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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자의 왕 마귀(06)
말씀: 욥41:34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글자 중에 하나는 만(慢)자입니다. 교만(驕慢), 오만(傲慢), 거만(倨慢), 자만(自慢) 등 끝에 만(慢)자가 들어가는 것들은 하나 같이 주님이 지극히 싫어하시는 것들입니다. 이런 단어가 성경에서 좋은 용례로 사용된 예가 없습니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고 오만하고 거만한 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무서운 것이나 두려운 것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단 한 가지는 염려하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백성들이 교만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가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8:14a).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해도 별로 개의치 않으시지만 교만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싫어하시며, 미워하시고, 가증스러워 하십니다. 이는 교만이 마귀의 속성이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의 왕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그(마귀)는 모든 높은 것을 눈여겨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 하시니라.](욥41:34).
교만하면 마귀의 자녀들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마귀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놀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의 입에서 조폭들이나 불량배들이 쓰는 천박한 욕설, 음담패설이 마구 튀어나오면 황망하고 질겁할 것입니다. 거기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악한 상상과 생각을 마구 표현하고 더러운 행동을 하면 내 자식이란 것이 수치스러울 것입니다.
교만이란 원수 마귀의 자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들이요, 거기서나 보아야 하는데 자기 백성이요 자신의 피로 사신 자녀들에게서 나올 때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이 왕이시듯 마귀 역시 왕입니다.
마귀는 자신이 다스리는 왕국이 있습니다. [보라, 주 하나님의 눈은 죄 많은 왕국(sinful kingdom-죄악의 왕국) 위에 있나니 내가 그 왕국을 지면에서 끊어 멸할 것이나 다만 야곱의 집은 철저히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암9:8).
우리 주님의 왕국이 의와 희락과 평강이 있는 하나님의 왕국인데 비해 마귀는 죄악의 왕국(sinful kingdom)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왕국의 백성들은 ‘모든 교만한 자녀들’입니다.
사람의 육신적 본성은 누구나 다 교만합니다. 십자가에서 옛 육신을 못 박고 하나님의 신성한 능력과 성품을 받아 새롭게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교만과 뗄 수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왕들로 인정받는 사람들도 마지막에 교만으로 인해 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웃시야 왕을 보십시오. 그는 젊었을 때 하나님의 종 스가랴의 말에 순종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상 계시들을 이해하는 스가랴가 살아 있는 날들에 하나님을 구하였으며 그가 [주]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번영하게 하셨더라.](대하26:5).
전쟁에서는 주님이 승리를 주셨고, 부국강병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의 명성은 이웃으로 퍼져 국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욱 겸손하게 행하는 대신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하게 되매 그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가 파멸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주 자기 하나님께 범법하여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焚該) 제단 위에서 분향하려 하였기 때문이더라.](대하26:16). 그는 강하게 되자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들, 주님이 형통케 하신 것, 주님이 복 주신 것을 자신의 능력과 팔이 이룬 줄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은 남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뽐내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 역시 동일합니다. 그들은 다음 세 단계를 거칩니다.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 보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족, 하나님이 주신 왕국,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 하나님이 주신 복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함으로써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이룬 작품인 줄로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마치 도둑놈이 남의 것을 도둑질한 돈을 자신이 일해서 번 돈인 줄로 생각하는 것이나, 남에게 받은 선물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넘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범위에 도전하고 월권(越權)을 자행합니다. 찬탈자가 되려고 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보좌와 권위를 찬탈하려 했던 것처럼, 압살롬이 자신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찬탈하려 했던 것처럼 자신의 범위 밖의 것에 공공연히 도전하고 찬탈하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주의 명령들을 떠나게 됩니다. [저주받은 교만한 자들 곧 주의 명령들에서 떠나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시119:21). 저주받은 교만한 자는 주의 명령을 떠나 잘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교만한 자에 대한 정확한 정의입니다.
