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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9 / 구체적으로 믿으세요. (출15:26)
월남전 당시 무기가 빈약한 베트콩들은 무기 대신 날카로운 쇠꼬챙이를 정글 곳곳에 묻어두었답니다. 이후 정글을 순찰하던 미군이나 한국 병사가 지나다 밟기라도 하면 쇠꼬챙이가 발바닥부터 발등까지 찔리게 되는데, 이때 한 사람이 찔리게 되면 두 사람이 부축을 해야 했고 다른 두 사람은 경계를 서며 가야 했기에 찔린 사람까지 도합 5명을 작전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군인 한 사람이 소중했던 정글전에서 베트콩의 쇠꼬챙이 작전은 그래서 아주 유효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도 모든 환난과 고난이 다 사탄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사탄은 쇠꼬챙이같이 찌르는 문제와 고난들을 인생의 요소요소에 숨겨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쇠꼬챙이 같은 문제와 고난들을 통해 사탄은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한편 믿음의 군사가 되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력화시켜버립니다. 교회가 됐든 가정에서든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만 잘 공격하면 주변 사람의 신앙까지도 묶어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형통할 수 있건만 현실에서는 영적으로 많은 사람이 사탄에게 찔려 아픔을 겪고 살면서도 치유할 방법을 도무지 알지 못해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들은 무의식중에 이적과 기사는 초대 교회 때 아니면 성경이 기록되기 전까지만 있었고 그 이후로는 치유 역사나 표적이 없는 것을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병든 자가 있으면 치유를 위해 교회의 지도자에게 기도를 요청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기도를 통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겁니다.
저 같은 경우엔 차가 고장 나면 자동차 정비 기술자에게 수리를 요청합니다. 고장 난 이유나 고칠 방법을 모르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같은 이치로 인생의 치유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인생을 영위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인생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설프게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돌팔이 짓하다 더 망쳐 놓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영적으로나 세상적으로 건강한 믿음입니다.
통상적으로 사탄이 가져오는 문제를 구분 지을 때면 육신의 문제를 고난이라고 하며 정신의 문제를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을 통틀어 인생에서 겪는 시험이라고 한다면 시험의 출처는 오직 한 곳 사탄에게서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면 사탄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대상입니다.
다만 이때도 문제가 되는 것이 사탄도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탄이 가져오는 시험 역시도 영적인 것이기에 육신을 가진 사람은 사탄이 시험하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시험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이어가며 영, 육의 유익을 얻기도 하고, 고난이 닥쳐온 순간에도 자신을 돌이켜보며 회개하고 겸손을 배우기도 합니다.
이런 점은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시험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시험을 ‘견디는 믿음’도 훌륭하지만,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시험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 사탄이 가장 빈번하게 시험하는 무기가 바로 질병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없는 천국에서는 어떨까요?
천국엔 병든 자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예수께서 감기에 걸려 사흘간 사역을 쉬시니라.’ 내지는 ‘예수님께서 관절염으로 6개월 요양하신 후에 베다니로 가시니라.’ 같은 말이 없습니다.
이렇듯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아프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린 왜 아프기도 하고 고난도 있게 되는 걸까요?
주목하세요. 사탄이 시험하는 공격 대상은 예수님을 믿는 내가 아니라 ‘예수 없는 나’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25장의 가사에서는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라고 합니다.
이 찬양 가사를 보면 예수님을 믿어도 시험은 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시험이 와도 겁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등 뒤에는 나를 도우시는 예수님이 떡하니 버티고 계시니까요. 그래서 찬송가는 계속해서 이런 권면의 가사로 이어집니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이제부터는 시험이 와도 겁내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이 왔다고 눈앞에 펼쳐진 시험만 볼 것이 아니라 시험 중에도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도 볼 줄 아는 믿음이 되셔야 합니다.
