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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층산
토머스 머튼. Thomas Merton, 1915년 ~ 1968년
「미국의 수도사 , 작가, 신학자, 신비주의자 , 시인, 사회 운동가 이자 비교 종교 학자. 켄터키주 바즈타운 인근 겟세마니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활동했으며 , 194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머튼은 27년 동안 50권이 넘는 책을 썼는데, 주로 영성 , 사회 정의 , 평화주의에 관한 책들이었으며, 수많은 에세이 와 서평 도 썼다 . 머튼의 가장 널리 읽힌 작품 중 하나는 베스트셀러 자서전 인 7층 산 (1948)이다. 이 책은 National Review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논픽션 100권 목록 에 올랐다 . 머튼은 종교 간 이해 의 열렬한 지지자이며, 연구와 수행을 통해 동양 종교를 탐구했다. 그는 달라이 라마 , 일본 작가 D. T. 스즈키 , 태국 불교 승려 부다 다사 , 베트남 승려 틱 낫한 등 아시아의 저명한 영적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 앞장섰다 .」
[머리말]
칠충산은 50년 전인 1948년 10월 4일에 처음 출판되었다. 일기에서 밝혔듯이 토머스 머튼은 4년 전부터 켄터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이 수도원은 그가 뉴욕 올리언 성 보나벤투라 대학 영문학 교수를 사임하고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41년 12월에 입회한 곳이다.
[독자에게 알리는 글]
칠충산은 1948년 10월 4일 출판되자 순식간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뿐 아니라 20세기판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50년이 지난 지금도 끊임없이 판매되고 있다. -국제 토머스 머튼 학회 설립회장. 윌리엄 H. 새넌
제 1부
보물섬 찾기 놀이
(1)
한창 큰 전쟁을 치르던 1915년 정월 그믐날, 물병자리 별빛 아래 스페인과 접경한 프랑스 산맥 어느 기슭에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고결함은 사람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세상 위로 들어 높인다. 아버지는 세잔처럼 그림을 그렸고 남 프랑스 풍경을 세잔 식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세계관은 건전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었으며 구조와 구성요소 간의 상호관계, 그리고 피조물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니게 해주는 온갖 상황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버지한테서는 사물을 바로 보는 태도와 고결한 성품을, 어머니한테서는 혼잡한 세상에 만족하지 않는 고요함과 다재다능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2)
아버지는 저 멀리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서 왔지만, 그가 태어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럼 시의 모습은 런던 교외와 비슷하다. ~~~뉴질랜드는 햇빛이 더 강하고 사람들이 좀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음악가요 독실한 사람으로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크라이스트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나는 약간 가냘프고 여윈 모습의 사진을 보았다. 작은 키에 성격이 깔끔한 그녀는 엷은 근심기가 어린 민감한 표정을 짓곤 했다. 어머니는 늘 걱정스러운 표정이었고 정확하고 부지런했으며 내 일을 얼마나 꼬치꼬치 캐물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맏아들인 내가 그러한 어머니와는 달리 변변치 못해서 몹시 속이 상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성공회 교리의 영향을 받으며 상당히 깊은 신앙 속에서 성장하셨다. ~~~아버지의 꿈은 ~~경치 좋은 지방에서 가정을 이루고 그림을 그리면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꿈의 전부였던 아버지는 프랑스에 정착해고 싶어 했다. 우리는 몹시 가난했다.
아버지는 그동안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미술가들이 경영하는 플러싱 전시관에서 전시회까지 가졌다. 우리 집에서 길 위쪽으로 두 집 건너에는 브리슨 버로스 씨가 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로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전쟁 동안 정원사로 일했는데 솜씨가 좋아서 일거리가 많았다.
1918년 11월, 이윽고 그 지겨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일주일쯤 전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1920년쯤에 나는 읽고 쓰고 그림도 드릴 줄 알게 되었다. 나는 담요를 깔거나 그냥 풀밭에 앉아서 집과 소나무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을 그렸다.
전쟁이 끝나자 뉴질랜드에 사시는 친할머니가 지구 정반대편인 영국과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녀들을 만나보려고 오셨다. 나한테는 이 일이 중대한 사건이었다. ~~~할머니는 매우 선하고 친절하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처럼 뉴질랜드에서 교사로 일하고 계셨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교회에 가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지만 결국은 가지 못했다. ~~~아버지, 새들도 모두 교회에 가나 봐요? 나는 다시 물었다. 왜 우리는 교회에 안 가죠? 아버지는 겨우 얼굴을 들었다. 갈 거다. 지금요? 아니, 오늘은 너무 늦었다. 다음 주일에 갈 거다.
어머니는 가끔 주일 아침에 외출을 했다. 어느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가지 않고 나와 존 폴을 돌보려고 집에 남아 있었다. 나중에야 한 일이지만 어머니는 퀘이커교 신자여서 오래된 만남의 집에서 신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더글라스톤의 성공회 성당에 오르간 연주자로 취직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이 1921년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직장은 아버지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신부와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일마다 교회에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때 병원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부터 나는 더글라스톤의 외조부모와 함께 살아야 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종교에 대해 그 정도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고 여겨진다.
(3)
우리가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것은 어머니가 위암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 일은 내가 끝내 설명을 듣지 못한 일 중 하나다. 아무도 병이나 죽음에 대해 들려주지 않았다. 그 사실을 어린이가 알면 해롭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것은 모두 어머니의 뜻이었다.
어릴 때에도 유달리 이기심이 강했던 나는 플러싱에서 더글라스톤의 외할아버지 집으로 옮겨 가는 것이 기뻤다. 거기서는 내 마음대로 해도 누가 꾸중하지 않았고 먹을 것도 많았으며 개 두 마리와 고양이도 몇 마리 있어서 같이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편지 한 통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몹시 놀랐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가 직접 써서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어머니는 편지에 자신의 죽음과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쓰고 있었다. 나는 집 뒤뜰에 있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그 편지를 읽고 또 읽고 해서 결국 무슨 뜻인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하룬가 이틀 후, 식구들은 같은 차를 세내어 교외로 나갔는데 이번에도 내가 차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생전에 화장되기를 원했다.
(4)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아버지는 이제 그림 그리는 것 외는 할 일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은 아버지와 떨어져 더글라스톤에 있는 학교에 두어 달 다니다가 2학년에 진급했다. ~~~아버지가 뉴욕으로 돌아왔다. 나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폴 강에서 배를 내렸다. 직물 공장 옆길로 걸어가던 우리는 새벽일을 끝낸 부두 노동자들로 붐비는 식당 마차를 보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하루 종일 기차를 탔다.
그 후 우리는 다시 더글라스톤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외할아버지한테 나를 맡기고서 다시 떠났다. 동생 존 폴은 그때까지 줄곧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좋은 곳을 발견하여 그림 도구와 함께 나를 데리고 다시 떠났다. 이번은 버뮤다였다. ~~~우리는 희미한 등불 옆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나는 이곳이 새로 머물 집이라는 생각에 금방 친해졌다.
태양은 날마다 바다의 청색 물결 위에도, 바다 가운데 있는 섬들 위에도, 해변가의 흰 모래 위에도, 그리고 언덕 위에 즐비한 조그만 흰 집들 위에도 내리비쳤다. ~~~아버지는 그 지방의 예술가 친구들에게 나를 맡겨 두고 뉴욕으로 가서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그림도 좀 팔려서 약간 부자가 되어 섬으로 돌아온 아버지한테는 또 다른 새로운 계획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나를 미국에 놔두고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5)
외할아버지가 일하는 사무실은 그로셋 던랩 출판사였다. ~~~이때가 1923년이었는데, 이 그로셋 던랩 출판사가 최고로 면영을 누리던 때였다. ~~~그 여름, 그러니까 1923년 여름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캘리포니아로 갔다.
동생 존 폴에 대해 한 가지 이야기해 둘 것이 있다. 어렸을 때 나는 자만심이 강하고 몰인정한 반면, 동생은 천성이 겸손하고 애정이 넘치는 아이였다. 지금도 동생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하다. 누구나 어렸을 때에는 네다섯 살 아래의 어린 동생과 함께 놀면 품위가 떨어진다고 느끼는 것이 형의 심리인 것 같다. 형은 동생을 어린애로 깔보거나 과잉보호를 하려고 든다. 그 당사 더글라스톤에는 전역에 걸쳐 투기업자들이 싸구려 날림 집을 짓고 있었다. 러스와 나와 빓은 그 공사판에서 판자쪽이며 콜타를 종이 나무랭이를 주워다가 숲 속에 판자집을 지으면서 내 동생과 러스의 동생 토미와 그 친구들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호기심에 찬 그 아이들이 몰래 판잣집에 들어오려고 하거나 심지어는 기웃거리기만 해도 돌을 던져 쫓아버리곤 했다.
(6)
외조부모는 보통 미국인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들도 프로테스탄트 신자였지만 어느 교파에 속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대체로 집안 분위기로 보아서 모든 종교는 순전히 자연적 또는 사회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처럼 종교는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쉽게 용인되는 법이다. 다만 유다교도와 가톨릭 신자에 대해서만은 예외였다. 누가 유다교도가 되려고 할까? 그 당시 그것은 종교 문제라기보다 만족 문제였다. 유다인들이 바로 유다교도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가톨릭 신자로 말할 것 같으면, 외할아버지 마음에는 가톨릭 냄새가 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죄악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종교에 대해 통렬히 비난하거나 적개심을 품고 말할 때는 오직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뿐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프리메이슨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는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 그 기사단 모임에서 가톨릭교회에 대한 지독한 악평을 들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외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줄곧 글어왔을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는 프로테스탄트 아이들 대부분이 종교시간이면 으레 듣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릇된 인식은 외할아버지 생애의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내가 외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아 내 정신 속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것 중 하나가 가톨릭에 대한 미움과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고 그저 가톨릭이라는 막연한 악을 피하려는 잠재적인 혐오일 뿐이었다.
