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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 내가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말씀/ 마태복음 9:18-38 요절/ 마태복음 9:28 | 2020.6.14 |
마태복음 15강 |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어떤 문제는 친구들이나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짠 하고 나타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는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진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병이 낫고 인생문제를 해결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나아가 구원을 받고 새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우리 인생의 구원자는 누구이며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져오신 축복들을 받기 위해서는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말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그 관리는 누구입니까?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는 딸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독감 바이러스에 걸려 열이 39도까지 올라가더니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어찌하든지 살려보고자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그의 딸을 살라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오셔서 안수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안수해 주시면 죽은 딸이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딸이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딸이라도 예수님은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는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런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신약시대에 부활신앙을 보여준 첫번째 사람은 야이로입니다.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기적을 일으키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믿음을 보시고 일어나 그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중에 돌발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혈루증은 일종의 부인병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하혈하는 고질병입니다. 여인은 피를 많이 흘러서 빈혈에 시달리고 얼굴이 창백하고 매사에 기력이 없었습니다. 레위기15장에 의하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사람은 부정하며, 그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12년 동안 여인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그 날부터 여인의 삶은 망가졌습니다. 여인은 좋은 피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어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고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병을 낫고자 명의들을 찾아다녔지만 돈만 허비하고 병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이라면 자신의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예수님께 나가는 데는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부정한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어떻게 했습니까? 놀랍게도 여인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자 무리들 사이를 뚫고 예수님 뒤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의 겉옷 가를 살짝 만졌습니다. 마가복음 5장 29절을 보면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을 때 여인의 혈루 근원이 말랐다고 했습니다. 12년이나 여인을 괴롭혀 왔던 지긋지긋한 혈루병이 완치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요란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믿음만 있으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공로보다도 믿음이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인의 행동은 작은 것이었고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큰 믿음이요 창조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촉이 예민하신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단번에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로 영접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은밀하게 했지만 율법을 거스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정죄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여인에게 평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여인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 말씀은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여인은 그 즉시 전인적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코로나19 상황에서 드리는 예배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매주 한 편의 소감을 드리는 것은 세상의 큰 일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예배와 소감을 드리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예배와 소감을 크게 보시고 이를 통해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의 복이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관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은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슬피 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음과 잠은 완전히 다릅니다. 죽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뜻합니다. 그러나 잠은 피곤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 위해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다시 깨어날 수 없지만 잠은 다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심으로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신으로 인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능력 많으신 예수님일지라도 믿지 않으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무리들을 다 내보냈습니다. 불신적인 분위기를 신앙적인 분위기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와 제자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침상에 누워있던 소녀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러자 죽은 소녀가 즉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간절한 소원대로 그의 딸을 안수하사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선한 목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인류역사 이래로 인간을 괴롭혀 온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지 않고자 몸부림칩니다. 하지만 공자도 마호메트도 징기스칸도 나폴레옹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죽으면 영원히 이별을 하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통곡합니다. 세월호 침몰로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과 고통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깜짝 놀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가장 큰 원수 죽음을 정복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죽음을 정복하시고 죽음을 잠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은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인간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입니다.
27-34절은 보지 못하는 맹인과 말 못하는 벙어리를 고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을 떠나가실 때 두 맹인이 따라왔습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소경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소경은 일생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어서 대부분 맹인들은 구걸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영적인 소경들은 눈이 보이는 현실만이 전부인양 생각합니다.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살다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맹인들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맹인들은 볼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자포자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찌하든지 눈을 뜨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습니다. 맹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쯤 가시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두 맹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다시 말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줄 수 있는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는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보다 더 절실한 외침이요 기도입니다.
그들의 외침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맹인들의 외침이 예수님의 귀가에서 메아리쳤지만 예수님은 못 들은 척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맹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시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낙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들어가서 다시 간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치지만 믿음 없이 소리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믿음이 없으면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나타내시기 전에 먼저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원하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은 대답을 못합니다. 믿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믿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과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는 믿음의 주님이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두 맹인은 예수님의 질문에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포기치 않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빨리 기도 응답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더 큰 믿음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에 감동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그들의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눈도 밝아져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한 것처럼 큰 믿음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루터는 열이 없는 불이 존재하지 않듯이 도전적인 기도가 없이는 믿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9:29). 무엇보다 우리는 절박한 문제 속에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절박한 문제 속에서 기도하고 믿음을 덧입어서 도전할 때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체험을 통해 실제적인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조간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이 가득한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여러 시련을 주심으로 그를 연단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주십니다. 이십년이 넘게 자녀를 위해 기도했는데도 자녀에게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기도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수년간 양을 돌보는 목자로 살았는데도 제자의 열매가 없을 때 목자의 직분을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이 들어옵니다. 하지만 기도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을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고,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10가지 기적 중에 마지막입니다. 이 사건의 특징은 기적 자체보다도 사람들의 반응을 더 비중 있게 다룬 데 있습니다. 무리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지만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무리들은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벙어리가 고침 받는 일이 예언되었지만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입니다.
35-38절은 이때까지의 예수님의 역사를 요약하면서 새 역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국을 발로 뛰며 생명구원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이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고생하며 기진합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목자로 세움 받았지만 백성들을 돌보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런 삯군 목자들로 인해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안타깝기 그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셨습니다. 37b,38절을 보십시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에는 추수할 영혼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일꾼이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하는 주인 하나님께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세울 뿐 아니라 제자들을 통하여 새로운 추수할 일꾼들을 세우고자 하십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많지만 일꾼이 부족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데도 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목자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추수할 일꾼이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목자로 성장할 뿐 아니라 목자양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을 추수하는 일은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영혼을 추수하기 위해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추수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시오 소망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새로운 마음으로 배움으로서 긍휼과 소망이 충만한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인생들을 돌아보고 구원으로 인도하고 목자로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