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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호, 삼보컴퓨터 (공중전화 카드)
2010 - ‘희망의 전설’ 쓰는 오뚝이 박찬호
역전 구원승으로 123승째
노모 히데오 기록과 같아
7번 팀 옮기며 17년 활약
“내 인생 불행 없어” 소감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타이
“현실이 불행하다고 생각지 말자. 내 인생에는 불행은 없었다.”
‘코리안 특급’ 박찬호(37·피츠버그 파이리츠)가 마침내 메이저리그 아시아 투수 최다승 타이 기록을 이뤄냈다.
박찬호는 13일(이하 한국시각) 신시내티 레즈와의 원정경기에서 0-1로 뒤진 8회말 등판해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 타선의 3점 추가에 힘입어 행운의 역전 구원승을 챙겼다. 시즌 3승(2패)째, 개인 통산 승수는 123승(97패)째. 은퇴한 일본 출신 메이저리그 투수인 노모 히데오(42)가 보유한 아시아 투수 최다승 기록(123승109패)을 따라잡았다. 앞서 5일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1이닝을 던져 노모의 아시아 투수 통산 최다이닝(1976⅓이닝) 기록도 이미 넘어선 그는, 올 시즌 뉴욕 양키스에서 방출되는 시련 속에서도 명실상부한 아시아 출신 최고 투수로 우뚝 섰다.
박찬호는 경기 뒤 누리집에 “지금이 아픈 건 이전에 고통이 없던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내 자신의 선택이었다. 어려움도 고통도 힘겨움도 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의해 느껴지는 착각”이라는 과거 일기장에 썼던 구절로 소감을 대신하며 빅리그에서 17년 동안 겪었던 다사다난했던 부침을 돌이켰다.
메이저리그 사상 아시아 최고 투수가 되기까지, 박찬호의 인생역정은 극적인 부침을 거듭한 ‘오뚝이’ 야구 인생이었다. 1994년 한양대 2학년 재학중 엘에이 다저스에 입단한 뒤 같은 해 바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며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마이너리그를 거치지 않고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것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17번째였다.
그 뒤 마이너리그에서 2년을 보낸 그는 1995년 9월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됐다. 1996년 4월7일 시카고 컵스전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4이닝 무실점하며 데뷔 첫 승을 올렸고, 1997년에는 14승8패에 평균자책점 3.38로 같은 팀에 있던 노모 히데오(14승12패·평균자책점 4.25)를 제치고 다저스 최고 투수로 떠올랐다. 1998년 15승9패(평균자책점 3.71), 1999년 13승11패(5.23), 2000년 18승10패(3.27), 2001년 15승11패(3.50)로 5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며 거침없이 내달렸다.
2002년 5년 동안 6500만달러(750여억원)의 거액에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한 뒤 허리 부상에 시달리며 고난의 세월이 시작됐다. 이적 첫해 9승8패에 이어 2003년 1승, 그리고 2004년 4승을 챙기는 데 그쳐 최고의 '먹튀'로 지목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결국 2005년 텍사스에서 샌디에이고로 트레이드됐다. 박찬호는 샌디에이고에서 2006년 6월5일 동양인 투수로서는 두번째로 통산 100승을 기록하는 등 꾸준히 재기를 꿈꿨지만, 뉴욕 메츠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좌절은 없었다. 박찬호는 2008년 친정인 엘에이 다저스에서 구원투수로 보직을 전환하며 다시 일어섰다. 예전같이 승수를 올리기는 어려워졌지만, 탄탄한 구원투수로 부활했다. 2008년 4승을 거뒀고, 2009년에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3승을 거두며 팀의 월드시리즈 준우승을 이끌었다.
월드시리즈 우승의 꿈을 안고 합류한 야구 명문 뉴욕 양키스에서 올 시즌 중 방출되는 시련이 닥쳤다. 하지만 박찬호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유니폼을 바꿔입고 또다시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다. 아시아 투수 최초 2000이닝 등판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까지도 불과 8⅔이닝을 남겨뒀다.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한겨레 2010-09-13 오후 06:55:30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439585.html
- 진달래꽃(김소월) (공중전화 카드)
2010 - ‘진달래꽃’ 초판본 근대 문화재 된다
문화부, 총 3점 등록 예고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민족시인 김소월(1902~1934)의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이 문화재 목록에 오른다.
문화재청은 1925년 12월 매문사에서 처음 펴낸 <진달래> 초판본 2종(3점)을 근대 문화재로 등록 예고한다고 13일 밝혔다.
<진달래>는 시인이 생전 펴낸 유일한 시집이다. 토속적, 전통적 정서를 절제된 가락 속에 담은 ‘진달래꽃’,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세간에 널리 애송되는 명시들이 다수 실려 있다. 이번에 등록문화재로 예고된 시집 <진달래>의 초판본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과 개인 소장의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 2점, 개인 소장의 중앙서림 총판본 1점이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30일 동안 소유자를 비롯한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로 공식 등록할 계획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2010-09-13 오후 07:09:53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9590.html
2007 - 알바니아, 국제공항에 테레사 수녀 동상 건립
테레사 수녀의 선종 10주기를 맞아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의 국제 공항에 13일 동상이 세워졌다.
알바니아계인 테레사 수녀 선종 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이날 제막된 테레사 수녀의 동상은 크기가 6미터에 달한다.
살리 베리샤 알바니아 총리는 제막식에서 이 동상이 테레사 수녀의 "헌신과 사랑,신앙의 힘으로 쌓아올린 인류에 대한 위대한 업적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제막식에는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알바니아의 이슬람,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알바니아는 티라나의 국제 공항과 주요 병원,광장 각각 한 곳에 대해 이미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붙여 기념하고있다.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2003년 교황청에서 시복돼 시성 절차가 진행되고있다.
테레사 수녀는 알바니아와 인접한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계 가정에 태어난 후 1929년에 인도의 콜카타로 건너가 빈민 구제 활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97년 87세로 선종했다.
연합뉴스 /경인일보 2007.09.14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6421
2007 - 美,백열전구 2014년까지 퇴출 추진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지난 1879년 발명한이후 근 130년 간 어둠을 밝혀왔던 백열전구가 미국 내에서 퇴출당할 운명에 처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13일 보도했다.
저널은 연방 상하원이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호를 위해 백열전구를 오는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시장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초당적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널은 제너럴일렉트릭(GE)과 필립스일렉트로닉스 등 백열전구 생산업체들도 에너지절약 및 환경단체들과 백열등 생산중단에 대해 거의 합의한 상태라면서 백열전구 퇴출안이 포함된 에너지법안이 다음달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에너지법안은 오는 2012년 100와트급 백열전구 시판이 금지되는 것을 시작으로2014년까지 미국 내에서 모든 백열전구의 판매를 금지, 에너지 효율을 높인 백열전구나 절전형 형광등만을 판매토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2020년까지 절전형 형광등(CFL)이나 이에 준하는 효율을 가진 기술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전구기준을 마련토록 요구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전구 시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0억여개의 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백열전구를 퇴출시키고 효율성이 높은 전구로 교체하면 소비자들이 연 60억달러의 에너지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백열등은 사용되는 전력의 효율이 5%에 불과한 반면 절전형 형광등이나 효율을높인 백열전구는 효율이 30%에서 75%에 달한다.