악마는 어리석지 않다. 그는 사람들이 지옥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천국에 대해서도 느끼도록 한다. 그는 죄악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처럼 은총의 수단은 꺼리도록 만든다. 밝음이 아니라 어둠을 통해, 실재가 아니라 그림자로써, 명백함과 본질로써가 아니라 꿈과 정신착란의 환상을 통해 악마는 인간을 그릇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지성이란 얼마나 나약한지 척추에 오한이 조금만 들어도 진리를 찾아내는 일을 포기하고 만다.
이때 나는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어느 종교에 대해서든 흥미를 잃었다. ~~~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나에게 편지와 함께 모자까지 달린 외투와 도마뱀 박재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 친구한테서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는 편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그때 생명이 위독했다.
아버지는 그 이상한 병의 위기를 극복하고 의식을 회복하여 차차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고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모아 런던 레스터 화랑에서 전시회를 갖기도 했다. ~~~그때가 1925년 초였다.
자 이제는 프랑스로 가는 거다. 프랑스요? 나는 놀라서 소리 질렀다. ~~~그해 8월 25일에 ~~~우리는 바다를 건너 프랑스로 떠났다.
[박물관의 성모님]
(1)
세상의 찌꺼기들은 서유럽에 모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고트족, 프랑크족, 노르만족, 롬바르드족이 옛 로마의 썩은 뿌리와 뒤섞여 잡동사니 종족을 만들어 냈다. 그 종족들은 하나같이 난폭하고 증오심이 강하며, 우둔하고 간교하며, 야수적 종족들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들한테서 어떻게 그레고리오 성가, 수도원들, 대성당들, 프루텐티우스의 시, 베다의 역사책과 주해서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윤리론>,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과 <삼위일체론>, 성 안셀모의 저서들... ~~~같은 책이 나올 수 있었을까?
1925년에 내가 태어난 땅 프랑스로 되돌아간 것은 내가 속하는 세계의 지성적. 영적 생명의 샘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자연적 물, 곧 오늘의 프랑스 사회의 부패와 퇴폐가 더럽힐 수 없는 은총으로 정화된 샘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프랑스여, 나는 너의 땅에서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잠시나마 하나님이 나를 어에게 도로 데려다 주신 것을 기뻐한다.
(2)
아버지는 종교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기도 같은 것을 가르쳐 준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때 처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가 성공하도록, 또 우리가 살 곳을 찾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부탁하라고 했다. 한 핸가 두 해 후에 우리 살림이 안정되자 아버지는 동생도 데리고 오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몽토방에 온 이유는 여기에 썩 좋은 학교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아버지를 아는 프랑스의 저명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추천한 장 칼뱅 학교였다.
아버지는 종교 교육을 간절히 원하지만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는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첫날이 지나자 몽토방은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그림 그릴만한 소재가 아무것도 없었다.
(3)
우리는 가축시장이 열리는 마을 변두리 라콩다민 광장에 있는 3층집에 세 들었다. ~~~산기슭의 땅을 샀다. ~~~나는 그 지방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동안 아버지는 갈바리오 산기슭에 건축할 집 설계도를 끝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1926년 여름까지도 집 짓는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지만 우리는 그럭저럭 생탕토냉에 자리를 잡았다.
(5)
열한 살 반쯤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성을 좋아했다. 앙리에트라는 작은 금발 소녀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흐지부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지배적인 타인의 애정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항상 깔끔하고 자유롭기를 바라는 이 뿌리 깊은 본능은 참으로 초자연적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만 마음이 놓이고 평온해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나는 프리바 씨 부부가 나에게 기울여 준 사랑을 기뻐하면서 나도 그들 못지않은 사랑을 드리려고 했다. 그 사랑은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소유하지 않는다. 전시효과를 노려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이해관계의 올가미로 발목을 옭아매려는 것도 아니다.
(6)
나는 이제 영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이 허비한 은총과 파멸된 영혼을 생각하면 몹시 두렵다. 성공회가 윤리 면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이 교회가 참교회의 신비체와 생명의 결합이 없다는 것 외에 이 교회의 기초가 되는 사회 불의와 계급적 억압에 기인하는 탓도 있을 것이다. 성공회는 대체로 계급 종교이니만큼 그 계급의 범죄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추측일 뿐이고 논증할 근거는 없다.
나는 열네 살이 되자, 리플리 학교로서는 늦은 셈이지만 적어도 퍼블릭 스쿨 장학생 선발시험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라틴어를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지망할 학교에 대해서는 벤 아저씨가 은퇴한 교장다운 전문적 안목으로 선택해 주었다. 아버지가 재산이 없는데다가 미술가였으니 해로나 윈체스터 학교는 벤 아저씨가 최고로 꼽는 곳으로 이미 많은 학생을 그 학교에 장학생으로 보낸다. 그러나 나가 그곳에 갈 수 없는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아버지가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은 외할아버지가 미국에서 학비를 대주기로 되어 있었지만)장학생 시험이 나한테는 너무 어려우리라는 것이었다. ~~~오컴 학교는 네 마음에 꼭 들 게다.
[지옥의 써레질]
1929년 가을에 나는 오컴으로 갔다. 이 조그만 장터 마을 분위기는 학교와, 회색 종탑이 있는 14세기 때 지어진 교회가 중부지방의 널따란 분지 복판에 솟아 있어서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나의 운명은 문화가 침체된 이 한적한 고장의 떼까마귀가 우글거리는 나무 아래서 3년 반을 살면서 장래를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1929년 부활절 방학 때 나는 아버지와 함께 캔터베리로 갔었다. 아버지는 주로 그곳의 고요한 대성당 경내에서 그림을 그리고 나는 그 근처 시골을 산책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방학이 끝나자 나는 리플리 학교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다시 프랑스로 건너갔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들은 마지막 소식은 루앙에 계시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링의 모드 아주머니 집에서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중태에 빠졌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버지가 얼마나 중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해 여름을 스코틀랜드에서 보내자고 편지를 보내와서 ~~~~아버지의 옛 친구가 그곳으로 와서 휴양하라고ㅛ 초대했다는 것이다. ~~~~에버딘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지쳐서 말이 없었다. ~~~오후 늦게야 우리는 인슈에 도착했다.
해가 구름을 헤치고 나와 저 멀리 히스 꽃이 피어 있는 산에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비치고 있었는데, 거기가 바로 아버지 친구의 뇌조류 사냥터였다. 차를 몰고 도시 마을이라기보다 오히려 시골 마을 같은 황폐한 거리를 벗어나 넓은 들판으로 접어드니 공기가 깨끗하고 주위는 더욱 고요했다.
처음 며칠 동안 아버지는 방 안에서만 지냈고 식사 때만 내려왔다. ~~~결국 아버지는 나를 방으로 불러올려 말했다. 런던으로 돌아가야겠다. ~~~너는 여기 그냥 머물러 있거라. 좋은 사람들이니까 너를 잘 돌봐줄 게다. ~~~아버지는 혼자서 런던으로 떠났다.
집안이 텅 비어 있던 그날도 나는 혼자서 뒤마의 <삼총사>를 읽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전보 내용은 이러했다. 뉴욕 항구에 들어가고 있다. 모두 잘 있다. 그것은 런던 병원에 있는 아버지가 친 것이었다. ~~~너의 아버지는 뇌에 악성 종양이 생겼단다.
1930년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기묘한 내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1930년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다시 유럽에 옴으로써 나에게는 세상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고 사실 완전히 독립된 세계 속에 살게 되었다. ~~~1930년 6월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존 폴이 모두 오컴으로 내려왔다.
1930년 여름, 아직 어떤 일도 일어나기 전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유산 중 내 몫을 남겨주어 내가 잃었던 아들, 어쩌면 실제 집에서 달아나지 않은 탕자가 되도록 문을 열어준 그 여름이었다. ~~~여름 내내 우리는 모두 런던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보자 오래 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아버지는 얼굴이 부어 있었다. ~~~이마의 혹이 무시무시하게 솟아 있었다. ~~~어느날 아침 나는 교장실로 불려 갔다. 교장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를 건네주었다. ~~~슬픈 이야기는 여기서 다 끝났다. 나는 정신이 멍했다.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윌리엄 블레이크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 은총이었다고 생각한다. ~~블레이크를 통해 어느 날 굽은 길을 통해서지만 오직 하나의 참교회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한 분 살아계신 하나님께 이르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외할아버지는 방학 동안 미국에 다녀가라고 편지했다. 나는 새 양복을 맞춰 입고 배에서 혹시 예쁜 아가씨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행운을 기대하며 배를 탔다. ~~~갑판 위에 나와 앉아 대학교 장학생 선발시험의 필수과목인 괴테와 실러의 편지 모음을 읽기 시작했다. ~~~열흘 동안의 항해였다.
그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는 나보다 어릴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은 내 나이의 갑절이었는데도 말이다. 16년이 지난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열여섯 살의 갑절이래야 별로 늙은 것도 아니다. 캘리포니아 태생이라는 그 여자는 조그마하고 섬세하여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여름이 끝나자 나는 다시 배를 타고 영국으로 떠났다. 이번 승객들은 다채로웠다. ~~~이윽고 새 학기가 시작되어 오컴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나는 교장을 포함하여 거기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 인생을 좀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자부하게 되었다. ~~~나는 연구실에서 학교 잡지를 편집하고 T.S. 엘리엇을 읽느라고 꽤 바빴다.
여우 열일곱살에 접어든 내가 철학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철학에 대해 안다고 여기며 당시에 이러한 문제를 고찰한 일이 무슨 유익이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혼자서 방학을 지내러 독일로 갔다. 쾰론에서 큰 배낭을 사서 어깨에 짊어지고 청색 모직 운동 셔츠에 헌 플란넬 바지 차림으로 라인 계곡을 맨발로 거슬러 올라갔다. 길목에 있는 여관 사람들이 나더러 네덜란드 선원이냐고 물을 정도로 내 차림은 방랑인다웠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배낭에는 저속한 대중소설 두어 권과 대중 문고판 스피노자도 한 권 들어 있었다.
고등 교육 자격증 시험 결과가 9월에 나왔을 때 나는 학교 친구 집에 잇었다. 그 친구는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합격의 기쁨을 마음껏 드러낼 수 없었다. 그 친구와 나는 12월에 케임브리지 대학 장학생 선발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그 친구 앤드루는 와이트 섬의 식로 교회 목사의 아들로 오컴의 크레켓 주장 선수였다. ~~~타임스 신문을 보았더니 이번에는 얀드루와 내가 둘 다 합격이었다.
