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부제: 나비의 시간
이삭빛
우리가 서로 다른 별의 여행자였음을
그대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보다 가슴 저린 것은
우리가 그토록 뜨겁게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새가 날개를 접어 품듯
나의 숨결, 나의 눈빛을
오롯이 당신이라는 세상에 포개어 살았던 날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고치(집)였습니다
그대 떠난 자리에
검은 먹물처럼 침묵이 번져올 때
나는 두려움에 떨며 웅크렸습니다
이 차가운 어둠이 내 생의 끝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를 밖으로 밀어내던 그 모진 추위는
나를 버리는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등 뒤에서 톡, 톡 터져 나오려던
내 날개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내가 자꾸만 낯선 타향을 헤매었던 것은
이제 그 좁고 딱딱한 허물을 벗고
진짜 나의 하늘로 날아오르라는
내 영혼의 간절한 신호였습니다
이제 나는
나를 옥죄던 그 화려한 슬픔의 껍질을 벗어둡니다
당신이라는 아픈 허물을 넘어
나, 비로소 눈부신 나비가 되어
내가 주인인 저 찬란한 꽃밭으로
가장 가볍고, 가장 자유롭게 날아갑니다.
[시평] 상처가 날개가 되는 순간, 그 눈부신 나비의 시간!
— 이삭빛의 <허물>을 읽고
시평 윤정시인
이별은 아프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이다. 그러나 이삭빛 시인은 그 고통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시인은 <허물>을 통해 이별이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좁은 고치를 찢고 나와야만 하는 생명적 필연이었음을 선언한다. 이 시는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오히려 슬픔을 딛고 날아오르는 생의 찬란한 의지를 노래한다.
■한몸이라는 이름의 감옥과 허물의 재발견
화자는 지난 사랑을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고치'였다고 회상한다. 고치는 안전하지만, 동시에 성장을 멈추게 하는 닫힌 세계다. 시인은 사랑했던 대상을 허물로 규정함으로써, 그와의 이별이 버림받음이 아니라 벗어남임을 명확히 한다. 껍질을 깨지 않고서는 나비가 될 수 없듯, 그와의 결별은 내가 온전한 나로 태어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던 것이다.
■고통의 역설ㅡ등 뒤에서 돋아나는 날개
이 시의 백미(白眉)는 고통을 해석하는 시인의 시선이다. 나를 밖으로 밀어내던 모진 추위와 검은 침묵은 화자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었다. 그것은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날 때 겪는 산고(産苦)였다.
이삭빛 시인은 특유의 긍정적 세계관으로 상처를 날개로 치환한다. 춥고 어두웠기에 밖으로 나가려 몸부림쳤고, 그 몸부림 덕분에 비로소 날개가 펴졌다는 이 역설적 깨달음은 절망에 빠진 독자들에게 강력한 위로를 건넨다.
■나의 꽃밭으로 향하는 주체적 자아의 회복
시의 결말은 눈부시다. 화자는 이제 당신이라는 허물을 미련 없이 벗어두고 내가 주인인 저 찬란한 꽃밭으로 날아간다. 여기서 꽃밭은 타인에게 의존하던 가짜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일궈낸 자아의 영토다.
이는 껍데기만 남은 관계나 타인의 시선에 갇혀 살던 삶을 청산하고, 진정한 자유인(나비)으로 거듭나겠다는 주체적 선언이다.
총평
이삭빛의 <허물>은 아픔을 낭만화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대신 아픔을 정면으로 통과하여 그것을 비상의 동력으로 삼는다.
지금 캄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안심하라. 당신은 무덤에 갇힌 것이 아니라, 지금 막 나비가 되기 위해 허물을 벗고 있는 중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나비의 시간을 견디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뜨거운 응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