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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전제는 수난과 고통입니다. 그래서 교황님께서도 십자가 없는 부활은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가 봅니다. 그 십자가를 생각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그 끝에 있는 유다의 행동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두고 '오 복된 탓이여'라고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에 성서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유다를 두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하셨는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것 같습니다.
We are in the midst of the holiest week of the Year and as we prepare to enter into Jesus' passion, death and resurrection anew, the Church has us ponder, all three days before Holy Thursday, the tragic figure of Judas Iscariot. It does this not merely because his betrayal chronologically preceded the events of the new and eternal Passover, but also because all believers have much to learn from the way the devil successfully tempted him.
우리는 일년의 가장 거룩한 주의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의 수난, 죽음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부활로 새로워질 때, 교회는 우리에게 성목요일 앞의 3일에 이스카리옷의 유다의 비극적인 모습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유다의 배신이 시간적으로 새롭고 영원한 파스카 사건에 선행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로부터 모든 신자들은 악마가 유다를 성공적으로 유혹한 방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In this Year of Faith, it's important for us to ponder in Judas' vices the virtues faith requires. Judas' greed puts the lavish love that should flow from faith, seen yesterday in Mary of Bethany's generosity in anointing Jesus' feet. Judas' despair highlights in contrast the type of trust Peter had, even though, like Judas, he was filled with shame for having betrayed and abandoned the Lord.
올해 신앙의 해에, 유다의 타락에서 신앙의 덕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제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에 향료를 바르는 모습을 보았을 때(요한 11:1이하, 마태26:6이하), 유다의 탐욕은 믿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헤픈 사랑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절망은, 비록 유다와 같았지만 주님을 배신하고 버렸던 것에 대하여 부끄러움으로 가득찼던 베드로의 신뢰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두드러집니다.
So let us look together at this tragic figure, the most notorious betrayer of all time, about whom Jesus said it was better for him never to have been born.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유명한 배신자로서 예수님께서 결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 비극적인 사람을 함께 살펴봅시다.
We learned yesterday from St. John that Judas was a thief. He robbed from Christ, from the other apostles, from the incipient Church. Jesus, for him, had become merely an excuse to seek after his own interests. Jesus was not the one thing necessary, as he was for Mary of Bethany. Jesus wasn't even an end, but merely a means for Judas to satisfy his own greed.
우리는 어제 성 요한이 유다는 도둑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요한12:6).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다른 사도들로부터, 초기 교회로부터 도둑질을 하였다.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그가 자신의 이익을 찾고 있는 것을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있어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베타니아의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있어서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였습니다.
Judas supposedly had serious qualms of conscience about the failure to sell the year's worth of aromatic nard with which Mary had anointed Jesus' feet, but he thought nothing about selling Jesus for 30 pieces of silver. Judas had been a disciple merely in his body, not in his heart.
유다는 아마도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바른 향기로운 향식물을 다른 사람에게 팔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 양심상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은전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는 마음으로가 아닌 몸만인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Judas had been called personally by the Lord, had lived with him for about 1,000 days, had followed him for three years, had heard him preach and teach, had seen him walk on water, still stormy seas, feed thousands with a five rolls and two sardines, raise three people from the dead, heal on countless occasions the sick, blind and lame and have mercy on countless sinners, had even received from the Lord the power to do many of these same things himself, and had been entrusted by him with the money bag for the Twelve.
유다는 개인적으로 주님에 의해 불림을 받았으며, 약1000일동안 주님과 같이 살았으며, 3년동안 주님을 따라다녔으며, 주님이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물위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위를 걷는 것을, 주님이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천명을 먹이신 것을, 주님이 세사람을 죽음에서부터 살리신 것을, 주님이 수없이 많은 경우에서 병자들과 맹인들, 그리고 절름발이를 고쳐주신 것을, 수많은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이와 같이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는 권능을 스스로 부여받았으며, 그리고 주님은 열두명의 사도들을 위한 돈지갑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But he tragically had never gotten to know Jesus, and even more tragically had never gotten to love him. He remained just a follower of Jesus on the outside, not on the inside. In betraying Jesus, Judas valued him less than a handful of coins, forgetting that it would profit him nothing to gain the whole world and forfeit his life.
그러나 비극적으로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그분을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가까이에서가 아니라 주변에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였을 때, 유다는 그분을 한줌의 동전으로 평가하였습니다.
This is in contrast to the example of St. Peter, whom we also see up close in today's Gospel. 이는 성 베드로의 예에서와는 대조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그를 가까이서 보게 됩니다.
Peter was an internal disciple, someone who followed the Lord not just with his body but also his heart. He desired to know the Lord with all his mind and to love him with all his heart, soul and strength. Peter wanted to do Christ's will. He wanted to follow the Lord.
