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세 번째 반지
[세 번째 반지]
지난 주말 동생과 나는 유난히 차타는 걸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해 해안도로를 따라 시린 눈이 머무는 곳에는 잠시 멈추기도 하면서
봄의 향긋함과 바다의 너울 손을 양손에 잡은 채 섬을 한 바퀴 돌면서
흐르는 세월에 흠뻑 취한 여행을 했었다.
넋을 잃고 차창 밖을 연신 돌아보며 미소짓는 어머니의 옆모습이
어떨 땐 순진무구한 소녀의 천진함이 솔솔 묻어나오곤 했다.
내가 힘들 때면 무턱대고 비벼대던 어미니란 오래된 고향의 언덕처럼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우리는 미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섰다.
다양한 종류의 회를 주인장이 자랑삼아 상세히 소개를 했었지만
나이 드신 어머니가 먹기엔 아주 부드러운 멸치회가 ‘딱’이다.
맛이 괜찮은지 어머니의 젓가락이 쉼없이 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는데 우연히 어머니 젓가락과 내 것이 부딪치면서
나는 어머니의 손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굵고 마디진 어머니의 손가락에서 빛을 발하는 분홍색 구슬박힌 반지가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게 아닌가. ‘어... 어... ’
"엄마, 반지에 박힌 구슬이 수정이가?"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엄마는 "내는 모른다. 아마도 수정이 맞을 끼다..... "
하시면서 반지를 자꾸만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엄마의 손등엔 파랗고 굵은 선들이 거대한 龍처럼 꿈틀거린다.
거세게 몰아부친 삶의 흔적이 찐한 손가락에 끼어있는 이 반지가
내가 알기로는 어머니의 세 번째 반지인 것이다.
[첫 번째 반지]
어머니의 첫 번째 반지는 그 옛날
"엄마, 내 공부 좀 해야 되는데 책 살 돈이 없네......"
말이 별로 없는 나는 말재간도 없어 언제나 퉁명스럽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어머니는 며칠 후 노란 봉투를 내밀며
"아나, 이거 밖에 없다. 니가 꼭 필요한 것만 사 봐라."
그런데 봉투를 내민 어머니의 손엔 전에 보였던 반지가 보이질 않았다.
어머니는 아무도 몰래 그분의 소중한 반지를 팔아 마련한 돈을
자식인 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때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아들아, 꼭 시험에 합격해 훌륭한 판사가 되거라."라고 빌었을 것이다.
지금 이 어머니의 첫 번째 반지는 무엇이 되어 어디에 있을까?
아마 내가 판사가 되어 이글을 쓴다면 하루아침에 우리 어머니의
첫 번째 반지는 유명해 졌겠지...
[두 번째 반지]
어머니의 두 번째 반지는 동생들이 해 드린 걸로 알고 있다.
난 삼십이 넘어 결혼을 했고 그때도 공부한답시고 이 절 저 고시촌을
방황하고 있었다.
‘고엽제후유증’ 때문인지 아니면 ‘전쟁공포증’ 때문인지
심한 빈혈이 자주 일었고 가끔 정신적 공황에 빠지곤 했었다.
아내와 난 자식을 낳지않고 친구로 일생을 함께 할것을 약속하고 결혼했으나
결국 아내는 그 약속을 어기고 내 나이 서른여섯에 첫 아이를 낳게 되었다.
아내도 나이가 있는지라 자연분만 대신 제왕절개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아내는 친정에서 자연분만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했었지만....
어느날 아침 식사 후 파랗게 죽어가는 아내를 처남이 그대로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 수술을 한 것이다. 산모가 우선이니 숨도 쉬지 않는
애기는 그대로 밀어 팽개쳐 버려두고...
사실 큰놈(호진)은 자연분만 하려다 보니 정상보다 20여일 늦게 나왔다.
인명은 재천이라, 죽었다고 버려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나는 살아있다’고 외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에게도 아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생활이 힘든 줄 아는 어머니는
"병원비 있나? 제법 많이 나오낀데... "
당시 일반 국민은 의료보험 혜택이 없었다.
나는 "........ "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나, 이거하고 좀 더 보태서 아이 하고 애미 퇴원 시켜라."
하시고는 어머닌 나에게 또 다시 봉투를 내 밀었다.
회갑 때 동생들이 해 준 두 번째 반지를 어머니는 묻지도 않고
조용히 손자를 위해 내놓으며 부담스러워 말라 하셨다.
언젠가는 이 사실을 큰 놈에게 얘기 해 줘야지.
얼마 전 나는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조카와 동생들에게 했다.
“진짜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나?”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미안해서인가? 아니면 무엇 때문에...
하다못해 대학총장이라도 되었더라면
이글은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련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내 삶은 고달프다.
자식이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니 이 어이 슬프지 않겠는가.
그냥 묻어두고 갈까하다 어머니에게 속죄하는 맘으로 원고를 보냅니다.
못난 자식으로 그토록 고귀한 어머니의 반지는 결국 빛을 잃고 마는구나!!
올해 아흔(2011년)인 어머니는 치매와 중풍으로 하루하루를 힘겨워 하면서
오늘도 자식인 나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애처러운듯 눈시울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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