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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8, 한신대 신대원 채플 설교
"자기를 넘어서"
창세기 45, 1- 8 ; 마가복음 7, 24- 30
한 문 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저를 불러주셔서 여러분 앞에 서니, 아직 가슴이 떨려야 할 나이인데 다리가 떨리네요. 사생회에서 어쩌다가 저를 불러 주셨나 하고 보았더니, 오늘 사생회장 박재현 원우님과 부사생회장 김도현 원우님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 분들은 저와 함께 축구를 같이하는 전도사님들입니다. 아마 함께 공을 차는 인연으로 저를 불러 주신 것 아닌가 합니다. 목회하는 제 후배, 동료, 선배 목사님들 중에 열심히 “공”을 차고, “산”에 오르시는 분들을 제가 “공산당”이라고 놀렸는데, 저도 열심히 공을 찹니다. 아무튼 여러분 반갑습니다.)
[러셀의 오해]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붓다나 소크라테스보다 낮게 평가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사람들을 양편으로 가르고 한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사실이나(41절), 돼지 떼를 갈릴리 호수에 몰살시킨 사건(마태 8:28-34), 또 무화가 나무의 철이 아니었음에도, 자신이 배고픈데 열매가 없다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 사건(마가 11:12-14) 등을 언급하면서 예수는 잔인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성서의 모든 사건을 문자 그대로 믿다 보면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지닌 상징성이나 문학기법, 성서 이야기가 형성된 과정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서 안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마가의 본문 또한 우리로써는 참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예수님과는 사뭇 다른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배운 것 없어, 근근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 들려 고통당하는 어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여인의 간청을 냉정한 말로 거절합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말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정말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마가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요? 이 말은 복음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습니다. 예수의 이 말은 우리들에게 걸림돌이며 쉽게 납득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에 대한 신뢰를 일거에 무너트릴 수 있는 이 말을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마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 본문을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꼼꼼히 살펴볼 생각입니다. 탐정이 다양한 추측과 추론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 가듯이, 또 상상력을 통해 당시 사건의 현장으로 건너가서 오늘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정들을 들추어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 전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그래서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고백하기에 예수님은 죄도 없고 흠도 없는 완벽한 분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니케아 신경이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살을 가지신 분, 참 인간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이 말하는 그 깊은 뜻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참 인간됨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인 우리들의 성숙에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모시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 버리는 것은 신앙인의 주체적인 삶을 방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들면서 본인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행하지 않는 모순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도 예수를 따르려 하지 않고, 예수를 마치 우상처럼 숭배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마가복음 본문으로 들어가 보지요.
[예수님! 왜 그러셨나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따질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함으로써, 아픈 아이를 살리려는 엄마를 모욕하고, 그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도록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두로에 간 이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 계시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병자의 치유(6:53-56),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의 논쟁(7:1-23)으로 몸과 마음은 지쳐있을 때로 지쳐 있던 때였습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 쉬고 싶었는데 그래서 유대 땅도 아닌 이방 땅까지 갔는데, 웬 이방여자가 찾아 왔으니, 혹시 예수님이 짜증이 났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개나 다른 가축에 앞서서 자녀들을 먹여야 한다.” 식량이 늘 부족한 고대 사회에서 이 말은 지중해 연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던 격언이고 속담이었습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잘 판단하여 선택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 말을 인용하여 여인을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속담이지만 이 상황에서 유대인 남성인 예수의 발설은 이방인 여성에게 완전 모욕적인 말이었고, 사실 이 정도면 여자는 욕을 하고 떠날 테고 어쩌면 예수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아무도 모르게 쉴 수 있는 때와 장소를 확보했겠지요.
