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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교육삼락회 2015년 8월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5년 8월 14일(금)
장소 : 영천호국원. 오어사. 기림사. 경주박물관. 용담정. 나원리오층석탑
반월당(08:00 출발) - (101.4km. 1시간30분) - 오어사(9:30 도착. 관람 1시간. 10:30 출발) - (20.1km. 23분) - 기림사(10:53 도착. 관람 1시간. 11:53 출발) - (28.1km. 40분. 점심 1시간) - 경주박물관(1:33 도착. 관람 1시간. 2:33 출발) - (10.5km. 20분) - 나원리오층석탑(2:53 도착. 관람40분. 3:33 출발) - (9.7km. 18분) - 용담정(3:51 도착.관람 40분. 4:31출발) - (14.6km. 21분) - 국립영천호국원(4:52 도착. 참배 1시간. 5:52 출발.054-330-0860 전화로 사전 예약) - (63.4km. 1시간 10분) - 반월당(7:02 도착)
오어사(吾魚寺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읍 오어로(항사리)운제산(雲梯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 때 창건하여 항사사(恒沙寺)라 하였다.
그 뒤 신라 고승 원효(元曉)와 혜공(惠空)이 함께 이곳의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방변(放便)하였더니 고기 두마리가 나와서 한마리는 물을 거슬러올라가고 한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는데, 올라가는 고기를 보고 서로 자기 고기라고 하였다는 설화에 의하여 오어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유적에 의하면 자장(慈藏)과 혜공·원효·의상(義湘)의 네 조사(祖師)가 이 절과 큰 인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절의 북쪽에 자장암과 혜공암, 남쪽에 원효암, 서쪽에 의상암 등의 수행처가 있었으므로 이들 네 조사의 행적과 연관짓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나한전(羅漢殿)·설선당(說禪堂)·칠성각·산령각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을 제외한 당우들은 모두 최근에 건립된 것이다. 이 절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대웅전 안에 보관되어 있는 원효대사의 삿갓이다.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삿갓의 높이는 1척이고 지름은 약 1.5척이다. 뒷부분은 거의 삭아버렸지만 겹겹으로 붙인 한지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삿갓은 마치 실오라기 같은 풀뿌리를 소재로 하여 짠 보기 드문 것이다.
이 밖에도 절내에는 불계비문(佛契 碑文)·염불계비문(念佛契碑文)·운제산단월발원비문(雲梯山檀越發願碑文) 등과 부도가 있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자장암과 원효암이 있으며, 오어사 앞의 저수지와 홍계폭포, 기암절벽 등의 경치는 일품이다.
혜공 : 선덕여왕 때의 승려. 아명(兒名)은 우조(憂助). 신라십성(新羅十聖)의 한 사람으로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여종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보이자 천진공이 권유하여 출가, 이름을 혜공이라 하였다. 만년에는 영일군(迎日郡) 항사사(恒沙寺)에 머물렀으며, 원효(元曉)가 경소(經疏)를 지을 때 의심나는 것을 그에게 물었다고 한다. 평생 기적을 많이 남겼고 입적할 때도 공중에 떠서 입적하였으며, 남긴 사리(舍利)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전한다. 일찍이 《조론(肇論)》을 보고 전생(前生)에 자기가 지은 것이라 하여 사람들이 그를 승조(僧肇)의 후신이라 여겼다
똥으로 물고기를 살려내다.-"저 물고기는 내 고기야!"
삼국유사 제4권 [의해편]에 나타난 오어사는 고승 혜공의 흥미진진한 행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 가기 위하여 운제산 계곡에서 원효암이라는 초가를 짓고, 불철주야 열심히 정진하던 차에 혜공선사는 중국에서 부처님의 전업을 이어받은 인가를 받아와서 70명의 대중을 공부를 시키고 오어사에 거주하던 중 하루는 두사람이 운제산 계곡 맥반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정진하던 중 혜공이 마음이 동하여 원효에게 물었다.