이와 관련, 파리 소재 국제에너지기구(IEA) 정책분석관인 폴 와이드는 전날 상원 에너지 위원회에 출석, 유럽연합(EU)과 캐나다, 호주가 미국과 유사한 백열전구시판금지를 계획하고 있으며 중국도 백열전구 판매금지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향후 10년에서 15년 사이에 국제시장에서 백열전구가 사라진다 해도 놀랄일은 아닐 것이라면서 백열전구 사용이 중단되면 이로 인해 감소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교토의정서에 따라 선진국이 감축하기로 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근 4분의 3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2007-09-14 10:17
http://www.fnnews.com/view?ra=Sent1101m_View&corp=fnnews&arcid=
1189695645&cDateYear=2007&cDateMonth=09&cDateDay=14
2005 - 제4차 북핵 6자회담 개막(베이징)
제4차 6자회담
〈제3차 6자회담〉의 개최 이후 약 1년 1개월 만에 재개된 〈제4차 6자회담〉은 2005년 7월 26일~8월 7일간(제1단계 회의)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의 참여국들은 과거 3차례의 〈6자회담〉과 달리 3박 4일이라는 회담 일정을 정하지 않고 쟁점사안들에 대해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회기를 연장하여 13일 동안 협상을 진행하였다. 회담의 참여국들은 전체회의 외에 수석대표회의, 그리고 참여국 간의 2자 또는 3자 등 다자간 교차협상채널을 가동했지만,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제1단계 회의를 마무리했다. 이 ‘공동성명’의 내용은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에 대한 상호존중과 평등의 원칙에 따라 실질적 협의와 동시에 이번 회담에서 상호 이해의 증진과 공동인식의 확대 진전, 평화적인 방식의 한반도 비핵화 목표 실현에 대한 의견의 일치, 공동문건의 내용에 관한 심도있는 의견교환과 유익한 공동인식의 도달, 각국 정부의 입장차이점 해결을 위한 잠시 휴회의 결정, 〈제4차 6자회담〉의 차기회의의 8월 29일 시작되는 주에 재개할 예정, 〈6자회담〉 과정의 발전 의지 재확인 등을 담고 있다.
그 후 9월 13일부터 19일까지 베이징에서 〈제4차 6자회담〉의 제2단계 회의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9·19성명〉인 6개 항의 공동성명이 채택·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즉, ①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임을 만장일치로 재확인하였다. ② 회담참여국은 상호 관계에 있어 국제연합헌장의 목적과 원칙 및 국제관계에서 인정된 규범을 준수할 것을 약속하였고, 북한과 미국은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각자의 정책에 따라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다. ③ 회담참여국은 에너지·교역 및 투자 분야에서의 경제협력을 양자 및 다자적으로 증진시킬 것을 약속하였고, 중국·일본·한국·러시아 및 미국은 북한에 대해 에너지를 제공할 용의를 표명하였다. ④ 회담참여국은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하였고,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고, 동북아시아에서의 안보협력 증진을 위한 방안과 수단을 모색하기로 합의하였다. ⑤ 회담참여국은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의 이행을 위해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하였다. ⑥ 〈제5차 6자회담〉을 11월초 북경에서 협의를 통해 결정되는 일자에 개최하기로 합의하였다.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52
2004 - 서울평화상에 하벨 前체코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69)이 제7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이사장 이철승)은 1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각계 인사 15명으로 구성된 최종심사위원회를 열고 ‘유럽의 양심’으로 칭송 받고 있는 하벨 전대통령을 수상자로 확정했다.
이철승 이사장 겸 심사위원장은 “공산정권 시절부터 동유럽 민주화의 기수로 이름을 떨쳤던 하벨 전대통령은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체코의 민주화를 이뤄냈고, 대통령 재임 때도 유럽의 평화정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하벨 전대통령에 대한 시상식은 오는 10월 중순 열릴 예정이다. 재단측은 하벨 전대통령에게 상패와 상장, 상금 20만달러를 수여한다.
〈조홍민기자〉/경향신문 2004-09-13 18:10: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9131810561&code=100305
1999 - 생명복제기술시민합의회의, 인간 배아에 대한 복제 실험을 금지해야 한다고 판결
생명공학의 신화를 깨뜨린다
시민 합의회의, 수정란을 생명체로 인정…포괄적 안전윤리 규정한 사회적 합의 제안
지난 9월13일 16명의 보통 시민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한국유네스코가 주최하고 한국생명윤리학회, 참여연대 과학기술민주화를 위한 모임 등이 후원한 ‘생명복제 기술 시민 합의회의’에서 주부, 학생, 공무원 등으로 구성된 시민 패널이 전문가들과의 오랜 토론 끝에 14 대 2로 “인간 배아에 대한 복제 실험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이 연구와 치료를 목적으로 한 14일 이내의 인간 배아 실험을 허용하는 데 비해, 우리나라의 시민 패널들은 “수정란에서부터 인간의 생명이 시작된다”는 광의(廣義)의 생명 개념을 채택해서 전면 금지라는 강경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지원자들 중에서 선발한 시민 패널들이 해당 주제의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통해 합의에 도달한 견해를 발표하는 형식의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는 그 자체로는 강제력이 없다. 그러나 이번 발표는 그동안 시민들의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를 밀고나갔던 과학자와 정부 관계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정부·국회는 육성 일변도 정책 고수
이처럼 NGO를 중심으로 시민들이 생명공학에 고삐를 채우기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정작 생명공학의 발전이 시민들에게 끼칠 영향을 파악하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적절한 법적, 행정적 조처를 취해야 할 정부와 국회는 그동안 생명공학 육성 일변도의 입장만을 고수해왔다. 정부는 지난 94년을 ‘생명공학 도약의 해’로 선포하고, 2000년 초까지 생명공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골자로 하는 ‘생명공학육성기본계획’(Biotech 2000)을 추진해왔다.
법률적인 면에서는 83년에 현재의 ‘생명공학육성법’인 ‘유전공학육성법’을 제정했다. 총 20개조문으로 이뤄진 이 육성법의 내용 중 생명공학의 위험성과 그에 대한 규제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생명공학을 선도기술로 삼아 국가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목표가 있었을 뿐 밥상에 유전자 조작 식품이 올라도 생명공학 기술로 인해 시민들이 받을 수 있는 피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지난 3월 국내에 인간복제회사 한국지부가 설립되어 희망자 모집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지금 당장에는 개체(個體) 복제를 목적으로 한 인간복제가 이루어져도 제재를 가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의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자 국민회의 장영달 의원과 한나라당 이상희 의원 등은 ‘생명공학육성법 개정안’에 생명공학의 문제점을 규제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지난 97년에 처음 발의되어 계속 계류중이고 이번 정기국회 회기에도 심의될 예정인 이 개정안은 “생명공학연구와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인체 및 환경에 미치는 생물학적 위험성 및 윤리적 문제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한다는 취지로, 금지대상 연구개발 항목으로 “인간의 생식세포나 체세포를 이용해서 복제하는 행위, 인간과 동물의 수정란이나 체세포를 상호 융합하는 행위…”(이상희 의원) 등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두 의원 모두 ‘연구비 지급금지’ 규정을 두어서 위의 연구개발에 대해서는 일체의 연구비 및 보조금 지급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밖에 “관계부처의 공무원 및 종교계, 학계, 연구기관, 산업계 관계자로 구성된 안전·윤리위원회를 둔다”고 명시하고 있다.
개정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경실련, 녹색연합, 소비자문제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등 12개 시민단체들은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아래 연대모임)을 결성하고 법적 대응을 둘러싼 시민토론회를 여러 차례 개최했다. 연대모임은 개정안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생명공학 육성을 위한 법안 내에서 생명의 안전과 윤리 문제를 다루는 것은 모법(母法)의 취지에 어긋나는 모순이기 때문에 생명공학을 규제할 별도의 ‘생명안전윤리법’ 제정이 필요하다. 둘째, 우리 헌법이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가치를 보장하기 때문에 하위법에서 대립되는 가치관을 조정해주어야 한다. 셋째, 처벌규정이 없는 법안은 죽은 법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처벌규정을 두어야 한다. 넷째, 안전·윤리위원회의 구성원으로 시민이나 시민단체가 반드시 명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들이 오랜 기간 동안 토론을 통해 합의한 내용이다.
