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 제자
서난석 nanseoks@hanmail.net
박연구(매원) 선생님 서거 20주 년 추모의 글 청탁이 왔다. ‘원조 제자’라는 부추김에 대답은 했지만 부담감도 만만치 않다. ’원조 맛집’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어도 ‘원조 제자’라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원조’의 그 깊은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을지 어깨가 무겁다.
매원 선생님의 문하생이 된 것은 아주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햇수를 헤아려보니 자그마치 30여 년 전이다. 같은 동의 아파트에서 여리여리한 여인이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늘 궁금했다. 내가 가방을 열어보자는 제안에 그녀는 서슴없이 호응을 해주었다. 내 가방은 악보로 채워졌고, 그녀의 가방은 원고와 책이 가득했다. 나보다 더 무거운 가방을 드는 그녀에 이끌려 한국일보의 문화센터를 찾게 되었다.
선생님의 존재는 수필집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설레었다. 그러나 첫 수업의 생경함과 점잖은 분위기에 기가 죽어 괜히 발을 들여놓았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나를 이끌어준 그녀는 선생님의 수제자였고 원조 멤버였다. 내가 등록한 지 얼마 후에 그녀는 남편의 직장 관계로 파리로 떠났다.
문하생들이 선생님을 존경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힘에 겨운 듯 조용하게 이어가는 선생님의 강의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냥 놓쳐버린다. 회원의 글을 읽고 돌아가며 평하는 것도 진지했다. 아무래도 번지수가 다른 곳에 발을 디딘 게 분명했다. 화려하고 밝은 분위기에서 놀다가 고상하고 우아한 곳에서 나는 물 위에 떠도는 기름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석 달은 채웠다.
그 기간이 지나자 문화센터에 재등록 없이 노래에 충실했다. 그런데 무언가가 허전했다. 노래보다 글쓰기가 머리가 더 맑아지는 것을 새삼 깨닫고 여섯 달 만에 다시 문화센터를 찾았다. 선생님과 문하생들이 반갑게 맞아주는데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영화 구경>이라는 시답지 않은 글도 한 편 냈다.
선생님의 강의는 고단수의 비법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글을 써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순서대로 읽고 평하지 않으셨다. 감감무소식이면 내 글이 기대 이하로 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감지한다. 그러나 순서를 제치고 발표를 해주시면 괜찮은 글을 썼다는 것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은 문하생의 글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도 무조건 깎아내리지 않으신다.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격려와 보완으로 에둘러 기를 살려 주셨다. 저마다 ‘내가 잘 쓰고 있다’라는 자부심과 착각을 갖게 했다. 그 주술(?)적인 마력에 빠져 문하생들은 부단한 노력으로 글을 썼다. 글을 꼬치꼬치 지적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나름대로 숲을 형성하도록 먼발치에서 지켜보실 뿐인데도 문하생들은 용케 본인의 특성을 살려 수필가로 자리매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방목에 가까워 보여도 우리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조종하셨다.
우리는 사석에서 매원 선생님을 ‘수필 교주님’이라고 했다. 세간에 회자되는 사이비 교주가 아닌, 진정성이 가득한 ‘수필교주’였다. 강의가 끝나면 문하생들은 선생님을 모시고 인사동의 찻집을 전전했다. 나는 선생님의 가방을 자주 들어드렸는데 무지하게 무거웠다. 내가 딸의 심정으로 가방을 들겠노라고 하면 선생님은 정색하셨다. 강의실에서는 스승이지만 밖에서는 멋진 남자이기를 고사하시는 모습은 때묻지 않은 소년이었다. 찻집에서 주워듣는 대화도 찰지고 쏠쏠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어내는지 글을 잘 쓰는 작가를 발굴하는데 특별한 촉각을 지니셨다. 해서 우리에게 그 글을 읽게 했고 심기일전하게 하셨다. 어느 행사에서든 제자들은 선생님 주변에서 맴돌았다. 누가 보면 극성맞은 군단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이 신이 났다.
소싯적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었다. 하지만 맏며느리의 삶에 파묻혀 엄두를 내지 못하던 터에 선생님과의 인연은 나에게 새로운 길로 물꼬를 트게 했다. 글을 쓸 때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누가 되지 않도록 애면글면하고 있다. 중간이라도 지키려는 글쟁이의 고군분투는 선생님께 대한 예의지 싶어서다.