"대사는 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아 오려면 부처님의 대법을 이을 수 있는 신통한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법력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세" 그러니 원효가 "그럼 무엇이든지 법력을 겨루어보세" 라고 해서 명경지수가 흐르는 계곡에 산고기가 노니는데 그 고기를 한 마리씩 산채로 삼켜서 바위 끝에 앉아 대변을 봐서 산채로 고기가 나오면 이기는 걸로 했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 부치고 계곡에 뛰어 들어가 서로 한 마리씩 고기를 나누어 삼켰는데 두 마리 고기 중 한 마리는 살아서 나오고 다른 한 마리는 죽어서 나오게 됐다. 그런데 살아있는 고기가 활기차게 상류로 올라갔다. 그 고기를 보고 대사가 서로 떠밀면서 " 저 고기가 내 고기야" 라는 말에서 오어사 라는 말이 삼국유사를 썼던 일연스님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운제산 :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원효암과 자장암을 왕래 하기가 힘들어 구름다리을 만들어 오고 갔다 하여 구름운(雲), 사다리제(梯)자를 써서 이름붙쳤다고 전함
포항 오어사 대웅전(浦項 吾魚寺 大雄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2호.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오어로 1 (오천읍))
운제산에 있는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세운 절로 ‘항사사’라 불렀다. 후에 신라 고승 원효와 혜공에 얽힌 설화로 ‘오어사’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설선당, 칠성각, 산령각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조선 영조 17년(1741)에 고쳐 지은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포항 오어사 동종(浦項 吾魚寺 銅鍾. 보물 제1280호.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오어로 1, 오어사 (항사리))
신라시대 종의 형태를 하고 있는 고려 범종으로, 종의 꼭대기 부분에 종을 매다는 역할을 하는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다.
몸통부분의 위와 아래에는 횡선의 띠를 두르고, 같은 무늬를 새겨 넣었다. 3분의 1되는 곳 위쪽으로는 사각형의 유곽을 만들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모양의 유두가 있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종을 치는 곳인 당좌를 따로 둔 것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 종 몸통의 문양을 보면 서로 마주보고 꽃방석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보살을 새겼고, 다른 두 면에는 범자가 들어간 위패형 명문으로 장식하였다.
고려 고종 3년(1216) 주조되었고, 무게가 300근이나 되고 오어사에 달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종의 변천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기림사(祇林寺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로서 16동의 건물로 불국사 다음 가는 규모다. 이 절은 신라 초기에 천축국의 사문 광유성인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임정사라 불리다가 원효가 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길이 없다.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 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 나무와 목탑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은 6차례나 다시 지어졌다는 대적광전은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맞배지붕의 건물로 단아하고 웅장하다.
기림사는 또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하다. 오종수라고 불리는데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감로수와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화정수, 기골이 장대해진다는 장군수,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오탁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장군이 태어날까 두려워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장군수를 제외하곤 다른 네 곳은 지금도 각기 다른 물맛을 내며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 기림사로 가는 도중에 12개의 석굴로 이뤄진 골굴사가 있다. 원래는 기림사 산내 암자였으나 독립 사찰이 된 후 선무도의 본산이 돼 전국에 선무도를 보급하고 있다.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 보물 제415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기림사)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慶州 祇林寺 乾漆菩薩半跏像)는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의 기림사에 모셔진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 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당당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경주 기림사 대적광전(慶州 祇林寺 大寂光殿. 보물 제833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기림로 437-17, 기림사 (호암리))
기림사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慶州 祇林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보물 제958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20번지 기림사)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은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慶州 祇林寺 塑造毘盧舍那佛 腹藏典籍.보물 제959호.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20번지)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사경(寫經)과 목판본(木版本) 등 일괄 54건 71책이다. 사경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4년(1348)으로 추정되는 『상지은니대반야경(橡紙銀泥大般若經)』 권 210 등 10첩(帖)이 확인되었고, 목판본은 고려 숙종연간(肅宗年間, 1096∼1105)에 조성된 목판에서 13세기 초반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불화엄경』 권26(大方廣佛華嚴經 卷二十六)을 비롯하여 고려말 인출본과 조선 초기 인출본 그리고 연산군 6년(1500) 합천(陜川) 봉서사(鳳栖寺)에서 판각 인출한 『선종유심결(禪宗唯心訣)』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장정 형태도 조선시대에 상당수 확인되는 선장본(線裝) 외에 고려 사경(高麗寫經)에서 많이 확인되는 첩장본(帖裝本)과 흔하지 않은 장정 방식인 호접장본(胡蝶裝本)과 포배장본(包背裝本) 등이 골고루 확인된다. 