우리는 장학생이 되었다. 앤드루는 세인트캐서린 칼리지이고, 나는 클리어 칼리지, 그리고 앤드루의 짝 디킨스는 세인트존 칼리지의 장학생이 되었다.
새해가 되어 정월 그믐날,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 대부는 카페 앙글레에서 샴페인을 사줌으로써 나를 어른으로 인정해 주었다. 다음날 나는 이탈리아를 향해 떠났다.
아비뇽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노아까지도 여비가 부족한 것을 알았다. ~~~대부에게 돈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카시스에서는 마침 일요일이어서 마르세유에서 온 사람들로 음식점마다 대만원이었다. 나는 어육요리를 사 먹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했다. 날이 저문 다음에야 원추형의 산 아래 있는 라시오타라는 스산한 작은 항구에 도착했다. 나는 몹시 지친 몸을 이끌고 방파제위에 앉아 달을 바라보았다.
이에르에서 나는 다시 길을 떠났지만 피곤하고 우울했다. 바위산과 누런 함수초, 아담한 핑크색 별장들과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뙤약볕을 피해 소나무 그늘 사이로 걸었다. 그날 저녁 어둑해질 무렵 카발레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생트로페에서는 대부가 소개해 준 대부의 친구 집을 방문했다. 언덕 위 양지바른 집에 살고 잇는 그는 폐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그 집에서 칸에 별장을 전세 내어 살고 있는 미국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내가 그곳을 지날 때 꼭 들러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칸으로 가는 도중에 에스트렐 산중에서 폭풍우를 만났다, 때마침 날이 어두워져 걱정했는데 크고 묘하게 생긴 차를 몰고 가던 운전사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배낭을 어깨에서 내려 뒷자리에 놓고 앉았다.
어쨌든 나는 산트로페에서 만났던 부부의 별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이틀을 묵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제노아로 떠났다. ~~~다시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갔다. ~~~피렌체는 너무 추웠고 또 종기고 괜찮은 것 같아 나는 다음 날 로마로 떠났다. ~~기차는 움브리아 산악지대를 기다시피 하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파란 하늘이 바위산을 굽어보고 있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다. ~~~나는 폐허가 된 신전보다 성당을 기웃거리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나에게 또 다른 로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팔라틴 언덕 아래 고대 고마 공회소 가장자리에 있는 (이것 역시 폐허였다) 옛 성당 벽의 프레스코화였다. 거기서부터 고대 로마 공회소 유적을 횡단하여 성고스마와 성 다미아소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란 쉬운 일이었다. 이 성당 애프스(제대 뒤쪽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부분)에 큰 모자이크가 있었다. 암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구름이 점점이 잇고 그 구름 속에 불이 엿보이는 모자이크였다. 이 모자이크를 발견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멋도 없고 음탕하고 시시한 조각품들이 판을 쳤던 이곳에 영적 생명력과 진실성과 힘이 충만한 천재적 예술, 진지하고 생동감에 넘치며 웅변적이고 힘차 보이는 이 예술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러면서도 과장도 꾸밈도 속임수도 없었다. ~~~~나는 비잔틴 모자이크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건축된, 모자이크가 있는 성당을 모조리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순례자가 되었다. 나는 의식하지도 않고 일부러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로마의 모든 대성전을 방문하여 진정한 순례자의 열정과 열망과 소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썩 올바른 동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릇된 동기도 물론 아니었다.
그리스도의 요람, 태형을 당했던 기둥, 예수님의 진짜 십자가, 성 베드로가 묶였던 쇠사슬, 위대한 순교자들의 무덤, 어린 성녀 아네스와 성녀 체실리아, 성 클레멘스 교황과 석쇠에서 화형을 당한 부제 성 라우렌시오의 무덤은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말을 했더라도 내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물들이 안치되어 있는 성당들은 내게 말했고 이 성당 벽 예술도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를 조금씩 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막연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알고 인정한 그 이상으로 참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개념이 형성된 것은 로마에서였다. 지금은 나의 하나님이요 임금으로 계시면서 내 삶을 차지하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로마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이분이 바로 묵시록의 그리스도요, 순교자들의 그리스도며 교부들의 그리스도시다. 성 요한과 성 바오로와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예로니모와 모든 교부와 사막 교부의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요 임금이신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이 깃들어 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 신성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보다 더 높은 분이시다.....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한다....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다....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태어나신 분이시다.(골1~2장). 죽음에서 가장 먼저 살아나신 분이시며, 땅 위 모든 임금의 지배자시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셨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다.(묵1:5~6).”
나는 보급판 성경을 사서 우선 신약을 읽었다. 나는 D. H. 로렌스가 에제키엘서와 묵시록에 있는 전통적 상징인 네 개의 신비로운 동물로 표현된 네 명의 복음사가에 대해 네 편의 시를 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저녁, 나는 그 시집을 읽다가 그 맹랑한 거짓말에 그 책을 팽개치고 말았다. 내가 왜 그 따위 시시한 사람한테 시간을 낭비했는지 화가 났다. 그는 신약성경의 참뜻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왜곡하여 자신이 꾸며낸 종교, 곧 괴상망측하고 섬뜩한 씨가 가득 차 있어서 김매지 않은 독일이라는 정원과 나치즘이라는 축축한 기후에서 싹이 터 끔찍한 독초로 자라날 준비가 되어 있는 그의 자작 종교에 악용하였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친밀한 벗이던 그 책을 처음으로 옆으로 밀쳐두고 나는 그 대신 복음을 읽게 되었다. 옛 성당과 모자이크에 대한 사랑도 날로 커갔다. 나는 이제 성당들을 단순히 예술적 안목만 가지고 방문하지는 않았다. 거기에는 나를 매혹시킨 다른 것, 곧 일종의 내적 평화가 있었다. 나는 이들 거룩한 장소에 있는 것이 좋았다. 나는 내가 거기에 속해 있다는, 곧 나의 이성적 본성은 하나님의 성당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심원한 소망과 필요로 가득 차 있다는 깊고 강력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가 애착을 느낀 성전 중 하나는 쇠사슬에 묶인 성베드로 기념 성당이었다. ~~~자신을 묶었던 쇠사슬보다 훨씬 무겁고 무서운 사슬에 묶여 있는 나를 위해 그 사도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음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의지에는 깊은 움직임이 없었고, 개종이라고 할 만한 변화가 없었다. 내 본성을 결박하는 윤리적 부패의 무쇠 같은 폭군은 끄떡도 않은 채 나를 여전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때는 오게 되어 있었다.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기이한 방법으로 그때는 갑자기 왔다.
나는 내 방에 있었다. 밤이었고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돌아가신 지 1년이 넘은 아버지가 홀연히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아버지가 내 팔을 툭 치고 말을 거는 것 같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이 놀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불이 깜빡였다. 그 순간 내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꼈다. 찰나와 같은 바로 그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빛 속에서 비참하고 부패한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곧바로 그 비참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력한 항거와 함께 해방과 자유에 대한 진지한 갈망이 생전 처음으로 힘차게 솟구쳐 올라왔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진정한 기도, 곧 입술과 지성과 상상뿐이 아니고 생명과 존재의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기도, 어둠 속에 숨어 계신 하나님께서 오시어 나의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이 많은 무서운 것에서 풀려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도와 함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렀고 그 눈물은 나를 위로했다. 그러는 동안 내 방에 아버지가 있다는 생생한 느낌은 없어졌지만 나는 아버지를 내 마음에 모시고 아버지와 이야기했고 아버지를 중재자로 삼아 하나님께 말씀을 여쭙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성인들 반열에 끼여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고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천국에 계시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그 경험의 기억으로 판단하자면, 아버지는 연옥에서 나에게 파견되었던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연옥에 있는 영혼이라고 해서 천국에 잇는 영혼처럼 그들의 기도와 영향으로 지상에 있는 이들을 돕지 말라는 이유는 없다. 사실 우리가 연옥 영혼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연옥 영혼들이 우리 도움을 더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만일 내 추측에 약간의 진리가 있다면 이번 경우는 그 반대 사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강조하려는 점이 아니다. 나는 이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할 생각이 없다. 이것이 단순히 상상에 지나지 않거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라는 순전히 자연적이거나 심리학적 원인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설명하지 않는다. 더구나 죽은 자와 영교함으로써 점을 친다든가 하는 강신술 냄새가 나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 반감을 품어왔고 그런 짓을 해보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상상이었든 신경과민이었든 나는 아버지가 거기 계신 것처럼 생생하게 느꼈고, 그 결과 이미 묘사한 대로 내 영혼 상태를(당시 나는 내가 영혼을 갖고 있다는 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만) 보게 하는 하나님한테서 온 내적 빛을 아버지가 나에게 전달해준 것같이 느꼈음을 진정으로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정말 크나큰 은총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그 은총을 철저히 따랐더라면 그 이후 내 삶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고 훨씬 덜 비참했을 것이다.
뉴욕에 도착하여 더글라스톤 집에 가자, 나는 처음 두 달 동안은 남몰래 성경 읽기를 계속했다. ~~~참되기는 했지만 일시적이었던 내 종교적 열성이 식어버린 전후 사정을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부활주일에 우리는 한때 아버지가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던 성공회 시온 성당에 갔다. ~~~어느 일요일, 나는 어머니가 나가던 플러싱 퀘이커 회당을 찾아가 뒤쪽 들창 가까이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회당 자리는 반쯤 차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중년층과 노년층이었고, 집회는 성령의 감도를 기다리면서 침묵 중에 앉아 있는 것 외에는 감리교나 침례교, 성공회나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 예배와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좋았다. 평화스러웠다. 피상적이나마 오랜만에 나 자신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가 흐릿하지만 어떤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퀘이커교 신자들한테서도 하나님에 대한 열성적이고 순수하고 겸손한 예배와 진정한 애덕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느 종교에서도 이런 점이 다소간 발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연 질서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확증을 본 적은 없다.