웃시야 왕이 정확히 그러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고, 다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했고, 마지막으로는 제사장 직분까지 탐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웃시야의 이마에 문둥병이 피어나게 함으로써 즉석에서 심판하시고 징계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교만이 오면 수치가 오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유대 역사에 믿음의 큰 획을 그었던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히스기야의 마음이 높아져서 그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은혜대로 다시 보답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진노가 닥쳤더라.](대하32:25). 히스기야의 교만은 자신 혼자만 아니라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 위에 진노가 닥쳤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교만은 나라와 왕국을 위기에 빠뜨립니다. 그는 15년간 생명이 연장되고, 해가 뒤로 10도 물러나는 이적을 체험한 후에 교만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큰 믿음의 체험 뒤에 곧 바로 다가오는 마귀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의 특징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고, 마음에 감동이나 경이로움이 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대로 보답하지 아니하고 육신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이 교만입니다. 은혜가 변하여 교만이 되는 것은 육신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을 보십시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다윗을 선동하여 이스라엘의 수를 세게 하므로](대상21:1). 다윗은 나라가 안정되고, 부강해지자 자신이 왕이 되어서 이룬 일에 대해 스스로 평가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요일2:16)이란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마귀는 다윗을 선동했습니다.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이 일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일보다 훨씬 더 큰 죄였습니다. 교만은 간음과 살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죄입니다. 늘 영적 통찰력과 분별력으로 백성들의 목자 역할을 하던 다윗이 이 순간만큼은 부하 장수 요압만큼도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인구를 조사하라는 왕의 명령에 요압은 그 의도와 목적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고, 마귀의 역사임을 알았습니다.
[요압이 응답하되,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 많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나 내 주 왕이여, 그들은 다 내 주의 종들이 아니니이까? 그런데 내 주께서는 어찌하여 이 일을 요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왕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범법(犯法)의 원인이 되려 하시나이까? 하였으나] (대상21:3).
육신적인 요압 장군마저 마귀의 역사임을 간파했고, 그는 자신의 상관이요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의 명령을 가증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압이 왕의 말을 가증히 여겼으므로 그들 가운데서 레위와 베냐민은 세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불쾌히 여기셨으므로 이스라엘을 치시매 다윗이 하나님께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행하였으므로 크게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이제 간청하건대 주의 종의 불법을 없애 주옵소서. 내가 심히 어리석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대상21:6~8). 다윗은 주님의 징계를 통해 자신의 어리석음과 불법을 깨닫고 주님께 회개했습니다. 교만의 올무에 걸려든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인생의 자랑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자신 있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를 갖고 싶어 합니다. 인물이 없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돈이라도 벌어야 합니다. 다 안 되면 교회에서 신앙심이라도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마귀가 부추기는 교만이란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목표를 성취한 후에도 자신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집니다.
다윗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믿음 하나로 일약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수많은 고난과 위험 속에서 살아남아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원수들에게는 져 본 적이 없지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죄와의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이 찾아 들어왔을 때 다윗은 이기지 못하고 범죄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 사건이 밧세바와 우리아의 사건입니다. 세월이 흘러 [인생의 자랑]이란 시험이 다윗에게 다가왔을 때 역시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성품은 교만이고, 가장 좋아하는 성품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더 많은 은혜를 베푸시나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물리치시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시느니라.](약4:6). 여기서 “물리치시나”라고 번역된 말은 resist로 주님께서 대적하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원수로 생각하시며, 대적자로 생각하십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는 두고 보지 못하시며, 교만한 자는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심판 하시고, 멸망시켜 버리셔야 속이 풀리시는 분이십니다. 누가 말하기를, ‘교만의 무게는 셋째 하늘에 있던 루시퍼를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끌어내릴 만한 무게’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누구든지 끌어내려 집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교만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과 사악한 자들의 쟁기질은 죄니라.](잠21:4). 교만한 마음은 죄의 목록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죄의 목록 속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교만은 성품이나 인격이 아니라 죄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은 죄악 된 마음입니다. 교만과 죄는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미워하십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길과 비뚤어진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 주님은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만 특별히 교만은 어떤 죄보다 더 미워하시는 죄입니다. 