호접장본으로는 고려 충선왕 1년(1309)에 새겼던 목판에서 공민왕 19년(1370)에 다시 인출(印出)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권 4∼7, 8∼9 그리고 중국 송(宋)에서 만들어진 목판(木板)에서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방광물화엄경소(대방광불화엄경소)』 권97 등이 있다. 한편 포배장본으로는 고려말 인출된 것으로 보이는 『대방광원각약소주경(大方廣圓覺略䟽注經 )』 권상2,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儀)』 권하 등이 있다.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의 전적 유물은 고려시대 조성되었던 은자대장경(銀字大藏經)의 실례를 보여주며, 고려시기 판각(板刻)되었던 목판의 인출과 다양한 장정(裝訂)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 사경과 여러 목판본에서 확인되는 조성 목적과 조성 시기와 장소 그리고 관여했던 인물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는 조성 당시의 역사상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경주기림사비로자나삼불회도(慶州 祇林寺 毘盧遮那三佛會圖. 보물 제1611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20번지 기림사)
이 불화는 기림사 대적광전의 후불탱화로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삼불회도로서, 중앙에 비로자나불회도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회도, 오른쪽에 아미타불회도가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조성된 삼불회도는 석가모니불화(중앙)·약사불화(좌)·아미타불화(우)로 구성된 삼세불화와 비로자나불화(중앙)·노사나불화(좌)·석가모니불화(우)로 구성된 삼신불화가 일반적이지만 이 불화에서는 비로자나불화와 아미타불화, 약사불화로 이루어져 있어 삼세불화와 삼신불화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 남송대부터 나타난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등 16세기 불상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지만, 불화 중에서 기림사 불화가 가장 이른 시기의 예에 속하기 때문에 자료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 삼불회도는 전반적으로 한 화면에 많은 존상을 배치하고 있는데, 중앙의 주불을 중심으로 점차 화면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상승하면서 높은 존격에서 낮은 존격으로 배치하고, 인물의 표현도 점점 작아지게 하여 화면에서 원근감과 입체적인 공간감을 살리고 있다. 색채에서 후대에 일부 개채의 흔적이 보이지만, 황토색의 바탕에 홍색·녹색·노란색·하늘색·초록색 등이 적적하게 조화를 이루어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불화는 천오(天悟)·금명(錦明)·최훈(最熏)·적조(寂照)·지순(智淳)·조한(祖閑)·임한(任閑) 등의 화원이 참여하여 1718년(숙종 44)에 그렸는데, 천오와 임한은 18세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화승들로 기림사 불화의 진가를 짐작케 한다.
기림사삼층석탑(祇林寺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현재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 있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있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로 이루어진 머리장식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2개에서 1개로 줄어들고, 지붕돌받침이 4단인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기림사응진전(祇林寺應眞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응진전은 기림사 내에 있는 건물로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로 단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을 볼 때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18세기 이후)의 건물이다.
기림사진남루(祇林寺鎭南樓.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진남루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기림사약사전(祇林寺藥師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19번지)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동쪽에 있는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불당이다.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 5년(1654)에 고쳐 세운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경주기림사소장유물(慶州祇林寺所蔣遺物.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01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420번지 함월전시관)
경주 기림사에 전하는 나무 비목 8점, 금구 1점, 석조 치미 1점의 유물들이다.
나무 비목은 18∼19세기 절의 수리 상황을 기록한 자료로, 돌 비석이나 철 비석에 비해 흔하지 않은 예로 그 가치가 높다. 금구는 금고, 반자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릴 때 사용하는 일종의 타악기이다. 기림사 금구는 직경 70㎝, 두께 11.5㎝로 청동으로 제작되었으며 조선 경종 2년(1722)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는 글이 새겨 있다.
치미란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 부착한 대형 장식 기와를 말하는 것으로, 주로 점토로 만들어졌다. 기림사 석조 치미는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은 편으로 현재 총 길이 95㎝, 너비 70㎝만 남아 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점토로 된 기와 제품이 아닌 돌로 이루어진 것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경주박물관 특별전시.2015-07-21 ~ 2015-11-01. 특별전시관 )
이 전시회는 국립경주박물관의 개관 70주년 기념전이자, “실크로드 경주 2015”의 선도적 테마 행사입니다. 신라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국내 특별전으로서는 처음인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이루어진 조사연구의 성과를 바탕으로 ‘황금문화’, ‘능묘’, ‘대외교류’, ‘왕경’,
‘불국토’ 등의 5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부별 전시품으로서 금관총(金冠塚) 금관 등 국가지정문화재 22건 30점을 포함한 600여
점의 다양한 신라 문화재가 선보이며,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최초로 경주에 전시됩니다(단, 2주간만 전시: 7.21.~8.2.).
