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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바로 위이며 부안초등학교 44회, 고창북중학교 9회졸업생으로 2년 선배가 되는누나가
2015년 11월 20일 귀향을 했다. 나도 같은차에 동승을 해서 같이 귀향을 했고 돌아올 때는 누나를 남기고 상경을 했다.예전 같으면 친숙한 얼굴이라도 대할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귀향을 했겠지만 이번 귀향은 하나 밖에 없는 누나의 마지막 귀향으로 누나가 권사로 임직을 맡았던 목동에 있는교회 신자들과 성가대원들의 애도와 추모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싸늘히 식어버린 누나의 시신을 안치한 장의사 차를 타고 마지막으로 귀향을 하는 슬픈 귀향이었다.
지난 월요일인 11월 16일 오후에 누나의 유일한 아들이며 카투샤로 근무중인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나의 몸이 아퍼서 병원에 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목동에 있는 이대목동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한다고 했다. 진찰을 받으니 내부장기 여러부위가 손상을 입어 입원치료가 필요한데 이대병원에는 입원실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큰 딸애가 근무하는 병원에 내과 병동에 입원실이 여유가 있다고 해서 그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 왔다.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했는데 밤에 다시 연락이 오기를 다시 열이 나고 얼굴과 복부가 붓는 등 증상이 악화되고 병웡에서는 감염병이 의심이 된다는소견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촌동생이 감염내과 과장으로 근무하는 병원으로 전원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일인17일 오전에 그래도 30년 이상의 임상간호사 경력이 있는 집사람이 서울에 올라가기로 하고 고속버스를 예매했다. 다음날인 17일 다시 전화가 오기를 감염병의 소견은 보이지 않는데 원인은 모르겠지만 퍠혈증의 증상이 보인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큰 병원인 서울대 병원으로 후송을해야하는데 이송중 위험이 생길지도 모른다는말을 하더라고 한다 .그래서 급작스레 예정이 바뀌어 온가족이 상경하기로 하고 강남행 고속버스를타고 강남 터미날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타고 혜화역에서 내리려 하였으나 동작이 느린 덕분에혜화동 역을 놓치고 다음역인 한성대 입구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서울대병원 본관 3층으로 가니 조카가 내과계 중환자실 앞에있고 자형도 침통한 표정으로 복도 의자에 있고 셋째 고모의 얼굴도 보였다. 면회는 여러사람이 한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환자당 가족이 두명씩 교대로 면회를하게 되어 있었다. 면회 표찰을 받아 목에 걸고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하고 중환자실에 들어가니 격리 병실에서 투석중인 누나를 볼수 있었는데 수면제를 투여하여 깊은 수면에 빠졌는지 의식이 없었다. 얼굴은 상당히 부어 있었고 눈꺼풀에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꺼풀에 피하 출혈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모니터 상의 바이탈(혈압과 맥박, 호흡)은 안정되어 보였다. 면회시간도 끝났고 병원에 있어봐야 마땅히 할일도 없어서 택시를 타고 오류동 딸집으로 와서 잠을 청했고 꽤 단잠을 잔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병원으로 가기위해 준비를 하는 도중에 전화가 오기를 누나의 상태가 갑자기 심각해졌다고 연락이 와서 정신없이 대충 씻고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에 다시 연락이 오기를 심장이 정지되어 심장맛사지를 한다고 한다. 제발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병원으로 가는데 다시 전화가 왔다. 2015년11월 18일 오전 10시 30분에 공식적으로 최종 선고를 했다고 한다. 병원으로가서 내과계 중환자실에가니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누나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얼굴은 많이 부었고 얼굴의 색갈이 조금변한 것 외에는 마치 잠을 자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장례를 위해 영안실과 장례식장을 알아보니 서울대 병원에는 자리가 없다기에 누나집과 평소 다니던 교회와도 가깝고 오랜동안 누나가 입원실 도서대여 봉사활동을 했던 이대 목동병원에 알아보니 그곳에 자리가 있어서 장례식을 이대목동병원에서 치루기로하고 운구를 하려니 아직 여러가지 절차(사망진단서 발급과 치료비 정산 등)이)가 남아 있어서 우리 가족은 먼저 택시 편으로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으로 이동을하고 거기에서 운구를 기다리기로 했다.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어 세시가 지나서야 누나의 시신이 운구되어 왔다. 누나의 시신은 안치실로 운구되었고 빈소는 지하 2층 11호 빈객실에 차려졌지만 아직 영정사진도 준비되지 않았고 1층 로비의 안내판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래도 음식 주문 등 나름 준비를 시작했다. 누나가 권사로 임직하던 교회에서 같은 직분을 가졌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도 몇분 오셔서 장례준비를 거들며 오늘 수요 예배시간에 누나의 소천을 공고하게 될것이니 그때부터 교회에서 조문객들이 많이 올거라고 말씀하셨다. 다행히 몇년 전에 교회에서 권사 임직식을 할 당시에 찍은 사진을구해서 확대해서 영정사진으로 안치를하고 기독교식 장례를 하기로 해서 빈소에 재배를 하기보다는 헌화를 하고 묵념으로 하기로 해서 헌화에 사용할 하얀색 국화꽃도 준비를 했다.
