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존경하는 해촌 김용주(1905-1985) 선배님께 제가 마음에 담고 있는 존경심을 전하려 합니다. 저는 해촌 선배님께서 애써 글구고 일구어 놓은 옥토에서 자유와 호사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 부산상고 53회 졸업생 이동순(李東淳)입니다.
제가 부산상고에 입학하고 가장 많이들은 말이 “삼남 제일”의 학교라는 칭송과 기라성 같은 3만 명 동문의 활약상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도 변함없이 내 마음속의 샛별은 박재혁(朴載赫) 의사와 해촌 선배, 그리고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입니다. 박재혁 의사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더구나 3대 독자의 몸으로 악질 일본 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를 죽이고자 고서적상을 가장하고 얼마나 침착하고 태연했으면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 기개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종횡무진 헤치며 대세를 거머쥔 그 용감무쌍한 모습만 생각하면 내가 같은 동기라는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긍지와 보람을 느낍니다. 지난해 2019년 8월 朴 義士와 盧 大統領의 동상이 많은 난관을 뚫고 교정에 세워지던 날 후배의 할 도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의 짐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는 해촌 선배님의 큰 뜻을 몰라주고 점점 잊히고 있다는 것이 두고두고 죄송했습니다. 해촌 선배님과는 졸업 횟수로 30년의 차이가 있으니 선배님이라 칭하기 민망합니다. 선배님께서는 대한제국의 말기에 탄생하시어 일제의 엄혹한 시절에 성장하셨습니다. 그 시절 경남 함양 땅은 오지 가운데 오지였습니다. 오죽하면 가수 현인(玄仁)이 부른 신라의 달밤에 “고향산천 가는 길”을 “함양·산청 가는 길”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지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해촌 선배님이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왕자처럼 자란 줄 알지만 실은 중농 정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그해 부산상고를 입학하셨으니 소년 김용주의 의지가 어떠했는지 알만합니다. 18세에 졸업과 동시에 식산은행에 입행하여 5년 남짓 근무하시다가 여기는 내가 놀기에는 물이 너무 적다 여기시고 그 좋은 직장을 사직하셨으니 24세의 청년 김용주의 배짱과 포부를 알만합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5년 만에 포항에서 왜놈들이 보란 듯 삼일상회(三一商會)란 간판을 걸었으니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왜놈들이 생각하기에 조금 하다 끝 날 줄 알았는데, 그 시절 사업가 김용주는 대구 지방의 청과와 포항의 건어물을 만주(滿洲)와 봉천(奉天) 지방으로 무역하셨다니 과연 타고난 사업가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할 때 소인배처럼 이문에 만족하지 않고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가장 이문이 적어도 이 민족을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교육이라 생각하시고 2만 원(지금의 5십억)의 사재를 선뜻 내어 영흥국민 학교를 만들어 사업과 교장 교사를 겸직하셨으니 그 열정에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30대에 접어들어 해촌 선배님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승승장구하는 사업을 왜놈들이 두고 볼 리 만무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도 못 되어 왜놈 고등계 형사들이 가게에 진을 치고 “왜 이름이 삼일상회냐?”고 따지면서 독립 자금을 공급한 적이 없는지 매일 와서 사업을 방해해서 더 버티다가 신상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사업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니 그 얼마나 마음 아프셨습니까? 해촌 선배님께서는 그때 개인의 힘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시고 31세에 도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시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세웠습니다.
30대 후반에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맞이하고 왜놈들이 물러가니 해외파와 국내파가 뒤엉킨 혼란 정국에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정치는 다른 사람이 하고 선배님은 사업에만 정열을 쏟았습니다. 연합군이 진주하고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적산으로 간주하여 맥아더 사령관이 총괄하여 관리할 때 일제 말기 어업을 하다 전쟁 물자로 모두 빼앗긴 어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셨고 그 가운데 몇 척은 일본에 억류된 것을 찾아오셨다니 과연 탁월한 능력이십니다.