적절한 규제가 연구를 촉진시킨다
이번 개정안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생명공학의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고 지적한다. 즉 기존의 육성법에 몇개의 조항을 덧붙여 우려의 목소리를 적당히 잠재우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이들의 시각이다.
우리나라의 생명공학 연구는 거의 세계 수준이라고 한다. 젖소와 한우를 복제해서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던 황우석 교수는 “복제 기술의 경우 세계적인 수준이고, 몇 가지 세부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말했다. 그 밖에 불임 연구분야도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이들 현장연구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마음놓고 연구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하루빨리 설정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적절한 연구범위를 확정하는 문제는 시민들이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줄일 뿐 아니라 현장연구자들이 당당한 자세로 연구에 임하게 하고, 자신들의 연구가 시민 모두의 이익에 기여한다는 믿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생명공학 연구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번 회기 내에 땜질식으로 마련한 개정안을 통과시킬 게 아니라, 먼저 규제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수렴해서 개정안이 아닌 별개의 생명안전윤리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연구의 방향과 범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 법률적 규제가 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광/ 과학세대 대표 /한겨레21 1999년 10월 07일 제277호
http://www.hani.co.kr/h21/data/L990920/1p3p9k29.html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1996 -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국내 최초의 국제 영화제인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PIFF)가 1996년 9월 13일 부산시 해운대구 수영만 요트경기장 앞 야외극장에서 개막됐다.
개막식은 외국초청 인사들과 국내의 영화계-문화계 인사들, 시민 등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됐다. 개막영화로는 그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비밀과 거짓말`(마이크 리 감독)이 밤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야외극장에서 6층 건물 높이의 초대형 스크린에 상영됐다.
부산영화제는 이를 시작으로 21일까지 시내 부산극장 등 7개 극장과 수영만 야외극장에서 7개 부문에 걸쳐 초대된 31개국의 극영화와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등 최신 화제작 1백70여 편을 상영했다.
개막식에는 김영수 문화체육부 장관 등 문화 관련 단체장, 김지미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등 영화계 인사들, 정계 인사들과 개막영화 `비밀과 거짓말`의 주연배우인 블렌다 블리신을 비롯한 외국의 영화배우, 감독 등 3백여 명의 귀빈이 자리를 함께 했다. 영화제 기간 중 18만4071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4억8277만원의 입장수입을 올렸다. /조선
1993 - 이스라엘-PLO 평화협정 조인
이스라엘과 PLO간의 평화협정이 1993년 9월 13일 오전 11시 백악관에서 역사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평화협정에 서명, 중동평화의 새 장을 열었다.
이날 백악관 잔디밭에서 열린 조인식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 등 관련 당사자 수뇌와 각국 외무장관, 외교사절 등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과 PLO의 아부 마젠 아랍-국제담당 국장이 양측을 대표해 서명했다. 조인컥?전세계 1백여국에 생중계됐다.
이날 양측이 서명한 평화협정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와 가자지구에 대한 제한적인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협정, 이스라엘과 PLO의 상호 실체 승인 등을 주요골자로 하고 있다. /조선
1978 - 북한의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 사망
이극로 [李克魯, 1893~1978.9.13]
국어학자 이극로 선생이 1978년 9월 13일 북한 평양에서 85세로 사망했다. 1893년 8월 경남 의령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만주와 중국,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독일 유학길을 떠났다.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대학과 런던대학에서 음성학을 연구한 이극로는 1929년 귀국, 조선어연구회에 몸담았다. 조선어학회로 개명한 이 단체에서 주간으로 활동한 이극로는 조선어사전 편찬, 한글맞춤법 제정, 외래어 표기, 표준어 사전 등에 관여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조선어학회 사건` 주모자로 6년형을 선고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아 풀려난 그는 이후 조선어학회 회장,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회장 등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좌우갈등의 한 가운데로 빠져들었다.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평양으로 간 후 그곳에 눌러앉은 것은 이극로의 이름을 남한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한 계기가 됐다. 북한에서 조국전선중앙위 의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 위원장 등 요직을 거쳤다. 저서로는 1947년 출간한 `고투 사십년`과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이 있다. /조선
한글날, 이극로를 생각한다
집념 끝 ‘최초의 한글사전’ 편찬 … 辭典에 일생거는 狂人 그리워
한글날(9일)만 되면 으레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예찬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한글을 지키고 가꾸는 데 일생을 바친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종종 잊어버린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글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선각(先覺)들의 고초와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한글은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멸시당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글이라고 탄압받았다. 한글 창제 465년 만인 1911년 조선광문회 주시경, 최남선, 김두봉이 최초로 한글사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일제 탄압 속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나타난 이극로에게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이고 문화운동이며 계몽운동이었다.
물불 이극로(李克魯·1897~1982)는 17세에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난다. 1916년 상해 동제대학 수학을 거쳐 1922년 베를린대학에 입학, 궁핍과 싸우며 5년간 학업에 몰두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 3년간 강의했다. 학생들로부터 “어째서 조선에는 사전 하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수치와 비애를 절감, 조국에 돌아와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한글사전 편찬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동지들과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등의 작업을 거쳐 16만 어휘가 정리된 사전 원고를 완성하고 조판에 들어간 것이 1940년 3월. 그러나 1942년 9월 5일 편찬원 정태진이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비밀 독립운동을 한다는 허위 자백서를 쓰고 만다. 잡혀간 회원은 27명. 참혹한 고문 속에 이윤재, 한징은 옥사한다. 이극로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 6월, 정인승 2년 등의 형을 선고받는다.
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병우는 자전(自傳)에서 이극로를 말한다. “그의 한글 애정은 종교적 신앙처럼 뜨거웠다. 눈 치료 받으러 와서 처음 보는 의사에게까지 한글을 전도할 수 있었던 그 신념. 그것도 서슬이 시퍼런 일제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해방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조선어학회 재건에 착수, 애타게 찾던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한다.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을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째 찾아가서 책상을 치며 호통쳤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나라문화 기둥인 한글사전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놈에게 가서 사정하라는 말입니까!” 정진숙 등 을유문화사 간부들은 크게 감명받아 출판 결단을 내린다. 드디어 1947년 10월 9일 한글큰사전 제1권이 발행되었다(1957년 전6권 완간).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큰사전을 앞에 놓고 감개무량해 눈물을 흘린다. 조선광문회가 편찬을 시작한 지 37년 만이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최초의 한글사전을 갖게 된다.
“이극로의 물불 가리지 않는 무서운 추진력은 누구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불이라는 별명이 그의 호가 되어 버렸다.” 이희승의 회고다.
흔히 우리말과 한글의 수난을 얘기한다. 그러나 말과 글의 집인 사전이 제 역할을 하는 한 걱정은 기우가 될 수 있다. 물불과 같이 일생을 사전 편찬에 거는 광인(狂人)들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 걱정일 뿐이다.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조선닷컴 2006.10.08 22:55 55'
http://www.chosun.com/editorials/news/200610/200610080381.html
소백산천체관측소 준공기념
(1978.9.13.)
1974 - 국립천문대 개설
1974년 9월 13일 과학기술처(지금의 과학기술부) 산하에 국립천문대가 설치되었다. 국립천문대는 천문학에 관한 연구와 천상관측 및 역서 편찬, 표준시의 결정 및 시보(時報)에 관한 사무를 주목적으로 설치된 천문연구 국가기관이다. 출범 이후 행성·태양·항성·은하·외부은하·우주 등에 관한 관측과 이론연구, 우주전파연구, 인공위성의 궤도와 천체역학 연구, 천문기기 개발연구 등을 추진했으며, 대민업무에 있어서는 일력자료 발표, 역서 편찬, 표준시의 결정, 음·양력 대조증명발급과 천문지식의 홍보 등을 수행했다. 소백산천체관측소의 24인치(61㎝) 반사망원경과 20㎝ 굴절망원경을 관측장비로 사용해오다가, 1985년말 충청남도 대덕연구단지로 옮기면서 새로이 지름 14m의 ㎜파(波) 관측용 전파망원경을 설치했다. 1986년 3월 14일 기구직제를 폐지하고, 그 업무와 기능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로 이관했다가 1991년 10월 17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천문대로 바뀌었다. 1999년 5월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우주천문연구부·보현산천문대·소백산천문대· 대덕전파천문대 등을 운영한다. /브리태니커
- 남북적십자 본회담 기념, 1972.8.30
1972 -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서울에서 개최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오늘 서울 조선호텔에서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됐다.
