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4,1-12; 요한 21,1-14
+ 찬미 예수님
제1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혔고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자, 그들 가운데에 서게 됩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어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과 같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끝까지 따라갔던 베드로와 요한이 이제 붙잡혀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하여 빌라도에게 넘겼던 최고 의회, 즉 산헤드린 앞에 섰습니다.
그들이 “당신들은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였소?”하고 묻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과연 이것이 얼마 전 “너도 저 사람의 제자가 아니냐?”고 묻자, 세 번이나 아니라고 부인했던(루카 22,56-60) 그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일까요? 같은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큰 차이는, 오늘 1독서에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 그들에게 말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이 말씀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편 118장을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산헤드린 멤버들 앞에서 했다는 것이 대단한 일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자들, 이스라엘이라는 집을 새로 짓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버린 그 돌이 머릿돌이 되셨기에, 이제 더 이상 당신들은 이스라엘을 재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이 밤새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다가, 예수님 말씀을 따르자 백쉰세 마리나 되는 물고기를 잡습니다. 이는 제자들의 선교 사명을 상징하는데요, 자신들의 힘에 의존하면 실패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153 마리가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고, 그에 대해 작년 오늘 강론 때 말씀드린 바 있는데요,
https://cafe.daum.net/noeunsd1004/UuAm/66
대표적인 것으로 예로니모 성인은 에제키엘서 주해에서, 그리스 동물학자들이 물고기 종류가 153가지라고 보고한 것을 지적하시며,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혹은 적어도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전해질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1부터 17까지의 수를 더하면 153이 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셨는데요, 17이 의미하는 바는 십계명과 성령칠은을 더한 수, 혹은 또는 천사의 아홉 등급과 진복팔단을 합한 수라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여러 해석이 있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위대한 신비의 수’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 같습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말씀은, 온 세상을 향한 선교와 그 결과 이루어지는 교회의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일치는 찢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수위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을 중심으로 이 일치를 유지하면서, 갈라진 형제들과도 화합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말씀하시며 빵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주십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는데, 이는 성체성사를 예고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앞으로 제자들이 거행할 성체성사에 당신께서 현존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빵과 물고기를 주시며 “아침을 먹어라”라고 말씀해 주시니, 제자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러나 우리도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이 미사에서 당신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분과 음식을 나눌 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상징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말씀을 듣고 난 후 “누가 한 말인지” 묻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누구의 몸인지” 묻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에 “아멘”이라고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으로 베드로 사도가 변화되었듯이, 세례 때에 성령을 받은 우리도 이미 변화되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시고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려야겠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가장 뚜렷한 징표는, 내 힘으로 하려 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의 힘에 의탁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파견 성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