그해 여름에 나는 세계박람회를 구경하려고 더러운 완행열차를 타고 시카고에 갔다. 그때 종교 전시실에서 모르몬교의 팸플릿 두 당을 집어 들고 읽어보았는데 거룩한 책이 계시에 의해 뉴욕 주 북부 산악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도무지 곧이들리지 않았다. ~~~9월이 되자 나는 다시 영국으로 배를 타고 떠났다.
케임브리지의 분위기는 어둡지도 않을 뿐더러 흉측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잇을 것이다. ~~~열여덟 살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인생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제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당신 계시고
저승에 잠자리를 펴도 거기에 또한 계십니다. (시편 139,8)
자신의 불행을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구원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기회일 수도 있고 지옥의 더 깊은 구렁으로 빠지는 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내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더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나로 하여금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대로 하도록 용인하신 것은 매우 짓궂고 어쩌면 잔인하다고까지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인 섭리는 지극히 현명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하려고 몰두하는 한 아무 간섭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책략을 쓰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움 없는 자신들의 무력함이 얼마나 많은 경박함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지를 스스로 깨닫게 하신다. 얄궃고 잔인한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 마귀한테서 온다. 마귀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한테서 나의 어리석고 시시한 작은 영혼을 빼앗는다고 믿는다.
케임브리지를 떠난 지 1년 쯤 지났을 때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인 내 친구 소식을 들었다. 웨일스 지방 출신인 마이크는 붉은 얼굴에 건장하고 시끄러운 청년이었는데, 내가 케임브리지에서 보낸 1년 동안 밤낮으로 어울리던 패거리에 끼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내게 전해진 소식은 그가 목 메달아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결국 영영 떠나버린 유럽은 1934년 11월 하순에는 불길한 예감이 감도는 슬프고 뒤숭숭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해 11월 사우샘프턴을 조용히 출범하는 밤배를 타고 영국을 영원히 떠날 때, 내가 버리고 떠나는 땅은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짙은 안개와 어둠이 겹겹이 감싸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두꺼운 자기 집 담벼락 속 방 안에서 나치스가 비행기 몇 천 몇 백 대에 시동을 거는 첫 천둥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듣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13장15. 이사6장9~10)
“하나님의 어머니, 당신은 과거 여러 세기 동안에 얼마나 자주 저희에게 발현하시어 산과 숲과 언덕에서 장차 저희에게 닥쳐올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까? 그런데 저희는 당신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저희는 당신 목소리에 귀를 막고 저희를 미워하는 지옥의 입속으로 머리를 처넣기를 계속할 것입니까?
성모님, 한때는 당신 딸이었던 영국이라는 섬을 제가 떠나던 날 밤, 제가 알지도 목하고 느낄 수도 없었으나 당신 사랑은 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배 앞에 바다를 마련하시어 저에게 다른 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것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당신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어디로 가는지 잘 몰랐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도 장차 제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보다 더 명백하게 제 미래를 아셨고, 제 배 앞에 바다를 터놓아 제가 꿈도 꾸지 못한 곳에, 당신이 그때 벌써 제 구원과 피난처와 집이 되도록 마련하고 계시던 그곳에 저를 데려다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도, 사랑도, 자비도 없다고 여겼을 때, 당신은 저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속으로 인도하고 계셨고, 제가 전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얼굴의 비밀 속에 저를 숨겨줄 집으로 데려다 주고 계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어머니, 당신은 하나님의 옥좌 앞에서 당신의 중개가 거절되지 않는 분이시오니 제가 어떻게 또다시 당신이나 당신 하나님을 불신하겠습니까? 제가 또다시 당신 손과 얼굴과 눈을 외면하겠습니까? 제 일생의 모든 나날과 모든 순간에 당신의 사랑 깊은 얼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참된 충고를 찾고 제 길을 열려고 두리번거리겠습니까?
성모님, 당신이 저를 인도하셨듯이 저와 같은 비참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제 형제들도 인도하소서! 그들의 뜻을 개의치 마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주소서. 영혼들의 거룩한 여왕이시며 죄인들의 피난처이신 성모님, 당신의 크신 힘으로 그들을 이끄시고 당신이 저를 데려다 주셨듯이 그들도 당신의 그리스도께 데려다 주소서!
저희들의 보호자 성모님, 불쌍한 저희를 인자로운 눈으로 굽어보소서, 귀양살이 끝날 때에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님을 뵙게 하소서. 그러나 저희 귀양살이가 끝난 다음뿐 아니라 저희가 방황하는 지금 여기서도 저희에게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보여주소서.“ (편집자: 가톨릭 기도문)
[장터의 아이들]
(1)
내 갈 길은 아득했다. ~~~~나는 비록 유럽을 벗어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옥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고 벗어나려고 바둥거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때 개종 막바지에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개종은 아니었지만 하여간에 개종은 개종이었고 분명히 지나온 과거보다는 작은 악이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큰 선은 못 되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오컴의 은둔생활을 떠난 이후 숱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 세상에서 나의 욕구를 제멋대로 탐닉하고 난 지금 내 가치를 한번 크게 바꾸어야 할 때가 닥쳤다. ~~~케임브리지에서 지낸 1년을 깊이 반성하지 않더라도 나의 환상적 쾌락과 향락의 꿈은 모조리 어처구니없는 미친 짓이었고, 내가 손을 댄 모든 것이 이미 재로 변했으며, 나 자신은 극단적으로 불쾌한 자, 무익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방탕하고 나약하고 결단력이나 자제력도 없고, 감각적이고 음탕하고 교만한 자로 변해 버렸다. 나는 쓰레기였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마저 보기 싫었다. ~~~내 정신은 벌써 영적 감옥을 벗어날 수 있는 열린 문인 듯한 것을 향해 있었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 내가 불행한 탓은 나 자신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요1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12:15~16)
내가 탄 배가 넌터킷 등대를 지나 12월의 희미한 햇살을 받고 있는 롱아일랜드의 길고 낮은 누런 해변을 보게 된 때는 몹시 추웠지만 날씨가 맑은 오후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시 찾은 기쁨에 들떠 배에서 내렸다. 뉴욕 너는 내 것이다! ~~~나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컬럼비아 대학의 입학 절차를 밟았다.
1935년 겨울, 나는 스무 번째 생일을 지냈다. 내가 컬럼비아에서 맞은 학기 첫날 마크 교수는 영어 부속가 첫 강의를 했다. ~~~그는 질문을 함으로써 학생들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 시기에 마크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때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계급 없는 사회라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어떤 어리석은 것이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위험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2)
다음 해에 스페인 내란이 터졌다. 나는 이 내란 소식을 1935년도 평화 파업을 주동한 연사한테서 처음 들었다. ~~~공산주의의 유일한 법은 그 순간에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이든 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 모든 정당의 규범이 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내 정신에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진을 찍어두었지만 그 실체는 실망이었다.
(3)
5월이 왔다. 롱아일랜드 나무들도 모두 녹색으로 변했다. 시내에서 들어오는 기차가 베이사이드를 지나 더글라스톤 초원을 지나가다 보면 늦은 봄의 부드러운 아지랑이가 가득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변가에는 다시 돛을 올린 작은 배들이 계류선 곁을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35년 가을에 동생은 코넬 대학에 들어갔고 나는 컬럼비아로 돌아갔다. ~~~나는 오래전부터 영적 죽음 상태였다. (컬럼비아 대학에서의 여러 경험과 감성적 경험으로)
(4)
1936년 가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한테는 단순한 점이 많았다. 이 단순성과 솔직함은 그의 천성이었다. 이것은 미국인의 특성이기도 했다.
이때 기이한 일이 생겼다. 나는 무심결에 창문을 닫고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이다. 이것은 불쌍한 외할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자발적 반응이었던 듯하다. 외할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고 나에게 베푼 모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죽음을 보아도 기도를 한 적이 없었고, 기도할 의향마저 없었다. ~~~외할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생각보다 여러 달이 지난 다음에 돌아가셨다. ~~~그때가 1937년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36년 11월이었다. 그 가을에 나는 벌써 몸이 병든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강의를 듣고, 학교 연감을 편집하고, 직장 일도 하고, 훈련은 받지 않았지만 크로스컨트리팀에 끼여서 뛰는 등 내가 해오던 모든 일을 계속했다.
하루는 롱아일랜드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시작했다. ~~~현기증은 역에 도착하자 멈췄다. ~~~자, 저 창문 밖으로 투신할 생각은 없나? 나는 돌아누우며 애써 잠을 청했다. ~~~의사가 가버리자 나는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방 값을 치르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제2부
큰 값을 치르고
모순의 바다
[큰 값을 치르고]
(1)
인간 존재의 핵심에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이를 파악해야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곧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는 자신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전혀 또는 거의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철학과 윤리 수준만 추종한다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역설이다. 이러한 생각이 순전히 추상적인 것이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절망하고 말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초자연적 생명력을 지향하는 본성을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체의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오직 인간 능력을 무한히 초월한 수준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되도록 조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인간이 순수한 자연 생명만을 이어가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자연적 행복만을 지향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인 인간 본성은 또 하나의 거저 주시는 은혜, 곧 성화 은총에 따라 완성되어야 한다.
성화 은총은 인간의 수준을 무한히 초월한 생명과 지성과 사랑의 은혜로 인간의 본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그 본성의 자연적 완성이라는 추상적 정점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업은 절반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다만 시작일 뿐이다. 본격적 사업은 은총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덕과 성령의 은혜의 사업이기 때문이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랑이다. 곧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은총에 의해 인간은 무한한 몰아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순수 현실유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어떤 것을 이기적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과연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릇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 존재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무결에 절대적으로 모순되는 개념은 바로 이기심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이타심에 의해 존재하는 까닭에 형이상학적으로 하나님은 이기적일 수 없다.
광선이 수정에 투사되면 수정은 새로운 특질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무한한 무조건적 사랑이 인간 영혼에 투입되면 그는 더욱 새로워진다. 그것이 성화 은총이라 불리는 생명이다.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의 영혼은 투명한 수정이 암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본성상 완전하지만 이를 초월하여 외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광선이 그 속에서 빛날 때 어떤 의미로 그것은 광선으로 변화되어 그 속에 잇는 빛의 본성 속에 몰입된 것처럼 보이는 고차원의 본성이 되는 것이다.