상주인 조카가 먼저 헌화를 하고 두번째로 자형이 세번째로 나와 동생이 헌화를 하고 조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조문객이 한산했다. 그러다가 8시가 조금지나 교회 수요예배가 끝난 시간이되자 교회에서 조문객이 오기 시작했다. 미쳐 빈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빈소 앞 복도와 로비에서 기도를하고 돌아가시는 신자들도 많아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누나가 참 잘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권사로 성가대로 그리고 예배후 커피 봉사자로 거의 5년 가까이 봉사를 했고 특히 신자들의 상사에 봉사자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의 모든 신자들이 조문을 온것 같았다. 밤 열시가 지나고 열 한시가 지나자 조문객의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일을 대비해서 오류동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오기로하고 택시를 타고 오류동으로 와서 바로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하게 고양이 세수를 하고 4명이 택시를 타고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6시 정도에 도착을 해서 11호 실에 들어가보니 조카와 동생이 이곳 저곳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누룽지로 아침을 먹고 오늘의 일정을 살펴보니 13시 30분에 입관 절차가 있고 15시 30분에 교회 목사님의 주재로 입관예배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전 중에는조문객이 많지 않아 조금 한가한 시간을 보낼수있었다. 11시 정도에 아버지가 장례식장에 오셨다. 원래는 그렇지 않아도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신 아바지에게는 누나의 소천을 감추려 했으나 언제까지 감출수는 없는 일이고 나중에 알게되면 더 큰 충격을 받으실것 같아 차라리 여러 친지 들이 있을 때 알리면 충격을 받더라도 여러 사람이 함께라면 더 낳을 것 같아 알리기로 했다. 막상 아버지는 누나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오후 한시 반이 조금 못되어 영안실직원이 와서 입관예절이 시작되니 유족들은 안치실로 가서 참관을 하고 고별의 시간을 가지라고 해서 아버지를 모시고 안치실로 가니 염습을 한다고 상주인 조카와 배우자인 자형만 안치실로 들어오고 나머지 유족은 참관실에서 대기하라고 해서 30분 정도 대기를 하니 염습의 철차가 끝났으니 나마지 유족도 안치실로 들어오라고 통보를 해서 들어가보니 삼베 수의를 입고 반듯한 자세로 누운 누나를 대할수 있었다. 얼굴의 부기가 가시지 않아 평상시보다 더 커보였고 혈색을 잃어 약간 파리해지 것을 제외하고는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
는 누나를 보니 그동안 참았던 설움과 눈물이 복받쳐서 한동안 소리를 내어 통곡을 했다.
누나인 장영란은 1956년 2월21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상오부락(일명 애미똥) 180번지에서 아버지 흥덕 張씨 東자 錫자와 어머니 안동 權씨 玉자 信자 사이에 2남 1녀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그 뒤로 2년 후인 1958년 1월 11일 서울에서 장남인 나 장무열이 태어 났고 또 두해 후인 1960년 1월10일 오산리에서 남동생 장경열이 태어 났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나 장무열의 두돌을 하루 앞두고 떡을 만들기 위해 쌀을 담구고 떡방아를 찧으려 하다가 산통을 느껴서 동생을 낳았다고 한다.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미쳐 가시지 않았고 극도로 경기가 불안하고 직장을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 였다고 한다.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아버지도 당시 불황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고 실업자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당시 우리 집은 영등포 역우측 100여미터 정도에 있는 한전 영등포지점 부근에서 살았는데 궁여지책으로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숫기가 없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버지는 손님이 와도 앞에 나서서 장사를 하는데 아주 서툴렀다고 한다. 결국은 가게 운영과 생계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가운데도 두 분의 금슬은 좋았고 자식 욕심이 많으셨는지 어머니는 또 아이를 가졌고 해산달이 되어 분만을 하기 위해 영등포 로타리 부근의 개인 산부인과에서 분만을 하는데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까지도 쌍생아라는 사실을 병원 측에서 몰랐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쌍생아라는 사실을 발견한 분만실 간호사가 놀라서 “어머나! 또 있네!”하고 무의식 중에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놀라 혈압이 급상승하여 경국 숨을 거두게 되었고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의 시신을 업고 영등포 시립병원까지 걸어가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소용이 없이 결국 어머니는 회생을 하시지 못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모와 이모 외삼촌 들이 모인 가운데 장례를 치루고 매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기억에 남은 것은 산에 갈 때 내가 부산 이모부가 안고 갔으며 엄마를 찾는 나에게 엄마가 저기 멀리 갔다고 대답하며 슬프게 우시는 것을 보고 왜 우실까 하고 궁금해 했던 기억과 몇일 후 고모가 어머니의 유품(피가 묻은 옷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됨)을 챙겨 여의도와 영등포사이 샛강의 모래사장에서 소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후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오산으로 와서 할아버지 댁에서 자랐다.