잠언 기자는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의 목록을 열거하면서 맨 앞에 교만을 두었습니다. [[주]께서 이 여섯 가지를 미워하시며 참으로 일곱 가지가 그분께 가증한 것이니 곧 교만한 눈빛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피를 흘리는 손과 사악한 상상의 꾀를 꾸미는 마음과 신속히 악한 일로 치닫는 발과 거짓들을 말하는 거짓 증인과 형제들 가운데 불화를 뿌리는 자니라.](잠6:16~19). 주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것 중에 맨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결단하기를, [누구든지 자기 이웃을 몰래 헐뜯는 자는 내가 끊을 것이요,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을 지닌 자는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이다.](시101:5)고 했습니다. 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만한 눈빛과 교만한 마음을 지닌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미워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고, 낮추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교만한 자를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해야만 합니다. [[주]께서는 높이 계셔도 겸손한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며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아시는도다.](시138:6). 교만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다!" 라고 했는데 이는 교만 이외의 다른 모든 죄들은 바로 교만이라는 죄 때문에 파생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악들은 교만의 자식입니다. 그러니까 교만은 모든 죄악의 원천이요,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교만은 인간이 빠지기에 가장 쉬운 것인 동시에 인간이 극복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만을 다스리는 왕이 있는데 바로 마귀입니다. [그는 모든 높은 것을 눈여겨보는 자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 하시니라.](욥41:34). 교만한 자들은 마귀의 백성이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자기 자녀들에게 교만이 발견될 때 엄히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면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하나 있습니다. [너희는 듣고 귀를 기울이며 교만하게 굴지 말라. [주]께서 말씀하셨느니라.](렘13:15)-주님은 너희는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귀에 “교만하지마라.”(be not proud)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무엇입니까? 교만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권위에 도전하고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교만은 과도한 자기 존중이며, 끝을 모르는 자기중심주의로서 항상 '나'를 한 단계 높은데 놓으려하는 욕망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 숭배, 자기 경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자기를 높이고 모든 신보다 자기를 크게 높이며 신들의 신을 대적하려고 놀라운 것들을 말하며 번영하되 그분의 격노가 이루어질 때까지 하리니 이는 작정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단11:36). 마귀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자기를 높이는 존재입니다. 그는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크게 하며,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귀의 이런 속성을 정확히 예언해 두고 있습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또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 안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살후2:4). 자기를 높이는 일이 교만의 핵심입니다.
사탄 마귀가 타락한 것은 자기를 높이는 교만 때문입니다.
(사 14:12-15)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민족들을 약하게 한 자야, 네가 어찌 끊어져 땅바닥으로 떨어졌는가! 13)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하나님]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내가 또한 북쪽의 옆면들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15) 그러나 너는 지옥으로 곧 그 구덩이의 옆면들로 끌려 내려가리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기를 높이는 마음이 있고, 자존심을 세울 마음이 있다면 이미 교만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나 체면이나 명예를 세워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나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취업이나 진로가 수시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인정받는 일이라면 흔쾌히 수용합니다.
교만이 무엇인가 좋은 예가 있습니다. 어떤 친구가 피를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의대를 갔습니다. 그래서 왜 의대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일단 의대에 가면 남들이 알아주잖아. 우리 교회에서 나한테 눈길도 안주던 사람들이 내가 의대 합격했다고 하니까 다 날 알아주는데 기분 죽이더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라. 자기를 높이라, 자기 가치를 올려라. 이것이 현대 교육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모를 업그레이드하는데 온 힘을 씁니다. 외모란 혈통, 학력, 돈, 권력, 사회적 지위, 명성, 인물 등 사람이 소유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도 집사도 하고 장로도 하는 세상입니다. 외모를 갖춘 자가 무슨 말을 하면 씨가 먹히고, 영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런 외모를 높이고 외모를 인정해 주는 성도라면 주님의 책망밖에 들을 것이 없습니다.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집회에 금반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오고 또한 허름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화려한 옷을 입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에게 이르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그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거기 서 있든지 여기 내 발받침 밑에 앉으라, 하면 4) 너희가 너희끼리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였느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친히 약속하신 왕국의 상속자들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6) 그러나 너희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들은 너희를 압제하고 재판석 앞으로 너희를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약2:1~6).
