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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월 답사자료 편집 艸峰
1. 관룡사(觀龍寺): 통도사(通度寺)의 말사로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에 있는 사찰이다.
해발 793m의 관룡산 서남에 위치하고 있는 관룡사는 산내에 전하는 석조불상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 8대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 39)에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지만 그 창건경위에 대해서는 확실하지는 않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埸)을 이루었다.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고, 1749년(영조 25)에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이 사찰에는 대웅전(보물 212호)과 약사전(藥師殿, 보물 146호)을 비롯하여 석조 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519호)과 약사전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1호), 용선대(龍船臺)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295호), 부도 등의 많은 불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藥師殿 보물 146호
신라(新羅)때 창건되었다고하나 정확한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으로 건축수법상(建築手法上) 조선초기(朝鮮初期)로 추정되는 소불당(小佛堂)이다. 사적(事蹟)에 약사전(藥師殿)이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소실(燒失)을 면했다고 기록된 점과 그 후의 산사태로 화를 입었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이다. 이 약사전은 주심포(柱心包) 집 계통에 속하는 맞배지붕의 건물로 정면기둥 사이를 3分하여 좌우에는 북막이 창을 고정하고 중앙부는 두 짝의 여닫이 문으로 되어 있으며 공포(栱包)는 네 귀의 기둥 위에만 있을 뿐이다.
이 건물은 공포의 짜임과 첨차의 쌍 조각 산미(山彌)의 뿌리, 또, 우미량(牛尾樑) 납도리와, 중도리(中道里), 엔타시스(베흘림)을 한 기둥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조선초기의 건물 양식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大雄殿 보물 212호
이 건물은 1965년 해체·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후 영조 25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룡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홍수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승려 20여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숙종 38년(1712)에 이 대웅전과 기타 당옥은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야 옳을 것 같다. 팔작(八作)지붕의 다포(多包)집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高柱)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했다. 고주(高柱)를 의지하여 불단(佛壇)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정은 우물 천정이지만 중앙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특이한 점이다.
出目(출목)은 내외 모두 2出目으로 동일하고 그 상단에 살미첨차의 끝은 3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 觀龍寺 龍船臺 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295호)
관룡사 서쪽의 봉우리인 용선대 마루에 동향(東向)하여 앉힌 여래좌상으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坐像)은,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높고 큼직하며 얼굴은 4각형에 가까우나 풍만하다.
목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形式化)를 지향하고 있다.
결가부좌한 모습에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몸에 밀착된 것이며,몸은 통일초기처럼 당당하지는 못하나 통통하고 안정감을 주며,특히 하체의 의문(衣文)은 형식화되고 있고 광배(光背)는 결실(缺失)되어 있다. 대좌(臺座)의 상대(上臺)는 반구형(半球形)이며, 판내(瓣內)에 화문(花紋)이 있는 중판(重瓣) 연화문(蓮花文)이 앙연(仰蓮)으로 조각되고 중대석(中臺石)은 8각이며 각 모서리에 주형(柱形)이 있다. 이 불상 바로 앞에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이곳에 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동안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알려져 왔을 뿐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었던 경남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이 8세기 전반인 722년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 위원이자 불교미술사학자인
최 교수 등의 조사 결과 명문은 이 불상의 팔각형 연꽃무늬 대좌 중대석의 면석을 얇게 파낸 뒤 세 줄에 걸쳐 ‘개원십(開元十)…/월입일(月卄日)…/성내(成內)…’라고 음각했다. 조사단이 제공한 사진을 판독한 한국서예사 전공의 손환일 박사는 ‘개원십(開元十)…/월입오(月卄五)…/성명(成明)…’으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한 줄당 5~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글자들의 마모가 심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개원 10년 ○월20일(또는 25일)에 (불상)을 조성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개원은 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로 개원 10년은 서기 722년이다. 최 교수는 “이번 명문의 발견으로 이 불상의 제작 연대가 개원 10년(722), 또는 개원 10년에서 개원 19년(731) 사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8세기 전반 석불 중 좌상으로는 제작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 됐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8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석불 중 명문을 통해 조성 연대가 확인된 것은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719년)이 유일했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산(해발 739.7m) 정상 부근의 용선대에 위치한 이 불상은 전체 높이 318㎝에 불상 높이 189㎝, 대좌 높이 129㎝다.