그러나 마가복음서를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예수님의 이런 변명은 통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어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피신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많은 군중이 그 사실을 알고 예수 일행의 일정과는 상관없이 그곳에 찾아왔었지요. 그 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가르침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빵으로 5천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었습니다.(6:30-44). 그 때도 피곤한 것은 마찬가지였고,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을 간 것도 동일했는데 그 때는 그렇게 기적을 베풀고 이번에는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유대사람들이 몰려 왔으니까 그런 것이고 지금은 헬라 여자가 오니까 다르게 반응하신 건가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을 때 회당장이 당신께 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을 때는 군말 않고 가시더니(5:21-23), 이번에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여자가 오니까 그녀의 간곡한 요청을 안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개라고 모욕까지 하시다니요! 그 여자도 예수, 당신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예수님,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내가 지금은 피곤하니 쉬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든지, 다음에 약속을 잡자고 하시긴 어려웠나요? 이 쯤 되면 예수님은 더 이상 변명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네 복잡한 삶의 터전에서 만들어지는 우리의 한계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사건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장소와 예수를 찾아온 여인의 출신, 그리고 몇 단어들이 또 다른 암시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여인은 시로페니키아 출신의 헬라인 여자였습니다. 시리아 페니키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리보-페니키아와 쌍벽을 이루는 지역으로써 고대부터 해상왕국으로 이름을 날렸던 곳입니다. 두로는 원래 지중해 연안에 불쑥 튀어나온 섬 위의 항구인데, 페니키아 성읍들 가운데 가장 강한 성읍으로 주전 2,700년경에 세워졌습니다. 두로는 그 위치 때문에 난공불락의 ‘요새 성읍’으로 통했습니다.(삼하 24:7 참조).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13년 동안 에워싸고도 정복하지는 못했고(겔 29:18-20 참조). 알렉산더 대왕은 육지에서 섬까지 배에다가 흙을 잔뜩 싣고 와서 길이 800미터, 폭이 60미터에 가까운 제방을 쌓아 본토와 연결시킨 뒤 일곱 달 만에 두로를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두로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 여성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두로 본토에 삽니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점령하여 헬라의 문화가 풍미했을 때 그것들을 익힌 교양이 풍부한 상류계층의 여성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아이가 침대에 누워 있고”라고 번역된 “침대”는 헬라어로 “클리네 κλινη”입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이불이나 들 것들은 모두 임시용으로 겉옷도 되었다가 보자기도 되었다가 밤에는 펼치고 덮고 자는 것이라면, 여기 나오는 침대는 머리받침대(headrest)가 있는 4각식 침대입니다. 로마나 상류계급 저택의 식당에는 청동이나 대리석으로 만든 호화스러운 이 침대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 침대를 때로는 소파용으로도 사용했고, 음식을 먹거나 독서를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아이가 누워있는 침대는 아마도 고급스런 제품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여성은 오래도록 강대국으로 있었던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헬라 문화를 익힌 이로써의 우월감, 그리고 뭐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풍족함 속에서 일상을 보내며, 그렇지 못한 이들을 얕보면서, 다른 민족은 미개한 족속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 계층이었습니까? 역사적 예수를 소개하는 복음서의 모든 본문은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였거나 예수도 목수였을 것이라 말합니다. 목수 예수를 오늘날 고급 옷장을 만드는 대목(大木)이나, 또는 황제의 수레를 만드는 기술자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아마도 예수는 일용직 노동자였을 것입니다. 소작농이거나 아니면 아주 적은 땅으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가 되면 나사렛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세포리스 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근로를 하던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신도시는 헬라식이었습니다.
