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고린도전서 3장 4-5절『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교회 안에서 바울파, 아볼로 파로 나누어진 것을 보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아주 질이 낮은 종교행위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것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학 위한 사역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유대교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율법주의로 전락한 유대교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확산되었지만,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기독교는 카톨릭이라는 세계적인 종교로 확산되었으며, 그 후 카톨릭과 정교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그 다음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가 시작되었고, 개신교도 수많은 종교 단체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독일의 루터교, 영국의 성공회, 청교도들이 건너가 미국에서 뿌리내린 많은 개신교의 분파들이 생겨났으며,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오순절 교회 등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미국 선교사의 영향으로 순복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으로 복음이 전파 되었다.
이렇게 나뉘어지게 된 배경에는 교리 또는 교의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는데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여러 분파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6-9절『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농부가 농사를 짓는데, 밭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을 때면 씨앗의 여린 싹이 두터운 흙을 뚫고 올라올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농부는 씨앗을 심기는 하지만 씨앗으로 하여금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씨앗은 땅을 뚫고 싹을 내어놓는다. 인간의 눈으로 모두 볼 수는 없지만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땅위로 솟은 어린 싹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경험이 많은 농부라면 우주만물의 질서가 어린싹이 자라도록 돕고 있음을 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때로는 얼마나 굵은지 모른다. 가속도까지 붙어 땅에 이르면 어린 싹이며 잎을 상하게 할 법도 한데 비는 싹을 해하지 않고 뿌리와 잎에 새 힘을 더한다. 저 멀리서 비춰오는 태양은 세상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어린 싹의 몸통과 줄기를 자라게 한다. 아침과 밤의 리듬 속에서 농작물은 생기를 얻기도 하고 쉼을 누리기도 하면서 조금씩 자라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농작물의 성장을 지켜본 농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농부가 스스로 농작물을 한뼘이라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농부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만물이 그의 뜻을 따라 순환하고 운행하며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작은 밭을 가꾸는 농부일지라도,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총을 누릴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생명으로 하여금 움트고 자라고 결실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밭의 비유를 들었다.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아직 육적인 마음의 종교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성경 지식으로 듣고 배우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심령 속에서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바울과 아볼로는 확실하고도 선명한 존재다.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막연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르는 일은 안정감을 준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는 것보다 보이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 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보다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쉽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임재하신 호 로고스의 말씀보다 유명한 신학자가 말한 교리를 더 신뢰하고 따른다면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나타난 분파 역시 교리가 문제인 것이다. 교리라는 것은 종교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함이지만, 깊히 들어가보면, 이것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세계관은 세가지로 변질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세가지는 율법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성경의 의미를 규칙화 또는 의식화하여, 교리로 만들므로서, 그것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의미보다, 교리가 더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 교리에 순종하도록 강요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에 순종하여 지키도록 하는 율법주의로 인해서 율법 속에 담긴 의와 인을 깨닫지 못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