자연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떤 의미로는 이기적일 수박에 없는 자연적 선행과 사랑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빛날 때 변화한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완전히 몰입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이러한 완전한 상태는 성인들,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사는 성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한테 성인이라고 칭찬받는 이들은 죄인일 수도 있고, 그들의 빛이란 암흑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빛에 관한 한 인간은 올빼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은 참 눈부셔서 우리는 오히려 어둠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눈에 성인처럼 보이는 이는 하나님 눈에 흔히 성인이 아니며, 우리 눈에 성인처럼 보이지 않는 이가 하나님 눈에는 흔히 성인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성인은 성모님이나 성 요셉처럼 때로는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세우셨는데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정화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2)
가련한 컬럼비아! 이 대학은 본래 진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설립했다. ~~~1936년 가을 새 학년 초, ~~~그날 나는 예상 밖의 일을 겪었다.
(5)
나의 독서 경향은 점점 더 가톨릭적이 되었다. 6년 전에는 약간의 인상을 받았을 뿐인 홉킨스의 시와 그의 필기장에 심취했다. 그리고 홉킨스가 예수회 회원이라는 데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번 여름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바로 그 사명이라는 대목에서, 곧 지옥에 대한 사제의 강론 부분에서 나는 매혹되고 말았다. 내가 매혹된 것은 지옥의 공포가 아니라 그 강론의 노련한 맛 때문이었다.
나는 조이스를 읽으면서 더블린으로 가서 물질적, 영적 빈민가의 공기를 마셨다. 그가 묘사한 것이 대체로 더블린 가톨릭 면모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배경은 교회와 사제들과 가톨릭 신심, 그리고 예수회 회원을 비롯하여 교회 복장의 옷깃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의 가톨릭 생활이었다. 나는 바로 이 배경과 아울러, 한때 조이스 자신 안에도 있었던 토미즘 기질에 매혹되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나는 아직 세례대 곁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숙고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으니 전쟁이 터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는 마치 지옥문 하나가 반쯤 열려 그 불길이 솟아나와 인간들을 말려 죽이려고 너울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비통한 표정으로 뉴스판 주변에서 서성댔다.
신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집으로 들어갑시다. 이렇게 대답한 신부는 나를 쳐다보더니 좀 놀라는 기색이었다. 우리는 문 옆에 있는 조그마한 응접실에 앉았다. 신부님, 가톨릭 신자가 되고 싶습니다.
(6)
10월 그믐께 본당 신자들과 함께 피정을 했다. 바오로회 신분미들 두 분이 하루에 두 차례씩 강론을 했고 미사와 성체강복도 있었다. 피정 기간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e아신 존재를 뚜렷이 계시하셨으므로 내 소원은 더욱 간절해졌다. 지옥에 관한 강론이 시작되자, 나는 자연히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과 정신적 비교를 하게 되었다.
지옥은 스스로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편을 선택함으로써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에 반항하고 거부함으로써 지옥에 갈 수 있다. 따라서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뜻이다. 하나님은 그들 스스로의 결정을 비준하여 단죄하는 것뿐이다. 그 결정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택에 맡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파멸에 대한 책임을 우리의 나약함에 전가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약함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힘의 원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고전12:9). 하나님의 권능은 우리 약점 안에서 더욱 드러나며 우리가 무력하다는 사실 때문에 가난한 자, 작은 자, 무거운 짐 진 자를 당신께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요청되는 것이다.
11월 초였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또 하나의 소망이 싹텄다.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이었다. ~~~월시 교수는 보통 교수들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자아도취가 전혀 없었다. 마크 밴 도런 교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어떤 인위적 무장을 하고 속임수를 쓰며 허세를 부리는 일도 없었다. ~~~그는 늘 순수하게 웃음을 띤 채 토마스의 확고하고 강력한 정신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11월에 접어들자 세례를 받고 마침내 교회의 초자연적 생명에 들어간다는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그러나 연구와 독서와 대화에 힘을 기울였음에도, 나는 내 영혼 안에서 일어날 일을 제대로 인식하기에는 아직도 너무나 미숙했다. 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가파르고 험난한 연옥의 칠층산을 올라가기 시작해야 할 참이었는데도 그런 등반을 해야 한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세례대 입구에 섰다.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무어 신부가 질문했다. “신앙을 청합니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 사제는 나에게 물었다.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나는 마귀와 마귀의 허레허식과 마귀의 행실을 끊어버리겠다는 맹세를 세 번 거듭했다. “천지의 창조주,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성령과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삶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23년 동안이나 내 안에 살았던 마귀의 대부대를 겁에 질리게 했다. (마르5:9)
사제가 내 얼굴에 입김을 불면서 말했다.
“더러운 악령아. 그에게서 물러가라. 그리고 파라클리토 성령께 자리를 내드려라.”
[모순의 바다]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당분간 옆으로 밀쳐두었다. 사제직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
1939년 첫 아침은 음산했다.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가서 방 하나짜리 아파트를 얻어 임대 계약하고 박사학위 논문에 착수했다. ~~~내가 새 교황 소식을 들은 것은 따사로운 태양이 가득 비추는 어느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4)
1939년 8월 하순은 누구에게나 지긋지긋한 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다 날마다 불길해지는 유럽 뉴스가 겹쳐 극도로 불쾌한 나날이었다. 급기야 본격적 전쟁이 터질 모양이었다.
마룻바닥에 앉아 레코드판을 들으면서 사온 것들을 먹고 있을 때 느닷없이 사제나 될까 보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당신의 내 생활이 무위한 것이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살기가 싫증나고 귀찮아서 그 반작용으로 그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레코드음악 때문도 아니고 가늘 날씨 때문도 아니었다. 내 안에 갑자기 심어져 자라난 이 확신은 병적으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정서적 욕구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양심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새롭고도 깊은 명확한 의식이었다. ~~~집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계속 사제가 될까 보다 하고 생각했다.
너는 정말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가? 원한다면 그렇다고 말하라.... ~~~나는 성체를 똑자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고 말했다. 네, 저는 사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진심으로 원합니다. 당신 뜻이라면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저를 사제로 만드소서.
3부
자북磁北
진북眞北
잠자는 화산
감미로운 자유의 맛
[자북]
(1)
또다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나는 수도회 규칙이 가장 손쉬운 곳을 택해야 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댄 교수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고 하면서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의 생활과 침묵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 수도자들은 절대로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그들이 어느 누구한테도 말을 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면 그 수도자들은 고해성사도 받지 않습니까?” “물론 고해성사도 받고 원장님께 말씀을 드릴 수도 있지. 피정을 지도하던 제임스 신부님이 수도자들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하더군. 법률가, 농부, 군인, 학생 등 가계각층 출신들이 함께 살면서 어디든지 함께 가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하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일세. 가대歌隊(수도자들이 성무일도를 함께 노래하는 것)도 함께 하고, 일하거나 책을 읽거나 rdh부할 때도 함께 한다네. 그러니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지. 그럼 가대에서 함께 노래합니까? 물론이지. 성무일도 합송과 장엄 미사에서 노래도 같이 하지. 하루에 두서너 시간씩이나 가대 기도를 바친다네.
나는 수도사들이 시편기도를 바칠 때 성대를 사용한다는 말에 한숨을 돌렸다. 평생 침묵을 지키면 성대가 말라버릴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수도사들은 밭에서 일한다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살아가지. 곡식도, 빵도, 신발도 모두 자급자족일세. 수도자들은 단식재를 많이 지킨다던데요? 그야 물론 1년의 절반 이상을 단식재를 지키고, 병이 나지 않는 한 고기나 생선을 평생 먹지 않지. 달걀도 먹지 않아. 다만 채소와 치즈 따위만 먹고 산다네.
자네, 그런 생활을 해볼 생각이 있나? 천만에요, 제게는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아마 일주일도 못 가서 죽을 겁니다. 그리고 저는 반드시 육식을 해야 합니다. ~~~~댄 교수는 친구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에드먼드 신부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2)
에드먼드 신부를 만난 첫 순간부터 나는 좋은 친구를 만났음을 알았다. ~~~나는 당신이 내년 8월에 수련회 입회를 지원 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부모님들과 같이 살고 있습니까? 나는 오래전에 부모님들은 작고했고, 외삼촌과 동생 외에는 가족이 없다고 했다. 그럼 동생도 가톨릭 신자입니까? 아닙니다, 신부님. 동생은 어디서 뭘합니까? 코넬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노는 6월에 졸업할 예정입니다. 그래요. 당신은 어떻습니까? 생계유지가 됩니까? 굶거나 그러지는 않겠지요? 아닙니다, 신부님 지낼 ask합니다. 금년에 컬럼비아에서 영어 공개강좌를 맡게 되었고, 그 외에도 박사학위 과정을 위한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 직장을 계속하십시오. 그게 매우 유익할 겁니다. 그리고 박사학위도 서두르십시오. 하여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철학도 공부하십시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지를 고찰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주님이신 하나님을 찬미하고 공경하고 섬기며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그리고 이 지상에 있는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사물들을 인간의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는 한 이용하고, 그렇지 않고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허용하는 한, 일체의 피조물에 대해서 초연할 필요가 있다. 곧 우리는 무턱대고 병고보다는 건강을, 빈곤보다는 부귀를, 치욕보다는 명예를, 단명보다는 장수를 원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더 효과적으로 인도하는 것들만을 선택하고 원해야 한다.」
이 기초의 단순하고 근본적인 진리가 내게는 너무나 크고 힘들게 여겨졌다. ~~~나는 의지의 초연과 감정의 초연을 도저히 구별할 길이 없었다. 감정의 초연 문제는 성인들의 체험에서조차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창작해 낸 부질없는 큰 난점에 얽매인 나머지 이 기초 묵상의 참결성(내가 집착하고 있고, 나에게 말썽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에 초연해야 한다는 결심)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4)
나는 쿠바에서 돌아온 이후 뉴욕에는 단 며칠 동안만 머물었는데, 그동안에 31번가 수도원의 에드먼드 신부한테서 내 입회 지원서가 수리되었고 또 필요한 서류 몇 가지가 이미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앴다.
