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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5일째 (5월 3일)
아침 5시 반 호텔 앞에 일행 20명 가운데 19명이 모였다. 집안시에는 볼 것이 너무 많다. 짧은 답사 일정 동안 많은 것을 보려면 시간을 아껴야 한다. 그래서 어제 우리가 꼭 봐야 할 유적인 국내성 성벽을 아침 식사 전에 산책 삼아 돌아보자고 제안했는데, 놀라운 호응을 보인 것이다. 호텔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지점에 국내성 남벽과 동벽 모서리가 나타난다. 이곳부터 시작해 국내성 남벽을 따라 걸었다.
국내성 남벽을 제대로 본 것은 이번 답사가 처음이다. 남벽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에 중국에서는 기존의 서벽과 북벽을 정비하고 유실된 남벽 전체와 동벽 일부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동벽 일부 구간은 여전히 건물 탓에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남벽을 복원하면서 민가를 많이 철거했고, 그 결과 남벽 남쪽에 넓은 공터가 생겼다. 그리고 이곳에 거대한 새벽시장이 들어섰다. 중국인들은 이곳에 나와서 물건을 사고팔고, 간단한 식사도 한다. 북적거리는 새벽시장의 활기찬 모습에서 중국인의 실생활을 더 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시장에서 물건을 사며 시간을 마구 지체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 남벽을 지나 서벽과 북벽을 지나 동벽까지 약 2,700m 길이의 성벽을 돌아 7시 반경에 호텔에 돌아왔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9시 경부터 또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버스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한 환도산성으로 향했다. 성문을 통과해 음마지(저수지)와 점장대(지휘소)와 군사 주둔지를 보았다. 환도산성 답사에서는 아쉬운 점도 있었다. 궁궐터 유적지를 다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2년 전에는 없었던 관리인이 나와서 우리가 답사하는 것을 지켜보며 궁궐지 3단 가운데 1단까지만 올라가서 보도록 제한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늘 보고 싶은 남문 서쪽의 특이한 형태를 가진 문터를 답사를 못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환도산성 남벽을 전면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하지만 남문에서 서쪽 지역은 답사를 제한하고, 동쪽 지역은 답사를 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남문 동쪽 지역 성벽을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벽 아래는 산성하고분구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1966년 집안 지역의 무덤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1,300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7년 [통구고분군 조사측회보고]에서는 현재 남은 무덤의 숫자를 6,854기로 파악하고 있다. 약 40%에 가까운 무덤이 30여년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통구(집안시의 옛 이름)고분군은 6개의 무덤구로 나눠지는데, 그 가운데 산성하무덤구에는 현재 1,248기의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15m가 넘는 대형 무덤만 320기가 넘는다. 산성하고분구는 한참 복원중이라서 답사를 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무덤은 엉터리로 복원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눈에 보일 정도여서 안타까웠다. 무덤 사이를 걷는 경험을 못하게 된 것이 아쉬웠지만 환도산성 성벽에서 위에서 아래를 조망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위에서 내려다본 산성하고분구는 보면서 다시금 고구려의 수도는 ‘산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 였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점심은 태왕촌문화촌이란 곳에서 식사를 했다. 한국식 음식이 나와서 마음에 들었고, 와이파이가 잘 터져서 더욱 좋았다. 점심 후 광개토태왕릉비와 태왕릉을 보러갔다. 약 20년 전 처음 광개토태왕릉비를 보았을 때 가졌던 설레임이나 감동은 다시 느끼지 못했지만, 보면 볼수록 대단한 조상들이 남긴 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비 덕분에 우리는 고구려사를 다시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너무 거대한 고구려의 왕릉들과 거대한 비를 감히 고구려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국내성 지역을 금나라 황제의 도성이라고 생각했다. 제후국인 조선의 그릇에 담기에 너무 거대한 탓이었다. 하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비문을 보며 감상에 오래 빠져 있을 수많은 없었다. 태왕릉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많음 무덤들이 보인다. 무용총과 각저총, 오회분, 임강총, 장군총 등등.. 지금은 많은 건물들에 가려 정신 차리고 돌아봐야 찾을 수 있지만,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서대총, 장군총, 임강총 위에서 본 집안시와 태왕릉에서 위에서 본 집안시를 비교해 생각해보면, 태왕릉이 위치한 곳이 너무나도 좋은 혈자리임을 느끼게 된다. 비의 발견으로 태왕릉에 묻힌 사람은 광개토태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설령 그가 아니어도 이 무덤에 묻힌 이는 결코 평범한 임금일 수 없다는 것이 무덤 위에서 올라와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태왕릉을 본 후, 장군총 답사를 했다. 장군총은 답사를 할 때 조금씩 무너져 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가 있다. 장군총 꼭대기나 석실 답사는 이제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장군총을 둘러보고 제단터와 배총을 둘러보았다. 장군총에 올 때마다 관심사의 하나는 배총의 모습이다. 아무래도 배총의 묘실은 고인돌과 너무 닮았다. 물론 배총은 적석총이다. 하지만 고인돌과 적석총의 관계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후배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본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후배에게 사진을 보내주며 응원해야겠다.