늦가을에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세미나를 마치면 저녁에는 여흥을 즐겼다. 어쩌다가 내가 반주도 없이 가곡을 몇 곡 부르면 선생님은 목에 힘을 주고 “내 제자여”를 연발하셨다. 선생님의 다시없는 칭찬에 고무되어 다시 성악공부까지 병행하게 되었다. 나에게 소설을 공부하라고 권하시는 것을 보면 제자마다의 특성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제자들이 엮어내는 동인지에도 공을 들이셨다. 손수 우리들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교정하셨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남편에 대한 글이었는데 뒷부분이 미흡했는지 문장을 새롭게 삽입하셨다. 내가 곰살맞은 마누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남에게 헤실거리기 잘해서였는지 선생님이 착각하셨던 게다. 그 글귀가 마음에 걸려 “이건 아닌데...”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선생님 귀에 덧칠까지 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나를 바라보시는 선생님의 시선은 싸늘했다. 온몸을 옥죄게 했다. 무안하고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어느 분은 매원 선생님이 꽤 뒤끝이 있다고 하셨다. 참 난감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지도 못하고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쭈뼛거렸고 서먹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선생님은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셨고 내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뒤끝은 선생님보다 내가 더 한 수 위였는가 보다.
그런데 선생님의 암투병이 시작되었다. 늘 제자들을 격려하고 이끌어주셨기에 믿고 든든했었는데 우리의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선생님의 건강은 기울어져만 갔다. 선생님께 병문안을 가서도 마음을 풀어내지 못해 답답했다. 별도로 속을 털어낼 겨를도 없었다.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강당에서 나는 피아노 반주자를 대동하고 드레스를 입고 정식으로 무대에 섰다. 선생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앞좌석에 앉아 계시는 선생님은 기진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제자로서의 감사와 쾌유를 비는 말씀을 드리고 쟈니 스키키의 <그리운 나의 아버지>를 마음으로 불렀다. 아리아와 가곡을 몇 곡 더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오는데 까무룩 하게 기울어가는 선생님의 어깨가 오버랩 되어 주저앉고 싶었다.
송현 문학 회원들은 선생님의 기일에 선생님 묘소를 찾았다. 십여 년을 한마음이 되어 참배를 드렸다. 선생님의 묘소에서 각자의 수필집을 보여드리고 에세이 문학의 근황도 말씀드렸다. 우리는 묵은 기억을 꺼내면서 밥을 먹었다.
어느 해 여름에 선생님이 꿈에 나타나셨다. 생전에 기운이 하나도 없던 표정은 여전했다. 희미하게 웃으시면서 “공부 해야지....” 손을 저으시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날씨도 덥고 꾀가 나서 수필 강의를 들어야 할지 망설이는 나에게 분명 재촉하시는 거였다.
매원 선생님이 떠나시고 20여 년이 지났어도 제자들은 누구도 이탈이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어쩌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신 선배 몇 분을 제외하고는. 선생님께서 주선해주었고 명명하셨던 <송현 수필 문학회>는 매달 독서 토론을 이어 나갔다. 문학회를 이어간 햇수를 따져보니 장장 스물다섯 해가 흘렀다. 독서 토론에서 얻어내는 것들이 자산이 되어 글쓰기에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송현의 ‘가오 마담’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코로나로 두 해 이상 쉬면서 독서 토론을 거르기는 했으나 지금은 다시 이어가고 있다.
작고하신 이재희 선배를 필두로 제자들은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매원 문학상>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마다 젊은 작가를 선정해서 상을 수여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선생님의 문학비 건립도 추진했다. 특히 조한숙 선배의 막강한 추진력에 우리도 동참하면서 쉼 없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선생님의 고향인 담양의 조각공원에 문학비를 건립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의 문학비를 건립하는 행사에 ‘원조 제자’로 노래를 불렀다.
어느 무대에 설 때보다 훨씬 많은 연습을 했다. MR을 블루투스에 연결해서 실제의 무대에 서는 것처럼 부르곤 했다. 남편이 그만하면 됐다고 손사래를 쳐도 멈추지 않았다.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마지막의 인사가 아니던가. 혹시나 해서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짊어지고 담양의 조각공원의 행사장에 도착하니 그 지방의 음향 담당 공무원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의 음량과 내 목소리를 조율해주어서 마음이 놓였다.
<내 영혼 바람되어>가 그날의 분위기에 제격이었다. 마음을 온전히 담아 부르는데 생전의 선생님께서 바람을 타고 오시는 듯해서 잠시 울컥했다. 깊은 의미를 내포한 가사와 선율은 선생님께 드리는 마지막 헌사였다. 늦가을의 정취까지 보태져서 다들 숙연했다. 선생님께 나만이 묵혀 두었던 저간의 속내까지 풀어냈다.
”선생님, 저 뒤끝 다 털었어요“
1995년 수필공원(현 에세이 문학) 여름호 등단
수필집 <바람의 흔적> <볼펜이 말한다>
계간 에세이문학 23년도 봄호에서 발췌
첫댓글 '뒤끝 제자' 가슴 뭉클하게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