요엘서 3장 4-6절에 따르면 두로는 유다인들이나 예루살렘 주민들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두로는 바다를 통한 국제 무역에 힘입어 부강한 도시가 되자, 키프로스 및 다시스(오늘의 스페인)와 같은 여러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막강한 부와 군사력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유다 백성이나 예루살렘 성민들을 노예로 팔아 먹고 국경 너머 멀리로 끌어 갔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유대인 남성이라면 예수의 이런 반응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시리아 페니키아의 두로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차라리 속이 시원하지요. 유대 민중들을 착취해서 헬라식 도시를 짓고, 그 문화에 취해 있는 헤롯 정권과 정부 요직의 인사들의 행태를 보아 왔던 민중이라면 헬라풍으로 꾸미고 다니는 이 여자가 좋게만 보일 리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원래 유대교를 갱신하려는 유대인들의 운동이었으니 이방인 여자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개인의 자유와 평등, 모든 인류의 권리가 존중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오늘날의 눈에서 보면 예수의 발언이 참기 힘들지만 1세기 유대인 독자들의 눈에서는 오히려 예수의 발언 이후가 그들에게 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콧대 높은 헬라 귀부인이 오늘 예수에게 제대로 한방 당했구만! 아이구 속이 다 시원하네. 평소에 좀 있다고 으스대는 모양, 눈꼴사나웠는데, 자 어떻게 하나 좀 보자!”
[예수의 자리와 오늘 우리의 자리]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이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첫마디는 “주님”입니다. 이 말 한마디로 사건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와 시로 페니키아 출신 여성의 만남은 모든 병을 고쳐주는 용한 의원과 딸아이가 낫기를 바라고 온 한 어머니의 단순한 만남 이상이 녹아 있습니다. 그저 병만의 문제라면 깔끔하게 고쳐주면 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그 이상의 무엇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는 것입니다. 삶의 경험이 다릅니다. 다른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삶의 굽이굽이에서 겪은 여러 상처들을 입은 사람들이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 할지라도 유대인 남성으로 태어나 나자렛 촌동네에서 일용직 근로자요 가난한 농부로 자란 경험과 기억은 언제든지 스물 스물 나오고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툭 튀어 나오는 것이지요. 머리를 굴려 성찰했다고 해도 그 기반이 이미 구부러진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기가 자기를 속여 자기자신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각자의 경험들은 각기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그 다양성이 모여 복잡한 사회를 구성하고, 그래서 새로움도 창출하지만 동시에 소통되지 못하고 서로에게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 이야기를 단순히 병을 고친 “기적 이야기”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어떻게 치유하면 좋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논쟁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자기를 넘어서는 방법: “내려놓기”와 “역지사지”]
오늘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간청에 예수가 보인 반응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사실 우리들 사이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자신의 삶과 경험 속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말들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또는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에게 모욕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 또한 오늘 그런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반응을, 즉 저주의 말을 복음의 소식으로 바꾼 것은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한 마디였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여인뿐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인 예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이 여성은 예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과거 왕국의 영화도, 헬라 귀부인의 교양도, 그동안 가지고 있던 민족적 우월성도 모두 내려 놓습니다. 사랑하는 딸 아이의 고통 앞에서 어쩌면 이 엄마는 삶의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밖에 나머지 것들은 모두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 내 자존심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바로 이 지점이 여성들, 특히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고 살리는 일에 전문가인 여성들의 가장 강한 강점입니다.
“주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겸손하지만 뼈 있는 이 한 마디에 녹아 있는 절규와 흐느낌과 간절함은 예수님의 편견을 깹니다.
“돌아가시오. 그 말로 말미암아 당신 딸한테서 귀신이 떠나갔습니다.”(200주년 신약성서) 제가 여기에서 천주교 200주년 신약성서를 인용했는데, 다른 번역들은 모두 예수님이 반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함부로 반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것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마가복음서 저자는 이 사건 이후의 예수 행적을 전부 이방에서의 행적으로 이어갑니다. 예수는 두로를 떠나 이방지역인 시돈과 데가볼리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저 쉬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본격적으로 그 곳에도 복음을 전하려 갑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였듯이 일곱 개의 빵과 물고기 몇 마리로 이방 사람 4천명을 먹입니다.