이런 현상이 교회마다 일어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대학 교수나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오고, 큰 기업체 사장이 오고, 변호사가 오는 것과 파산자나 노숙자(Homeless)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 올 때 우리는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아마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자기를 높여 줄 만한 무엇을 갖추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교만은 외모를 취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들에게 이르기를, 어리석게 굴지 말라, 하였고 사악한 자들에게 이르기를, 뿔을 들지 말라, 하였나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고 뻣뻣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시75:4~5). 주님은 “뿔을 들지 말라.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라” 명하십니다. 너희 뿔이란 우리의 교만을 일컫는 말씀입니다. 목을 곧게 세우는 모습은 코브라를 연상하시면 간단합니다. 기어도 마땅치 않을 뱀이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고개를 들고 있는 뱀의 모습은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교만한 인간의 모습이 꼭 그런 모습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바로 그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마18:4),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 자기를 높이는 자는 다 낮아집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무신다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교만한 자들의 집은 허무시되 과부의 경계는 굳게 세우시리라.](잠15:25).
이런 대표적인 예가 헤롯왕입니다. [어떤 정해진 날에 헤롯이 왕복을 차려 입고 자기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하니 백성이 환호하며 이르되, 그것은 신의 음성이요,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하매 그가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즉시 {주}의 천사가 그를 치매 그가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니라.](행12:21~23). 그는 수많은 악행과 불법과 비리에도 심판을 당하지 않았지만 교만했을 때, 즉 주님께 돌릴 영광을 자신이 가로챘을 때 즉석에서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교만은 마치 지뢰밭에 지뢰를 밟고 섰다가 발을 떼는 것과 같이 그 발을 떼는 순간 폭발합니다. 교만은 강한 폭발력이 있습니다. [멸망에 앞서 교만이 나가며 넘어짐에 앞서 거만한 영이 있느니라. 자신을 낮추는 자들과 함께 겸손한 영을 갖는 것이 교만한 자들과 더불어 노략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6:18-19).
멸망이 오기 전에 그 앞에 선구자로 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은 멸망을 인도하는 길잡이요, 멸망에 앞서 마음속에 조용히 다가오는 전령입니다. [멸망에 앞서 사람 마음의 거만이 있고 명예에 앞서 겸손이 있느니라.](잠18:12). 교만이 얼마나 조용히 다가오는지 대부분은 멸망한 후에야 “아, 내가 교만했구나!”란 사실을 깨달을 정도입니다. 맹독을 지닌 독사들은 가축들을 슬쩍 스쳐 지나가지만 조금 있으면 여러 마리가 중독되어 힘없이 쓰러집니다. 가축들은 자신이 중독 된지도 모른 채 가만히 있다가 쓰러진 후에야 뱀에게 물린 줄 알듯이 마귀는 교만이란 독을 우리 마음속에 슬쩍 뿌려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망한 사람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나옵니다. 종의 신분인 자가 아이를 낳아 교만해진 하갈은 결국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로 도망하게 되었으며(창16:4-6), 부자였으나 어리석고 교만한 나발은 급살 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25:38). 교만했던 사울왕은 주께 버림받고(삼상15:23), 전쟁터에서 자식과 한날 비참하게 죽고, 교만했던 거인 골리앗은 어린 목동 다윗에게 지극히 적은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삼상17:49). 제국의 2인자였던 하만은 자기가 준비한 처형대에 목매달려 죽임을 당했고(에7:10),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느브갓네살 왕은 7년 동안이나 짐승처럼 들에 살며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교만으로 인하여 멸망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교만으로 인해 이런 일을 당하리니 이는 그들이 군대들의 주의 백성을 모욕하고 그들을 대적하여 자신을 크게 높였기 때문이라.](습2:10). 주님은 이들이 이런 일을 당한 원인이 자기의 교만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교만이란 자기 기준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척도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가 잣대가 되고 자기가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이란 본래의 뜻은 캐논(canon)으로 '잣대'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의 잣대가 됩니다.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성경이란 잣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교만한 사람입니다.
