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여사의 놀이터
최말순(2021. 11. 부산)
굵은 장맛비가 시원스럽다. 이번 주는 시골에 가지 않아도 된다. 엄마 없는 시골 빈집 황토 마당을 적시는 빗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파트 창문 밖에 내리는 빛줄기에서 시골집 마당과 논밭에도 떨어지고 있는 듯한 비를 생각한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경남 진양군 단숲골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 살던 곳이다. 부모님은 각각 열아홉, 열여덟 나이에 살림을 차려 2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방 두 개에 부엌과 소 마구간 아래채가 있는 작은 집도 마련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아래채 헛간 옆에 방 하나를 더 티었다. 아버지는 쉰여덟에 어머니를 두고 먼저 떠났다. 어머니는 아흔까지 이 집을 꿋꿋이 지켰다.
장맛비가 내리면 늘 기억나는 풍경이 있다. 보리를 베어낸 논에 물을 가두어 모내기를 했다. 지금처럼 농수로가 없던 시절이라 막내였던 아버지의 농사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큰아버지 논부터 소를 앞세워 쟁기를 끌었다. 형제 논을 차례로 갈아엎는 아버지의 몸짓이 안쓰러운 듯 소는 커다란 두 눈을 껌뻑이며 쟁기질을 함께 했다. 가뭄 때는 전봇대 길이의 나무에 양철 두레박을 매달아 지지대 위에 세우고 물을 논으로 퍼 올렸다. 그 연후에야 아버지는 우리의 논에 모를 심을 수 있었다.
도시에 살던 오빠가 잠시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의 삶을 따르듯 소를 키우고 비닐하우스 딸기를 했지만 외한 위기가 닥치면서 빚만 잔뜩 늘어났다. 오빠가 다시 도시로 나가면서 전답과 어머니가 살던 집을 정리해야 했다. 전답과 선산은 그렇다 치더라도 시골집과 텃밭을 남에게 넘긴다는 건 엄마에겐 죽음이었다. 장남을 따라갈지라도 도시에는 가지 않겠다고 엄마는 며칠을 드러누웠다. 어쩔 수 없이 막내딸이 시골집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2년 동안은 빈집이었다. 태어나 자란 집, 비상을 꿈꾸던 집, 부모님이 고생한 집, 정겨우나 아린 곳이지만 시골서 사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다. 조금씩 삭아가는 집을 팔려다 내가 한 번씩 들르기로 했다.
막내딸은 시골집에 리모델링을 했다. 위채는 그대로 두고 아래채를 헐었다. 콘크리트 담장도 헐었다. 아래채의 기름보일러 층과 연탄보일러 선을 걷어내었다. 바르고 걷어내고 정리하는 데 나흘이나 걸렸다. 그동안 아버지 어머니의 악착스런 세월이 얹힌 갖가지 살림 도구도 정리했다. 몇 개의 물건만 남았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호미와 재봉틀, 그리고 서랍마다 노란색 동 장식이 달린 아버지의 은행나무 책상도 남았다.
새로 도배한 방에 어머니의 재봉틀과 아버지의 책상을 옮겼다. 두 분이 새로 단장한 방으로 들어와 책상과 재봉틀 앞에 앉는 듯했다. 어릴 적 어머니는 같은 무늬의 천으로 딸들이 입을 옷을 즐겨 만들어 입혔다. 아버지는 먹을 찍은 가는 붓글씨로 족보 책자를 손수 엮어 책상 위에 포개두었었다. 두 분은 이런 시간을 꿈꾸며 평생 고생했으나 가난이라는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다.
마당에 잔디를 심은 지 두 달이 지나니 짙은 녹색 빛이 마당 가득 펼쳐졌다. 봄날이 오고 봄날이 지났다. 애써 심은 꽃나무 잎이 오뉴월 뙤약볕에 마를 즈음 장맛비가 내렸다. 아버지가 모를 심을 때에도 그토록 내리지 않은 장맛비가 아닌가, 동네 사람들이 지나면서 상추나 고추 채소가 아니라 웬 잔디를 심었는지 모르겠다며 한 마디씩 한다. 농작물이 농촌의 생계이니 동네 어른들의 근심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만약 어머님이 계셨다면 뭐라고 말씀하실까.
동쪽 돌담 울타리에 남천을 심었다. 길 건너 텃밭에서 옮겨온 앵두와 매실나무를 심고 수국 몇 그루와 줄 장미도 심었다. 햇살은 온종일 머물게 되었고 벌 나비 새들이 날아들자 제법 소박한 정원이 되었다. 한 해가 지나니 엉성하던 마당에 꽃들이 방실거린다.
앵두나무 가지 위에 호미 한 자루도 걸었다. 어머니가 평생 동안 썼던 앞이 뭉퉁해진 호미다. 자식을 위해 무인경비시스템 텔레캅을 장치한 것 같아 든든하다. 시골집을 지키며 평생 밭일하던 호미였으나 이제는 채소와 곡식을 키우기보다는 딸을 지켜주고 기다려주는 어머니의 분신이라 여긴다.
시골에 가면 모든 게 다 있다. 어린 날 추억이 걸려있고 부모님의 사랑이 있고 살아가야 할 길도 보인다. 자동차로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가 이제는 가깝게 느껴지고 시골에 다녀올 때마다 막내딸은 늦었지만 철이 들어간다. 생전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묻던 혼잣말도 한다.
어머니는 말년에 귀가 어두웠다. 전화를 걸면 목청껏 ‘강여사’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면 어머니를 놀려주는 막내딸인 줄 금방 알아챘다. 강 여사의 귀가 열리고 한껏 깔깔 소녀처럼 웃었다.
강 여사 십 년만 웃게 해 줄게, 십 년만 옛 놀이터에서 웃으며 놀다가 가, 이제는 양식 걱정, 자식 걱정, 물 걱정, 영감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반으로 접은 허리 펴고 웃고만 있어, 자식을 최고로 여긴 강 여사였잖아, 집이랑 텃밭이랑 그대로 있잖아, 이젠 일터가 아니라 놀이터야, 마당에 꽃밭을 만들어 두었으니 한두 번 물이나 줘, 길 건너 텃밭도 잘 가꿀 테니 뒷짐 지고 와서 점심 푸성귀 뽑기만 해.
어머니는 신작로 쪽을 바라보며 얼마나 서성였을까, 세월이 지나 부모님 나이를 넘겨보니 호밋자루 손에 놓지 않았던 어머니와 은행나무 앉은뱅이책상에 다리를 붙여 막내딸에게 내어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간다. 숱한 세월 지나야 자식은 철드는 것, 예나 지금이나 그건 변하기 어려운가 보다. 엄마란 존재는 언제나 시골집 그 자리에서 자식을 기다려주는 줄로만 알았다.
첫댓글 최말순 선생님
2021년 11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강여사님의 놀이터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앞으로 더 좋은글로 오래오래 만나뵙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어슬픈 글,
축하와 격려 감사드립니다.
많이 배우고 알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