프랜시스 베이컨의 자연관 논란.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1. 2016학년도 평가원 6월 모의평가 제시문과 미래엔 교과서에 제시된 베이컨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
베이컨의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으로 유명한 문구이다.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지식은 인간이 자연을 의도에 맞게 변형하여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다. (2016학년도 평가원 모의평가 7번 (가)의 병 사상가의 지문: )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미래엔 교과서 120p)
2. 그런데 정말 베이컨이 한 말인가?
그런데 이 문구가 베이컨의 『신기관』, 『뉴 아틀란티스』, 『학문의 진보』등 한국어로 번역된 어떠한 책에서도 등장하지 않아서 정말 베이컨이 이러한 말을 했는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제기되었다.
3. 베이컨의 인용문 출처
과연 6월 평가원과 교과서에 실린 표현이 베이컨의 표현이 아닐까?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지식은 인간이 자연을 의도에 맞게 변형하여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다. (2016학년도 평가원 모의평가 7번 (가)의 병 사상가의 지문: )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미래엔 교과서 120p)
해당 문장의 출처는 베이컨의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혹은 학문의 존엄과 진보)(De Augmentis Scientiarum)』(1623)의 Works IV, 296 부분, Francis Bacon, The Advancement of Learning (1605) (Works, Vol. 3, p. 331) 부분에 이다.
베이컨은 해당 책 『De Augmentis Scientiarum』을 라틴어로 집필했다. 그래서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따라서 해당 문장의 출처와 번역의 적절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영어권 학자들의 서적, 논문을 통해서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De Augmentis Scientiarum)』의 해당 문장이 영역된 부분을 찾을 수밖에 없다.
4.
라틴어를 몰라서 베이컨 원전을 직접 해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위 영역본을 살펴보자.
(1)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문장의 앞 부분 영역은 다음과 같다.
For you have but to hound nature in her wanderings, and you will be able when you like to lead and drive her afterwards to the same place again. Neither ought a man to make scruple of entering and penetrating into those holes and corners when the inquisition of truth is his whole object.
(출처: https://philpapers.org/go.pl?id=SOBIDO&proxyId=&u=https%3A%2F%2Fphilpapers.org%2Farchive%2FSOBIDO.pdf)
“For it is no more but by following and as it were hounding Nature in her wanderings, to be able to lead her afterwards to the same place again.”
(출처: https://philpapers.org/go.pl?id=MERTVO-3&proxyId=&u=http%3A%2F%2Fdx.doi.org%2F10.1086%2F597767)
Alan Soble의 논문 「In defense of Bacon」
(출처: https://philpapers.org/go.pl?id=SOBIDO&proxyId=&u=https%3A%2F%2Fphilpapers.org%2Farchive%2FSOBIDO.pdf)
For you have but to hound nature in her wanderings, and you will be able when you like to lead and drive her afterwards to the same place again. Neither ought a man to make scruple of entering and penetrating into those holes and corners when the inquisition of truth is his whole object.
carolyn Merchant의 논문 「The Violence of Impediments」
(출처: https://philpapers.org/go.pl?id=MERTVO-3&proxyId=&u=http%3A%2F%2Fdx.doi.org%2F10.1086%2F597767)
“For it is no more but by following and as it were hounding Nature in her wanderings, to be able to lead her afterwards to the same place again.”
여기서 hound는 명사로는 사냥개, 동사로는 사냥개로 사냥하다, 가차없이 쫒다/박해하다 의 뜻이 있다.
즉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개로 사냥하다/ 가차없이 쫒다/ 박해하다'로 해석할 수 있으며, 베이컨의 표현을 문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자연을 사냥해서' 라고 해석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
물론 필자는 해당 표현을 '방황하는 자연을 사냥개와 같이 가차없이 쫒아야 한다.'로 번역하는 편이 더 의미가 직접적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알려진 베이컨의 표현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2) 노예로 만들어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문장의 뒷 부분은 문장의 앞 부분과 바로 연결되어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즉 교과서의 문장은 베이컨의 한 말들이 합성되어 있는 문장으로 추정된다.)
carolyn Merchant의 논문 「The Violence of Impediments」
‘leading to you Nature with all her children to bind her to your service and make her your slave, (위 책)
5. 교과서 집필진의 대처가 아쉽다.
사실 이 부분은 교과서 집필진과 미래엔 출판사의 대처가 미흡했던 것 같다.
저자가 교과서에 실린 문구에 대한 원전 출처를 확보하지 않고 책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학문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의가 없다.
6. 베이컨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옹호
한편, 베이컨의 입장을 '인간중심주의, 자연 파괴의 주범, 남성우월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고교 <생활과 윤리>과목에서는 단순히 베이컨을 '인간중심주의, 서구의 과학지상주의, 환경 문제를 초래한 원인 제공자' 정도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고교 <생활과 윤리>가 편향성을 띄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간단히 양쪽의 입장을 살펴보자.
(1) 베이컨을 비판하는 입장
위에서 carolyn Merchant와 같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베이컨의 입장을 '자연을 여성에 비유하고, 성적인 메타포를 사용하여 정복하려는 욕구' 로 정의하고, 과학의 남성우월주의적 경향, 환경파괴적 성향의 기원으로 비판한다.