제1부. 황금문화
오늘날의 시각적 표상으로서 신라가 부각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부터였습니다. 근대적
학문인 실증적 역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의 관점에서 신라문화가 재조명되며 ‘문화재’라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 사례는
1921년 금관의 발견이었습니다. 금관총에서 금관을 비롯해 처음 보는 신라의 황금 유물들이 세상에 불쑥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의 이미지는
인쇄술과 사진의 발달로 인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금관총 금관을 비롯하여 경주 보문동합장분 출토 금귀걸이, 경주
노서동 출토 금목걸이 등 일제강점기에 출토된 신라 황금문화재를 예로 들어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봅니다.
제2부. 능묘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시작한 신라능묘의 발굴은 197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를 정통으로 보는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가 집중적으로 조명되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의 지시로 1973년부터 경주고도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한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들이 발굴되는 등 신라문화에 대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성과는 1974년 10월
대릉원의 개원 그리고 1975년 7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축 개관과 함께 공개되면서, 신라 왕릉의 실체와 의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보여주는 광복 이후 신라능묘 출토품과 금제 관식, 은제 관모 등 천마총·황남대총의 화려하고 다양한 부장품을 전시합니다.
제3부. 대외교류
1970년대의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마립간 시기의 각종 금제품과 돌무지덧널무덤의 연원을 북방
초원지대로 보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울러 당(唐), 중앙아시아, 인도에까지 구법승(求法僧)이 오갔던 신라 통일기의 국제적 성격 등도
거론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신라문화 연구의 다각화와 함께 그 범위와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음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림로
14호묘 보검, 황남대총의 봉수형 유리병, 식리총 식리 등을 전시합니다. 또한, 신라 통일기의 활발한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경주고등학교
소장의 무인석상이 처음으로 박물관 전시에 선보입니다.
제4부. 왕경
경주 시내의 대형 능묘 발굴이 일단락된 뒤, 신라
왕경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양한 성격의 유적들이 조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장기간에 걸쳐 월지(안압지)와 황룡사터 등의 대형 유적이
발굴되었으며, 생활 유적들도 조사되어 왕경의 구조와 특징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촉발되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월성 내부의 발굴, 일제강점기에
부실하게 수습되었던 금관총의 발굴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월지의 용얼굴무늬 기와와 보상화무늬 전, 황룡사터의 각종 공예품, 경주박물관 남쪽
부지에서 나온 ‘東宮衙’가 새겨진 단지 등이 전시됩니다.
제5부. 불국토
불교미술품이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고,
‘문화재’라는 가치가 부여된 것도 일제강점기부터였습니다. 불상의 복장품이나 불탑의 사리장엄구를 도굴하여 불법으로 거래하는 나쁜 풍조가 생긴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재가 파괴되고 그 출처를 알 수 없게 되는 등 그 후유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5부에서는 신라
불교문화의 융성을 보여주는 불상과 불교공예품들이 전시됩니다. 특히 국보 제83호 금동 반가사유상이 경주에서 처음으로 전시됩니다(전시 기간
7.21.~8.2.). 이밖에 경주 구황동 석탑의 국보 제79호 금제 아미타불좌상(전시기간 8.4.~11.1.), 사천왕사터 출토 ‘東塔西’가
새겨진 금동 장식, 경주경찰서 소장의 부처가 새겨진 탑신석(경주 외동읍 입실리 절터) 등도 주목되는 작품입니다. 이밖에 ‘신라’를 소재로 한 한
이응노, 박대성, 배병우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될 예정입니다.