평양에서 제1차 회담이 열린 지 2주일 만이다.
이범석 한국적십자사 수석대표는 개회연설을 통해 적십자 정신과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해 회의를 진행하자고 말했다.
양측은 이번 회담에서 같은 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제3차 회담을 열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절차를 빼고 바로 의제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자고 합의하고 회담을 마무리한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이듬해 7월 11일 제7차 회담까지 진행되지만 8월 28일에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의 대화중단선언과 함께 단절되고 만다.
제8차 회담은 12년이 흐른 1985년 5월에야 열린다. /YTN
- Mao and Lin Piao
1971 - 중국의 정치인 린뱌오(林彪) 비행기 추락사
린뱌오 [林彪(임표), 1907.12.5~1971.9.13]
[어제의 오늘]1971년 중국 공산당 린뱌오 ‘의문의 죽음’
ㆍ마오쩌둥과의 권력싸움서 밀려
린뱌오(林彪)는 호걸인 데다 두뇌회전도 빨랐다. 한국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던 펑더화이(彭德懷)가 숙청당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권력의 속성을 간파했고 처세의 중요성을 체감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펑더화이를 제거하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린뱌오는 마오의 편에 서서 펑더화이를 비판하는 저격수 역할을 했다. 펑더화이 숙청 이후 린뱌오는 중국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국방부장이 됐다.
린뱌오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 신격화를 주도하며 권력을 공고히 다졌다. 붉은 책의 마오 어록을 전 군부대에 배포해 암송하도록 한 것이 그이다. 린뱌오와 그의 군부는 문화대혁명이라는 혼란한 정세 속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969년 열린 중국 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는 린뱌오의 대약진을 증명해주었다. 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린뱌오 측 인사 5명이 정치국에 입성하면서 정치국 위원 3분의 1이 린뱌오 세력으로 채워졌다. 린뱌오는 사실상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절대적 권력자는 2인자의 성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법이다. 마오쩌둥은 9차 전국대회 이후 린뱌오에 대해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고, 그를 타도할 준비를 했다. 결국 두 사람은 국가주석직에 대한 이견으로 충돌했다. 마오가 주석직을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린뱌오가 이에 반발한 것이다. 마오는 작심한 듯 린뱌오를 몰아세웠다. 토사구팽의 위기를 직감한 린뱌오는 공격으로 방어하는 전략을 택했다. 그는 주석직은 유지돼야 하며 마오가 반드시 주석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마오는 꿈쩍도 안했다. 린뱌오를 내세워 펑더화이를 내친 것처럼 마오는 이번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앞세워 린뱌오를 비판했다.
마오가 “어떤 자가 국가주석이 되고 싶어 당을 분열시키려 한다”며 71년 벽두부터 린뱌오를 몰아세우자 린뱌오는 군대를 동원해 마오를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쿠데타를 도모한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는 마오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궁지에 몰린 린뱌오는 71년 9월13일 그의 측근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도주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얼마 못가 몽골 상공에서 추락했다. 린뱌오는 이 사고로 64세의 나이로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추락사고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문에 쌓인 그의 죽음은 오랫동안 많은 억측을 낳았다.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중국 당국은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11개월이 지나서야 린뱌오의 사망을 공식화했다.
서영찬 기자 /경향신문 2010-09-12 21:41: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9122141365&code=100100&s_code=ap005
1959 - 뤼프케 서독 대통령 취임
뤼프케 [Lubke, Heinrich, 1894~1972]
독일의 정치가, 대통령.
베스트팔렌 출생, 베를린대학교와 뮌스터대학교에서 농학·국민경제학·철학을 배웠다. 1926년 중소농민 단체들을 통합하여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31년 프로이센 주(州)의회 중앙당 의원이 되었으나 1933년 나치스에 의하여 모든 공직에서 추방, 투옥되었다. 1935년 베를린의 건축회사에서 근무하고, 1946년 이래 독일 기독교민주동맹당원, 지방주 각료(地方州閣僚)를 거쳐 1949∼1950년과 1953∼1959년 연방의회 의원, 1953년 10월 제2차 K.아데나워 내각의 농업장관이 되었다.
1959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1964년 재선, 1969년 사임하였다. 농업문제에 힘을 기울여, 황폐한 전후(戰後) 독일에 푸르름을 가져온 ‘녹화계획’의 창도자이며, 1967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naver
1941 - 미국의 PC 발명가, 기업가, 의사 에드 로버츠(Roberts, Ed) 출생
로버츠 [Roberts, Henry Edward "Ed", 1941.9.13~2010.4.1]
(참고) (2010.4.1) 빌 게이츠에게 영감을 준 PC발명가-에드 로버츠 타계
빌게이츠와 폴 앨런이 최초로 SW를 만들어 준 바로 그 PC를 발명한 에드 로버츠가 1일 세상을 떠났다고 뉴욕타임스,씨넷 등 주요 외신이 보도했다. 향년 68세.
그는 다른 초기 컴퓨터 개척자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발명한 ‘알테어8800’라는 PC를 현대 컴퓨터 역사에서 최초의 PC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에드 로버츠는 MITS(Micro Instrumentation and Telemetry Systems)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1975년 알테어8800 PC를 소개한다.
1975년 파퓰러일렉트로닉스가 알테어 소개 기사를 내보내자 이 기사는 MS공동창업자 폴 앨런의 눈길을 끌었고 그는 이를 빌게이츠에게 보여주었다.
빌게이츠와 앨런은 재빨리 로버츠에게 가서 알테어의 SW를 만들어주겠다고 말했다. 미팅을 위해 두사람은 로버츠의 회사가 있는 뉴멕시코주의 앨버쿼키로 갔고 거기서 오늘 날의 세계SW산업계의 거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설립된다. 1975년 4월 4일이었다.
비록 그의 산업에 대한 영향이 오래 가긴 했어도 로버츠는 70년대에 MITS를 팔고 컴퓨터 산업계를 떠나 의대로 진학했고 조지아에서 의사가 됐다.
빌게이츠는 자신의 노츠 웹사이트에서 앨런과 공동으로 그에 대한 추모글을 썼다.
빌 게이츠는 “에드는 진정한 PC혁명의 개척자였으며 그 스스로 그럴 만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머가 있는 열정가였으며 항상 우리를 포함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돌보았다”고 썼다.
앨런은 로버츠가 컴퓨팅부문에서만이 아니라 진정한 정신적 스승이었다고 말했다.
앨런은 “에드는 빌과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낸 최초의 기업가였고 우리는 그에게서 비즈니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죠”라고 이메일에서 그에 대해 회고했다.
게이츠는 지난주 병을 앓고 있는 로버츠에게 조지아로 병문안을 다녀왔다.
"에드는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고 했어요.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에게 고마워했지요.(이 두사람은 컴퓨터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컴퓨터에 재미를 들여 왔었다.)“라고 게이츠와 앨런은 기억했다.
이어 이들은 “우리가 처음으로 테스트 안된 SW를 그의 알테어컴퓨터에서 작동한 날은 많은 위대한 일들의 시작이었죠. 우리는 앨버쿼키 66번 도로바로 옆에 있는 MITS사무실에서 에드와 함께 한 많은 즐거운 일들을 기억할 겁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그 때 거기서의 일들만큼 즐겁지는 못할 겁니다” 라고 적었다.
