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 4월 23일~1851년 12월 19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미천한 신분을 딛고 일어나, 19세기의 가장 성공한 화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반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는 전무후무한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였다. 터너는 런던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런던 토박이였고, 정신이상인 어머니까지 두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그는 어린 나이에 최고의 명문인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그는 코벤트 가든 광장에서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이발소의 창문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불과 열다섯 살의 나이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전문적인 전시회를 여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였다. 터너는 수채화로 지형학적인 풍경을 그리는 숙련된 화가로서의 자신의 명성을 빠르게 확립해나갔다.
터너의 천재적인 재능은 원대한 야망을 품게 했다. 그가 원숙해져감에 따라, 그의 작품도 점차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고, 기존의 미술계에 도전하려는 욕망을 드러냈다. 특히 터너는 풍경화의 수준을 높이고, 그것의 다양성과 표현력을 세상에 알리는 것에 주력했다. 터너는 독창적인 표현법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어느 한 지역의 지엽적인 세부묘사에 그치지 않고, 대기의 변화에 따라 풍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와 풍경을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심상을 묘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세상을 자신의 시각으로 관찰하여, 날씨와 물, 그리고 특히 무한하게 변화하는 빛의 장대함을 자연적인 효과에 충실하게 그려냈다.
<카타르고를 건설하는 디도>는 터너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세부묘사에 치중한 그림이다.
시야를 넓히며
동시대 화가인 존 컨스터블이 기술한 바에 따르면, 터너는 사고의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넓어서, 직업적인 활동의 영역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풍경에 대한 열정에다, 지성과 학식을 겸비한 터너는 역사, 고대 신화, 정치, 문학, 그리고 미술 등 여러 방면의 주제들을 탐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는 워털루 전투나 산업혁명에 중대한 역할을 했던 증기기관의 출현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다. 터너는 그 당시의 화가로서는 드물게, 유화와 수채화에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두 가지 중 한 쪽에 대한 실험은 다른 쪽에 도움이 되곤 했다.
그 결과 그는 그림에 대한 자유롭고 비전통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여 유화와 수채화의 영역을 놀라울 정도로 확장시켰고, 빛에 집착한 자신의 작업 방식을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흐릿한 시각적 효과를 연출하는, 투명하게 젖은 맑은 색의 채색법을 완성했다. 그 결과, 터너의 가장 매력적인 그림들에서는 이러한 기법에서 비롯된 흐릿함과 무형성이 주제의 비실재성을 완벽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비와 증기와 속도―그레이트 웨스턴 철도>(1844경)와 베네치아를 주제로 한 자욱한 증기가 매력적인 후기 작품들이 있다. 관광 산업과 근대적인 운송 수단이 탄생된 이 시대의 화가 가운데서 터너는 아마도 가장 많이 여행을 한 화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영감을 자극하는 소재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그는 매년 여름에 새로운 시각적 소재를 찾아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그의 초기 여행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해안으로 한정되었지만, 그 후에는 더 멀리 나아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을 비롯해 모든 화가들이 꿈꾸는 황금의 나라인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여행지는 스위스였다. 스위스의 풍경은 산과 호수, 건축물, 그리고 부드럽고 맑은 빛 등 터너 작품의 전형적인 조합을 완벽하게 제공해주었다. <푸른 리기, 일몰>(1842)과 같은 스위스에서 제작한 후기 작품들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수채화에 있어서 미술적 표현의 정점을 보여주며, 개별적인 풍경을 보편적인 풍경으로, 지상의 풍경을 형이상학적인 풍경으로 바꿔놓았다.
60대에 그린 <파이팅테메레르호>는 터너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였다.
터너는 상당한 명예와 부를 얻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그에 관한 문서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자료는 바로 그의 작품들이다. 터너의 유언에 따라 280여점의 유화와 수천 점의 수채화, 드로잉, 예비 스케치 등 그의 작업실에 있던 작품들과 거의 300개에 달하는 스케치북이 국가에 기증되었다. 런던에 있는 테이트 미술관의 부설 갤러리인 클로르에 소장되어 있는 터너의 유품은, 그의 삶과 작업 습관을 통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되고 있다.
찻잔 속의 폭풍
오늘날 터너는 근대회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후기 유화 작품들이 항상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작품은 <눈보라―항구 어귀에서 멀어진 증기선>(1842)이다. 이 작품은 눈보라와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인 증기선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 항간에 떠도는 비화에 따르면, 위작일 가능성도 있다.
· 이 장면은 터너가 직접 경험한 것을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폭풍이 부는 동안, 터너는 선원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묶게 하고, 폭풍우를 관찰했다. 관람자들은 이 그림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들은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라고 조롱했고, 터너에게 다음번에는 폭풍이 멎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아테나이움』의 한 평론가는 터너를 “크림이나 초콜릿, 계란 노른자나 건포도 젤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주방의 모든 재료를 사용한 이 그림에서 증기선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디가 항구의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를 알아볼 수 없다”라고 평했다.
· 존 러스킨은 『근대 화가론』(1843)에서 이를 반박하며 터너를 옹호했다. 이 책은 터너의 미술을 지적으로 변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러스킨은 <눈보라>에서의 바다의 움직임, 안개, 빛이 이제껏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 중 가장 장엄하게 표현되었다고 평가했다.
“그의 작품은 채색된 증기로 그린 듯이, 그렇게 일시적이고 공기처럼 가벼워 보인다.”―존 컨스터블
[네이버 지식백과] (『501 위대한 화가』, 마로니에북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