마무리. 신라의 현재적 의의
이 전시를 마무리하며 신라의
현재적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신라’라는 국호에 주목합니다. 주지하듯 제22대 지증왕(재위 500~514) 때 확정된
‘新羅’는 ‘德業日新 網羅四方’(덕업이 날로 새롭고, 사방을 망라하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덕업일신’은 바로 변화와 개혁 또는 혁신이며,
‘망라사방’은 세계화 또는 글로벌리제이션에 다름 아닙니다. 이처럼 ‘신라’는 오늘날에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라’의 현재적 의의일 것입니다. 개관 70주년과 ‘실크로드 경주 2015’를 맞이하여 개최하는 이 특별전이 ‘신라’를 바탕으로 21세기 우리
문화를 융성케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출처:국립경주박물관)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 국보 제39호. 경북 경주시 현곡면 라원리 676)
나원리마을의 절터에 남아 있는 석탑으로, 경주에 있는 석탑 가운데 경주 감은사지 동ㆍ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과 비교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순백의 빛깔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나원 백탑(白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기단과 1층 탑신의 몸돌, 1·2층의 지붕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는데, 가운데 조각을 아래층은 3개씩, 위층은 2개씩 두었다. 탑신부는 각 층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예리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고,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부서진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잘려나간 찰주(擦柱: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는 쇠꼬챙이)가 남아있다.
짜임새있는 구조와 아름다운 비례를 보여주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세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 부근에서는 보기 드문 5층석탑으로, 탑이 지니고 있는 듬직한 위엄에 순백의 화강암이 가져다주는 맑은 기품이 잘 어우러져 있다. 높은 산골짜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모습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함이 묻어난다.
용담정(龍潭亭) :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산63-1
용담정은 대신사 스스로 용담수류사해원(龍潭水流四海源), 즉 ‘용담의 물이 흘러 네바다의 근원이 된다’고 하신 것처럼 후원 세상을 이끌어나갈 진리가 처음으로 열린 후천개벽의 성지(聖地)이다. 본디 용담정은 대신사의 할아버님이 대신사의 아버님(근암 최옥)을 공부시키기 위해 처음지었던 ‘용담정사’를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주유천하에서 돌아와 용담정이라 고쳐 부르고 수도에 전념하시던 중 득도하시게 된 곳이다. 용담정을 감싸안고 있는 구미산(龜尾山)은 경주 서쪽에 위치한 명산으로 대신사가 태어나던 날 3일 낮밤을 울었다고 전해진다. 또 대신사의 아버님이신 근암공 최옥께서는 일찍이 26편의 시로 구미산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였다. 용담정은 대신사가 대구장대에서 순도하신 이후 폐허가 된 것을 포덕 55년에 황해도 교인 오응선, 이계하 두분이 재건하였고 포덕 (1961)에는 <천도교 부인회><천도교 부인회>에서 중건하였으며 포덕 (1947)부터는 용담정, 용담서사, 용담수도원, 포덕문 등을 갖추어 대대적으로 성역화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천도교 성지)
“사람마다 마음 속에 한울님을 모셨으니 사람이 곧 한울(하늘, 인내천 사상)”임을 깨달아 천도교(동학)를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가 태어나고 동학을 포교하다가 뼈를 묻은 곳이며, 경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현곡면 가정리 일대는 조선 후기 민심을 사로잡은 민족 종교 ‘동학’의 발상지이다.
관광객이 몰리는 시내와 떨어져 있는 데다 교통도 편리한 편이 아니어서 아직까지 이곳을 찾는 여행객이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천년 고도 경주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싶은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곳이다.
용담정은 구미산 기슭 132만 2320㎡의 넓은 땅에 민족 종교인 동학의 발상지라 하여 1975년에 성역화 작업을 통해 천도교 수련 시설로 정비되었다.
입구의 포덕문을 들어가 최제우 동상을 끼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가장 높은 곳에 용담정이 있다. 용담정은 그의 아버지가 글을 가르치던 곳이며, 최제우가 천도교를 창시한 뒤 포교 활동을 하며 〈용담유사〉를 쓴 곳이다.
용담정에서 1km 떨어진 가정리 마을에는 최제우생가터가 있고, 용담정으로 오르는 길의 오른쪽 구미산 줄기에 최제우 묘가 있다.
최제우가 태어난 당시 국내는 관리들의 폭정에 의한 과도한 세금과 천재지변, 대외적으로는 영토 확장을 위해 동양으로 진출한 서양 세력과 충돌하며, 백성들의 불안과 고통이 극에 달해 있었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예로 태어난 최제우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통해 학문을 익히면서 민중을 구제할 생각에 골몰하였는데, 격변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울님의 뜻(천도)을 알아내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고, 천도교를 창시하고(1860년),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는 데에 맞서 우리의 도를 천명하였다는 뜻으로 ‘동학’이라 이름하였다.