민족의 장래를 위해 더 큰 힘을 만들려는 선생님의 꿈은 이루지 못했습니다만 당시 해방정국에서 도의회는 관선 20명 민선 30명이었는데 민선 30명 중 선배님과 같은 정신을 가진 자가 거의 없어 아무리 좋은 의안이 나와도 파기되기 일쑤였습니다. 힘의 한계를 느낀 선생님께서는 사업에 전념하기로 하고 어업과 운송업을 운영하며 이익을 후세를 위해 사용할 것을 기획하셨다니 다시 존경심을 금할 길 없습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대통령이 되고 삼면이 바다로 된 이 땅에 해운업이 절실하다는 이 대통령과 해촌 선배님의 견해가 일치하여 전쟁 말기 일본 놈들한테 빼앗긴 배를 찾아오는 능력을 눈여겨본 대통령이 호출하여 다음 개각 때 商工部長官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애치슨라인)에서 한국이 제외되어 온 나라가 들끓는 통에 改閣이 무기 연기가 되었고 대신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라 주일 특명전권공사를 부여받고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예산도 없고 50년 동안이나 이 나라를 지배하던 그놈들이 제대로 대우해줄 리가 있겠는가?
당시 조총련과 민단은 전쟁을 방불케 하고 소인배들은 문지방이 닳도록 공사관을 드나들었으나 업무에 도움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불량배들은 협박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습니다. 그 어려운 와중에 1950년 6월 25일 한국동란이 발생하여 이틀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동생 김용성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처 부산으로 왔는데 한국은행이 현금을 두고 와 모든 지불이 올 스톱되어 심지어는 물물 교환이 되고 있는 실정이었답니다.
전쟁을 치르려면 임금이 지불되고 물자를 구입해야 되는데 그 기능이 마비되었으니 예삿일이 아니라 생각한 선배님께서는 한국은행 동경(東京)지점장과 몇몇 유력 인사들과 협력하여 방법을 찾아 나섰습니다. 상식적으로 새 돈을 만들려면 도안에 5-6개월 걸리는데, 돈은 당장 필요하니 다섯 시간 만에 도안을 완료하여 일본에서 조폐 제작을 완료했습니다. 일본 조폐공사와도 사전에 조율이 되었는데 정부와 연락이 되지 않아 승인을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배님께서는 40대 초반이라 우선 이것을 성공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립이 어렵다는 열정만 가지고 어느 부서 소관인지도 모르고 밀어붙인 결과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미군 군용기 편으로 세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본국 수송이 되었는데 미군이 군수 물자를 보내야 하는데 무게가 너무 무거워 거절하였으므로 선편을 이용하여 우선 급한 불을 정리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는 이전에 한 번도 인사 한 일이 없는데도 아그레망을 주고받을 때 앞으로 한일관계에 대한 의견을 폭넓게 교환한 후로 이심전심 마음을 주고받는 막역한 사이를 유지해 왔었습니다.
1952년 8월 초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달려가니 특특급 비밀이란 운을 띄우고 가까운 시간 내 대규모 상륙 작전이 있으니 영어로 안내할 수 있는 젊은이 200명을 차출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알고 보니 인천 상륙작전인데 그러려면 노르망디 상륙 작전처럼 융단 폭격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서울에 남대문을 위시한 4대 고궁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처음은 참모들에게 션별 폭격을 호소하니 일성이 전쟁이 장난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러다가 큰일을 당할 것 같아 선배님께서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선별 폭격을 요청했 습니다. 역시 대인은 대인을 알아보았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맥아더 사령관이 참모들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해인사(海印寺)를 가 보신 분이 많을 줄 아는데 해인사 정문 앞에 공군 대령 김영환 공적비가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괴뢰군이 해인사를 점령하고 있을 때 상부로부터 해인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은 김 대령은 주변만 폭격하고 대장경을 온전히 보존한 공적비입니다, 거기에 비교하면 해촌 선배의 공적비는 어디에 세워야 합당하겠습니까? 광화문 앞????
해촌 선배님은 주일 공사를 사직하자 대한해운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어 총력을 경주한 결과 오늘의 해운 강국 무역 대국의 발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선배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국민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국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 전남방직을 만드시고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그 후 전국에 신한제분을 비롯한 10여 개의 회사를 만들어 한때는 종업원이 수만 명이 넘어 복지국가의 기틀을 확실히 만드 셨습니다. 공장마다 야학은 필수로 만드시니 그 고견을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 할 것입니다. 선배님께서는 사업에서 생긴 수익을 국민 복지에 환원했으니 선각자 중의 선각자이십니다.