이재구 국제과학전문기자 jklee@zdnet.co.kr /[지디넷코리아] 2010.04.02 / PM 07:00
http://www.zdnet.co.kr/news/news_view.asp?artice_id=20100402181433
1941 -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오스카르 아리아스(Arias, Oscar) 출생
아리아스 [Arias Sánchez, Oscar, 1941.9.13~ ]
코스타리카의 정치가.
코스타리카 북부 에레디아(Heredia)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났다. 코스타리카대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67년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 대학(LSE)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974년 영국의 에섹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PLN에 입당하면서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1977년 PLN의 간사장직을 맡아 당내 기반을 다지고 1978∼1981년 국회의원, 1979∼1984년 PLN 서기장을 지냈으며, 1986년 PLN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집권 후 미국을 의식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를 펼치는 한편, 정규군이 없는 중립국 코스타리카의 안정 전략으로 중미지역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여 국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특히 중앙 아메리카 지역의 분쟁 해결을 위해 1987년 8월 니카라과·엘살바도르 내전의 즉각 중단 등을 골자로 한 45개국 평화안, 즉 ‘아리아스 플랜’을 제의하여 중앙 아메리카 5개국 평화협정을 실현시켰다. 이 공로로 1987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06년 2월 대통령 선거에서 40.9%를 득표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3년, 2004년 연달아 방한하여 한국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에 《코스타리카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라틴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등이 있으며, 유명 대학으로부터 받은 50개 이상의 명예학위를 소지하고 있다. /네이버
1923 - 스페인에 군사쿠데타, 리베라 장군 바르셀로나 점령
프리모 데 리베라 [Primo de Rivera, Miguel, 1870~1930]
스페인의 장군, 정치가.
카디스 출생. 마드리드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후 미국스페인전쟁 때는 군인으로서 쿠바 ·필리핀에서 근무하였다. 그 후 식민지 모로코에서 근무하다가 1915∼1917년 카디스의 군사총독, 1922년 바르셀로나의 군사총독을 지냈고, 1923년 보수세력 지지하에 군부를 이끌고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가르샤 프리에트 내각을 쓰러뜨리고 집권, 국왕 알폰소 13세의 승인을 얻어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정지로 군사독재를 확립하였다. 1925년 프랑스의 원조를 얻어 모로코의 압델 크림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 후 국내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에스파냐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1930년 그의 독재정부는 붕괴되고, 그는 파리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아들 J.A.프리모 데 리베라(1906∼1936)는 1931년의 공화혁명 후 1933년 팔랑헤당(黨)을 창립, 1936년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인민전선 정부에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naver
1916 - 영국의 동화작가 로알드 달(Dahl, Roald) 출생
달 [Dahl, Roald, 1916.9.13~1990.11.23]
로알드 달(Roald Dahl, 1916년 9월 13일 ~ 1990년 11월 23일)은 영국의 소설가이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제임스와 거대한 복숭아》, 《마틸다》 등이 있다.
노르웨이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자랐으며, 22세때 아프리카로 건너가 석유회사인 Shell에 입사, 탄자니아 등지에서 일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의 파일럿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다.
북아프리카에서 근무 중 지휘관의 잘못된 정보로 엉뚱한 곳으로 출격하여 연료 부족으로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 중상을 입고 구조되었다. 이 사고로 몇달 간 군 병원에서 실명 상태로 지냈으며 안면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완쾌 후 그리스로 이동하여 영국 공군 허리케인 전투기 조종사로 다시 참전하였으나 불시착 부상 후유증으로 귀국하였다.
1942년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영국공군 무관보(Assistant Air Attache)로 근무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후에 정보부로 옮겨 비행단 지휘관(wing commander)이 되어 종전을 맞았다.
로알드 달에 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그가 대전 중 격추사고를 당한 이후 충격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두번 째 자서전 《홀로 가기 Going Solo》에서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스스로 밝히고 있듯 - Chapter 8 'Survival' - 그것은 적기나 지상포화에 의한 격추가 아닌 연료 부족에 의한 불시착이었고 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1940년 9월 불시착 사고가 발생한 이후 약 2년여가 지난 후 워싱턴에서 지상근무를 할 때였다. 하지만 전쟁 기간 중 좀더 극적인 기사거리를 원하던 미국잡지 Saturday Evening Post에 의해 '리비아에서의 격추 Shut Down in Libya'로 보도되면서 불시착이 격추로 바뀐 것이다.
1953년에 미국 배우 패트리샤 닐과 결혼하여 30년간 부부로 지냈으며, 다섯 아이를 두었다. 1983년 이혼한 후 펠리시티 크로슬랜드와 재혼하였다. 1990년 11월 희귀한 혈액 질환 골수이형성증후군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소년 Boy》, 그리고 20대와 2차 대전 기간중의 행적에 대해 《홀로 가기 Going Solo》라는 두 편의 자서전을 썼는데 자서전 역시 동화적인 그의 문체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로알드 달은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작품 /위키백과
1899 - 미국 최초의 자동차 사고 사망자 발생
[책갈피 속의 오늘]1899년 美 첫 교통사고 사망자 발생
헨리 블리스는 노면전차에서 내리던 중이었다. 자신을 덮치는 불빛을 봤지만 피하지 못했다.
미국 뉴욕 시내의 센트럴파크 서쪽과 74번가가 만나는 지점이었는데 아서 스미스가 과속으로 몰던 택시(번호 43)에 치였다.
부동산 중개업자였던 블리스는 루스벨트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으나 다음 날 아침 숨졌다. 머리와 가슴의 상처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스미스를 살인 혐의로 체포했다. 법원은 고의가 아닌 과실로 일어난 사고라며 보석금 1000달러에 석방했다.
블리스는 미국에서 자동차에 목숨을 잃은 첫 번째 보행자다. 뉴욕 시는 사고 100주년을 맞아 현장에 표지판을 세우면서 1899년 9월 13일 택시에 치여 다음 날 숨졌다고 기록했다.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사고 발생일을 9월 9일로, 사망일을 9월 10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2명의 교통사고 희생자가 나왔다. 브리지트 드리스콜이라는 영국 런던 시민이 1896년 시내 하이드파크에서, 이에 앞서 1869년 메리 워드가 아일랜드에서 자동차 사고로 숨졌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세계 최초의 교통사고는 1769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육군공병 니콜라 퀴뇨가 프랑스 육군 장관 스와솔 공작의 후원으로 세 바퀴 증기자동차를 발명한 뒤 파리 교외의 숲에서 시험운전에 나섰다가 담벼락을 들이받았다.
시속 3.2km에 불과했지만 퀴뇨가 이 자동차를 고쳐 몰고 다니자 공포를 느낀 파리 시민들이 경찰에 ‘괴물수레’를 처벌해 달라고 항의하는 바람에 차가 창고에 갇히게 됐다.
세계 최초의 앰뷸런스는 1895년 12월 파리의 산업박람회에 선을 보였고, 세계 최초의 경찰 순찰차는 1903년 미국 보스턴에 등장했다.
당시 경찰은 마차를 순찰활동에 사용하다가 속도가 빠른 교통질서 위반차를 따라잡을 수 없어 자동차로 바꿨다고 한다.
추석 연휴의 귀성 귀경길에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순찰차와 앰뷸런스가 출동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모두들 안전운전 하시길.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동아닷컴 2008-09-13 01:54:00
http://www.donga.com/fbin/output?f=g__&n=200809130120
1899 - 루마니아의 정치가 코르넬리우 코드레아누(Codreanu, Corneliu) 출생
코드레아누 [Codreanu, Corneliu (Zelea), 1899.9.13~1938.11.30]
루마니아의 정치선동가.
