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자는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성경본문 잠언 17: 21
21.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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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자란 말이 두 번 반복되고 있는데, 전자의 미련한 자는 ‘케실’로서 ‘얼뜨기 멍청이(dolt)’를 말한다. 이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굼뜨고 재빨리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반절에서의 미련한 자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지적이고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언급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그렇게 어리석음을 지닌 자식을 두게 될 때, 그만한 슬픔이 있을 것을 경고한다.
어리석은 자녀를 두게 된 사람이 마음에 슬픔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하여 “자식 농사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려 한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자녀를 두는 것이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 들이려 하는 이들에게 본문은 이렇게 경고한다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영어 성경은 여기서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와 같은 생리적 의미를 지닌 “낳는다”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비가 그러한 자식을 “본다면”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beget)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강조되는 것이 어리석은 아들을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한 사람이 어리석은 아들이 되는 것에 있어 실제적으로 부모의 역할이 크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이 최선을 다해서 어리석은 아들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식으로 인한 슬픔의 책임이 부모인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팔자 소관으로 여기던지, 아니면 친구들을 잘 못 새겨서, 혹은 시대적인 풍조가 잘못되어서, 혹은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라고들 말하려 한다.
그러나 문제시 되는 이들의 95%이상이 사실은 부모의 잘못에서 비롯된다는 교육자이셨던 아버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신앙적 문제나, 삶의 방식에 있어서 문제점을 안고 있는 많은 사람들 대부분은 어리석은 부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가정적 문제란 부모들이 쉽게 말하려 하는 가정 형편을 말함이 아니다. 가정 형편이 그들을 빗나간 이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이 지니고 있는 삶의 방식이 그들을 타락시킨다.
가진 집 아이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 그만큼 배운 사람이 왜 그런 패륜아적 행동을 했을까? 라고 하는 것 역시 암암리에 지니고 있는 편견이다
어리석은 아들을 지닌 아비는 기쁨을 지닐 수 없다. 그것은 사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자라날 때 자녀들이 지닐 수 없었던 기쁨의 결과이다.
인색한 부모에게서 자녀는 기쁨을 누릴 수 없다. 단지 인색함을 배울 뿐이다
불경건한 아비나 어미에게서 내적 경건을 배울 수 없다. 단지 불경건을 배울 뿐이다.
일례를 들어 아이에게 경어를 쓰는 부모들을 지닌 아이들은 일상에서 경어를 쓰게 된다. 그리고 그 경어를 쓰는 것을 다른 이들이 놀라워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계속하여 경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뻐하게 된다. 그렇게 기쁨 안에서 습득되어 간다. 그는 그렇게 교육되어 부모에게 기쁨을 끼치는 자녀로 성장한다.
미련한 자는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길러 지는 것이다.
또한 의로 길러 지는 것은 신 11:19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삶의 전방위에 걸친 교육의 결과임을 성경은 말한다.
“너희들이 집에 앉았을 때에 그리고 길을 걸을 때, 그리고 누울 때와 일어날 때”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의와 지혜의 가르침이 단지 소리치는 말로만이 아닌 삶의 전 영역에 걸친 교육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자녀들은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익숙해 져야 한다.
은밀한 수고를 기뻐하는 집의 자녀들은 그 은밀한 수고의 기쁨을 즐거워 할 줄 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의 자녀들은 그 신앙적 교육을 집에서 배운다.
그렇게 바울은 딤후 1:5에서 믿음의 유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신실한)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실상 신앙적 교육의 원초적인 장은 교회가 아닌 가정이다. 구약의 백성들에게 있어 그 가르침의 책임은 아버지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오늘은 마치 이 책임이 교회에 있는 것처럼 여긴다. 일주일에 한 시간 맡겨지는 것조차 아까와 하는 이들이 아이들의 신앙적 빗나감이라는 당연한 결과에 대하여 혀를 찬다.
자녀들은 집에서 선한 일, 남을 돕는 일에 풍성한 것이 지니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의를 위해 희생하고 있음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지켜 보아야 한다
실수를 어떻게 용납하는가 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를 배워야 한다
가장 중요한 모습은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다
가장 소중한 시간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샌더슨이라는 설교가는 이 가장 중요한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설교하였다
“당신이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실수를 할 때 고쳐주고, 잘했을 때에 보상해 준다 할지라도, 그들을 위한 당신의 뜨거운 기도들이 모자라는 한, 당신들이 그들의 완고함과 타락에 대해서만 씨름한다면, 당신 들 중 그 누구도 당신의 책임하에 있는 이들을 향한 당신의 몫에 대하여 충분히 자유할 수 없다.”
육적으로 무엇을 먹이느냐에 골몰하는 것만큼 영적으로 무엇을 먹일 것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의 기쁨을 위한 씨뿌림이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