마귀는 교만한 자녀들의 왕으로서 성경을 보지 못하게 하고,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삼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히 행하며 목을 뻣뻣하게 하여 주의 명령들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느9:16). 교만한 자에게 드러나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주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자세만 보아도 요즘 영적 상태나 마음 자세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 시간이 몹시 지루하고,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잠이 오는 것은 여러분의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교만한 것입니다. 예배를 빠지고 싶은 것은 다른 많은 사연과 이유가 있겠지만 마음이 교만한 때문입니다. 마음이 교만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어깨를 빼고, 목을 굳게 하고,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다시 주의 율법으로 데려오려고 그들을 대적하여 증언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히 행하여 주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주의 판단의 규범들을 범하여 죄를 짓고 어깨를 뒤로 빼며 목을 뻣뻣하게 하고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나이다.](느9:29).
이런 사람들이 반대로 남을 판단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 한 마디에 순종하면 교만은 더 이상 틈탈 수 없습니다.
저는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주님이 주신 평안이 내 마음을 다스립니다. 저는 매주 예배 시간에 늦는 김 형제 부부를 보고 한번은 혼을 내야겠다!, 매주 그냥 넘어가는 것은 목자의 직무 유기다! 생각하다가도 “주님 감사합니다. 늦게라도 나오게 하시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저가 장성한 자가 되어 스스로 깨닫게 하옵소서. 하고 나면 저는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그 순간 마다 [모든 일에 감사를 드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는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결심을 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인격적으로 성숙해서가 아닙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저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께서 자기가 의롭다고 스스로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어떤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눅18:9).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멸시한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이기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파괴하기 시작합니다.
교만은 상대적 우월감에 기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 모두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형편이나 처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을 이용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용 가치가 있으면 가까이하고, 그렇지 못하면 멸시하고, 냉정하게 돌아서 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도 그런 식으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조차도 자기를 위해 복 주시는 분으로만 여깁니다. 십자가는 이런 자아를 부수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두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자아를 의롭다하는 사람은 주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며 따라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8-10).
교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두로의 통치자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네 마음이 높아졌으므로 네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들의 한가운데 앉아 있다, 하였도다. 그러나 네가 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같이 정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아니니라.](겔28:2).
마귀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이 자의 정체에 대해서 상세하게 묘사해 두셨습니다. 두로 왕으로 묘사되는 이 자는 적그리스도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같이 정하였으니](겔28:6). 하나님은 그를 사람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사람의 하나처럼 죽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마귀나 신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들을 죽일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이라고 외쳐도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처럼 죽게 되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 여전히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는 너를 죽이는 자의 손 안에서 사람일뿐이며 하나님이 아니니라.](겔28:9).
하나님 앞에서는 신들이라 불리거나 그 무엇이로 불리며 스스로 높일지라도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심판하시고, 끌어 내리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너희는 다 지극히 높은 자의 아이들이라, 하였으나 너희는 사람들같이 죽을 것이요, 통치자들 중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시82:6~7). 교만한 자들의 말로는 다 동일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어 자기가 대신 취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교만은 가장 본질적인 악이며, 최상의 악이며, 최대의 악이다. 세상에 단 한 사람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반대하는 마음의 상태다." 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걸림돌 역시 교만입니다.