다시 한번 찬송가의 후렴구를 보세요. 주를 섬기기를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또 주를 기리기를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날마다와 언제나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믿음이 끊어지는 간격’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생을 ‘예수 없는 나’로만 있지 말라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이 없을 때 사탄이 접근했고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탄이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가정에서 예수 없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사탄은 그 가정에 시험을 가져옵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어디에서고 예수 없는 나를 보는 순간 사탄은 지체없이 시험을 가져오고 환난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린 매 순간을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해야만 하는 겁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입으로 시인해야 하는 것은 믿음만이어야 합니다.
내가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세요. 행여라도 입으로 시험을 즉 실패를, 병을, 원수 등을 시인하지 마세요. 가끔 보면 노상 ‘나는 환절기만 되면 아파!’라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런 분들은 환절기가 되면 틀림없이 아플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플걸’ 시인했기에 ‘아프게’ 되는 겁니다.
물론 시인 안 한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시험이 있더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이라면 마음으로는 치료를 시인하고 입으로도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시인하려 하세요. 그래야 시인한 대로 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시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일컬어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중간에 첨가하신 단어가 있습니다. ‘너희를’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희’가 바로 ‘나’ 인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요? 여러분은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가 다름 아닌 ‘나를 치료하는 하나님’이신 것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믿는데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잘 안 믿어진다는 게 오늘날의 현대 교인들이 가지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물론 하나님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은혜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구체적으로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믿음대로의 은혜도 구체적으로 있게 됩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하는 실수 내지는 불신앙이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치유는 내가 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를 예로 들자면, 그동안 치유 사역이 믿음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사이비나 이단에 의해 인본주의적으로 시행되어 오다 보니 치유한답시고 손톱으로 후벼파서 상처를 악화시키거나 안찰한다고 두들겨 패고 하다가 사고를 내서 뉴스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치유 사역을 이상 행동 내지는 광신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게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아주 교묘하고 악질적입니다.
예전에 넌센스 퀴즈 중에 일본에서 가장 악랄한 사람의 이름이 뭐냐고 묻는 게 있었는데, 정답은 ‘깐 이마 또 까!’랍니다.
가뜩이나 한번 까여 아파 죽겠는데 거길 또 까대니 죽을 맛이지요. 그런데 사탄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깐 이마 또 까듯이 이미 시험으로 고난을 당하게 해 놓고는 하나님을 믿어 시험에서 벗어나는 걸 막으려고 거짓 치유 사역으로 또 시험에 들게 합니다.
이렇게 인생이 연거푸 시험에만 들다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그것도 치유하시는 하나님은 언제 믿을 겁니까?
이제까지 세상에 드러난, 사탄에 의한 왜곡된 치유 사역을 보며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까지 믿지 못하게 되면 안 됩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야훼 라파!’ 이젠 구체적으로 하나님만이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힘든 시기를 만나면 어떤 사람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로 힘을 내려 하고 견뎌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시험이나 힘든 상황이 닥치면 우린 이렇게 고백하며 견뎌내고 이겨내야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치유하시리라!’
(한번 따라 하세요) “이 또한 하나님이 하시리라!”
고난이 있을지라도 “이 또한 하나님이 처리하시리라.” 실패했다고 해도 “이 또한 하나님이 해결하시리라.” 원수가 괴롭힌다고 해도 “이 또한 하나님이 제거하시리라.”처럼 “이 또한 하나님이 하시리라!”에서 말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해주시기를 원하는 내용을 단어만 바꿔서 넣어 보세요.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의 믿음이자 하나님이나 사탄이 듣기에 시인하는 말이 됩니다. 결국 사탄은 들은 대로 물러갈 것이고 하나님은 들으신 대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문젭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치유하실 것은 잘 믿지들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 구경을 갔는데 이런저런 축복의 방들이 있는 중에 어느 한 곳에 ‘못 찾아 먹은 방’이란 팻말이 붙은 걸 봤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물었더니 그 방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도 사람들이 찾아 먹지 못한 복들을 쌓아놓은 방이라고 합니다. 호기심에 들여다보니 세상에서 성도가 못 믿어서 못 받은 복과 기도하다 중단해서 못 받은 응답 등등이 쌓여 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많은 것이 성도들이 세상에서 써먹지 못해서 못 받은 ‘믿음의 복’이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써먹지 못해 못 받은 복은 없으시나요?