선배님께서는 사업 수익을 재투자하면서, 가장 수익이 적은 교육과 또 하나 조림 사업에 투자하였습니다. 둘 다 최소 20년 이상 기다려야 수익이 나온다고 주위에서 만류하는데도 뿌리치고 1950년 후반부터 광주·화순·담양·장성 등지에 산림 녹화 사업에 힘쓰신 결과 이것이 결실을 보아 오늘날 우리나라 허파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난지도 하늘공원과 용인 에버랜드를 아시지요? 이 역시 선배님께서 날로 증가하는 서울 시민의 휴식 공간을 만들 목적으로 확보한 것인데 쓰레기 매립장으로 유용하게 사용하다가 지금은 선배님의 뜻에 맞게 하늘공원이 되어 서울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선배님은 시민의 정서를 생각하시어 천둥벌거숭이 산하에서는 심성이 착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조림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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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께서는 하시는 사업이 하나같이 국민을 위하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 수익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계에 진출할 때 교육을 위해서라고 밝힌 바와 깉이, 서울에는 용문중·고등학교를 세우고, 광주에는 전남중·고등학교를 세워 자리가 잡혀 공립으로 전환했으니 그 마음 하해(河海)와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은 프로 야구의 전성 시대입니다만 그 전에는 고교 야구가 단연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지요. 호남과 경남이 결승전에 부딪히면 나라 전체가 들썩거렸습니다. 부산상고·경남고·부산고 대 광주제일고·군산상고·광주상고는 맞수 중의 맞수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야구장 앞에서 밤을 새웠지요. 그 불을 뿜던 광주 무등경기장 부지를 1957년 해촌 선배가 무상 기부한 사실을 아십니까?
선배님께서 가장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하신 때는 1950년 후반이었습니다. 당시 참의원 원내 총무로 타고난 사교성을 바탕으로 여야와의 소통을 원활히 하시고 일본의 비중 있는 인사들과의 교류를 원활히 하여 그때 벌서 대일 청구권 해결을 시도하고 밑바탕을 만드셨으니 참으로 고견이라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뒤 선배님은 대한상공회의와 무역협회 경영자총연합회 등을 만들어 국가의 경재를 다진 후 후배들에게 물러주었으니 그 능력과 열정을 길이길이 보존 겠습니다. 국가 민족을 위한 업적이 너무 커 요즘 말로 존경받는 사회적 기업가가 되시니,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공장 정문에 시민군이 보초를 섰다는 유명한 일화를 들었습니다.
존경하는 해촌 선배님 !
선배님의 인생 여정을 사람들이 보는 각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언덕 위에 큰 나무와 작은 나무의 흔들림을 같이 평가하여 지난 행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국내 기반이 전혀 없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하는 수 없이 친일파를 이용하여 정권을 사수했기 때문에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합니다. 이승만 박사의 정권 야욕에 반민특위가 해산되고 50년간 식민지 시절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한 친일파는 단 한 놈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악질 노덕술 종로경찰서 수사과장을 비롯한 정·관계·경찰에 몸담았던 무리는 열렬한 독립투사로 새탁 되어 고위 관직과 국회의원이 되었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뜻있는 사람의 빈축을 살 만합니다.
어떤 이는 프랑스의 드골식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기 쉬운 말을 합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우리는 경우가 다릅니다. 전쟁 중의 4년 1개월 동안 나치에 협조한 경우와, 두 세대 50년 동안 일제의 세상에서 나서 자라고 음으로 양으로 협조를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길 없는 우리의 형편을 같이 봐서는 안 됩니다. 드골이 집권해서 부역자를 처벌한 인원이 약 65만 명 정도인데 처형 자만 약 13만 명이라고 합니다. 드골식 청산이라면 쉬운 말로 우리 1·2·3공화국의 각료는 거의가 처형대상자가 될 것입니다.
각설하고, 해촌 선배님은 일생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재경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18년 봉사하셨습니다. 이런 선배님이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서는 안 됩니다. 후배들이 자랑스러운 선배님을 발굴하여 기리는 것은 후배들의 의무요 도리입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이유에서 교정에 흉상을 모시고 싶습니다. 총동창회에서는 심도 있는 논의를 기대하며 흉상 건립 기금으로 일금 100만 원을 동창회 계좌에 입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산상고 53회 졸업생
이동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