1861년부터 경주를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는데, 곧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랐다. 동학의 가르침이 경주를 넘어서 경북 지역으로 빠르게 세력을 얻어가자, 전국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가 그 지역의 신도를 이끌며 전국으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동학의 급속한 교세 확장을 지켜보던 조정은 동학을 민심을 현혹하는 ‘사술’이라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쫓김을 당하던 최제우는 제자 최시형을 2대 교주로 임명하고 1863년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3월 ‘삿된 도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대구에서 효수형을 당한다.
교주 최제우는 동학을 포교한 지 3년 만에 잡혀 죽고, 제자들은 유배되었으며, 2대 교주 최시형도 끝없이 쫓김을 당하면서 동학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가난하고 핍박받은 사람들은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크게 이끌렸다.
1894년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동학농민전쟁이 꼭 동학 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최제우의 동학이 물꼬를 튼 것은 어김없는 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종교가 발생된 곳답게, 구미산 자락으로 둘러싸인 용담정 일대는 신성한 기운이 짙게 감도는 듯하다. (출처 : 경주시청)
국립영천호국원(경북 영천시 고경면 호국로 1720)
나라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호국 영령을 추모하며 그분들의 희생과 애국애족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현재는 추모뿐만 아니라 전후 세대의 호국 안보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영천은 나라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굳건히 이겨낸 영광스러운 역사의 현장으로 곳곳에 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특히 민족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 당시 신녕전투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보루로서 총반격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나라의 운명을 되살린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6·25 전쟁 및 월남전 참전자 등 약 50만 명에 이르는 참전유공자 대부분이 고령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훈연금을 받고 있는 전사자, 공상자를 제외하고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훈혜택이 미흡했다. 또한 참전유공자들의 국립묘지 안장문제도 안장자격과 수용능력의 한계 때문에 대부분의 참전유공자들이 안장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하여 1994년 5월 국가보훈처에서 「향군 참전군인 묘지 조성사업계획」을 수립한 후 1997년 4월 14일 공사를 시작하여 2002년 1월 1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영천호국원으로 개원하였다.
[변천]
1994년 5월 「향군 참전군인 묘지 조성사업계획」이 수립되고 1996년 10월 1일 향군 참전군인 묘지추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97년 4월 14일 조성공사를 시작해 2002년 1월 1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영천호국원으로 개원했다. 2002년 3월 12일 호국영령 31위(位)에 대한 제1차 합동안장행사를 시행했으며 같은 해 4월 30일 호국용사묘지 준공식을 가졌다. 2006년 1월 30일 국립 영천 호국원으로 승격하였으며 2007년 1월 1일 국가보훈처 소속 국립묘지로 편제되었다. 2012년 2월 8일 봉안 묘역과 충령당 제1관이 만장(滿場)됨에 따라 2월 24일 충령당 제2관을 개관했다.
[구성]
국립 영천 호국원은 2만 2천여 기(基)를 안장할 수 있는 봉안 묘역[국가유공자·한국전쟁 참전군인·한국전쟁 참전경찰·월남 참전군인묘역], 1만 2천여 기를 안치할 수 있는 납골당 시설인 충령당 제1관[봉안실·영상제례실·헌화대·유가족휴게실 등으로 구성], 2만 5천기를 안치할 수 있는 납골당 시설인 충령당 제2관[봉안실·참배실·호국안보갤러리·도서휴게실로 구성]이 있다.
이외에 추도식과 안장식을 거행하는 현충관, 호국안보전시관[전쟁역사실·한국전쟁실·해외파병실·유품전시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충탑·현충문·홍살문·영천대첩비·전투장비전시관·호국지(護國池)·식당 및 매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현황]
국립 영천 호국원의 총 부지면적은 약 36만 9천㎡이며 호국영령 2만 7천여 기(基)가 안장되어 있다. 영천에서 28번 국도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약 25km 지점에 있으며 연중무휴로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11~2월)에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한다.
운영을 위한 조직은 원장·관리과·현충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직원은 관리과 11명[총괄 1명, 총무팀 6명, 시설팀 4명], 현충과 12명[총괄 1명, 현충팀 7명, 전례팀 4명]이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 자료 : 문화재청 자료.경주시청 자료.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