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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교실 스크랩 불우한 삶을 살다간 의친왕 이강
심상진 (호) 송정 추천 0 조회 128 14.02.17 18: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종의 다섯 번째 아들…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

 

  “ 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돼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한다.”

 

 

 

 의친왕 이강의 비 김수덕의 80회 생일을 맞아

 한자리에 모인 의친왕의 후손들

  

1910년 한일합방 후 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했다. 보다 안전한 장소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망명정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상설 신규식 박은식 등은 신한혁명당을 만들고 고종황제를 망명시키고자 했다. 이에 외교부장 성낙형을 국내에 침투시켰지만 일본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하지만 고종이 아니더라도 구심체 역할을 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대상으로 지목된 것인 고종의 둘째 왕자이자,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 이강이었다. 신한혁명당은 이강을 상해로 탈출시켜 왕으로 옹립시키고자 했다. 이른 바 대동단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19년 11월 10일 아침, 조선총독부에 비상이 걸렸다. 이날 아침 총독부의 고위 관료로 조선 왕족들을 감시하는 일을 맡고 있던 지바는 사복경찰관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제3부 경위반 주임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어젯밤 의친왕 이강이 궁을 탈출한 것 같습니다.”

“……”

“어젯밤 10시쯤 이강이 살고 있는 집의 후문 경계를 맡고 있는 시시가 키가 큰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 중 한 명을 미행했는데, 그만 이문안 명월관 앞에서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이강인 것 같습니다.”

 

지바는 즉시 왕족 감시 담당관인 이왕직의 구로사끼에게 이강이 집에 있는지 확인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구로사끼는 이강의 집을 방문하고 이강의 부인을 만났다.

 

“이강 전하는 잘 계십니까?”

“아무 탈 없이 잘 지내십니다.”

“전하를 꼭 뵙고 할 말이 있습니다.”

“……”

“혹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닙니까?”

“사실은 어젯밤 나가셔서 들어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중대사건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깜짝 놀란 일본은 조선은 물론 일본, 만주, 심지어 시베리아와 상해까지 수배령을 내렸다. 일본 경찰의 수사는 빠르고 신속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탈출이 아닌 납치로 몰아갔다. 이강이 돈이 궁한 것을 안 전라도의 한 부호가 어장 어업권을 담보로 3만원을 빌려드리겠다고 대리인 이민하라는 자를 시켜서 접근해왔다는 것이다.

 

이에 이강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김삼복이라는 종 한 명만을 데리고 약속장소로 갔는데,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이민하가 이강을 상해로 납치했다는 것이다.

일본 경찰이 이 사건을 탈출이 아닌 납치로 규정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그 해 있었던 3?1 운동으로 인해 민심이 사나워져 있는데다 이강이 탈출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웠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조선 민족들이 다시 뭉칠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중국에서 이강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시 조선으로 이강을 소환한 일본은 총독 관저 구내에 있는 녹천정이라는 작은 집에 이강을 연금시켰다. 녹천정은 이토 히로부미가 술잔치를 벌였던 곳이기도 했다. 여기에 잠시 연금시켰다가 일본으로 이주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강은 끝내 일본행만은 거절했다고 당시 신문들은 전하고 있다.

 

평생 불우한 삶에 시달렸던 유약했던 왕자

이강의 생모 장귀인은 영친왕의 생모인 엄귀인처럼 눈치 빠르고 처신에 능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로부터 갖은 협박과 질시를 받았고,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궁에서 쫓겨나 이강을 낳았고 힘들게 살다가 죽고 말았다. 이에 이강은 고아아닌 고아가 됐고 끊임없는 위협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미국 유학이었다. 1903년 3월 1일자 <뉴욕헤럴드>는 의친왕 이강의 기사를 실었다.

 

“ 이 조선의 왕자는 미국 시민의 자유와 독립심에 매료돼 국내외에서의 자유롭고 독자적인 활동을 위해 왕국의 왕관 계승권과 왕좌에 관련된 어떤 권한도 포기한다.”

 

고종을 닮아 유약했던 이강은 이처럼 고된 환경에 단련되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며 자포자기 하고 만 것이다.

 

 

의친왕 이강. 왕족이 아닌 일반 관료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삶이 얼마나 불우했는지 보여주는 사진이다.  

               

   

광복 후에도 의친왕의 비극은 멎질 않았다.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왕실 재산 국유화와 왕족을 천대하는 바람에 정부를 원망하며 등지고 살아야했고 1.4후퇴 때 부산에 내려가 돌봐주는 이 하나 없어 수시로 밥을 굶어야했다. 이로 인해 결국 영양실조에 걸려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게 됐다.

 

훗날 그의 큰 아들 이건은 다음과 같이 아버지를 회고했다.

 

“아버지는 생활이 문란하기는 했지만 암우한 천성은 아니었다. 일족 중에 머리는 명석한 편이었다. 만약 장귀인에게 엄귀인(엄비)만한 총명함이 있고 조부가 보다 강한 성격과 소신의 소유자였던들 아버지가 왕통의 계승자는 못되었더라도 꽤 다른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평생 자신을 둔 주변의 불공평에 불평한 적이 없었으나 오로지 생모의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는 저녁 반주라도 할 때는 하염없이 한탄하고 슬퍼하셨다. 아버지는 이처럼 비극적인 분이셨다.”

 

 

남가몽: 조선 최후의 48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박성수 (왕의서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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