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96, 주학목장에서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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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님의 댓글을 보고 좁은길,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 천안에 소재했던 옛 주학목장의 추억 하나...
전도사님 보세요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군복무에 수고가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내일이 초복이고 보면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겉봉의 이름이 알송달송하지 않으세요? 별로 반갑지 않은 사람이라서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죠.
부산있을때 김목사님에게 보내신 편지에는 편지를 받기만하고 하지는 말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히스기야하고 서신 연락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는게 있드군요. 헌대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담하게 펜을 들었습니다.
시골 농촌에서 새를 친구로 삼고 밭에 곡식을 친구로 삼는 나로서는 옆에 사람들이 있긴해도 왠지 옛날이 그립고 마음이 외롭군요. 외롭다는 것은 전도사님 앞에 심히 부끄러운 일인줄 압니다. 옛날이란 물론 부산에 있을때를 말합니다.
전도사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었을때 그당시는 즐거운지도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추억이라서 그런지 꽤나 그립군요. 이것이 바로 간사한 사람의 본능이라 할수 있겠죠.
그렇지 않아도 약 4,5일전에 니므롯 언니와 밭을 매면서 성숙이와 태종대에 갔다가 두사람이 만났던 이야기를 해서 웃었답니다.
전도사님! 이곳 경치가 매우 좋습니다. 한번 놀러 오시지 않겠읍니까? 물론 차비가 많이 들고 시간이 좀 걸리겠죠. 용산역에서 왕복500원이면 되니까 한번 다녀 가세요. 히스기야나 나한테 연락을 받아서 온것처럼 하지 말구요. 오시면 후히 대접하겠습니다.
7~10일만 있으면 옥수수와 참외를 먹을수 있어요. 참외는 내힘으로 키웠답니다. 꼭 한번 다녀가세요. 그리고 답장을 안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마음 내키면 해주셔도 괜찮구요.
나훔 장로님이 계시긴 해도 편지는 틀림없이 내손으로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안하는게 안전하겠죠. 히스기야가 1주일전에 이곳으로 왔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면 기다리겠습니다. 수고많이 하시고 더운날씨에 건강하세요.
7.17 日 드보라
네잎 다섯잎 크로바 보내드립니다.
오시는 요령-->천안역전에서 하차하시어 역전앞에 시외버스가 있습니다. 주차장 말구요. 그리고 시내버스도 있습니다. 시내버스는 백석동 가는걸 타고서 종점에서 내려서 주학목장 찾으시면 되구요. 시외버스는 소금쟁이 가는걸 타시고 주학목장에서 내려달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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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편지를 받고 복무하던 부대에서 외출을 나와 천안의 주학목장을 찾아갔다. 지워진 부분은 원문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나는 그때 부대에서 편지를 받으면 의심갈만한 단어들은 볼펜으로 문질러 놓았다. 그리고 내가 동방교의 전도사였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보안이 철저했던 부대였던지라 나는 받은 편지들을 전부 내가 근무하던 사무실의 책상 서랍을 들어내고 안쪽 빈 공간에 차곡차곡 숨기듯 보관해 놓았다가 제대하면서 잘 간수해 나왔고 잡동사니 가죽가방속에 수십년 그대로 넣어 두었었다. 그 편지들중의 하나다.
편지의 내용을 좀 상세히 설명하는 편이 좋을것 같다.
첫줄을 비롯하여 여러곳에 등장하는 전도사님이라는 명칭은 필자를 일컫는 단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전도사님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었던지...
여섯째줄에 등장하는 김목사님은 이단의 추억 #12에 소개한 김인경 입다목사를 말한다.
일곱째줄에 등장하는 히스기야는 이단의 추억 #19,어느 신고식 # 22,주학교회 # 23,붕어빵 장사 #55,히스기야와 돈까스 # 56,주학목장의 밤등 여러곳에 등장하는 바로 그 히스기야, 재화를 말한다.