베드로는 가까운 제로서, 그는 주님을 몸으로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따라다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그의 온 정신을 다하여 알고자 했으며, 온 마음과 영혼, 온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며 주님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I believe Peter really meant what he said, that he would lay down his life for the Lord (as he ended up doing upside-down on a Cross in the Vatican valley). But Peter failed to recognize what Jesus tells him in St. Matthew's Gospel: that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Peter's spirit did want to give himself entirely to following the Lord, but his flesh was so weak that he was willing to swear that he didn't even know the Lord - ultimately, to apostasize - just to stay warm on the cold dark night of Jesus' Passover!
베드로는 진실로 자신이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으며, 그는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그가 바티칸 계곡에서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린채 생을 마감한 것처럼). 그러나 베드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영은 하려고 하나 육체는 약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영은 스스로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그의 육체는 너무나 약해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신 어둡고 차가운 밤에 따뜻한 곳(당시, 베드로가 가야파집의 모닥불 옆에 있었던 것을 말하는 것임)에 있으면서, 결국 변절하여 주님을 모른다고 기꺼이 맹세하였습니다.
A similar thing happened to Peter when Jesus was walking on water. Peter begged the Lord to give him the ability to come to him - Peter always wanted to come to the Lord and be with him - and then actually began to walk on water. As soon as he took his eyes off of the Lord, however, as soon as his weak flesh took account of the wind, he sank and this fisherman, who lived on that lake and who obviously had to be a good swimmer, cried out to the Lord to save him from drowning. Peter's spirit was always willing, but his flesh was frail. Even though his flesh would betray the Lord, his spirit believed.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 때, 유사한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에게 자신도 물위를 걸어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간청하였으며 -- 베드로는 항상 주님에게 다가가서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 그때 실제로 물위를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으로부터 눈을 떼자 마자 그의 연약한 육체는 바람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자마자, 그는 물에 빠졌으며, 호수위에서 살았으며 명백하게 훌륭하게 수영을 잘해야 하는 이 어부가 주님께 물에 빠진 것에서 구해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베드로의 영은 항상 의도하였으나, 그의 육체는 깨졌습니다. 비록 그의 육체는 주님을 배신하였지만 그의 영은 믿었습니다.
We see the contrast between Peter and Judas especially in the response each had to betraying the Lord Jesus. During the scene in today's Gospel when all the apostles said, in response to Jesus' declaration that one of them would betray him, both Peter and Judas had protested with the rest, "Surely not I." But Peter couldn't fathom that before the cock crowed he would have denied the Lord three times. Judas, on the other hand, was continuing to live the lie he had been living at least for months with Jesus and the other eleven.
우리는 특히 베드로와 유다가 주 예수님을 배신할 때에 보인 반응에서 두 사람의 대조적인 것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의 한명이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을 때의 반응에서 모든 제자들이 말하였을 때, 베드로와 유다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확실히 나는 아니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수탉이 울기전에 그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유다는 계속하여 거짓으로 살았으며, 적어도 예수님과 다른 열한명과 함께 여러달을 생활하였습니다.
What is particularly and tragically moving in all of this the scene in the Gospel was taking place on what would be the last night of Judas' life. The following morning, as Jesus was about to be hanged by his limbs via nails on the man-made tree of the Cross to the northwestern part of Jerusalem, Judas would hang himself out of despair on a tree to the south in a field that became known as Hakeldama, or Field of Blood. He would hang himself with such force that an eviscerating disembowelment would result, as Peter tells us in the Acts of the Apostles. Judas, who betrayed the Lord ultimately to death for a handful of silver coins, would die even before the Lord himself died.
복음에서, 이 모습의 모든 것에서 특별하고 비극적인 것은 유다의 삶의 마지막날 밤에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의 북쪽지역에 있는 사람이 만든 십자가나무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사지에 못질을 하여 매달고자 할 때에, 유다는 피의 들판이라 알려진 Hakeldama의 남쪽에 있는 나무에서 절망에 의해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유다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창자가 제거되는 결과를 가져온 그 힘에 의해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을 한줌의 은전에 의해 죽음으로 몰고가는 배신을 한 유다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죽었습니다.
His personal catastrophe prompts us to ask: What had happened to this man? How could things have gone so wrong? How could, after three years with Jesus, he have given up all hope?유다의 개인적인 불행은 우리에게 다음 물음을 재촉합니다.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떻게 일이 그렇게 나쁘게 되었는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보냈는데, 어떻게 그는 모든 희망을 포기할 수 있는가?
In speaking about his betrayer in the upper room before Judas had departed into the night, Jesus said "Alas for that man by whom the Son of Man is betrayed! Better for him if he had never been born!" Jesus said this not because he would seek divine vengeance upon him for his betrayal, since Jesus came to die even for Judas and called him "friend" until the end.
