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 가는 길목에서 / 최미숙
오전 여섯 시 30분, 주위가 어둡다. 잠자리에서 빠져나와 아침거리로 달걀 두 개 삶고, 사과 한 개를 깎았다. 이어 막내아들 점심 도시락까지 싸면 오전 할 일은 끝난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 마음 편하다. 토요일인데도 할 일이 많다며 출근 준비하는 아들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아침 고요를 깬다. 그것도 내년 2월 결혼해 분가하면 집 안은 다시 적막 속에 잠길 것이다.
남편이 고등학교 동창들과 부여로 나들이 가는 날이다. 지난 4월 다 늙은 남자들이 칠순 기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더니 만족스러웠는지 다시 한번 가자고 해 희망자만 받아 가기로 했단다. 남자끼리 관광 차를 빌려 놀러 가는 것이 생소해 웃음이 났다. 남편과 아들이 나가고 나니 조용하기만 한 집에 오늘은 종일 혼자다. 가끔은 잡다한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런 날이 좋다. 주방으로 가 차를 준비해 다시 따뜻한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11월 하순답지 않게 볕이 너무 좋다. 통창으로 보이는 맑은 가을 하늘이 눈부시다.
집안 구석구석 청소는 물론, 미루었던 빨래를 해서 널었다. 며칠 전 빨았던 가을 이불도 보송하게 잘 말라 차곡차곡 개서 이불장에 넣었다. 현관까지 물걸레로 닦고 나니 비로소 묵은 때를 벗긴 것처럼 개운하다. 베란다 화단에 앉아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식물멍을 했다. 오후에 이불호청 하나 만들려고 잠깐 이불집 들른 것 말고는 집에서 책 읽고 유튜브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아까운 하루가 금방 갔다.
저녁 일곱 시가 넘으니 아들에 이어 남편이 두 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들어온다. 특산품쯤으로 생각했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안 봐도 뻔하다. 또 누군가의 권유에 확 넘어갔을 것이다. 귀사문석이라는 돌로 만든 원적외선 온열 매트와 내 허리 찜질기, 거기다 경옥고 한약까지 값이 꽤 나갈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의료 기구를 잘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실 남편은 어디 가면 뭐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해외여행을 가서도 안내인이 데리고 가는 곳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같이 간 동료 교사도 다 알 만큼 귀가 얇기로 유명하다. 그걸로 여러 번 싸웠다. 비싸게 사가지고 온 것 대부분을 먹지 않고 버렸다.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자주 잔소리를 해 대니 이제는 전화로 꼭 묻곤 하는데, 오늘 안 한 걸 보니 꽤나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내 얼굴 표정을 본 막내아들이 눈짓으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
남편은 매트를 펴고 자랑스럽게 사용법과 약 먹는 방법을 설명했다. 어느새 머리는 허옇고 눈꼬리가 처진 70줄에 들어선 남자가 꼭 아이 같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듣고 있었다. 한마디 하면 싸울 것 같았다. 약은 정리해서 손이 쉽게 닿는 곳에 두고, 덤으로 받아온 홍삼 스틱 하나를 터서 먹었다.
이 남자와 함께 산 지 40년째다. 그동안 좋았던 세월만 있었겠는가. 부부는 눈빛만 보고도 안다는데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운하고 미워 같이 안 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순간순간을 잘 극복하고 부모 형제보다 더 오래 살면서 이제는 친구처럼 돼 버렸다. 나이 들어 가면서 연민과 측은지심이 앞서, 될 수 있으면 참견하거나 따지지 않고 그냥 인정해 주려고 노력한다. 남편은 남편이고 나는 나니까. 그런데 그 또한 쉽지 않다.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미울 때가 있는 것이 아직 사랑이란 게 남아 있긴 하나 보다.
허리 찜질기 상자를 풀어 침대에 깔고 전원을 켰다. 잠시 누워 있으니 등 뒤가 따뜻해진다.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