어느날 나는 6개월 정도 느껴온 평화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내가 살던 에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에덴 담 밖으로 쫓겨났다. 에덴 문을 다시 찾을 수 없도록 불 칼이 문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에 나는 또다시 알몸으로, 외톨이로 추운 바깥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수도회에 들어갈 내게서 모든 것이, 특히 성소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겠다는 소망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소망은 차디찬 고독의 암흑 속으로 추방되자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 소망만이 실제로 유일하게 남아 나를 감싸주고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소망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내 마음속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몰아쳐 나온 갑작스런 절망과 대조되어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위안이랄 것 도 못 되었다.
정말로 내게 성소가 잇는가 하는 고뇌에 찬 의문과 함께 갑자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려지자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은 소망이 결코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누구이며, 누구였던가를 회상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이래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에 적잖이 놀랐다.
이제 무서운 문제가 나에게 대결을 해왔다. ~~~결국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다는 소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수도회에 대한 매력은 수도 성소의 주요소가 되지 못했다. 올바른 윤리, 신체, 지성적 적성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상당한 근거로 받아들여져야 했다. ~~~~나는 즉각 가방을 챙겨 뉴욕으로 떠났다.
[진북]
(1)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럼에도 내게는 자유의 확신과 하나님과의 일치와 은총의 심증이 있어서 어떠한 필연적 사태에 맞부닥치더라도 흐트러지거나 흐려질 수 없는 평화를 누렸다. 이 평화는 사뭇 보람찬 것으로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2)
우리 모두는 조금씩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1941년 새해가 왔다. 그해 정월에 나는 스물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했고, 내 생애 가장 중대한 스물일곱 번째 해로 들어서게 되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직전 어느 날, 나는 느닷없이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 갑자기 그 무수한 시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비전투 요원을 희망하는 입대원서를 썼다. 곧 자원으로 육군에 입대하되 위생병이나 병원 잡역부 따위의 의무부대에 복무하겠다는 것이었다. ~~~책임 의사가 다가와 내 입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튼 검사는 마저 하도록 합시다. 책임의사는 나를 앉히고 직접 여러 가지 복잡한 검사를 하기 시작했다. 겨우 검사가 다 끝나 옷을 입어도 좋다는 지시가 있자, 나는 더 참을 수 없어 의사에게 물었다. 제 이가 어떻다는 겁니까? 집으로 돌아가시오. 이가 너무 모자라요. 그래서 나는 다시 눈 내리는 거리로 나왔다. 그들은 결국 나를 들것 나르는 병사로라도 입대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거리는 고요 하고 유난히 평화로워 보였다.
(3)
부활절까지는 아직 3주간쯤 남았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가서 성주간을 지내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터는 성주간이 다가옴에 따라 트라피스트 수도원 생각이 점점 더 간절해져서 어느 날 도서관에 가서 가톨릭 백과사전을 펴 들고 트라피스트 항목을 읽었다.
기차는 바스타운에서 선로를 바꾼 뒤 봄날 밤 속을 서서히 달렸다. 내가 내릴 역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역으로 걸어갔다. ~~~~나는 어떻게 할지 궁리하면서 가방을 자갈 위에 내려놓았다. 편지에는 이곳까지 오면 수도원으로 데려다 줄 차를 준비해 놓겠다더니 잊은 걸까? 초조해지기 시작하는데 문득 어떤 집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서두르는 기색 없이 걸어 나왔다. 우리는 함께 차에 올라타 출발했는가 싶었는데 차는 순식간에 달빛 비치는 들판으로 들어섰다.
수도사들은 벌써 잡니까? 운전사에게 물었다. 그때가 겨우 8시가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그럼요, 그분들은 7시면 잠자리에 든답니다. 수도원이 먼가요? 2킬로미터입니다. 한적한 시골길이 달빛 아래 납 같은 회색빛으로 우리 앞에 뻗쳐 있었다.
안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나더니 이내 열쇠가 문에 꽃히ㅐ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내 뒤에서 조용히 닫혔다. 나는 세상을 벗어났다. ~~~여기서 살려고 왔습니까? 수사가 물었다. 이 질문이 나를 전율케 했다. 마치 내 양심의 소리처럼 들렸다. 천만에요, 아닙니다. ~~~마침내 맨 위층에 이르자 수사는 이번에는 널찍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더니 거기에 내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두고 떠나갔다.
종소리가 높은 탑에서 울려 나오자 깜짝 놀라 일어난 나는 졸린 눈을 반쯤 뜨고 더듬어 옷을 입고서는 급히 서둘러 캄캄한 계단을 내려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 문 앞으로 갔다. 수도원 봉쇄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봉쇄구역은 불빛이 희미하여 어두운 데다가 춥고 눅눅한 가운데 양털 수도복 냄새가 코를 찔러 이 세상 같지 않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수도자 한 사람이 바로 문 옆 모퉁이에 있는 피에타 상(성모님 품에 안겨 못에 뚫린 손바닥을 펴고 한 팔을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시신 상)앞에 수도복의 넓은 소맷자락 속에 얼굴을 파묻고 무릎을 꿇었다기보다는 부복하고 있었다. 너무나 통절한 모습이어서 나는 몸서리를 쳤다. 숨져서 축 늘어진 그리스도의 발치에 풀 고꾸라진 이 수도사의 처절한 자아포기, 나는 심연 속에 빠져 들어가는 기분으로 봉쇄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하나님, 당신은 때때로 얼마나 큰 권능으로 한 인간의 영혼에 당신의 무한한 교훈을 가르치시는지요! 여기서는 평범하고 통상적인 전례를 통해서도 은총이 밀물처럼 나를 덮쳐누르고 진리가 그 엄청난 힘으로 나를 압도했다. 청빈과 자아포기와 자기 비하 속에서 심한 노동으로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으로 봉헌되는 미사는 과연 어떤 것인가? 모든 경당 속에 있는 빛과 그림자들이 말했다. 보라, 보라!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라! 이 미사가 무엇인지 까달으라! 여기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의 상처를, 찢어진 손을 보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여기 십자가 위에서 니 못들, 이 가시관으로 괴로워하는 사랑이 이기 있다. 너의 죄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를 모르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분의 제사를 기억하지도 않는 사람들 때문에, 납이 달린 채찍으로 얻어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기 까지 피를 흘리는 사랑이 여기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스도한테서 배우라! 이 십자가와 이 사랑에서 그리스도께 생명을 바치는 법을 배우라!
영성체를 하자 내 마음은 터질 것 같았다. 각 제대에서 미사가 두 차례씩 끝나 성당이 거의 비었을 때 나도 성당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왔다. 그리고 3시경기도, 6시경기도, 9시경기도, 교중미사에 참석하러 다시 성당에 가서 신자석 맨 끝 높직한 발코니에 무릎을 꿇었다.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나는 공기가 대단히 희박한 높은 산에서 내려온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무슨 중대한 일이나 있는 것처럼 뛰어가서 버스를 타고 신문을 읽고 담뱃불을 붙이는 것이 사뭇 이상하게 보였다. 그다지도 서두르며 걱정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으로 보였는지 몰랐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초여름의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동생이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 불쑥 나타났다.
[잠자는 화산]
(2)
내가 처음 할렘의 열기 속을 찾아간 때는 몹시 무덥고 비까지 오는 8월 중순 오후였다. ~~~이 흑인 아이들의 수줍음은 나에게 할렘의 일면을 보여준 것이다. 할렘의 세부적 모습은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것이었지만 골자는 벌써 거기 있었다. 이 더위에 푹푹 찌는 빈민가에는 몇 십만의 흑인들이 가축처럼 떼 지어 살고 있다. 그중 대다수는 먹을 것도, 할 일도 전혀 없었다. 감정이 생생하고 정서적으로 깊이 반응하는 한 인종의 온갖 감각과 상상, 감수성과 정서, 슬픔과 욕구와 희망과 생각이, 좌절의 쇠사슬로 내면이 구속당한 그들을 덮칠 듯 내리누른다. 편견이 그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그들을 사방으로 에워싼다. 이 거대한 가마솥 속에서는 귀중한 자연적 재능 지혜, 사랑, 음악, 과학, 시가 짓밟히고 뭉개져, 근본적으로 부패된 본성의 앙금과 더불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도록 방치되어 있다. 몇 백만의 영혼이 비행과 비참과 퇴폐에 의해 파괴되고 비인간화되어 생존자 명단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할렘이여, 네 암흑의 도가니 속에서 마리화나와 진(술)과 광기와 히스테리와 매음이 삼켜버리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시와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 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은 파크에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다.
할렘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할리우드다. 할리우드는 할렘이 절망 속에서 유일하게 움켜쥐는 천국의 대리자다. 그중에도 가장 무서운 것은, 백인 문화는 할렘의 시궁창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지 않는 흑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백인문화가 썩어버린 협ㅈ바이요, 속이 텅 빈 가짜며 허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흑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흑인들은 이것을 좋아하고 원하는 척하며 얻으려고 애쓰는 저주스러운 운명을 살고 있다. 그 전체가 온통 처참한 음모 같다. 이처럼 흑인들은 실제 생활로써 백인 존재의 근본 뿌리를 부패케 한 비참을 뚜렷이 표상하도록 강박되고 잇는 것 같다.
할렘의 어린이들은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악을 불가피하게 목격하는 셋방에서 소금에 절여진 정어리처럼 한 덩어리가 되어 북적거리며 자라다 보니까 예닐곱 살이 되기도 전에 자연적 본능이 이지러진 변태 행위에 익숙하게 된다. 이 구역질나는 빈민굴이야말로 부자들의 죄의 산물이요, 부자들의 의젓하고 호사스러운 은밀한 음행과 색욕에 대한 고발이다.
메리 제르도가 초대해 주어서 나는 그날 밤 할렘에서 그들과 함께 남작 부인의 생일을 축하하며 식사를 같이 한 후 오락실에서 흑인 어린이들의 연극까지 구경했다.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뉴헤이번 열차는 철도 왼편으로 파란 강물과 색이 바랜 모래와 시든 풀밭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공업도시를 달렸다.