또한 생활과 윤리 교과서의 '요나스' 『책임의 원칙』 제 5장 「오늘날의 책임: 위협받는 미래와 진보사상」에서 요나스는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베이컨의 유명한 명제를 거론하며 과학주의와 유토피아주의를 결합하여 '자연 정복전략'을 펼쳤던 환경 위험의 근원으로 비판한다.
주로 '환경 윤리학자'들이 베이컨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왜 고교 <생활과 윤리>의 「환경 윤리」 단원에서 베이컨의 사상이 '인간중심주의, 환경 문제의 근원 사상'으로 편향되었는가를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현대 철학의 주류 흐름인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이 '모더니티'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도 '근대 자연 과학의 사상적 배경'인 베이컨이 '환경파괴 사상의 기원'으로 비판받는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2) 베이컨을 옹호하는 입장
이러한 비판들과는 반대로 베이컨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그것은 '근대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발', '베이컨의 메타포(수사학적인 비유적 표현)'를 문자 그대로 인용하여 베이컨이 해당 말을 한 맥락을 무시하고, 베이컨의 전체적 사상을 왜곡하는 잘못된 비판이라고 지적한다. 이 문서에서는 베이컨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와 평가원 모의고사에 실린 베이컨의 주장의 출처를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뤄둔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이종흡 교수님의 「베이컨 수사학의 덫에 걸린 베이컨 비판자들-베이컨의 수사학에 대한 역사학적 검토」(한국수사학회, 2005) 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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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카페의 글을 둘러보던 중 베이컨의 유명한 문구에 대한 논의를 읽었습니다.
관련 논의를 보충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첫댓글 세 가지만 얘기합니다.
1. <<문장의 뒷 부분은 문장의 앞 부분과 바로 연결되어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다. (즉 교과서의 문장은 베이컨의 한 말들이 합성되어 있는 문장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2. 『학문의 존엄에 관하여(De Augmentis Scientiarum)』---Augmentis는 '증대'이지 '존엄'이 아닙니다. 이 책의 온전한 이름에 '존엄'에 해당하는 용어가 들어가 있을 겁니다
3. <<교과서 집필진의 대처가 아쉽다.
사실 이 부분은 교과서 집필진과 미래엔 출판사의 대처가 미흡했던 것 같다. 저자가 교과서에 실린 문구에 대한 원전 출처를 확보하지 않고 책을 썼다는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학문적으로 문제가 없었다고
힉스 선생님 안녕하세요 ^^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시는 글들을 통해 항상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합리성을 지닌 각 주체들이 인터넷이라는 공론장에서 비판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윤리 교육과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자유롭고 합리적인 토론과 발전적인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베이컨 책의 경우 한글 번역본이 없어서인지, 베이컨을 소개하는 백과사전이나 기사 등에서 다르게 번역을 하더라구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네 '학문적 문제'는 제가 제시문에서의 오류 여부에 국한해서 좁게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렇네요. 학문적으로도 문제가 있군요..
(베이컨 번역서들을 꺼내서 훝어보았습니다. 이종구 교수님께서는 <학문의 위엄과 증대> 라고 제목을 소개하셨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위엄, 존엄'에 해당하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있니봐요. 좋은 코멘트 감사합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성의가 없다.>> ----- 당연히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죠. 원전 확인 안 한 채 썼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런 일은 현행 윤리 교과서에 비일비재합니다.
제가 자주 수능 기출, 교과서, 연계교재가 오류투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다 있는 겁니다.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윤리교과인으로서 너무나 부끄러운데, 학문적 내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거나 향상되는 게 아니라서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 게시판이 윤리 관련 학문적 오류들을 지적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교과의 학문적 역량 증대에 기여할 것입니다.
교과서 서술, 수능과 평가원 문항에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능 시험이라는 일률적인 평가를 위해서 '공리화'해야 한다는 점이 항상 아쉬워요.
교과서와 기출 문제가 종교적 도그마처럼 여기는 입시 만능주의 풍조는 무오류성과 권위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평가원에게도 일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가원이 닫힌 기관이 아니라, 교육계와 학계와 일반 대중에게도 열린 기관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평가원에서 시행하는 시험들이 단순히 줄을 세우는 기능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기능(수능의 경우 학문 적합성을 테스트하고,, 임용시험의 경우 해당 교과를 교수할 능력과 성품을 올바르게 테스트하는 등)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카페의 선생님들께서 수행하시는 비판 작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베이컨의 라틴어 책을 영문으로 번역한 책에서 해당 문장이 어떻게 적혀있는지(앞뒤 맥락 포함)가 필요다는 말씀이시죠?
영문 번역본이 있는 것 같은데... 온라인 서치로는 pdf나 해당 페이지를 찾을 수가 없더라구요.
타당한 지적이신 것 같습니다. 저도 베이컨 책을 읽으며 '종족의 우상에 빠지지 말라' 즉 '인간 중심적으로 자연을 파악하지 말고 자연을 따라 정확하게 자연을 이해하라' 등의 내용을 보며 베이컨은 자연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한 인간 삶의 풍요로움을 추구했지만 지금 우리 교과서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만큼 자연에 대한 '정복과 지배'를 말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료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