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22 KBS1 방송 1645 땅방 생방송 토요일 땅이름 순례 25 ·망우동 ·망우리
배우리의 땅이름 순례 - `망우동ㅗㅗㅗ
망우동
1. 오늘은 망우리로 가 보자.
한가위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가위를 전후해서 성묫길이 붐빌 것 같다. 수도권 근처만 해도 벽제, 청계, 용미리, 파주 등으로 성묘를 가는 차들로 해마다 복잡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서울 사람들이 익히 오래 전부터 아는 망우리로 가 볼까 한다.
2. 망우리, 망우리고개가 있는 곳 말인가요?
서울 중랑구 망우동에서 구리시 교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망우리고개이다.
분명히 망우동 때문에 '망우'가 들어갔겠지만 고개 이름은 '망우동고개'가 아닌 '망우리고개'이다. ‘망우리’는 이 지역이 옛날에 양주군 땅이어서 그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러 왔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은 보통 ‘망우동’이라 하질 않고 망우리라 하고, 고개 이름도 망우리고개라 한다.
어느 한 고을이 군에서 시(市)로 되면 그 안의 ‘리(里)’들은 ‘동(洞)’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렇게 행정단위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불렀던 ‘~리’식의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많다. 미아동이 그렇고, 청량리가 그렇다. 하남시의 ‘미사리’와 ‘미사동’, ‘사리포구’로 많이 불리는 하남시의 ‘사리’와 ‘사동’의 예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3. 근처에 공동묘지를 끼고 있는 망우리고개, 태조 이성계와 관계가 깊다는 얘길 들었는데...
공원 형태로 묘지를 조성해서 정식 이름은 ‘망우리묘지’가 아니라 ‘망우리공원’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의 왕으로 추대된 것으로, 국가의 기초를 잡은 것으로 이성계의 만족은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죽은 뒤, 자기 시신이 묻힐 좋은 자리를 찾도록 측근에게 명했다. 그는 눈 감은 후의 일까지 세심히 생각하는, 어쩌면 무인답지 않은 지나친 정성 같은 것도 엿볼 수가 있다.
풍수를 중요시했던 태조는 무학대사, 하륜 등으로 하여금 자신의 음택(陰宅)을 물색하게까지 했다.
양주 땅 검암산 밑에 좋은 음택 자리가 있다는 전갈을 받은 태조는 그곳으로 왕림한다. 청룡, 백호 두 산줄기가 너른 벌판을 감싸안은 아늑한 명당은 돌도 별로 없는 옥토. 결국 태조는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뜻대로 이 명당에 묻혀 건원릉(健元陵)이 마련되고 그 후에도 능이 여럿 들어서 '서울 동쪽의 9릉'이라 해서 동구릉(東九陵)이 되었다.
좋은 신후지지를 정한 태조는 만족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망우리고개에 올라서서 자신의 음택이 될 자리를 바라보고 혼자 말하듯이 한 마디를 했다.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
근심(憂)을 잊겠다(忘)는 뜻의 이 한 마디 말은 결국 망우(忘憂)라는 지명을 낳았고, 이것이 고개이름과 동리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
4. 동구릉에 이성계의 능이 있군요. 지금은 그 곳이 양주 땅이죠?
풍수에 관해 관심이 컸던 이성계는 양주 검암산 밑 지금의 구리시 인창동의 한 산기슭을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정했다. 이 곳이 지금의 동구릉(東九陵)이다.
동구릉은 9릉 17위의 왕과 왕비, 후비 등을 안장한 왕릉이다. 사적 제193호. 1408년(태종 8)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터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 일대를 통해 족분(族墳)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王陵群)이다.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은 문조(文祖)의 능인 수릉(綏陵)이 아홉 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부르던 사실이 실록에 전하고 있다.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 이론에 합당한 지세임은 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들이 여러 대를 걸쳐 9개의 능터를 찾아낸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태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건원릉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묘함에 감탄해 “어떻게 이와 같은 천작지구(天作地區)가 있는가? 필시 인간이 만든 조산(造山)일 것이다.”라고 찬탄하였다 한다.
5. 망우리는 조선시대엔 경기도 양주 땅이라 하셨죠? 양주군 무슨 면이었나요?
