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의 죽음을 예견한 용인 어비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는 어비울이란 마을에서 유래했다.
어비울(魚肥鬱)은 강이 넓어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마을에서 도랑을 파다가 황금빛 물고기가 뛰어나왔다는데서 어비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곳에는 이동저수지(어비울저수지라고도 부름)가 있어 이 지역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수
자원으로 이용되며,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곳에 일제강점기 탁지부 대신 어윤중이 지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연이 있어 마을명 어비리와 연계하여 전하고 있다.
지금 어비울이 있던 마을은 대부분 1971년 완공된 이동저수지 속에 묻혔다.
이 저수지는 어비울(어비리)저수지라고도 부른다.
저수지 가에는 어비울비각이 있고, 그 안에 “魚肥洞遺跡地永世不忘碑”(어비동유적지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불망비 뒤에는 “魚湖八景(어호 팔경)”이라 하여 이곳의 8가지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해 놓았다.
성륜봉의 아침햇살, 수선대에 비친 밝은 달, 탁영정에 모인 친구들, 석우천에 드리운 낚시, 용강에 지는 해, 방목리 마을의 점심 짓는 연기, 금단사의 새벽 종소리, 갈마산의 비취색이 그것이다.
용인시에서는 이동저수지에서 보는 낙조(落照)가 서해의 낙조보다 이름답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며, 그 저수지에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워 살찐 고기를 낚고 있다.
어비울에는 대한제국 당시 친일내각을 세웠다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인해 친로내각에 의해 제거당한 어윤중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어윤중의 죽음과 “어탁지! 어탁지!”
대한제국 시절 1895년에는 일제에 의해 단발령(斷髮令)과 변복령(變服令)이 강제로 시행되고, 일본 자객에 의해 민비(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어 왕비의 몸은 일제에 의해 몰래 불살라졌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아관파천이 일어나 친로세력에 의해 친일내각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 친일내각의 중심세력이었던 김홍집이 피살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탁지부 대신을 맡았던 어윤중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고향인 충청도 보은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여인들이 타는 가마로 위장을 했다.
어윤중은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그러면서 주모에게 이곳 마을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모는 어비울이라 말했다.
어윤중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고기가 살찐다는 어비(魚肥)울을 고기가 슬피 운다는 어비읍(魚悲泣)으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윤중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급히 행장을 챙겨서 이웃마을로 옮겨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윤중의 신분을 알아차린 마을의 장정들에게 붙잡혔다.
어윤중은 지금 이동저수지의 수문이 만들어진 강변에서 몽둥이로 무참히 살해당하였고, 시체는 장작더미에 올려 불살라졌다.
어비울은 이동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물속으로 들어가고, 어비울에 살던 사람들은 언덕 위로 이주하였다.
지금의 어비리가 된 마을이다.
어윤중이 죽은 후 밤에 어비울 강변에 가면 “어탁지! 어탁지!”하고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은 대한제국 시절 벼슬을 하였다.
개혁안을 제출하는 등 많은 일을 행하였다.
간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고 친일내각이 붕괴되었으며, 김홍집이 민중들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어윤중은 자신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 가서 피란하는 것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고향인 충청북도 보은으로 내려가다가 용인의 어비울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개인적인 감정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