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 / 백봉기
‘빠삐용’ 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은 프랑스 애 완견 ‘빠삐용’을 생각하고, 영화 마니아들은 영화 ‘빠삐용’을 기억할 것 이다. 하지만 우리 모임에서의 ‘빠삐용’은 생활의 한 덕목이다. 건배를 할 때는 으레 ‘빠삐용!’이라는 말을 외친다. 모임에 ‘빠’지지 말고, 이유 불문하고 ‘삐’치지 말고, 서로 ‘용’서하면서 살자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 다.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고 즐겁게 더불어 살려면 ‘빠·삐·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나이가 들면 조그만 일에도 삐치기 쉽고, 젊었을 때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던 일도 자존심 때문에 화를 낼 때가 있다. 특히 가족이나 후배 또는 사회로부터는 나이대접을 받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화를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치거나 심하게 얼굴을 붉히게 되면 결국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모임 전체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늦게라도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과하거나 화해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없던 것만 못하다.
설을 앞두고 두 아들 내외와 손자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챙겨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식사를 마친 뒤에 아내에게 “후식으로 애들 먹을 것 좀 없어?” 엊그제 사 온 곶감과 과일들이 생각나서 말했는데 아무 대꾸가 없다. 무슨 언짢은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며느리들 앞에서 계면쩍은 순간이었다.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까 하다가 딸에게 부탁했다 “자영아 여기 후식 좀 가져와라!” 그러자 뭐 뀐 놈이 화낸다더니 큰소리로 “밥 먹은 지가 언젠데 그래!” 옆에 있던 며느리들이 화들짝, “아버님 저희가 준비할게요.” 가만히 앉아있기가 무렴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애들에게 창피했다. 화가 치밀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언젠가 아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 집 보물 1호는 손자들, 다음은 아들딸, 셋째는 며느리고, 넷째는 애완견 뭉치, 그리고 꼴찌는 백봉기”라고. 강아지만도 못한 나였지만 농담이라고 생각되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모두가 사실이고 진심이었다. 이래저래 화가 치밀어 큰 소리 한 번 쳐볼까 생각도 했지만 순간 ‘빠삐용’이 생각났다. 참는 게 약이고 참는 자가 승리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하루를 참으면 백일이 즐겁고, 한 번의 굴욕을 넘기면 두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그래, 삐치지 말자. 용서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몇 시간 뒤 가족들을 데리고 모악산 도립미술관 쪽으로 갔다. 기분도 전환할 겸 아이들에게 한우구이를 사주고 싶었다. 내가 먼저 아내에게 러브콜을 했다. 맛있어 보이는 고기를 골라 아내 앞으로 밀어줬다. 할머니를 귀찮게 하는 손자들을 내 옆에 앉히고 편하게 음식을 먹도록 했다. 나는 화해와 용서의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분위기는 금방 달라졌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는 법,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집어 내 접시에 가져다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여태껏 말 한마디도 안 하던 사람이 “집에 가서 맛있는 술 한 병 줄 테니 아들이랑 먹어”라고 한다.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실천하기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 옳았다. 만일 내가 큰 화를 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속 좁은 사람이 되고, 가족들 앞에서 이미지 구기는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다. 오히려 자리를 툭 차고 안방으로 들어간 것이 미안했다. 빠삐용! 오늘은 ‘삐’ 와 ‘용’의 덕목을 잘 지킨 하루였다.
[백봉기] 《한국산문》 등단
* 온글문학회장 역임, 전북문인협회 부회장,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한국예총 전북연합회 사무처장, 한국산문작가회원
* 전북문학상, 한국미래문화상(문학부문), 전북수필문학상, 몽골문학상 수상
* 수필집 《여자가 밥을 살 때까지》, 《탁류의 혼을 불러》, 《팔짱녀》, 《해도 되나요》
하늘이 전형적인 가을하늘입니다. 흰 구름 핀 하늘은 높다랗고 맑아요. 아침저녁 바람은 또 얼마나 기분 좋게 하는지요. 백로가 낼모렌데요, 한낮 무더위는 만만찮아요. 추석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화기애애하게 지혜롭게, ‘빠삐용!’ 잘하셨습니다. 꿀꺽 침 한 번만 삼키면 만사형통이지요. 화날 때는, 부부지간이든 형제간이든 심호흡 크게 한 번하고 받아주기, 참아주기가 제일이네요.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