유다가 그 밤에 떠나고 나서 이층 다락방에서 이 배신자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슬프다, 사람의 아들이 그 사람에 의해 배신당하다니! 그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를 위해서 더 나았을텐데."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유다의 배신에 대하여 거룩한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유다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He said it not because Judas' very name would become ignominiously attached to betrayal for the rest of human history. He said it because Judas went to his death, as far as we can discern, never having known and loved the Lord, who would have forgiven him even this betrayal of betrayals. 주님께서 위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유다의 이름이 이후 인류 역사동안에 불명예스럽게 배신자에게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유다는 우리가 알수 있는 한,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채, 심지어 주님께서는 이러한 배신자의 배신조차도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채,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Jesus went freely to the Cross. He himself said, "I lay down my life in order to take it up again. 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I have the power to lay it down, and I have power to take it up again. I have received this command from my Father" (John 10:17-18). Jesus freely went to his "fate," and if Judas hadn't been involved in it, someone else would have. After all, the Scribes, Pharisees and Herodians had been plotting to kill Jesus for over a year by this stage.
예수님께서는 자유롭게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나는 내 의지에 의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얻을 권한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이 명령을 받았다."(요한10:17-18) 예수님은 자유로이 그분의 운명으로 갔으며, 만약 유다가 그것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즉, 율법학자,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당원들은 이러한 과정으로 일년동안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입니다.
Judas had never realized that the point of life is to come to know and love Jesus, to trust in his mercy, to participate in his salvation, even if one doesn't explicitly know Christ, as Judas did for at least three years. Judas never realized this, and hence his life ultimately was tragically a waste - and it was better that he had never been born.삶의 단계는 유다가 적어도 삼년동안 그렇게 해온 것처럼 비록 어떤 사람이 명확하게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고, 그분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다는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유다는, 그래서 그의 삶은 궁극적으로 비극적인 낭비였으며,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던 사람이 된 것입니다.(마르14:21참조)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자비에 의탁하여 그분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거나 못한 삶은 낭비이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의미이다.)
Unlike Peter, who - after his apostasy when he swore that he never knew the Lord after having sworn hours earlier that he would never abandon him - wept when he realized he had sinned against the Lord and who turned to the Lord for mercy; unlike the Good Thief on the Cross, who hoping in God's love and mercy, turned to the Lord and asked Him to remember him when he came into his kingdom hours before his death; Judas never understood the depths of God's love and mercy.
베드로는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몇 시간전에 맹세한 후 주님을 모른다고 맹세한 그 배신을 한 후, 주님에 대하여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위하여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는 십자가위의 선한 도둑은 주님께 돌아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몇시간전에, 예수님께서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달리 유다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깊이를 결코 몰랐습니다.
He never understood the meaning of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He never understood the meaning of Jesus' teaching on the lost sheep and heaven's rejoicing more for one repentant sinner than for all those who never sinned and needed repentance. He never understood the meaning of Jesus' statement to Peter of the infinite forgiveness of God, seventy-seven times. He never understood that Jesus' whole mission was to come to save sinners, to save men just like Judas, to save Judas himself.
유다는 탕자의 우화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버린 양과 죄짓지 않고 회개할 필요가 없는 모든 사람들보다 오히려 회개하는 한명의 죄인을 더 기뻐하신다는 가르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70번의 7배의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에 대하여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유다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며, 유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After Judas had recognized how wrong his action was, after he saw that Jesus was condemned to death, he returned to the high chief priests and elders, as we'll see in tomorrow's reading, and said, "I have sinned by betraying innocent blood," throwing the silver pieces on the floor. Yes he had sinned! But rather than have that sin lead him to the One who was about to die to save him from that sin if only he would turn back to him, Judas, despairing of that forgiveness, went to field and took his own life. What a tragedy indeed!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달은 후,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것을 본 후, 그는 대사제와 원로들에게 돌아와 --우리는 내일 독서에서 이 내용을 봉독합니다. -- 바닥에 은전을 던지면서 "나는 무죄한 피를 배반함으로써 죄를 지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신을 만약에 예수님께 돌아가기만 하였으면 그를 구원하기 위하여 돌아가시려는 그분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유다는 들판으로 가서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 참으로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Where is the good news in the tragedy of Judas? Only God knows if there were any good news for Judas between the tightening of the noose and his sad death seconds later. For us, however, there is good news in the fact that Judas' example illustrates just how essential hope and trust in the Lord's mercy are for our Christian lives.
