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6.화
연휴는 안가에 숨어 꿈인 듯 생시인 듯 보냈다.
마지막 날 귀경 차량 다 빠진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 하늘 아래 발을 디딘 지 다섯 달은 족히 넘은 듯하다.
이젠 낯설고 물선 도시.
나의 집인데도 내 집이 아니었다. 수도꼭지며 싱크대, 창턱과 문틀 먼지, 얼룩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신축이긴 했지만 나 살 때도 이렇게 깨끗했을까 싶게 정갈하고 각 맞춰 정돈돼있다.
휴지 하나, 쌀 한 톨까지 제 것을 꺼내 쓰고 있는, 좀 질린다싶게 경우 바르고 셈 분명한 친구.
그녀와 벗해온 지 28년 차인데도 이제야 보이는 것,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사람은 정녕 쉽게 안다고 할 바가 못 된다.
덕분에 내 집에 왔는데도 까치발로 다니면서 챙겨온 세면도구를 쓰고, 머리카락을 줍고,
사용한 화장실, 씽크대의 물기를 닦고 다닌다. 배가 고픈데 냉장고를 손대기도 뭐한 웃픈 상황.
갖고 온 여름옷 등속을 옷장 구석에 구겨 넣어두고, 겨울옷을 최소한으로 꾸려서 짐을 쌌다.
이 불편함을 털기위해선 빨리 출발하는 게 상책이다 싶은데 오랜만에 상경했다고 친구가 찾아왔다.
우리 집이 하자보수기간임을 알고, 집안 구석구석을 스캔하더니 깐깐한 아줌마의 눈으로
구석구석에서 숨은그림찾기 하듯 깨진 곳, 찍힌 곳, 갈라진 곳을 귀신같이 찾아낸다.
몰랐으면 이 집에 살 동안 평생 못보고 살았을지 모를 틈새들이 드러나면서
그냥 넘어가긴 찜찜해졌고 동시에 그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우환이 생겼다. 역시 아는 게 병이다.
이번 주 공용공간 공사에 이어 다음주 집집마다 실내 공사를 하는데 덕분에 하루 더 상경해야 하게 생겼다.
무튼 나의 유일한 고교친구인 그녀는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시골 사립중학교에 교사를 해왔던 터라
요즘도 가르치기 좋아하고 따지기 잘한다. 그래서 함께 1시간을 얘기하면 짜증이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그런데 최근엔 만날 때마다 폐허처럼 마음이 무너져가는 것이 보인다.
스스로 깨끗하고 정직해서 남이 허접하게 노는 꼴을 못 보는 계일주,
편인 운에 갇혀 목숨 같은 자존심이 많이 망가졌다.
이 말 저 말 하다보니 결국 불쌍한 친구의 눈물 콧물 다 빼고 말았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시끄러운 속사정 얘기를 꺼내지 않는데 오늘은 주책없이 폭풍 오열이다.
갱년기 호르몬 작난에다 서방을 향한 분노, 미움으로 인해 우울이 더 깊어졌다. 어쩔거나...
어차피 남의 말을 들을 사람은 아니지만 할 수 있는 건 하나 뿐. 마음을 기울이고 진심을 쏟는 일 뿐이었다.
시외버스도 막차를 타기로 하고 원 없이 말하고 울도록 했다.
6시 반 차를 타기위해 터미널에 도착하니 에너지가 너무 딸려
팥빵, 크림빵, 치즈빵까지 세 봉지를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버스에 타자마자 오랜만에 꺼낸 마스크를 쓰고 자다 깨다 선잠 속을 헤맸다.
그리고 밤 11시. 겨울옷 든 캐리어를 끌고 마침내 나의 집에 당도했다.
10년은 훅 늙어버린 듯한 기분. 열일한 하루였다.
그래도 집에 돌아오니 참으로 좋다.
첫댓글 영해로의 복귀를 축하드립니다~^^
이제 좀 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