마가복음 16:17절로 18절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하면서 각종 기적적인 결과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하시는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매번 표적이 아니라 질병이 따르고 실패가 따라옵니다.
누가복음 9: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라는 우리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능력도, 권세도 세상에서 써먹질 못하니 내가 받을 복들이 죄다 천국의 못 찾아 먹은 방에 쌓여만 가게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줘도 못 먹는 여러분 되시지 말고, 하나님이 주셨으니 다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믿음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두리뭉실하게 ‘하나님’을 믿으셨다면 이제부터는 방법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나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5: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본뜻은 사탄의 시험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게 역사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업그레이드가 돼야지 반대로 쪼그라들게 되면 결국엔 시험에 지는 인생이 되고 말 뿐입니다.
전에 병원 목회를 하면서 보니 환자분들이 첫 입원 하실 때는 믿음도 충만하고 병원 교회도 열심히 나와 기도도 하고 그러더니 재입원을 하게 되면 조금은 실망하고 교회 출석도 뜸해집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입원하게 되면 크게 낙담하거나 아예 믿음을 체념한 듯이 행동하는 걸 보게 됩니다.
믿음이 이리되면 안 됩니다. 우리 말에도 삼세번이라 했던가요?
첫 입원이든 재입원이든 세 번째 입원이든, 믿음이 한결같거나 더 강해지는 것. 이게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믿음입니다.
동시에 이게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믿음이기에 사탄은 성도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고 성도를 향해 삼세번 시험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홀로 가나안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 여호수아를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또한 병을 고쳐보려던 딸아이가 죽었다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아이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런데 이 두 곳의 말씀에는 공통된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되 그 믿음으로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은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환자가 수술실을 도망쳐 나왔답니다. 직원이 병실에 있던 환자를 찾아내고는 물었답니다. ‘무슨 수술인데 겁을 먹고 도망치셨어요?’ 그랬더니 맹장 수술이랍니다. 그래서 직원이 ‘그까짓 맹장 수술 갖고 그렇게 겁을 내면 어떡해요.’라고 했더니 도망 나온 환자분이 하는 말이 ‘수술실에서도 간호사가 똑같은 얘기를 했는데 수술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풋내기 의사에게 그 말을 하지 뭡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어떤가요?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분이 보시기에 우리를 치유하신다는 하나님이 풋내기 같아서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풋내기고 내 믿음이 풋내기인데도 내가 치유하고 내가 해결하려고 하니까 우린 믿음을 시작해 보기 전에 겁부터 먹게 되는 겁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까?
26절을 다시 보세요.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어디에도 사탄이라든가 병명이나 치료법 등과 관련한 그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계명에, 하나님의 규례를 등과 같이 온통 ‘하나님과 관련된 말씀’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병과 싸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시험 앞에서는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노력은 전혀 할 필요 없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다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시 병든 걸 예로 들자면 의사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니 찾아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약이든 주사든 하나님의 창조물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먹고 맞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힘써 다 하면서. 그러나 치유는 하나님이 하실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형편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면요?
병원에 갈 돈도 없고, 내 병을 고쳐줄 의사도 약도 없다면요?
그렇다면 더더욱이 치유는 하나님이 하실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이쯤에서 잠시 여러분의 지난 삶을 돌아보세요. 오늘까지를 놓고 볼 때 여러분에게서는 인생의 무엇이 잘못돼 있습니까?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어떤 것이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시되 구체적으로 믿으셔서 이젠 하나님이 나를 치료하실 것까지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문제들을 해결하실 것까지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여러분의 인생이 그동안엔 천국의 못 찾아 먹은 방에 쌓여만 있던 영, 육, 물질, 건강과 인생의 많은 복들을 이젠 찾아 먹고 받아 누리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