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가자들 250여 명은 질토래비 문이사장을 따라 넓은 아스팔트를 지나 도착한 장소는 옹포천변에 위치한 다케나카통조림공장이다. 통조림공장은 일본인 다케나카라는 사람이 설립하여 다케나카통조림공장이라 하였고,
설립목적은
1931년 일본군에게 식량을 지원하기 위함이며,
주로 소고기통조림, 청어통조림을 생산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인 약 1,200여 명이 주야로 교대하면서 일을 하였다 하며, 하루에 소 400마리를 도살하였으니 옹포마을은 온갖 소의 피바다였을 것이다.
내가 어려서 이 이야기는 어른들께 많이 들었다. 그래서 옹포도살장이라 하였다.
다케나카통조림공장은 해방 후 고종석이라는 분이 인계받아 군수물품을 제조 했는데 모슬포 제1훈련소가 논산으로 이설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문을 닫는다.
살벌한 제주4·3 당시에
1948년 11월 후
제주4·3 초토화작전(1948년 11월 17일부터)이 진행하던 때 10월 15일부터 제주중산간 지역주민들은 소개가 시작되는데 금악, 명월, 상명에서 소개한 사람들을 수용하였다.
1949년 초
추운 겨울에 공장내부에 판자나 가마니로 칸막이를 하고 생활하지만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1948년 12월 3일 무장대 금능리 습격과
1949년 1월 3일 협재리 습격이 벌어졌다.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한림국민학교에 끌려갔다가 수원초등학교 뒤편 ‘봉근굴’에서 혹은 동명리 ‘신갱이서들’에서 총살당한다.
이러한 사건이 지속되자 주민들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를 옹포공장에 수감시켜 달라고 자청했으며 그도 생활이 만만치 않음이 식량문제다.
1949년 봄이 되자
고림동에 성을 쌓고(지금도 성 흔적이 남아 있음) 명월중동(넙게), 금악, 상명주민들을 복귀시킨다. 금악리와 고림동 경계지점에 빌레못 잃어버린 마을표지석이 지키고 있으며 당시 명월리 원로들은 이 마을 표지석을 바라보면 군경, 서청들이 들들볶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떠오른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힌다.
1950년 봄이 되자 명월 중동(넙게 : 바다에 게의 등짝지처럼 빌레가 넓은지역) 사람들은 마을을 재건하여 돌아갈 수가 있었다.
첫댓글 우리 선조중에 한분 강생이물에 장사지내난 우리 후손들 술잘덜 헌덴 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