17번째 줄에 등장하는 니므롯(동방교에서의 명명-부르는 이름)과 성숙이는 빈집초월(무단가출)해서 껌팔아 바치던 세칭 동방교의 여신도, 그 말썽많고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던 세칭 동방교의 연단선님들을 말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모두가 발랄한 아가씨들이었다. 어찌 동방교에 몸을 담게 되었던지...
26번째 줄에 등장하는 나훔장로는 당시 40대말 정도의 여자 신도인데 이별인지 사별인지 남편과의 연락은 없었고 10대의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동방교에 입교해서 대기처에 들어와 대기자로 있던 성격이 괄괄하고 기갈이 억세던 여성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시고 동방교의 노인네들 집단수용시설이라고 볼 수 있는 청해복지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양로원에 계시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는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샬롬 요엘>’의 저자 요엘의 친 누님이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아직도 몸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편지를 보내준 아가씨는 당시 내 또래의 빈집초월 (무단가출)한 세칭 동방교의 여신도다. ‘이단의 추억 #46, 그리운 선님들’ 편에 등장해서 ‘남쪽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나르고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 라는 노래를 불렀던 바로 그 아가씨다. 부산에서 연단선님 생활을 할때 순회자와 연단선님으로 만났던 인연깊은 아가씨다.
‘전도사님이 나의 인도자가 되었을때’란 순회자와 연단선님으로 만났을때를 말하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부산에서 세칭 동방교 초량12교회, 주학교회 전도사 시절에도 부산에 있던 연단선님들, 즉 시내 중심가를 돌면서 껌을 팔아 세칭 동방교에 갖다 바치는 연단선님들의 순회업무, 즉 연단선님들의 믿음상태를 점검하고 지시사항들을 전달하고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해서 정신상태가 바짝 긴장되어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전날의 행상하여 벌어들인 돈인 지성(헌금)을 파악해서 회수해 가는 일을 오전시간에 맡아 하고 있었다.
철없고 기구했던 젊은날이었다. 해괴한 짓을 하면서도 수치를 모르던 천박한 시절이었다. 누군가에게서는 피해자가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되었던 한없이 어리석었던 시절이었고 이단사설 진흙땅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면서도 구름위에 올라탄듯 천지분간을 못하던 미망(迷妄)의 시절이었다.
태종대에 갔다가 두 연단사가 서로 만나 웃었다는 이야기 한 구절, 껌팔이 행상에 지치고 피곤한 청춘들이 어느 순간 절망과 회의를 이기지 못하고 세뇌된 믿음이 희미해지고 정신상태가 해이해져서 부산의 영도 태종대 공원으로 터벅터벅 찾아 들어가 끝없이 펼쳐진 남쪽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상념에 젖어 있다가 우연히도 서로 만나 웃었다는 이야긴데, 가련하여 참으로 웃지못할 그런 이야기도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그때 편지속에 같이 넣어 보내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네잎 다섯잎 크로바는 세월속에 삭아버려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광활한 목초지 사이사이에 심어두었던 참외밭을 메고 콩밭을 메면서, 주위에 아무렇게나 허드러지게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던 크로바 무더기 속에서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네잎 다섯잎의 크로바를 찾아내어 편지속에 고이 담아 보내주었던 그 따스하고 정다웠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녀의 명명(동방교에서 부르는 이름)은 ‘드보라’였다. 지친 연단사(연단선님) 생활을 이기지 못하고 허우적거릴때 도망가기 직전 아마 주학목장으로 보내진것 같다. 세칭 동방교에서는 껌팔이등 행상을 해서 돈을 갖다 바치는 신도들을 연단선님, 연단사, 또는 그냥 선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면서 이제 곧 세상을 불로 심판하고 닥아오는 천년왕국에서 왕의 권세를 누릴 '왕의 씨'가 된다고 가르쳤다. 일종의 은어(隱語)였고 모두가 그 이단사설에 현혹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천안의 주학목장을 찾아 갔었고 그 이야기는 ‘이단의 추억 #56,주학목장의 밤’으로 기록을 남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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