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럼 2006.12.20.수
강암 송성용과 학인당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은 1913년 전북 김제에서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선생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한국 서단의 최고봉으로 평생을 유학· 한문학· 서예에 정진했으며 사군자 등 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전주시 교동에 세워진 강암서예관에는 추사 김정희,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석정(石停) 이정직(李定稷),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을 비롯한 당대의 명필들과 정약용, 송시열, 황현(黃玹), 전우(田愚) 등의 당대 학자, 김구, 한용운 등 인사들의 글씨와 간찰(簡札) 등을 포함한 작품 등이 1,162점이나 전시되고 있다.
서화의 고장으로 깊은 전통을 이어온 전북지역의 독창적인 면모를 잇는 강암서예관은 작품 전시뿐 아니라 서예 관련 사업과 학술 연구를 벌이고 있다.
강암서예관은 단순히 한 지역의 문화공간으로써의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와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문화 창조라는 원대한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와 가치는 각별한 것이다.
그러나 강암서예관이 위치하고 있는 전주한옥마을은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도내 학계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전통한옥지구에 관광객이 집중되면서 태조로 북측과 남측간의 불균형 발전이 심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태조로 북측 기존시설지구와의 균형발전차원에서 강암서예관과 학인당 등의 거점지역과 인근 음식관련시설 등이 집중된 지역, 향교지구 주변 거점지역 등 4곳의 거점지역에 대해 신규 문화시설을 도입해 관광루트의 다양화를 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대별 전통가옥 조성사업을 위해서는 학인당과 양사재, 변호사 집 등 16곳의 건축물을 보전 정비할 수 있도록 유지 및 관리비를 지원하는 방안도 서둘러야 한다.
전주시 당국도 최근 전통한옥이 잘 보존되어 있는 전주한옥마을 일대에 '시대별 전통가옥 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관광객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1910년, 1930년, 1950년, 1970년, 2000년대 등 시대별 전통가옥 5가구를 짓는다는 것이다. 가옥은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원형 그대로 지어지며 집 내부에는 당시 가재도구가 전시된다.
한편 강암서예관과 매우 가깝게 자리한 학인당은 세워진지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이에 따라 전북도와 전주시는 학인당에 대한 대대적인 개보수를 추진하고 있다. 학인당은 고종 황제가 효자로 유명한 인재(忍齋) 백낙중(白樂中)이 죽은 후 그 효심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의 호 인제(忍齊)에서 ‘인(忍)’자를 따서 집 이름을 ‘학인당(學忍堂)’이라 붙였다.
학인당을 지키고 있는 수원백씨 인제공파 후손은 “개보수가 끝나는 대로 ‘학인당’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한국적인 전통생활문화체험장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전통문화 중심도시사업에 활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학인당은 520평의 대지에 사랑채, 안채, 별당채, 뒷채, 헛간, 쌀광 등 7개의 건축물이 있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정원과 연못, 샘 그리고 우물과 장독대 등도 남아있다. 한옥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로 여전히 평가받고 있다.
학인당은 강암 송성용 선생 뿐 아니라 한국화가인 남농, 남전, 소전 선생을 비롯 서예가 효산 및 당시 국악 대가들의 주무대였으며 교류의 장소였다.
그러나 현재 강암서예관과 학인당은 한 마을에 있으면서도 인근 주택으로 꽉 막혀 있다. 직선거리로는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우회하는 데에는 꽤 먼 거리인 셈이다.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두 명소가 따로 따로 떨어져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직선도로를 뚫어야 한다. 학인당과 강암서예관을 연계 관광 코스로 개발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강암서예관과 학인당은 모두 전주의 전통문화 요람지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재조명하고 개발해야 할 일이다. 당국은 두 명소를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두 건물 사이에 도로를 내는 한편 학인당 보수 작업을 서두르기 바란다.
( 정복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