약사전석조여래좌상 ( 觀龍寺 石造如來坐像 :보물 519호)
관룡사의 약사전에 안치되어 있으며, 16개 꽃잎이 겹쳐진 부연(附椽)이 아름답게
새겨진 대좌(臺座)위에 앉아 있는 여래좌상이다. 수인(手印)은 약사인(藥師印)인데 오른손의 약호(藥壺)는 없어진 듯하다.
불상도 약간 조잡한 느낌이 있으나 고려불상으로 추측되는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불상의 외면에는 후대에 칠한 것으로 보여지는 회칠이 되어 있었으나,
2001년 약사전 보수공사 때에 회칠을 제거하고 원래 갖추었던 형태로 복구하였다.
관룡사약사전 삼층석탑 (觀龍寺藥師殿 三層石塔 지방유형문화재 11호)
관룡사 경내에 있는 방형(方形)의 삼층석탑으로, 암반을 이용하여 하층기단을 조성하고 하층기단의 4면에는 각각 2개씩의 안상(眼象)을 새겼다.
상층기단 면석에는
관룡사사적기 ( 觀龍寺事蹟記)
신라시대 때 관룡사(觀龍寺)를 건립하면서 관룡사의 유래(由來)와 재산(財産) 등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길이 보존케하고자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간용 목판(木板) 11개와 서적 1권이 전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관룡사석장승( 觀龍寺 石長丞)
관룡사 입구에 좌우 마주보게 2주가 서 있는데, 일명 돌장승, 벅수라고도 하며 민속적인 어떤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이곳으로부터 관룡사의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에 남녀상을 각각 새겼다.
관룡사 원음각 ( 觀龍寺 圓音閣 ) : 관룡사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조 12년에 건립된 원음각은 그 후의 재건 또는 중수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상량문을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영조 39년(1736년)에 크게 중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숙종 30(1704년) 가을의 산사태로 인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건물은 정향(正向)을 갖지 않고 대웅전의 중심축의 선상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운 특색을 갖고 있다.
3. 신라진흥왕척경비 국보 제33호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
순수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부터라고 한다.
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蓋石)이나 대석(臺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년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字劃)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4.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국보 제34호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下層基壇)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年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 보존 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의 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형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 유리제(製),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립(粒), 향편(香片), 유리소주(小珠)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복원시 사리는 다시 스테인레스용기에 넣어 탑내에 보관되었으며 다른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탑을 동탑(東塔)이라 하는 것은, 한 사찰내(寺刹內)에 쌍탑(雙塔)이 건립(建立)된 때문이 아니라 행정구역상 술정리 내에 2기의 석탑이 존재하는 이유로 붙여진 명칭이며, 서(西) 삼층석탑(三層石塔)은 약 1㎞ 떨어진 곳에 있다. 이중기단(二重基壇)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基壇)은 이중(二重) 4개의 면석(面石)과 4개의 갑석(甲石)으로 조립되었고, 상하(上下) 기단(基壇)의 면석(面石)에는 모두 탱주(撑柱) 2주식(柱式)이 각출(刻出)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매이며 옥개석(屋蓋石)받침은 각층 5단이고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결실되었다. 세부 양식에서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작풍(作風)에 있어 장중명쾌(莊重明快)한 기풍이 있는 석탑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各部)의 수법도 통일신라(統一新羅)초기(初期)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불국사(佛國寺) 삼층석탑(三層石塔)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제작 시기 또한 석가탑과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5. 술정리 서삼층석탑 보물 제520호
통일신라 석탑으로 2중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이다.
상층기단(上層基壇)의 면석(面石) 중앙은 별도의 석재로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으며, 위에는 양 우주(隅柱)가 조각되고 옥개(屋蓋)받침은 5단이다. 상층기단의 각 면석의 조각은 곡선의 아름다운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기단은 8개의 면석으로 조립되고 탱주(撑柱)는 4매씩 되었으며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1매이다.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아 술정리 동 3층석탑보다 수준이 떨어지며 제작시대 역시 같은 통일신라시대지만 동 3층석탑보다는 후대로 추정된다.