루마니아의 주요 파시스트 운동단체인 철위대(鐵衛隊)의 지도자이며 창설자이다. 일찍부터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은 코드레아누는 1919~22년 이아시대학교에 다니는 동안 반공활동과 반유대활동에 널리 참여했다. 1922년에는 기독교학생연합 창설에 이바지했으며, 1923~27년 대학교수이며 반유대주의자인 A.C.쿠자가 이끄는 전국기독교방위동맹(LANC)과 손을 잡았다. 코드레아누는 '반역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한 혐의로 1923년에 체포·투옥되었으며, 1925년에는 살인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지만 무죄로 석방되었다. 1927년에는 LANC와 결별하고 대천사 미카엘 군단을 결성했는데, 이 단체는 나중에 '군단' 또는 '군단운동'이라고 불렸다. 또한 그는 이 단체의 하부조직으로 철위대라는 군사조직을 1930년에 창설했는데, 외부인들은 그들의 조직 전체를 철위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코드레아누는 공산주의와 유대인을 반대하는 이 운동에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열정을 심어놓았다. 이무렵 철위대(후에 조국당이라고 개명함)는 정부의 박해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테러 전술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에는 루마니아에서 3번째로 큰 정당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철위대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자, 불안을 느낀 독재자 카롤 2세는 1938년 1월 이 당을 해산시키고, 1938년 4월 코드레아누를 투옥시켰다. 1938년 11월 30일 코드레아누와 13명의 그의 동지들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교수형을 당한 다음 총살되었는데,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즉결처분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브리태니커
1894 - 폴란드의 시인 율리안 투빔(Tuwim, Julian) 출생
투빔 [Tuwim, Julian, 1894.9.13~1953.12.27]
폴란드의 서정시인.
' 스카만데르'라고 불리는 20세기 폴란드 시인 그룹의 대표적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중 브라질과 미국에서 지낸 5년을 제외하고 계속 폴란드에서 살았다. 1915년 현란한 미래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선언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미래파로서 그의 위치를 확립해주었으나 그는 곧 입장을 바꾸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쓴 시들은 폭발적인 정력과 엄청난 감정적 긴장이 특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출판된 시집으로는 〈숨은 신 Czychanie na Boga〉(1918)·〈춤추는 소크라테스 Tańczacy Sokrates〉(1920),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집 〈피에 젖은 단어들 Słowa we Krwi〉(1926)이 있다. 망명기에는 길고 산만한 자전적 시 〈폴란드의 꽃 Kwiaty polskie〉(1949)을 썼으며 여러 권의 동시집도 출판했다. /브리태니커
1894 - 프랑스의 작곡가 에마뉘엘 샤브리에(Chabrier, Emmanuel) 사망
샤브리에 [Chabrier, (Alexis) Emmanuel, 1841.1.18~1894.9.13]
프랑스의 작곡가.
그의 작품들은 1880년대 파리 감각의 활력과 기지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자신은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상응하는 음악가였다.
젊은시절 음악과 회화 모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58~62년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아울러 이 기간에 피아노·화성법·대위법도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받은 기술적 훈련은 한정된 것이었으며 작곡 기법은 스스로 공부했다. 1862~80년 내무부에서 근무했는데, 이 기간에 오페라 〈별 L'Etoile〉(1877)·〈잘못된 교육 Une Éducation manquée〉(1879 피아노 반주로 초연, 1913 관현악 반주로 초연)을 만들었다. 1863~65년 폴 베를렌의 협조로 2편의 미완성 오페레타의 초고를 완성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친구인 에두아르 마네의 걸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Bar at the Folies-Bergère〉을 사기도 했다.
1879년 뮌헨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를 들은 후 관직을 떠나 음악에만 몰두했다. '콩세르 라무르'의 합창단장으로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회 공연을 도왔으며 '작은 바이로이트'의 일원으로 뱅상 댕디, 앙리 뒤파르크, 가브리엘 포레와 같이 일했다. 샤브리에의 최고 걸작들은 스페인을 여행한 후(이곳에서 그는 민속 음악에 매료되었음) 라멩브롤르(투쟁)에 정착했던 1881~91년에 작곡되었다. 이 기간에 작곡되었던 곡으로는 피아노 소품 〈10개의 회화풍의 소곡집 Dix Pièces pittoresques〉(1880), 2대의 피아노를 위한 〈3편의 낭만적 왈츠 Trois valses romantiques〉(1883), 〈환상적 부레 Bour rée fantasque〉(1891), 관현악곡 〈스페인 España〉(1883)·〈유쾌한 사랑 Joyeuse Marche〉(1888)·오페라 〈억지 임금 Le Roi malgré lui〉(1887) 등과 6개의 가곡(1890)이 있다. 생애 마지막 3년은 정신적·육체적 쇠약이 엄습한 시기였다.
불규칙한 리듬 유형이나 고향인 오베르뉴의 춤곡인 부레에서 비롯한 빠른 반복 음형에 기초한 샤브리에의 음악은 폭넓은 유머와 풍자 감각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파리의 카페 연주회에서 불리는 대중 가요에서 발전한 그의 음악적 재능은 비록 조잡한 면이 없지 않지만, 매우 풍부한 것이었다. 피아노곡과 관현악곡에서 20세기의 작곡가 프랑수아 풀랑크와 조르주오리크의 모델이 된 세련된 파리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관현악법은 참신한 악기 조합이 특징이다. 〈스페인〉에서 보이는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사용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Petrushka〉의 효과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샤브리에는 편지 작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그의 편지 모음집은 음악적 관심뿐만 아니라 문학성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자연스럽고 익살스러운 유머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1885 - 포르투갈의 소설가 아킬리누 히베이루(Ribeiro, Aquilino) 출생
히베이루(리베이루) [Ribeiro, Aquilino (Gomes), 1885.9.13~1963.5.27]
포르투갈의 소설가.
1930년에 시작된, 신사실주의적인 지역주의 물결이 밀려오기까지 포르투갈 소설의 대들보 역할을 한 인물이다. 혁명적 행동주의로 인해 1908~32년에 걸쳐 몇 차례 망명을 했으며, 대부분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많은 작품을 썼으나 북동부 방언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에 비해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지는 못했다. 그의 산문에는 어린시절 베이라 알타에서 자랄 때 보았던 여러 인간형(型)과 생활방식이 그려져 있다.
데뷔작으로 1914년에 〈폭풍의 화원 Jardim das Tormentas〉을 선보였으며 이어 〈악마의 땅 Terras do demo〉(1919)과 단편집 〈산티아고의 길 Estrada de Santiago〉을 출간했다. 1950년대말까지도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로마리가에스 저택 A casa grande de Romarigães〉(1957)·〈늑대들이 울 때 Quando os lobos uivam〉(1958) 등을 썼다. 40여 년에 걸친 작가생활 동안 24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문체상의 기교로 유명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시골 방언과 고어투의 말, 여러 종류의 인간형, 지역 고유의 동물상이나 식물상을 사용해 향토색을 전달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산티아고의 길〉에 등장하는 마야디냐스로 그 당시 많은 독자들은 그를 포르투갈 시골사람의 전형으로 여겼다. /브리태니커
- German expedition to the South
Pole, 1911 to 1912.
1877 - 독일의 과학자, 탐험가 빌헬름 필히너(Filchner, Wilhelm) 출생
필히너 [Filchner, Wilhelm, 1877.9.13~1957.5.7]
독일의 과학자·탐험가.
1911~12년 독일인 남극 탐험대를 이끌었다.