누나는 나와는 불과 2살 터울이지만 너무 어린나이에 철이 들어서 52년의 세월을 가녀린 어깨에 나이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7살때 어머니기 돌아가시고 두살 아래 5살인 나와 3살인 동생 경열이를 챙기느라 그때부터 이른 나이에 철이 들어서 두 동생의 누나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어떤 때는 고모같이 어떤 때는 이모같이 더 나가서는 엄마의 역할까지를 수행하느라 여린 어께에 무거운 짐을 벗지 못하고 살아왔다. 1967년 내가 부안초등학교4학년이니 누나는 부안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시기에 교내음악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무렵에 부안초등학교 교문좌측에 있는 강당이 완공되어 그곳에서 대회가 열리고 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강당ㄷ앞쪽에 있는 단상좌우의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누나가 찾아와 부르기에 나가보니 손에 작은 백색 알사탕을 두개 쥐어주고 돌아갔다.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를 부르기 전에 생달걀을 먹으면 소리가 더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가정형편이 좋은 아이는 생달걀을 깨어먹기도 했다. 누나도 어디에선가 들은 것 같았지만 그 당시 누나의 상황에서 귀한 달걀을 구하기는 어려워서 달콤한 사탕도 그와 비슷한 효능이 있다고 사탕을 구해서 내손에 쥐어주고 간 것이었다. 물론 누나라고 사탕이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였겠지만 그래도 동생이 음악경연대회에서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먹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내손에 쥐어주고 간것이었다. 그 알사탕의 효능인지 누나의 바람덕분인지 그 대회에서 나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나를 맞아주는 누나의 그 환한 웃음은 오랬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속이 깊고 다정다감했던 누나가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나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누워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도 않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하지만 누나가 작은 목관에 들어가는 장면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어서 심약하신 아버지를 부축하여 안치실을 나오고 말았다. 지금은 입관을 하고 관덮개를 못으로 박는것 같지 않지만 예전에 입관 후에 관 뚜껑을 박는 망치 소리가 못으로 관을 박는게 아니라 내가슴에 대못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큰 외삼촌의 큰아들인 영목형과 넷째 아들인 권영섭ㅁㄱ사가조문을 다녀 갔다.. 예정된 세시 반에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몇분과 신자들이 거 가의 50여명이 오셔서 빈소에서 입관 예배를 보았다. 예배가 끝나고 4시가 조금 지나서 중국 상해로 출장을 가셨던 작은 아버지가 인천공항에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오셨다. 누나를 어릴때부터 유난히 귀여워 하셨던 작은 아버지의 오열도 새로운 설움을 북받치게 했다. 작은 아버지는 순천 집에 들렸다가 내일 아침에고창군 부안면 상등리에 있는 선산으로 가서 막내고모부와 같이 산역을 점검하신다고 내려가셨다 오늘도 교회 신자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져 거의 모든 신자들이 오신것 같았다. 오산에서 같이 자란 친구도 몇분오셔서 조문을 했고큰외삼촌의 큰아들인 영목이 형과 동생인 네째아들 영섭이도 조문을 왔다. 내일 아침에 발인을 해서 교회에 가서 영결예배를 보고 장의사 버스와 교회버스 2대에 분승하여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 선운사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상등리 소재 선산에 안장을 하기로 해서 오류동 집에 다녀올 여가가 없어 그냥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세우기로 헸다. 다행히 식장측에서 잠을 잘수 있는 족실을 두실을 배정해 주기로 했다. 12시가 지나 조문객의 발길이 끊어진 시간에 자형과 내가 가족실 1호실에 들어가 눕자마자 잠에 떨어졌다.
