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밭을 갈고 있습니까?
(송현 로마노 신부)
중세 프란치스코회의 스코토 수사가 밭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싸움이 일어나 한 농부가 상대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습니다.
스코토가 그를 타일렀습니다.
여보시오. 당신 영혼을 위해서라도 드렇게 남을 저주하면 안 됩니다.
농부가 대뜸 응수했습니다.
수사 양반. 하느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지요?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지어 지옥에 갈 것인지.
아니면 천국에 갈 것인지도 전부 알고 계시지 않겠소?
저주의 말 때문에 내가 지옥에 간다면 하느님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계실 테고
난 분명히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니 못할 일이 무엇이겠소?
스코토가 찬찬히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지금 밭을 갈며 고생하고 있습니까?
그 밭에서 열매를 얻을 것인지 아닌지 하느님이 모두 결정해놓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땀을 흘리며 애쓸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느님은 하늘에서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지만 땅에서 밭을 일구는 것은 인간의 몫이랍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는 항상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주도권은 그분에게 있지만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 가운데 그 농부와 같은 이가 있습니다.
자신은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주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듯.
가난한 이에게 필요한 양식은 하느님이 모두 해결해주시겠지.
앓는 이와 슬퍼하는 이는 하느님이 치유해주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들 역시 하느님이 인도해주실 것으로 여기며 팔짱을 낀 채 방관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 자신은 아무런 투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재앙을 면하고 현세적 축복을 비는 `기복적 기도`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유럽의 박물관이나 대성당에 빠짐없이 걸려 있는 성화가 있으니
바로 성모영보 장면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에서 그만큼 중요한 사건임을 반증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이천 년 전 사건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엄중히 일러줍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찾아 제멋대로 살지 말고.
내 일신 편한 것만을 추구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슴과 입이 되어 그분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야 합니다.
내 시간과 돈. 재능과 열정이 요구될 때 기꺼이 `예`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첫댓글 내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