1900년에 지금은 주로 타지키스탄에 속하는 중앙 아시아의 산악지대 파미르 고원을 지나, 1903~05년에는 티베트를 탐험했다. 1911년 '도이칠란트호'를 타고 남극으로 항해해 1912년초 남위 77°50'에 있는 웨들 해를 통과했으며, 서경 29°~37°에 있는 바이에른의 섭정 왕자 이름을 딴 '루이트폴트 해안'의 해도를 만들었다. 3월 그가 탄 배는 부빙군(浮氷群)에 걸려 1912년 11월 26일 남위 63° 37', 서경 36° 34' 지점에서 풀려날 때까지 표류했다. 1926~28년 티베트에 있으면서 지도 제작을 위한 조사와 자기(磁氣) 관측을 실시했다. 또한 1939~40년에도 네팔에서 자기조사를 했다. 저서로는 〈마추의 수수께끼 Das Rätsel des Matschu〉(1907)·〈제6대륙에게 Zum sechsten Erdteil〉(1923)·〈탐험가의 생애 Ein Forscherleben〉(1950)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1874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Schoenberg, Arnold) 출생
쇤베르크 [Schönberg(Schoenberg), Arnold, 1874.9.13~1951.7.13]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빈 출생. 12음기법의 창안으로 20세기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 베르크, 베베른 등 많은 뛰어난 제자를 육성, 그들과 더불어 제2차 빈악파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못하여 거의 독학으로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초기의 작풍은 연면(連綿)한 주정(主情)의 세계를 묘사하는 후기 낭만파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현악6중주곡 《정화된 밤 Verklarte Nacht》(작품 4, 1899),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잔데 Pelleas und Melisande》(작품 5, 1903) 《구레의 노래 Gurrelieder》(1900∼1911) 등의 작품에서는 바그너와 말러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작풍을 거치고 나서 조성(調性:tonality)의 틀에 박힌 음악에 질식감을 느끼게 된 그는, 마침내 이를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 《3개의 피아노 소품》(작품 11, 1909)에서 조성과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부터 12음기법을 고안하기까지를 ‘무조(無調)시절’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시기에 그는 《관현악의 5개 소품》(작품 16, 1909)과 《달의 피에로 Pierrot lunaire》(작품 21, 1912) 등의 걸작을 내놓았다.
12음기법은 조성조직(調性組織)을 대신하는 이론으로서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작품 25, 1921)에서 이룩되었다. 이 무렵부터 비난의 대상이었던 그는 점차 인정받게 되어 1925년에는 베를린의 예술아카데미의 교수로 초청되어 이듬해 베를린으로 이사하였다. 옛 도시 빈에서 나와 자유로운 베를린의 공기를 마시게 된 이 시기에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작품 31, 1928), 미완성 오페라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2)을 작곡하여 그의 충실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나치스의 대두와 더불어 유대인이었던 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후로는 미국에 영주하였다. 그는 만년에도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히틀러에 대한 분노를 곁들인 《나폴레옹에로의 오드》(작품 41, 1942)와 유대인 대량학살을 소재로 한 《바르샤바의 생존자》(작품 46, 1947) 등은 특히 유명하다. 저서에 《화성악 Harmonie Lehre》(1911) 《작곡 초보자를 위한 범례 Models for Deginners in Composition》(1940), 논문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Style and idea》(1950) 《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ey》(1954) 등이 있다. /naver
1860 - 미국의 육군 장성 존 퍼싱(Pershing, John) 출생
퍼싱 [Pershing, John Joseph, 1860.9.13~1948.7.15]
미국의 육군 장성. 별칭은 Black Jack.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 파견된 미원정군(AEF)을 지휘했다. 1886년 뉴욕 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차례의 인디언 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쟁(1898)에 참전했고, 1906~13년 육군 준장으로 필리핀 제도에서 복무했으며, 1916년에는 멕시코의 혁명가 판초 빌라를 응징하기 위한 습격을 지휘했다. 링컨에 있는 네브래스카대학교와 웨스트포인트에서 군사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1917년 4월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유럽에 파병할 미군 사령관으로 퍼싱을 선임했다. 퍼싱은 6월에 전체 병력을 1918년까지 100만 명으로, 1919년까지 300만 명으로 늘릴 것을 건의하는 '전군 편제에 관한 보고서'(General Organization Report)를 제출했다. 애초의 미국의 계획은 그런 대군을 전제로 하지 않았지만 퍼싱의 건의는 주효했다.
연합군의 고위 사령부는 1917년의 패퇴로 많이 와해된 유럽군 사단들의 보충대로 미군을 활용하려 했지만 퍼싱은 독립군으로서 AEF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퍼싱은 연합군 측의 압력을 대부분 물리쳤지만, 1918년 3~6월의 독일군의 파리 공격중에는 그의 부대를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 휘하에 임시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퍼싱의 군대는 완전히 독자적이었던 적은 없지만 2차례 중요한 작전을 수행했다. 1918년 9월 AEF는 독일군의 생미엘 전초기지를 공격하여 함락하는 데 성공했고, 9월말에 퍼싱은 포크의 요청에 따라 메츠로 진격하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꾸어 뫼즈-아르곤 공세를 위해 신속히 그의 부대를 재집결시켰다. 불충분한 준비와 경험 부족으로 작전이 지연되었지만, 프랑스에서의 연합군의 합동공세로 10월초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11월에 휴전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퍼싱은 작전과 병참에 있어서의 실수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AEF 창설은 뛰어난 업적이었다. 그는 명성을 얻고 귀국하여 1919년 미국 육군 대장으로 승진되었다. '블랙 잭'이라는 그의 별명은 군대생활 초기에 흑인 연대에서 복무한 전력 때문에 생긴 것으로, 그의 완강한 태도와 엄격한 훈련을 의미한다. 정계로부터의 유혹을 피하여 군대에 머물면서 1921년부터 참모장을 지내다가 3년 후에 퇴역했다. 2권으로 된 그의 회고록 〈나의 세계대전 체험 My Experiences in the World War〉이 1931년에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57 - 미국의 기업가 밀튼 허시(Hershey, Milton) 출생
허시(허쉬) [Hershey, Milton Shavely, 1857.9.13~1945.10.13]
미국의 기업가·박애주의자.
허시초콜릿회사를 설립했고, 전세계적으로 초콜릿을 대중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골에서 학교를 중퇴한 뒤, 허시는 15세의 나이로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제과업자의 도제로 들어갔다. 1876년 도제생활을 끝내고 필라델피아에 사탕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6년 뒤 사업이 실패로 끝났다. 뉴욕에서 사탕을 제조하려 했으나 이것도 실패로 돌아가자 허시는 랭커스터로 되돌아왔다. 그곳에서 캐러멜 제조에 신선한 우유를 사용하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랭커스터캐러멜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1890년대에 걸쳐 계속해서 캐러멜을 제조하는 한편 허시는 점차 초콜릿 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허시는 캐러멜회사를 1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그후 초콜릿 바의 제조공법을 완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03년 펜실베이니아의 한 지역에 세계 최대의 초콜릿 제조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후에 이 지역은 허시라고 불리게 되었다. 허시의 기업은 상품을 선전하지 않았는데도 밀크 초콜릿 바의 인기를 바탕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했다. 허시 기업도시에는 기업이 관리하는 많은 공공편의시설이 세워졌다. 1918년 허시는 상당 부분의 재산을 M. S. 허시 재단에 위임했고, 재단은 허시가 설립한 직업학교인 밀턴 허시 학교를 후원했다. /브리태니커
1851 - 미국의 병리학자, 세균학자 월터 리드(Reed, Walter) 출생
리드 [Reed, Walter, 1851,9.13~1902.11.22]
미국의 병리학자, 세균학자.