잠을자 다가 눈을 떠서 주위를 살펴보니 침대 머리맡에 시계로 보이는 물체가 어둠속에 어렴풋이 보이는데 시간을 알기 위해 자세하게 살펴보니 아침 7시 15분을 가르키는 것 같았다. 8시 반에 장례식장에서 발인하여 교회에서 영결예배를 보려면 너무 늦잠을 잔 것이 었다 놀라서 더듬더듬 전등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보니 시계가 아니라 금연 표시였다 그 아래 걸려 있는 시계를 보니 이제 5시 15분이었다. 안심을 하고 잠시 누웠다가 6시 정도에 자리에서 일어나 빈소로 찾아가니 경열이 큰 아들이며 다음 세대의 대장인 재현이가 영정사진 앞에서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거의 밤을 새워 울어서 주변에서 잠을 한숨도 못잤다고 볼멘소리가 대단했다. 누룽지에 밥을 한술 말아서 아침을 요기하고 정산을 하고 남은 음료수 등을 반납을 하고 장지로 가지고 갈 꽃바구니와 하관후에 뿌릴 국화 꽃 술 등을 모두 챙겨 장의사 차에 실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는 거의 500명이 넘는 신자들과 가운을 입은 성가대등이 교회 대예배당을 거의 가득채우고 있었다. 다시 한번 누나가 세상을 잘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결예배에 소요될 시간을 한 시간정도로 예상을 했으나 헌화에 참여한 신자들의 행열이 계속이어져 정해진 시간보다 상당한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모든 영결 예배와 헌화의 시간이 끝나고 두대의 버스에 분승하여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 소재 선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두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었고 작은아버지와 막내 고모부가 직접 진두지휘하여 포크레인을 이용하여 매장할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목사님의 주재로 하관예배를 마치고 작은 아버지와 고모부 그리고 동생 경열이는 남아서 마무리 짓는 것을 보기로하고 교인들과 우리 가족과 상주인 조카와 자형은 미리예약한 식당에서 늦은점심을 먹고 상경을 하기로 해서 거의 4시가 다된 시간에 누나를 남기고 부안면을 출발하여 목동이대병원에8시가 지난 시간에야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헤어지자는 자형의 말씀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택시 편으로 오류동 딸집으로 왔지만 아직도 그저 멍한 기분이 들 뿐 누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실감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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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열 친구가 한동안 조용하더니 어머니 같은 누님의 마지막 귀향을 동행하고 갑작스런 슬픔을 진정시키느라 수고 많았겠다.
누님께서 무엇이 그리 급해서 천국으로 빨리 가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삶을 아름답게 사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슬픈일이네 나도자네누나를
어렴푸시기억이 난다
하오산 이난효누나와 같은동창이셨지 예쁘기도하셨고.......
천국에서 기뻐하실거네
무열친구 참 큰일을 당했네요 너무나 안타까운일이 있었는데 ! 얼마나 가슴아팠을 무열친구 생각하니 내마음도 저려오네요 영란언니 하얀피부에 넓다란이마가 머릿속에 환한데 벌써 가셨다니 믿을수없어요 힘내시고 건강차리고 밝은맘으로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누나와이별은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 한구석에 응어리가 맺혀있는 슬픈 일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59년의 길지 않은 생애중 52년 동안 허덕이며 지고살았던 무거운 짐응 벗고 홀가분하게 왼쪽에 52년전 7살에 헤어진 그리운 어머니와 오른쪽에 먼저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 그 동안의 수고를 보상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네요. 여러 친구들의 따뜻한 위로의 댓글 고마워요.
나도 영란이 언니기억이 또렷한데... 참하고 할아버지를 닮아 (난 아버지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지긋하시고 점잖으신 어른이셨다... 기억에 한복두루마리 입으시고 교회 다니셨어....)
콧날이 오똑하고 미소가 사랑스런 여자였었지.. 부산으로 시집보냈다고 하던데 맞는지... 처음 누나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려서 뭐라 말할 수 없더라고~! 이제야 사연을 듣고 무열이 남매한테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다니 맏기지 않아...그만큼 무열인 당당하고 밝았으니까~! 아마도 엄마같은 누나가 있어서 그랬을거야... 할아버지도 자애로우신 분으로 기억해~!
그 예쁜 누나가 더이상 볼수 없다니 ....마음이 아프네~!
11월 26일 상등리 소재 무열 친구네 가족 장지...
가장 오른쪽에 새로 조성된 묘가 무열 친구의 누나가 잠들어 있는 곳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