유다의 비극에서 좋은 소식은 어디에 있는가? 올가미와 그의 슬픈 죽음사이의 몇초동안에 그에게 좋은 소식이 있었는지 여부는 오직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유다의 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위해서 주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과 의탁이 얼마나 필수적인가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소식입니다.
No matter what we've done in the past, no matter what we might do in the future, no matter how bad we think our lot is, no matter how unforgivable we think we might be, we can always turn to and trust in the Lord's mercy. St. Peter did, even though he had considered a little warmth more valuable than his allegiance to Christ. St. Paul did, even though he used to kill Christians for a living, terrorizing the Christians in the 30s just like Nero would in the 60s and Roman emperors after that. And so should we.
과거에 무엇을 하였든, 미래에 무엇을 하든, 얼마나 나쁜 생각을 많이 하든, 얼마나 용서받을 수 없는 생각을 하든,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자비로 돌아가서 의탁할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비록 자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실보다는 작은 따뜻함에 더 가치를 두었었지만, 주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고 의탁하였습니다. 성 바울로는, 비록 서기 60년대에 네로와 같이, 그리고 그 후 로마의 황제들과 같이 30년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죽였지만, 주님의 자비에 희망을 두고 자비에 의탁하였습니다.
St. Paul himself wrote,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 He who did not withhold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all of us, will he not with him also give us everything else?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or angels, nor rulers, nor things present, nor things to come, nor powers, no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in Christ Jesus our Lord" (Rom 8:30-39). Nothing can keep us from God's merciful love - not even our sins against the Lord, unless we let them by refusing to come to receive God's mercy!
성 바울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시는데, 누가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아드님을 아낌없이 내주시는 분께서, 아드님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는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통치자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것도,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모든 것도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주님안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한다고 확신합니다."라고 썼습니다(로마8:31-39). 어떤 것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멀리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죄 조차도,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려는 것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죄조차도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지 못합니다.
The same Satan who entered into Judas and turned everything dark seeks to enter into us. Very often we've sold out Jesus for far less than 30 pieces silver, choosing instead to work for minimum wage rather than attend Mass, or to choose some momentary warm of the fire of illicit love instead of remaining faithful. So often we have opted for Barabbas in disguise rather than uniting ourselves with Christ through picking up our Cross everyday and following him. We have denied Jesus many more than three times out of weak flesh. And this week we will remember the Crucifixion he had to endure because of those betrayals.
유다의 마음에 들어왔고 모든 것을 어둠으로 돌려놓은 그 사탄이 우리에게 들어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매우 자주, 미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적은 돈을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성실한 상태에 남아있는 대신에 인정되지 않은 사랑의 불의 순간적인 따뜻함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은30전도 안되는 값으로 팔아넘겼습니다. 그래서 가끔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기보다는 변장하여 바라바를 선택해왔습니다. 우리는 약한 육체로 인하여 세 번보다 많이 예수님을 부정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우리는 이러한 배신들을 견디시는 그분의 십자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At the same time, however, we need, like Peter, never to lose hope in the Lord's merciful love for us. Jesus knew Peter would betray him, but Jesus also knew what Peter would do for him after he had received his forgiveness. That's why during the Last Supper, Jesus told Peter, "Satan has desired to sift you like wheat. But I have prayed for you, Peter, that your strength may not fail, and that after you have converted back to me, you will strengthen your brothers and sisters in the faith." And Peter did. The same Lord Jesus prays for us, for our conversion.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배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가 당신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최후의 만찬상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은 밀과 같이 너를 체질할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위하여 기도해왔다. 베드로야, 너의 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에게 돌아온 후 너는 신앙안에서 너의 형제 자매들을 강화시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But he wants us to pray, too. In order to try to strengthen the weak flesh of Peter, James and John, he told them in the Garden of Gethsemane, "Be vigilant and pray that you may not undergo the test, fo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flesh is weak." We know that rather than doing that, Peter, James and John fell asleep, and that was doubtless part of their betrayal. This week the Lord wants us to stay away and pray that when Satan seeks to sift us like wheat this week and beyond, we may pass that test we undergo with a strengthened flesh to accord with a loving spirit. 또한 그분은 역시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이 약한 육신이 강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은 게세마니동산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있어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영은 의지가 있으나 육체는 약하다." 우리는 그들이 기도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잠들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배신은 의심할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주에 주님은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며, 사탄이 이번 주와 그 다음에도 밀과 같이 우리를 체질하려고 할 때. 우리가 사랑의 영에 일치됨으로써 강화된 육체와 함께 우리가 겪는 그 시험을 통과하도록 기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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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자기들의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의 목에는 하느님의 찬송이, 그들의 손에는 쌍날칼이 있으리라. (시편 149 ,5-6)
- 찬양이야말로 세속, 육신, 마귀에 대항하는 무기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