장군총을 본 후, 오회분 5호묘를 보러갔다. 오회분 5호묘는 고구려 벽화고분 가운데 공식적으로 관람이 허락된 유일한 곳이다. 프레스코 기법으로 벽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 조벽지 기법으로 벽화를 그린 탓에 사람들이 들락거려도 벽화의 훼손이 덜 된다는 판단 하에 개방이 된 곳이지만, 아무래도 벽화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답사하는 우리는 좋지만, 사실 답사를 하면서도 꺼림칙한 마음이 늘 드는 곳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10명 두 팀으로 나누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두 팀을 다 설명해주느라 두 번이나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무덤 4벽 하단부가 사람들의 몸에 부딪힌 탓인지 엄청나게 훼손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습기 조절은 나름 중국에서 잘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들락거리면서 아래 부분의 훼손은 막지 못한 것 같다. 답사와 유적 훼손의 딜레마를 고민하게 된다.
오히분5호묘 답사를 마치고도 아직 5시가 안되었다. 국내성을 답사한 터라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우산 중턱에 있는 우산하 3319분과 고구려 석인상을 보러갔다. 고구려 석인상에는 고구려인의 모습과 윷놀이판이 새겨져 있다. 2년 전에는 사진으로 찍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윷놀이판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있었는데, 이번에는 석인상을 확인할 수 있어도 윷놀이판은 눈으로 확인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보호 유리판이 씌워져 있어서 석인상 위에 먼지를 청소하지 못한 탓일까? 풍화 탓? 윷놀이판은 익산 미륵사에서도 발견된 바 있고, 청동기 시대 고인돌에서도 발견된 바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우주론적 도형이자 놀이판이다. 그런데 윷놀이판이 왜 이곳 돌에 새겨졌고, 그 놀이판 위에 고구려인의 모습이 새겨진 것일까? 게다가 석인상 곁의 3319호분은 중국계 고구려 관리의 무덤 - 외형은 적석총이지만, 안에는 전축분의 형태 - 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이곳에 와서 보았지만 궁금하기 그지없는 아직 풀지 못 한 수수께끼다.
석인상을 본 후 고구려 석주유적으로 향했다. 돌기둥은 2개가 있는데, 그 중 길가에서 가까운 1개만 보았다. 1개는 민가 한 가운데 있는데, 2년 전에는 들어가서 보았는데, 이번에는 집 주인이 1인당 80원을 내라는 소리에 보기를 포기하고 돌아섰다. 돌기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사찰 입구에 표시된 것이라거나, 금역 표시라거나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명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돌기둥 옆에는 1964년 북한과 중국이 발굴한 고구려 귀족의 저택으로 알려진 민주유적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덩 빈 공터로 남아있어 알고 오지 않으면 어떤 곳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흔한 표지판도 없는 상태다. 최근 집안 지역에 발굴이 많이 되어 도시의 윤곽이 어떤 지가 조금씩 알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석주유적 답사를 마치고 5시 반경 압록강변에서 위치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함께 한 조한웅 후배의 생일. 케잌까지 준비한 가이드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글을 쓰고, 그리고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집안시에서 2일간 머물면서 그냥 잘 수는 없어서 방을 나갔더니, 벌써 술을 한잔 걸치고 돌아온 일행분 들과 만났다. 호텔 밖에 서도 여러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밤늦게 영업하는 가게가 있어서, 술과 음료, 안주를 사가지고 돌아와 호텔방에서 8명이 함께 술을 마셨다. 나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집안시를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첫댓글 호태왕릉이 복원되었나요?이십삼년전 집안에 갔을때 국내성벽은 안보이고 호태왕릉으로 전해지는 돌무덤도 거의 붕괴된 상태였답니다. 장군총에 올라 압록강넘어 민둥산 북한지역 바라보던 기억이 나는군요.후기 감사합니다
광개토태왕릉비 다음 사진이 태왕릉 입니다. 많이 무너진 부분도 있지만, 묘실까지 올라가 내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많이 정비되었군요..압록강 넘어 북한지역 산들은 지금도 민둥산이군요..답변 감사합니다
산성자산성 내부 관람을 제한하다니...쉽게 이해가 안 갑니다. 크게 문제될게 없는 것 같은데...몇년전에 갔을때 성벽을 한바퀴 다 돌았는데, 이제는 그것도 힘들겠네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