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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대하여
1. 피라미드의 기원
2. 피라미드의 역사
3. 피라미드 건축
4. 피라미드 신비
1. 피라미드의 기원
피라미드란 고대 이집트에서 국왕, 왕족들의 무덤으로 건조되었다는 사각뿔 모양의 큰 돌을 사각뿔 모양으로 쌓아올린 탑의 유적을 말한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집트의 특이한 기후의 산물인 미라와 고대 이집트인들의 내세관을 알아야 한다. 고대 초기 이집트에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사막 경계 지역에서 시체를 약간 깊은 구덩이에 넣고 모래로 덮었을 뿐이다. 그러자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의 접촉을 받은 시신에서 급속한 탈수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수의가 썩기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미라가 만들어지곤 했다. 이집트인들은 우연히 육신이 보존된 미라를 발견하고 내세에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미라처럼 시신이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덩이가 커다란 무덤으로 변하고 관이 사용되자 시신은 모래와 직접 접촉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인공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들여 미라를 만들어도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흩날려 버리고 재칼과 같은 동물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곤 했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이런 이유에 피라미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이집트에서 뛰어나게 발달한 삼각형, 사각형, 육각형의 면적 산출과 원주율 3.16의 공식이 있는 기하학을 이용하였다. B.C2700년에 처음 건축하기 시작하여 많은 노동력과 기술을 소모하였으며 종교적 신앙의 행위의 근본적인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는 1백40여 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됐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 하더라도 80여 개에 이른다. 피라미드는 단지 왕의 무덤이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성에도 이용되는 것은 물론 영원과 안정을 희망하는 야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즉 굳건한 건축은 국민에게 불멸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피라미드 건설은 4-5 왕조에 절정을 이루고 13 왕조까지 지속된다. 피라미드의 건설 시기는 이집트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할 때였다. 파라오는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했고 중앙집권체제에서 사회는 안정돼 있었다. 하지만 후에는 피라미드는 후대 왕이 권력을 위해 선대왕의 피라미들 파헤치기도 하였다.
2. 피라미드의 역사
피라미드가 처음 만들게 된 역사적 기원은 왕조 시대에 이집트인들이 진흙 벽돌로 상부가 편평하고 옆이 경사진 무덤 “마스타바”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스타바”의 의미는 사자 (죽은 사람)가 환생할 때까지 영원한 삶을 누리는 직사각형의 묘이다. 마스타바의 지상부나 지하부에는 몇 개의 방이 있는데 한 방에는 미라를 안치하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을 넣어 두었다. 세계 최초로 돌을 가공하여 만든 피라미드는 사카라 제 3왕조 (기원전 2천 6백년경) 죠세르 왕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피라미드 복합 건축물’이라고 부르는데 묘지는 신전과 부속 건물을 비롯해 장례와 생활에 관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구조이다. 피라미드는 제4왕조에 이르면서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그런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계단식 피라미드의 건축술을 숙지한 건축가들은 가장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하늘을 향하는 뿔 모양의 피라미드로서 이상을 현실화시킨다. 이 시대가 5백년쯤 계속되다 실질적인 지배자가 파라오에서 지방 제후로 바뀌기 시작했다. 파라오의 권위는 약해지고 피라미드는 약탈당하고 파괴된다. 심지어 자신이 건설하는 무덤의 부장품을 확보하기 위해 파라오 스스로가 선대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고왕국 시대로 나누어 질 수 있는 제3왕조가 시작되고 제4왕조(기원전 2723년~2563년)에 초대왕 스네프루의 후계자 쿠프왕이 기자지역에 대피라미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아들 카프레도 대피라미드 옆에 피라미드를 하나 세웠고 멘카우레 또한 이 시기에 피라미드를 지웠다. 두 피라미드는 대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고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 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이며, 사람인 동시에 신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고 이집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기자의 남쪽 20킬로미터 지점 다슈르에도 피라미드가 2개있고 기자에서 북서쪽으로 6킬로미터 지점에 아부 와쉬르라는 황폐한 지역이 있는데 이곳 또한 한때 제4왕조의 피라미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그 자리에 기반과 초석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고왕조 이후의 왕조는 계속 이어져 기원전 30년 로마의 수중에 떨어질 때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파라오의 왕위계승은 사실상 끝났다고 한다. 대략 이까지가 기자피라미드가 고왕조에 세워졌을 때의 역사이다. 즉 지금까지 말한 이 시대는 피라미드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피라미드가 세워졌을 때이다. 제4왕조 때 3명의 파라오가 기자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의하여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헤라도토스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케오프스는 50년 동안 통치했다고 전해진다. 케오프스가 붕어 한 뒤 형제인 케프렌이 왕이 되었고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그것은 케오프스의 피라미드보단 12미터 정도 작았으나 크기는 동일하였다. 케프렌 왕은 56년동안 나라를 통치하였다. 그 후 케오프스의 아들인 미케도리스가 왕위를 계승하였고 미케도리스는 아버지보단 작은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
헤로도토스가 피라미드를 본 것은 기원전 5세기경으로 만들어지고 부터 2,000년 이상이 경과한 후였다 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헤로도토스의 증언은 그 후의 역사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3. 피라미드의 건축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었나?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정점에 위치한 기자 지역에 세계 최고(最古), 최대 규모이면서 가장 정밀한 석조 건축물이 우뚝 서있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도 4천5백여년 전에 건축됐다고 인정하는 이 건축물이 과연 그 옛날 석기와 청동기만을 사용했을 미개인들이 만든 것일까.