망우리면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지면(九旨面)을 병합하여 구리면九里面)의 일부가 되고,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망우 출장소가 되었다. 이 지역은 1988년 동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중랑구로 되었다.
구리면은 나중에 구리시가 되었다. 즉, 구리시의 ‘구리(九里)’는 ‘구지’와 ‘망우리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다.
6. 망우리고개 근처에는 어떤 지명들이 있나요?
묘하게도 '뒤'자가 들어간 것이 많다. 망우동에 있는 '뒷말', 묵동에 있는 '뒷골'[後洞] 등. 여기서의 뒤는 물론 '앞'의 상대적 의미이긴 하지만, 많은 사자(死者)들이 묻혀 있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뒤'가 사후(死後)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망우동 옆 상봉동의 한 마을 이름이 '황천' 원래는 '황촌'인 것도 묘지와 관련지을 만하다. 황천(黃泉)은 바로 '저승'을 뜻하지 않는가.
지금은 공동묘지가 된 망우동의 산비탈. 세칭 '망우리 지하 다방'으로 통하는 이 곳엔 엄청나게 많은 '핑계 있는' 무덤들이 이 곳의 땅이름처럼 생전의 근심들을 흙 속에 몽땅 묻은 채 말없이 누워 있다.
"이제야 근심을 잊겠노라."
하늘은 태조 이성계의 입을 빌어 이 곳이 많은 사람의 '근심을 잊은 터'가 될 곳임을 미리부터 예고해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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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망우산 일대 83만 2,800㎡의 공간에 조성된 묘지공원이다. 1933년 5월 27일부터 공동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73년 3월에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찼다. 이장과 납골을 장려한 결과 2005년 9월 기준으로 1만 7,041기의 묘가 남아 있다. 한용운, 오세창, 서동일 등 독립운동가들과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등 17인의 유명인사가 잠들어 있으며, 안창호 선생의 묘도 이장되기 전에는 이곳에 있었다. 산책과 조깅을 즐길 수 있는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5.2km의 산책로 곳곳에 15인의 연보비가 놓여 있다.
이성계의 정치 행적과 풍수관
이성계는 고려 말인 충숙왕 4년(1335)에 함경도 화주(和州.지금의 영흥) 흑성리에서 전주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술에 뛰어나더니 장성하여 당시 고려를 소란케 했던 홍건적, 여진족을 억눌러 진압했고, 원나라의 패잔군을 섬멸했으며, 왜군이 침입했을 때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 무공으로 그는 국방의 중추에 참여하는 지위에 오른다.
1388년에, 고려가 원나라를 돕기 위하여 명나라가 점령한 요동(遼東.랴오뚱)을 공격할 때, 그는 원정군의 좌도통사로 임명받고 북으로 진군한다.
왕명으로 출병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원정의 무모함을 외치고 위화도(威化島)에서 우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달래어 군사를 남으로 돌려 개성에 들어와 친원파를 일소하는 동시에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을 내쫓고 새로 창왕(昌王)을 세웠다. 그리고, 친명(親明) 정책을 선언하였다. 다음 해에는 창왕도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하고 공양왕을 세워 스스로 삼군도총제사가 된다.
정권을 쥔 그는 토지 개혁에 힘써 과전법을 실시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더니 1392년에 드디어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배극렴(裵克廉) 등에 개경(開城)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때가 1392년으로, 고려가 34왕 475년의 명을 다한 해이자 조선 건국의 해가 되는 것이다.
그는 한양(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추대된 지 2년 후인 1394년 10월 25일 송악(개경.개성)에서 이 곳으로 천도하여 왕성과 궁궐, 종묘 등을 세웠다.
이성계는 풍수지리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도성(都城)을 쌓고 4대문을 낼 때 서울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동쪽의 낙산(駱山), 즉 지금의 동대문 북쪽, 전 이화여대 부속병원이 있는 자리가 너무 낮고 풍수적 기운이 약하다고 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하여 지(之)자를 추가해서 비보(裨補)를 했고, 남쪽의 관악산이 화기(火氣)가 있다고 하여 그 불기운을 막는다고 산꼭대기에 작은 연못을 팠다.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늘 마음에 걸려 남대문 앞에 인공적 연못을 만들어 두었는가 하면 불기운을 막기 위해서는 남대문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면서 '숭례문(崇禮門)'이란 현판을 세로로 달아 놓기도 했다.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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