6. 하병수가옥
조선시대의 가옥구조와 민가의 건축술을 알 수 있는 남향의 초가로 하씨(河氏)가 수대로 살아온 터이다. 마루판자는 윗면이 평면, 아래면은 원목 그대로이고 지붕은 쇠풀로써 덮었으며 못은 사용하지 않았다. 서까래는 구멍을 뚫어 그대로 이었고 지금 가옥의 부엌위치가 서쪽인 것에 반해 이곳은 동편으로 되어 있다. 서로부터 건넌방, 대청, 안방, 부엌순으로 되어 있고 부엌 뒤로 반문을 내달아 창고를 만들었고 지붕은 양토없이 밀대로 거꾸로 엮어 얹었다.
7.교동 고분군
화왕산 서쪽 기슭의 목마산성 아래에 있는 송현동 고분군과는 현풍으로 통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남쪽에 위치한 대형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그 일부가 발굴조사되어 유물은 대부분 일본으로 옮겨 가고 지금은 그 일부만 국내에 남아 있다. 완전한 조사보고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이 유적의 성격을 완전히 알 수가 없으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형 고분들은 횡구식(橫口式) 또는 횡혈식(橫穴式)고분이었다고 하며, 유물은
현존하는 고분중 36기(基)는 지금까지 복원정비한 것인데 그중 1기(基)는 입구쪽을 개봉했다. 현재 명덕못을 둘러싸고 있는 야산 전체가 고분군이며, 구조는 현실(玄室)과 연도의 구별이 없고 다만 장방형(長方形)이 평면횡구식(平面橫口式)석실로 삼면(三面)의 측벽은 크고 작은 자연석이고 판석(板石)으로 천장을 덮은 것이다. 일본인에 의해 간략한 보고서가 출간되기는 하였으나 그 많은 유물들의 출토 경위와 유구(遺構)들의 특징이 자세하게 밝혀지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다. 해방이후 1992년에 창녕군 문화유적 정비계획의 일환으로 동아대박물관에서 5기를 조사하였으며, 유구의 형식은 횡구식(橫口式)이었다. 대부분 도굴이 되어 출토유물은 극히 미비하였으나, 형태는 잘 남아 있고 석곽묘의 형식에 목곽묘의 전통이 남아 있는 등 분묘의 축조 당시의 창녕지역의 묘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8. 송현동 고분군
목마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교동고분군과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인접해 있다. 원래 수십 여기가 2개의 고분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기슭의 것이 송현동 고분군이고, 도야리(道也里)로 통하는 도로 아래의 반대쪽에 있는 것이 교동고분군이다. 표면상에 나타난 봉토는 대형분(大型墳)이고, 무덤의 형태와 구조는 교동고분군과는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추정되어진다. 즉, 세 벽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뚜껑돌을 여러개 놓은 뒤 막지 않은 벽을 통해 시체를 안치하고 나머지 벽을 쌓아 막는 방법인 횡구식(橫口式)석실분이다.
흙을 쌓아 올려 봉분(封墳)을 만드는데 주로 진흙과 주변의 흙들을 이용하여 축조하며 내부의 공간은 장방형이 되게 한 가야시대무덤의 일반형으로 되어 있는 고분군이다. 2001년 실시한 송현동고분군 정밀지표 조사 결과 17기의 고분이 확인된 바가 있다.
9. 창녕박물관
화왕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고분군과 인접하고 있으며 2개의 전시실과 시청각실 등을 갖추고 있다.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의 유물 총 166종 276점 (토기류 85점, 마구류 42점, 장신구류 50점, 무구류 53점, 기타 46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교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전시관 중앙홀에는 가야고분의 축조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관(디오라마)이 설치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가야시대 고분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시설규모
부지면적: 4,811㎡(1,476평), 전시관계 : 1,194㎡(361평)
지상(1층): 730㎡(221평)
제1전시실: 156㎡(47평) , 제2전시실 : 259㎡(78평)
별관(계성고분 이전복원관): 254㎡(77평)
중앙홀, 사무실, 숙직실, 다용도실, 화장실
지하(1층): 464㎡(140평), 시청각실, 수장고, 유물정리실, 방풍실
기계실, 소장유물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AD 5~6C경)유물 240종 1,012점
전시유물: (실물) 102종 160점, (복제) 64종 106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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