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23장 9-20절
설교제목 : 나의 막벨라 굴은 어디인가?
침묵의 공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요란한 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의 포성은 멈추지 않고 매일 긴급하게 참혹한 현장과 혼란한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한국의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이 불법적인 행동임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살아있는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는 검찰은 변호인을 자청하며 사건을 무마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복잡한 세계 정치과 경제 상황도 다루기 힘든데, 정치적 현실은 이로 인해 물고 뜯으며 비난하면서 온통 시끄러운 잡음을 내고 있습니다. 한강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광주 5.18 사건과 제주 4.3 사건의 소재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소설을 쓴 사람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고 규탄하며 스웨덴 대사관을 찾아가 시위하는 한심한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밖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란한 뉴스들과 우리 안에 일어나는 온갖 시끄러운 소리로 마음을 평안하게 둘 곳을 잃어버리며 살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주소인 듯합니다.
스위스 취리히에 가면 프라우 뮌스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샤갈의 스테인글라스로 유명한 아름다운 채플입니다. 이곳에 가면 다음과 같은 독일어와 영어로 쓰어진 푯말이 있습니다.
Raum der Stille / Room of silence
Stop / Breathe deeply / pray
The most happens when all is still.
Be invited to moments of silence!
침묵의 공간 / 멈추고, 깊이 숨 쉬고, 기도하라.
모든 것이 고요해질 때 가장 많은 것이 일어난다. 침묵의 순간으로 초대합니다.
침묵의 공간에서 멈추고, 심호흡하며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면 최상의 것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우리의 내면이 복잡할수록 침묵의 순간으로 우리 자신을 초대해야 합니다. 매 주일의 예배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며,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고요해지면 최상의 것이 일어난다는 이 문구처럼 우리 삶에도 멈추어 침묵 속에서 심호흡하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 개입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죽음의 길
시험받은 아브라함은 시험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변환시키고, 결국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통과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최종적으로 약속받았습니다. 이삭 대신에 주님이 수풀 속에 뿔이 걸린 숫양을 ‘준비하였다’하여 그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명명합니다. 주님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앞서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그 준비된 것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시험을 통과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충성심과 기꺼이 더 큰 목적에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자아의 실력이 있다면 앞선 미래에 준비해 놓으신 것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서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준비해 놓으신 곳까지 가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충성과 희생,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월이 지나 사라가 어느덧 백년하고도 스물일곱해를 더 살았습니다. 이삭을 낳고 37년이 지났습니다. 그녀는 가나안 땅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의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떠나 정처없이 반세기를 유랑하면서 살았습니다. 4절의 아브라함의 고백처럼 “나그네로, 떠돌이로” 살았습니다. 온갖 세파를 함께 견디면서,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자신의 아내를 보면서, 아브라함은 고마움, 미안함, 아쉬움 등 많은 감정 속에서 슬퍼했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죽음에 대한 서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엄숙한 진리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며, 죽음은 삶만큼이나 너무도 확실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런 죽음의 엄정한 현실 앞에서 “너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는 물음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가 남긴 족적을 따라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인생의 발자취가 그의 죽음 앞에서 선명하게 기억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50대 초반의 정신과의사이자 융학파 분석가인 선생님께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작년 말에 주유소에서 주유하다가 쓰러졌고, 검사를 해보니 뇌종양이 발견되어 올 봄에 수술하였지만, 결국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른 나이에 총망받는 일꾼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그림책을 좋아해서 그림책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과 관련한 책도 발간하셨습니다. 믿음 또한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같은 분을 왜 그렇게 먼저 데려가시나요라고 속으로 조문하면서 되뇌였습니다.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런데 영원의 관점, 이 광활한 우주의 관점에서 30년, 혹은 50년, 또는 100년을 사는 것은 스치는 바람같은 시간, 한 경점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짧은 시간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새삼 중요하게 와닿았습니다. 그분의 죽음 앞에서 가슴깊이 울어주고, 그의 삶의 흔적이 아름다웠고 의미있었음을 모두가 기억해 준다면 비록 짧은 세월이지만 빛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유한함을 인식하고, 쓸데없는 것으로 이 짧은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아름답고 의미있게 삶의 무늬를 내길 소망합니다.
매장지의 의미
반세기를 넘는 시간을 동거동락하면서 죽음을 맞이한 아내를 애도하면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위한 매장지를 찾아 나섭니다. 죽은 아내 곁에서 물러나 헷 족속에게 가서 아내를 묻으려고 하니 무덤으로 쓸 땅을 사겠다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얼마나 헷 족속과 우호적으로 잘살았고, 신망이 있었는지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이니 좋은 곳을 골라서 고인을 모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에게 큰 절을 하며 예우를 갖춘 후,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그가 소유한 막벨라 굴와 그 앞에 밭을 팔도록 주선해 주기를 간청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에게 절하며 막벨라 굴을 팔라고 간청하는 이유는 아직 아브라함의 땅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떠돌아다니며 목축업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이 뿌리내릴 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중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매장지 사기는 아내에 대한 애정의 표현일 것입니다. 아내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언제든 그곳에 가면 사라의 삶을 더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매장지, 묘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연결하는 장소입니다. 삶과 죽음이 만나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묘를 정성스럽게 돌보았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오히려 심리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하는 통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런 연결 통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비합리적인 것들은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병리적으로 죽은 자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면, 죽은 자와의 접속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삶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의 소통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상징적으로 삶과 죽음을 연결하고 죽은 자와 접속할 수 있는 매장지, 막벨라 굴이 나에게 무엇일까요? 나의 막벨라 굴이 있는 사람은 그곳에서 삶과 죽음을 접속하여 나를 값지고 의미있게 세워갈 것입니다.
나의 막벨라 굴은 어디인가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마므레 근처 막벨라 굴과 그의 밭을 사려했던 이유는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얻게된 땅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9절에 말씀에 보면 아내의 묘지를 넘어서 “우리 묘지”로 삼고자 합니다. 사라를 넘어서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땅 사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막벨라 굴과 그 밭과 그 경계 안에 있는 나무들까지 은 사백 세겔의 값을 주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래를 합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막벨라 굴만이 아니라 그 근처의 밭과 나무까지 모두 값을 매기고 마을 법정에서 공증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죽음 이후 시시비비를 없애고, 정당한 값을 치름으로써 완전한 계약이 성사되도록 합니다. 결국 막벨라 굴은 3대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까지 장사지냈던 이스라엘의 뿌리의 징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미래를 응시하며, 자신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대가 반드시 기억하고, 미리 맛보는 약속의 땅으로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장차 다가올 시간에 성취될 씨앗이 바로 막벨라 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막벨라 굴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징적 징표이자 미래에 성취될 땅에 대한 바라봄의 징표입니다. 우리의 정신 에너지와 감정 가치를 들여 미래에 성취될 땅을 사는 것은 우리 인생에게 필수적입니다. 그 막벨라를 바라봄으로써 미래에 온전한 땅의 성취를 희망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막벨라 굴은 꿈분석을 시작한 것인 듯합니다. 여러 가지 형편과 조건이 안되었지만, 나의 정신을 살피고자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여 무의식을 살피는 분석 그 자체를 사들인 것입니다. 24년 전에는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저의 미래의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나만의 막벨라 굴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미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결실을 경험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