(3)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 돌아오니 대학 측은 양지바른 푸른 산비탈 골프장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북쪽편 방을 나에게 주었다. 방에 앉아 있으면 기차가 올리언 화물 집하장에서 하루 종일 경적을 울리며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여행의 소리요 유배지의 소리였다.
은총 면에서도 그해 10월에 큰 은혜를 받았다. 소화 테레사가 감상적인 노파들이 상상해 낸 말 못하는 작은 종교인형이 아니라, 참으로 성녀라는 R서을 발견한 것이다.
10월에 나는 아직도 캐나다에 머물고 있던 남작 부인에게 질문 투성이의 긴 편지들을 써 보냈고 부인의 정력적인 산 지혜가 가득 담긴 긴 답장들을 받았다. 확고한 격려로 충만한 이 답장들은 내게 매우 유익했다. “계속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계속 쓰세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기도하세요. 당신은 소생하여 하나님을 찾는 여정에 올랐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사게 될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할 일은, 외조부가 나를 위해 뉴욕 은행에 남겨둔 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으니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인 것 같았다. 이는,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은총을 청하면서 9일기도를 하기로 결심했을 무렵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9일기도 셋째 날 프란치스코회 허버트 신부가 내게, 남작 부인이 기차로 캐나다에서 돌아오는데 버팔로역까지 마중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오후 일찍 차를 타고 알레게이니 쪽으로 비스듬히 경사진 긴 고개를 넘어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부인은 신부들의 영성생활과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치유된 나환자 열 명 중 오직 한 사람만 그리스도께 감사하러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었다.
남작 부인은 할렘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면서 알려지지 않은 채 일하던 여성이었는데 이제는 그 일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봉사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녀가 사제와 신학생과 수도자들 가운데서 비공식적 사도직을 행하게 하고 있었다.
남작부인이 수도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수도자들이 갖고 잇지 못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울러 기도와 희생과 철두철미한 청빈을 통하여, 이들 두 신부가 의무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메마르고 인습적이고 순전히 학술적인 피정에서는 흔히 얻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충만했다.
부인은 앞좌석에 앉아서 모든 이에게 말하다가 불쑥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럼 톰, 언제 할렘에 오시겠어요?” 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얼떨떨했다.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것이 나에 대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이것이 아마 내가 줄곧 기도하며 찾던 대답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던져진 느닷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하다가 우선 글 쓰는 데 대한 말부터 꺼냈다. 할렘에 가느냐 한 가느냐 하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얼마만큼 글을 쓸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즉시 두 신부가 한꺼번에 끼어들어 조건을 붙이고 빠질 구멍을 터놓은 짓은 집어치우라고 말했다. :부인이 결정하도록 하시오.“ 하고 허버트 신부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당분간이나마 할렘에 갈 것 같은 눈치를 보였다. 남작 부인이 말했다. ”톰, 당신은 신부가 될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편지에 쓴 그런 것들을 묻는 사람들은 보통 신부가 되기를 원하던데....” 부인의 말은 나의 묵은 상처를 찌르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저한테는 사제 성소가 없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확정을 지었다. 1월에 학기가 끝난 다음 나는 ‘우정의 집’으로 가기로 되었다.
(4)
만일 제가 수도원에 들어간다면 트라피스트회를 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할렘에 가겠다는 내 결심에 어떤 영향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할렘에서 일하는 것이 나의 성소가 아니란 것이 확실해지면 수도원을 찾겠다는 생각이었다. ‘우정의 집으로 갔더니 주일날은 그들 전원이 리버사이드 드라이브에 있는 거룩한 아기 수도원에 모여 월례 피정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날 밤 수녀원을 떠나면서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둑어둑한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묵묵히 걷다가 헤어져서 나는 저지 시에서 기차를 집어타고 올리언으로 돌아왔다. 아무 사건 없이 사흘이 지나갔다. 11월 말이어서 해가 짧ㅇ느 탓인지 날이 일찍 어두웠다. 마침내 그 주간 목요일 저녁에 나는 갑자기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될 때가 왔다는 생생한 확신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는 것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하고 또렷한 것이었다.
필로테오 신부 방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용감히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으나 그의 방문 앞 1미터쯤 되는 거리까지 갔을 때 마치 누군가가 내 어깨를 꽉 붙잡아 세우는 것 같았다. 어떤 것이 내 의지를 꽉 눌렀다. 걸으려고 했으나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필시 마귀일지도 모른다 싶어 그 장애물을 떠밀어 보다가 되돌아서서 그곳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제발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상상 속에서, 한밤중에 높은 회색 탑에서 울려 나오던 겟세마니 수도원 종소리가 바로 앞 산 너머에서인 듯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 종소리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를 알려주어 마치 나를 집으로 부르는 것 같았다. 이 환상은 내게 결정을 내리게 하여, 나는 곧 르루드의 성모 경당을 지나 축구장을 삥 돌아서 수도원 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이제까지의 모든 의심과 주저와 의문이 사라지고 내가 속한 트라피스트회에 가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졌다.
안마당에 들어서 보니 필러테오 신부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실제로 창문마다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나는 낙심했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은 있었다. 나는 문 안에 들어가 곧바로 복도를 거쳐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공동방으로 향했다. 전에는 그 방문 근처에도 기본 적이 없었다. ~~~오직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필레테오 신부였다. 내가 말씀을 여쭐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것이 나의 고뇌, 내 주저의 마지막이었다. ~~~비이성적으로 보이겠지만, 그 순간에 마치 내 눈에서는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이제까지 내 모든 걱정과 의문이 얼마나 허황하고 부질없는 것이었던가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내가 수도 생활의 소명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에 관한 모든 의심은 대체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은 실재처럼 보였던 것일까? 우연한 사건과 상황이 내 정신 속에 있는 것들을 과장하여 왜곡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만사는 다시 똑바로 되었다. 그리고 벌써 내 앞에 곧고 깨끗한, 평탄한 길이 활짝 열려 있잠늠 느낌으로 내 안에는 평화와 확신이 충만하였다. 필로테오 신부는 단 한 가지만 질문했다. :확실히 트라피스트회 회원이 되고 싶습니까?“ ”신부님,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필로테오 신부의 얼굴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나는 쌀쌀한 진눈깨비 속에 뚫고 들어온 버팔로 행 열차에 올랐다. 이것으로 내가 살던 세상과 마지막 인연이 끊어졌다. 이것은 한 시민으로서 윤리적 죽음이었다.
[감미로운 자유의 맛]
수도원은 행복하게 되는 법을 하나님한테서 배우는 학교다.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의 행복과 무한한 자유와 완벽한 사랑의 완성에 참여하는 데 있다. 우선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창조된 인간 본성이 치유되어야 하고 사랑을 배워야 한다. 인간 본성의 치유와 사랑의 학습은 같은 것이다. 인간은 그의 자유 덕분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라는 것이 인간 본질의 핵심이고, 또한 이 자유의 행사는 사심 없는 하나님 사랑의 행사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초는 진리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 사랑을 주시려면 먼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거짓을 깨끗이 고쳐주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범죄로 형성된 자신을 미워하고 하나님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 새 영혼에 드러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전선과 완벽한 사랑의 거울이 된, 자기 자신의 정화된 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
마태오 수사가 내 등 뒤로 문을 닫아걸자 나는 새로운 자유의 울타리 속에 갇혔다.
(5)
동생은 빨리 세례성사를 받겠다고 했다. 나는 원장 신부님 방으로 갔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9월은 우리 수도원 설립 300주년이 되는 때여서 모든 젊은 수도자가 죽은 이를 위한 시편을 열 차례씩 바쳤다.
1943년에 접어들자, 시간은 더욱 빨리 흘러 어느새 사순절이 되었다. ~~~원장님은 내 동생 폴 머튼이 4월 17일 작전 중에 실종되었다는 전보를 읽어주었다. ~~다음에는 마침내 존 폴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왔다.
[후기]
[고독하고 가난한 이의 묵상]
(1)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시편19:3) 구름은 흐른다. 계절은 느린 듯하면서도 제 질서를 따라 숲과 들판 위를 스쳐 지나가고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이 흘러갔다.
6월의 뙤약볕 속에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성령을 쏟아 부으시는가 싶더니,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헛간 뜰에 서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있고, 어느덧 시월 그믐의 싸늘한 바람이 앙상한 숲을 휩쓸고 넘어와 뼛속까지 파고든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성탄 시기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다.
(4)
관상은 활동을 중지하고 신비스러운 내적 고독으로 물러나 쉼을 뜻한다. 이 내적 고독 속에서 영혼은 하나님의 무한히 창조적인 침묵 속에 흡수되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창조적 사랑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에 이르는 비결을 다소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지한다면 불완전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 따르면, 관상에 도달하되 하나님에 대해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랑으로 넘쳐흐르지 않은 영혼은 비교적 약한 영혼이라고 했다.
어떤 의미로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 우리는 현세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소유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빛 속에 도착하여 그 안에 살고 있다.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제 발목에 뉴욕의 절반을 족쇄처럼 잡아 묶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마음은 모래톱처럼 소란을 피우면서 기둥 뒤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관상입니까?
※ 이하 전문(全文)
서원 후 몇 달이 지났는데도 당신은 이 소망을 조금도 줄여주시지 않았지만 평화를 주셨기에 저는 제 안에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를 여기에 부르신 것은 제게 특정 범주에 속하는 사람으로 자처할 수 있는 꼬리표를 달아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제가 스스로 누구인가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제가 아무것도 사색하지 말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은 저를 사색의 수준 위로 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왜 있는지를 언제나 알아내려고 한다면, 수도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수도 생활을 큰 연극으로 꾸미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모든 것을 원하셨으므로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저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을 일절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뒤로 버티고 서서 저한테서 당신께로 어떤 것이 건너간 것처럼 생각한다면, 저는 불가불 당신과 저 사이의 간격을 보게 될 것이고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의 하나님, 저를 죽이는 것이 바로 그 간격, 그 거리입니다. 이것이 제가 고독을 바라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피조물들은 당신과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모든 피조물과, 피조물에 관한 지식에 대해 죽은 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은 피조물 속에 계시지만 세상 만물을 초월하신 분임을 피조물이 제게 가르쳐 줍니다. 당신이 우주만물을 만드셨고 당신 현존이 그것들을 살게 하시는데 그것들은 저한데 당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것들을 벗어나 홀로 살렵니다. 오, 복된 고독이여!