버지니아주(州) 벨로이 출생. 황열병(黃熱病) 방역의 지도자이다. 1870년 버지니아대학을 졸업, 1875년 군의관이 되어 세균학을 연구하였고, 1893년 소령으로 워싱턴 육군의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에서 장티푸스 방역단(防疫團)의 위원이 되었고, 1900년 쿠바 주둔 미군에 황열병이 유행하였을 때 조사단장으로서 현지에 가서 모기에 의한 황열병 전염 경로를 연구하였고 1901년 황열병원체 바이러스를 발견하였다. 워싱턴의 월터 리드 육군병원은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naver
1830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에브너 에셴바흐(Ebner-Eschenbach, Marie von) 출생
에브너 에셴바흐 [Ebner-Eschenbach, Marie Freifrau von, 1830.9.13~1916.3.12]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모라비아(지금의 체코)의 치스라비츠성(城) 출생. 두브스키가(家)의 딸로 태어나 1848년 오스트리아의 에셴바흐 남작(당시 공병장교)과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생애를 문학에 바칠 수 있었다. 윤택하고 부유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소농민이나 사회적으로 학대받는 소시민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고, 한편 선의와 의무감을 중시하는 교육적인 면도 농후했다. 처음에는 서정시 ·희곡을 썼으나, 소설 《시계 파는 처녀 로티》(1889)를 발간하면서부터 문명을 떨쳤고, 그 후의 활약으로 19세기 독일 최대의 여류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로는 《지방청의 촉탁의》(1883), 《마을과 성(城) 이야기 Dorf-und Schlossgeschichten》(1886), 《보육원의 아이 Das Gemeindekind》(1887), 《속죄할 수 없다 Unsuhnbar》(1890) 등이 대표작이며, 특히 《크람밤불리 Krambambuli》 《거짓말 Der Fink》 등 동물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기울인 작품,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소품들이 많으며, 그밖에 자서전으로 《나의 유년시절 Der Vorzugsschuler》(1906)이 있다. /naver
1819 - 독일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Schumann, Clara) 출생
슈만 [Schumann, Clara, 1819.9.13~1896.5.20]
독일의 피아니스트·작곡가.
결혼 전 이름은 Clara Josephine Wieck.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다. 아버지한테서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835년경에 이르자 전유럽에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838년에 오스트리아 궁정의 인정을 받았고, 빈에 있는 음악 단체인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했고, 1841~54년 8명의 아이를 낳았다. 결혼 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일 때문에 연주자로서의 활동이 줄어들었지만,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했으며 자주 순회여행을 다녔다. 1856년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죽은 후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와 직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고, 남편의 작품들을 모아 편집하는 일을 했다(1881~93년 출판). 그녀가 남긴 작품으로는 관현악곡(피아노 협주곡 1곡을 포함), 실내악곡, 가곡, 여러 편의 피아노 독주 소품 등이 있고, 1983년 조앤 치셀에 의해 그녀의 전기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14 - 네덜란드의 목사, 작가 니콜라스 베츠(Beets, Nicolaas) 출생
베츠 [Beets, Nicolaas, 1814.9.13~1903.3.13]
네덜란드의 목사·작가.
네덜란드 문학의 고전이 된 〈암실 Camera obscura〉을 썼다. 레이덴대학 시절 바이런의 작품들을 읽고 영향을 받아 네덜란드 최초로 낭만주의 시를 썼다. 〈요세 José〉(1834)·〈쿠제르 Kuser〉(1835)·〈기 드 블라밍 Guy de Vlaming〉(1837) 같은 시는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서 한몫을 했다. 레이덴대학 재학중에 쓴 단편·설화·수필 등을 〈암실〉(1839, 힐데브란트라는 필명으로 편집)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이 작품들은 네덜란드의 정경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네덜란드 전통문학을 계승하는 한편, 스턴·램·디킨스의 작품을 읽고 배운 기발한 유머와도 결합시켰다. 1839년 성직에 임명되어 헴스테데(1840~53)와 위트레흐트(1854~74)에서 목사로 일했으며, 1874~84년에는 위트레흐트주립대학 교수로 근무했다. 교회에서 성공적인 목회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산문과 운문으로 된 명구들을 썼다. /브리태니커
1766 - ’엉클 샘’ 새뮤얼 윌슨(Wilson, Samuel) 출생
윌슨 [Wilson, Samuel, 1766.9.13~1854.7.31]
[역사속의 인물] ’엉클 샘’ 새뮤얼 윌슨
긴 백발에 흰 염소수염, 높은 콧날과 날카로운 눈매, 챙 바로 위에 별이 그려진 모자를 쓰고 연미복에 파란색과 붉은색의 줄무니 바지를 입은 신사. 미국인을 상징하는 ‘엉클 샘’의 모습이다. 이 캐릭터의 원조(元祖)가 육가공업자 새뮤얼 윌슨이다. 1766년 오늘 알링턴에서 태어났다.
뉴욕주 트로이에서 동생과 함께 육가공사업을 하고 있던 그는 1812년 영미전쟁이 터지자 미군에 쇠고기를 납품하는 계약을 따냈다. 그는 고기를 납품하면서 정부 소유라는 표시로 포장용기에 ‘E.A-U.S.’라는 검인을 찍었다. 정부 측 계약자 엘버트 앤더슨과 미합중국의 머리글자였다. 사람들이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공장 직원들은 “아마 앨버트 앤더슨과 엉클 샘이 아니겠느냐”고 대답했다. 당시 ‘샘 아저씨’로 불렸던 윌슨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를 재미있게 여긴 사람들이 얘기를 퍼뜨리면서 엉클 샘은 미국 풍자 만화가들에 의해 미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됐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몽고메리 플랙이 도안해 1, 2차 대전 때 사용된 ‘I WANT YOU’(당신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징병(徵兵) 포스터이다. 미국 의회는 1961년 ‘트로이의 엉클 샘’을 미국의 상징으로 공식 인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9월 13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6999&yy=2010
1598 - 펠리페 3세,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 즉위
1598년 9월 13일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1621)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으로 즉위했다. 포르투갈에서는 펠리페 2세로 명명되었다. 펠리페 3세는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와 그의 사촌이자 4번째 아내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오스트리아의 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펠리페 2세는 1578년 8월 조카인 포르투갈 왕 세바스티앙이 후계자 없이 죽자, 1580년 무력을 동원해 포르투갈의 왕위를 차지했다. 이로써 펠리페 3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왕위를 동시에 이어받아 포르투갈의 펠리페 2세를 겸하게 되었다. 인정 많고 덕망 있는 인물로 알려졌으나, 왕이 된 뒤로는 총신인 프란시스코 고메스 드 산도발 이 로하스에게 국정을 일임한 채 사치를 일삼았다. 펠리페 정부는 투르크에 대해 적대정책을 유지했고 베네치아 공화국 및 사보이 공작령과 경쟁관계에 있었으나, 그밖의 서유럽 국가에 대해서는 유화정책을 펴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1609년 모리스코들에 대한 추방 결정을 내려 중산층의 재정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이것은 결국 스페인 경제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다. 1618년 30년전쟁이 일어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을 무조건 지원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592 - 프랑스의 사상가 미셸 드 몽테뉴(Montaigne, Michel de) 사망
몽테뉴 [Montaigne, Michel Eyquem de, 1533.2.28~1592.9.13]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 사망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몽테뉴가 1592년 9월 13일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철학과 고전에 열중했다. 보르도와 파리에서 교육받았고 법관을 거쳐 궁정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5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몽테뉴의 영주가 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영주이면서도 농민이나 정원사들과 대화 나누기를 즐겼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가 건너온 시기이기도 했지만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심각한 대결구도에 빠져들었지만 그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견지했다.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한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에세'라는 책을 출간했다. '에세'는 그를 상징하는 '수상록'의 원제이기도 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에세이의 어원이기도 하다. 몽테뉴는 젊은 시절 쾌락주의적 천성과 싸우며 스토아적 금욕주의에 빠져들었던 법조인 겸 관료였다. 그리고 점차 경륜을 쌓으며 자유로운 인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회의주의자였지만 '절대적인 완성'에 대한 믿음은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무엇보다 그가 육체와 정신의 쾌락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다양성과 유연성, 평범함을 높이 평가했다는 데 있다. /조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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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출처:화목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