교만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거만하게 보이는 표정이나 무뚝뚝한 말투가 아닙니다. 교만은 외적 현상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고 예배를 잘 드리지만 마음은 교만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가 한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나 어머니는 아이를 훈계하면서 자기는 학교 다닐 때 무엇이든지 다 잘 했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아이 앞에서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는 별로 잘 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고, 직장에 취업을 했고, 훌륭한 남편/아내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공부를 마쳤을 텐데 “부모 잘 만나서 별 어려움 없이 공부를 잘 했습니다.”, 또는 “머리 하나는 좋아서... 공부는 잘 했습니다.”와 같은 식으로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고, 두르시고 계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복을 주셨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시는 교만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점을 이용합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의 약점보다는 강점 때문에 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인정하신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하였더라.)](민12:3). 그는 얼마나 온유했던지 250명의 통치자들이 자신을 대적하여 도전했을 때나 미리암과 아론이 자기를 시기하여 도전했을 때에도 성질을 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온유했던 그가 무엇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그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반석 앞으로 회중을 함께 모은 뒤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반역자들아, 이제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반석에서 반드시 물을 내야만 하랴? 하고 모세가 손을 들어 자기 막대기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풍성히 솟아나므로 회중과 또한 그들의 짐승들이 마시니라. [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눈앞에서 나를 거룩히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20:10~12). 갑자기 폭발한 성질로 말미암아 온유한 모습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는 성질을 못 이겨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의리의 사나이요, 신의가 있는 사람의 대명사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신의를 저버리고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했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다 죄를 범했습니다. 마귀는 매우 교묘해서, 우리에게 책 잡을만한 고소거리가 없을 때는 우리가 자랑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할지니라.](고전10:12).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였고 너는 믿으므로 말미암아 서 있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 우리는 어떤 것에서 결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만하는 마음, 거만함과 오만은 교만과 같은 부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마귀의 전술이요, 계략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모든 범죄는 교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면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지만 교만하게 되면 주님을 떠나고, 주님을 버리게 됩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신자든 불신자든 주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꺾어 버리십니다.
히브리 격언에 “하나님은 부서진 것들을 사용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려면 먼저 땅을 갈아엎고 흙덩어리를 부드럽게 부수어야 합니다. 단단한 곡식은 잘게 부서져야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밀가루, 보릿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단단한 밀이나 보리를 먼저 빻아 가루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도 먼저 포도를 밟아 짓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포도에서 즙이 나와 포도주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 잘 소화시키기 위해서는 입속에서 씹어서 완전히 잘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는 잘게 부수는 일을 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서진 정도에 따라 성숙도가 달라집니다. 많이 부서지면 부서질수록 성숙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교만은 마치 단단한 덩어리와 같습니다. 주님은 징계와 심판을 통해서 그것을 부수십니다.
교만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너 곧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거처를 둔 자야, 네가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 내리겠느냐? 하지만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옵1:3). 교만한 자들은 계속해서 자신을 속입니다. 무식해서 속는 경우보다는 마음이 교만해서 속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마귀는 교만을 부추김으로 성도들이 스스로 속임수에 빠지게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뭔가 된 줄로 생각하는 교만으로 인해 속습니다. 뿌리지 않고도 요행수로, 운으로 뭔가 얻을 줄로 생각하는 것 역시 속은 것입니다. 악한 친구를 사귀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속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는 이유는 마음의 교만 때문입니다.
자기만을 돌보고 남을 돌보지 않는 것 역시 교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네 형제의 날 곧 그가 낯선 자가 되던 날에 바라만 보지 말았어야 했고 유다 자손이 멸망하던 날에 그들로 인해 기뻐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그들이 곤경에 처하던 날에 교만히 말하지 말았어야 했느니라.](옵1:12).
교만한 자들은 형제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거나 외면합니다. 도리어 판단합니다. 다 무식해서 그렇다느니, 스스로 무덤을 팠다느니 하면서 판단만 합니다. 도움을 청하는데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것은 교만히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든 교만한 자녀들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왕은 의로 다스리지만 교만의 왕은 교만으로 다스립니다. 마귀의 통치술은 속임수, 기만, 대적, 교만입니다. 아무쪼록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더 낮추어서 주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혜를 받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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