제가 그것들을 떠나야만 비로소 당신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당신이 저를 그것들 속에 머물러 있도록 처벌하시는 것처럼 보였을 때 제가 그렇게도 불행했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제 슬픔은 지나가고 기쁨이 시작되려 합니다. 가장 깊은 슬픔 가운데 용약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제가 이제 깨닫기 시작하는 까닭입니다. 당신이 저를 가르치고 위로해 주셨기에 저는 또다시 희망하고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네가 바라는 것을 주리라. 나는 너를 고독으로 인도하리라. 나는 가장 바른 길을 원하는 까닭에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로 너를 인도하리라. 그러므로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너를 거슬러 싸우고 거부하며 때리고 괴롭힘으로써 너를 고독으로 쫓아낼 것이다. 그것들이 너를 미워하는 까닭에 나는 머지않아 홀로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너를 저버리고 배척하여 추방할 것이요. 그러면 너는 홀로 되리라.
네가 만지는 온갖 것이 너를 태울 것인즉 너는 아파서 손을 뗄 것이요, 결국 만물에서 물러서고 홀로되리라. 소망할 수 있는 온갖 것이 너에게 불의 소인을 찍을 것이니 너는 아파서 이것들 한테서 도망쳐 홀로 되리라. 무릇 피조물의 기쁨은 너에게 오직 고통일 따름이리니 너는 온갖 기쁨에 죽어 홀로 되리라. 사람들이 사랑하고 바라고 찾는 좋은 것들이 너한테는 네가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에서 단절시키는 살해자가 될 따름이리라.
네가 칭찬을 받으면 화형에 처형되는 것 같으리라. 네가 사랑을 받으면 네 마음이 상처를 입어 사막으로 도망치리라. 네가 선물을 받으면 그 부담 때문에 짓눌리리라. 네가 기도의 즐거움을 누리면 네 마음이 병들 것인즉 너는 그것을 피해 도망가리라. 네가 조금이나마 칭찬이나 사랑을 받으면, 나는 너의 모든 선물과 사랑과 칭찬을 빼앗을 터인즉, 너는 온전히 망각되고 버려져 배착 받고 죽은 허무가 되리라. 그러면 그날 비로소 네가 그다지도 오래도록 소망해온 고독을 차지하리라. 그리고 너의 고독이 네가 이 지상에서 결코 만나보지 못할 사람들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
그것이 언제인지 어디서인지 어떻게 되는지 묻지 마라. 산 위에서인지, 감옥에서인지, 사막에서인지, 포로수용소에서인지, 병원에서인지, 겟세마니에서인지 묻지 마라. 그런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네게 일러주지 않을 터인즉 묻지 마라. 네가 그 안에 있을 때까지 너는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너는 나의 고뇌와 가난의 참고독을 맛보리니, 나는 너를 내 기쁨의 높은 자리로 인도하리라. 그러면 너는 내 안에서 죽어 내 자비로 노든 것을 발견하리라. 나의 자비가 이 목적을 위해 너를 창조하여 너를 프라드에서 버뮤다로, 생탕토냉으로, 오컴으로, 런던으로, 케임브리지로, 로마로, 뉴욕으로, 컬럼비아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성당으로, 성 보나벤투라 대학으로,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수고하는 가난한 이들의 시토 수도원으로 데리고 왔느니라.
네가 나의 형제가 되어 불에 탄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알아 모시기를 배우도록.
“책은 끝났으되 탐구는 끝나지 않았노라.”
[Review]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사건이다.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철저하게 분리되어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은혜의 사건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어떤 동기가 필요하다. 성경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히브리 민족,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상기시키면서 핍박받는 민족의 서러움을 상기시키셨다. (출2장)
이 책은 미국 켄터키주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 사제인 ‘토머스 머튼’(1915년 ~ 1968)의 자서전이다. 그러나 이 책 속에는 단순한 인생 기록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의문과 영혼의 내용이 들어 있으며, 8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이다.
저자는 영국 태생이지만 모친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영국에서 그리고 후에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며 옥스퍼드대학에서 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를 수학했다. 여섯 살 때 퀘이커 교도였던 모친을 여의고, 화가로 또 교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동분서주하는 활동적인 아버지로 인해 유년기와 청소년기에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경험을 했다. 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의 처음 만남은 로마에서 폐허의 옛 성당에서 본 벽화였다.
“암청색 하늘을 배경으로 심판하러 오시는 그리스도의 발치에 구름이 점점이 있고 그 구름 속에 불이 엿보이는 모자이크였다. 이 모자이크를 발견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로마 제국의 멋도 없고 음탕하고 시시한 조각품들이 판을 쳤던 이곳에 영적 생명력과 진실성과 힘이 충만한 천재적 예술, 진지하고 생동감에 넘치며 웅변적이고 힘차 보이는 이 예술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러면서도 과장도 꾸밈도 속임수도 없었다.”(본문)
그 후에 수없이 반복되는 종교적 회의와 개신교, 가톨릭 사이에서 방황하며 갈등을 경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스물여섯 살에 뉴욕 올리언 성 보나벤투라 대학 영문학 교수를 사임하고 가톨릭에서도 더욱 엄격한 규율이 요구되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 입회했다.
수도원에서 쓴 이 자서전은 1948년 ‘칠층산’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순식간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20세기판 성 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론>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이 책이 기독교인들에게는 한 개인을 향한 구원의 길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계획과 간섭과 일하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참고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트라피스트‘ 회원은 85개 수도원에 약 4,300명 정도로 추산되며 우리나라에도 경상남도 창원에 소규모 인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저한 묵언수행 규율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인터넷에’유기농 잼‘ 광고를 통해 알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본문)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개념이 형성된 것은 로마에서였다. 지금은 나의 하나님이요 임금으로 계시면서 내 삶을 차지하고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로마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영혼은 그 자체의 수준에서는 완성될 수 없고, 오직 인간 능력을 무한히 초월한 수준의 하나님에 의해서만 완성되도록 조성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인간이 순수한 자연 생명만을 이어가도록 운명 지워져 있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자연적 행복만을 지향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인 인간 본성은 또 하나의 거저 주시는 은혜, 곧 성화 은총에 따라 완성되어야 한다.”
“1939년 8월 하순은 누구에게나 지긋지긋한 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다 날마다 불길해지는 유럽 뉴스가 겹쳐 극도로 불쾌한 나날이었다. 급기야 본격적 전쟁이 터질 모양이었다. ”
“마룻바닥에 앉아 레코드판을 들으면서 사온 것들을 먹고 있을 때 느닷없이 사제나 될까 보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당신의 내 생활이 무위한 것이기는 했어도 그렇다고 살기가 싫증나고 귀찮아서 그 반작용으로 그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레코드음악 때문도 아니고 가늘 날씨 때문도 아니었다. 내 안에 갑자기 심어져 자라난 이 확신은 병적으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정서적 욕구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양심의 차원에 속한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새롭고도 깊은 명확한 의식이었다.”
“어느날 나는 6개월 정도 느껴온 평화가 갑자기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내가 살던 에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에덴 담 밖으로 쫓겨났다. 에덴 문을 다시 찾을 수 없도록 불 칼이 문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간에 나는 또다시 알몸으로, 외톨이로 추운 바깥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수도회에 들어갈 내게서 모든 것이, 특히 성소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란치스코회 회원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가 되겠다는 소망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소망은 차디찬 고독의 암흑 속으로 추방되자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 소망만이 실제로 유일하게 남아 나를 감싸주고 따뜻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소망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내 마음속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몰아쳐 나온 갑작스런 절망과 대조되어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위안이랄 것 도 못 되었다."
"정말로 내게 성소가 있는가 하는 고뇌에 찬 의문과 함께 갑자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맞닥뜨려지자 수도회에 입회하고 싶은 소망이 결코 위안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내가 누구이며, 누구였던가를 회상했다. 그리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 9월 이래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에 적잖이 놀랐다.“p606
“10월에 나는 아직도 캐나다에 머물고 있던 남작 부인에게 질문 투성이의 긴 편지들을 써 보냈고 부인의 정력적인 산 지혜가 가득 담긴 긴 답장들을 받았다. 확고한 격려로 충만한 이 답장들은 내게 매우 유익했다. “계속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계속 쓰세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기도하세요. 당신은 소생하여 하나님을 찾는 여정에 올랐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팔아 값진 진주를 사게 될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P722
“마침내 그 주간 목요일 저녁에 나는 갑자기 트라피스트회 수도자가 될 때가 왔다는 생생한 확신을 느꼈다.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아는 것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저항할 수 없이 강력하고 또렷한 것이었다.” p737
“오직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필레테오 신부였다. 내가 말씀을 여쭐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나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갔다. 이것이 나의 고뇌, 내 주저의 마지막이었다.” p741
“나는 쌀쌀한 진눈깨비 속에 뚫고 들어온 버팔로 행 열차에 올랐다. 이것으로 내가 살던 세상과 마지막 인연이 끊어졌다. 이것은 한 시민으로서 윤리적 죽음이었다.” p748
“어떤 의미로 우리는 언제나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행은 목적지를 알 수 없는 긴 여행이다. 다른 의미로 우리는 이미 도착했다. 우리는 현세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소유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둠 속에 여행하고 있다. 그러나 은총에 의해 하나님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빛 속에 도착하여 그 안에 살고 있다. ”
“당신은 저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제 발목에 뉴욕의 절반을 족쇄처럼 잡아 묶으셨습니다. 당신은 저로 하여금 마음은 모래톱처럼 소란을 피우면서 기둥 뒤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관상입니까?”
“당신이 저에게 모든 것을 원하셨으므로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과 저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을 일절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뒤로 버티고 서서 저한테서 당신께로 어떤 것이 건너간 것처럼 생각한다면, 저는 불가불 당신과 저 사이의 간격을 보게 될 것이고 거리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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