이 여성의 옳은 말 덕분에 예수님은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생각에서 누구나 배불리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도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실천에 옮깁니다. 그리하여 마가교회에는 이방인, 유대인, 열두 제자를 추종하는 그룹, 소외되어 주변부에 머물렀던 여성, 장애인, 어린아이 모두가 함께 신앙을 나누는 공동체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가 공동체는 예수의 저주를 복음의 기쁜 소식으로 만들 줄 아는 공동체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 시로 페니키아 여인의 재치와 기지,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와 생명에 대한 사랑, 편견에 사로잡힌 유대인 남성을 포용할 줄 하는 넓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목회자의 길과 초월과 극기의 삶]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학교에서는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시고, 또 여러분이 사역하는 현장에서는 다양한 목회의 경험들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일개의 신학생, 목사후보생, 교육 전도사님들은 지금 한국 청년이 겪는 매우 힘든 상황들을 겪어 내면서도 동시에 교회 현장이나 학교 현장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소명을 받아서 찾아 온 곳이지만, 여러분의 동료가 했던 기도처럼 “한창 성장해야할 20대에, 낯선 곳에서 눈치를 보면서,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인인 척해야 해야 했고, 학교로, 사역지로 동분서주하며 몸과 맘이 상하고 탈진하였습니다.” 제가 담임목사가 된 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리고 우리 교단의 모든 목사님들을 대표할 수도 없지만 여러분에게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저는 예수님처럼 내 안에 스며든 가부장적인 잔재를 뿌리 뽑고,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늘 내려놓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만 그것이 쉽지 않음도 고백합니다. 동시에 저는 오늘 또 이 시리아 페니키아의 여인처럼 더 소중한 가치와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억울함과 모욕감조차도 넘어서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요셉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로부터 온갖 모함을 당하여 목숨까지 위태로웠다가 이집트 상인에게 팔려갔던 요셉.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당했던 일들, 감옥에서의 고생 등을 생각하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로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이었지만 요셉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녹여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려고 늘 노력합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극기(克己)라고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자기를 이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극복하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또 오랜 시간을 들여 훈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하는 극기의 시작과 완성은 결국 남으로부터 가능합니다. 진정한 극기(克己), 자기(自己)를 넘어서는 초월(超越)은 바로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깨우쳐 주는 타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의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쩌면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깨우쳤을 수도 있습니다. “나 또한 그랬었지. 유대 민족을 하찮게 보았었지. 저런 편견에 사로잡혔던 사람이었지.” 예수는 여인의 현명한 말 한마디를 통해 자신의 선교에 대해 깊이 자각합니다. 원래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처음에는 쓰라리고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결국 넘어설 때, 서로에 대한 상처처럼 보이던 것이 각자가 하는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성숙으로 변할 때, 극기도 가능하고 초월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너와 나는 서로에게 배워 각각이 자기를 초월하고,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을 통해 성숙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동시에 남의 얘기도 듣고 우리 공동체 안의 다양한 목소리도 귀를 기울여 들어봅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각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한걸음 더 나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기 위해, 반종교, 비종교, 무종교인들의 얘기도, 이웃 종교인들의 얘기도,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비판의 소리도 주의 깊게 듣고 가장 좋은 길을 택해 그 길에 함께 걸어갑시다. 시로 페니키아 여인이 보여준 인내와 남에 대한 신뢰를 기억하면서, 또 다른 이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과감하게 고친 예수님을 따라 그 길로 갑시다. 나를 중심으로 삼아 소소한 일들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큰 뜻을 중심으로 삼아 더 큰 세계로 나아갑시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새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여 주소서! 학교 현장에서 교수님과 동료들과 함께 신학을 해 나갈 때, 즐거움을 주시고, 교회 현장에서 애쓰고 땀 흘릴 때 시원한 바람으로 우리를 찾아주소서.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웁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작은 모욕과 고통 정도는 넘길 수 있도록 우리에게도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주소서. 사랑을 담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을 붙들어 주소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개인적 억울함과 울분을 승화시킨 요셉을 통하여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 한신의 동역자들이 늘 자기를 넘어서는 경험을 갖게 하시고, 말씀의 기근으로 험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는데 앞장 서게 하소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며 진리와 생명을 따라 살고자 다짐하는 한신대 신대원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님들 위에, 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기를 넘어서는 우리 기장 모든 가족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