많은 고고학자들은 당시가 절대왕권 체제로서 자본과 노동력, 그리고 시간을 무제한으로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피라미드의 건축이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요점은 석기와 간단한 청동기 도구로 석회암을 채굴하고, 통나무와 지렛대, 그리고 윤활유를 사용해서 돌을 운반했으며, 완만한 경사로를 피라미드 상부까지 건설해서 돌을 쌓아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언뜻 생각하기에 가능할 것 같아도 건축의 규모를 헤아려보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사용된 돌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피라미드를 한변의 길이가 30cm인 정육면체 블록으로 쪼개면 지구 둘레의 3분의 2까지 늘어놓을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총 6백만톤이 넘는다. 이 정도 규모의 토목건축사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에 충분한 사회적 구조가 뒷받침됐음을 의미한다.
이집트 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경사로가 있다. 경사로를 이용하여서 돌을 굴려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사로가 1:10의 기울기를 유지하고 대피라미드 본체의 부피의 세배가 되어야만 가능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경사로는 벽돌과 흙으로 만들어 졌어야 하는 건데 이것은 불가능하다. 피라미드에 사용된 석회암보다 경사로가 견고하지 않으면 무너진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벽돌과 흙으로 이 무게를 지탱하여 겠는가? 또한 그 이전에 경사로 자체를 벽돌과 흙이란 재료로 쌓아올리기에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니면 똑같은 석회암으로 경사로를 만들었다 가정한다 해도 작업이 끝난 후에 남은 돌들의 제거도 밝혀야 하겠다.
또 하나의 가설은 나선형 경로이다. 이 방법은 확실히 재료의 양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정상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거대한 돌을 끌어당기면서 회전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외도 더 큰 이유는 나선형 경사로가 피라미드를 덮게 되서 건축가는 건설 중에 정밀도를 조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자 피라미드는 보란듯이 초정밀도를 나타내고 있다. 건설자들은 정밀도를 확인했으며, 완성할 때까지 정밀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피라미드의 정점이 정확하게 밑면의 중앙지점에 위치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사면의 각도와 변의 각도도 정확하고 돌 역시 정확한 장소에 놓여있었으며, 방위도 거의 정확하다. 현재까지도 그 건축방법은 끊임없이 연구되어 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모린 크레몬스(44)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쌓기 위해 하나에 약 2.3t이나 나가는 돌덩어리들을 옮길 때 바람의 힘을 이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23일 실제로 연(鳶)을 이용해 땅에 누운 3.2t 오벨리스크를 일으켜 보였다. 크레몬스씨가 이끄는 연구진이 이를 성공시키는 데 단 2명의 인력과 9m 크기의 연, 복잡한 도르래 시스템, 그리고 초속 7m 정도의 바람으로 충분했으며 시간은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AP통신은 24일 전했다. 크레몬스씨가 이 계획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97년. 그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의 돌을 어떻게 옮겼을까를 밝히려는 현대의 노력을 다룬 기사를 접한 뒤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바이킹들이 통나무를 깔고 풍력을 이용해 지상에서 거대한 바이킹 배를 이동시켰다는 얘기를 들은 뒤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러한 가설들을 뒤로하고 피라미드를 만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선 피라미드 이전에 오늘날 가장 정밀한 건축물중 대표적인 게 파리천문대와 그리니치 천문대는 각각 정확히 자오선(어떤 지점에서 정북과 정남을 따라 천구에 상상으로 그은 선)과 일치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실제로 측정한 결과 각 천문대는 자오선 방향에 대해 6호분과 9호분씩 틀어져 있었다. 이에 비해 대피라미드는 3호분 남짓 어긋나 있을 뿐이다. 또 오늘날 레이저빔을 이용한 초정밀 수준기(평면의 수평 정도를 측정하는 기계)로 건설되는 건물의 수준 오차는 전체 규격의 0.2% 남짓인데 비해 대피라미드는 전체 밑면적에서 겨우 0.03% 정도의 오차를 보여준다.
즉 대피라미드 건설에 적용된 기술과 기능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오늘날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면에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당시 이집트인들의 기능적인 능력을 극찬하면서 그들이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건축의 정밀도가 전적으로 기능에만 의존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보다 당시에 매우 발달한 기술 수준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즉 그들의 초인적인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대피라미드가 건설될 때 오늘날의 정밀 측정기에 버금가는 기기가 사용됐으리라고 추측하여 본다.
대피라미드는 쿠푸왕이 지었다고 알고 있다. 쿠푸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피라미드 내부를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흔히 발견되는 미이라나 전 세계 왕들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금은보화 중에는 없다. 다만 우리가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왕과 여왕의 방과 환기구멍 등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기본적 구조는 피라미드의 기본적 방향이 정북을 향하고 있다. 동면도 거의 완벽하게 정동을 향하고 있다. 평균 오차는 원호로 3분밖에 되지 않는다(남면은 2분 이하) 그리고 밑변의 네 의 길이는 거의 동일하다. 북쪽 변의 길이:230.25미터, 서쪽변의 길이:230.35미터, 동쪽 변의 길이: 230.39, 남쪽 변의 길이:230.45미터이다. 가장 긴 과 가장 짧은 변의 길이가 20센티차이만 난다고 한다. 대피라미드의 전체 높이는 137.28미터(정상의 9.42미터가 없어졌다고함. 이높이를 뺀 임), 돌은 203단으로 쌓여있고, 한단의 높이는 평균 68센티미터이다.
9세기에 카이로의 이슬람교도 총독이었던 마문이란 사람이 일꾼들을 데리고 대피라미드내에 있을 것만 같은 보물들을 도굴하기 위해 통로(마문의 통로)에 들어섰다. 내려가는 통로에서 길을 내는 작업을 하는 도중에 올라가는 통로) 구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망치등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 진동 때문에 그 부분이 조금 허물어져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올라가는 이 통로가 막혀있었다는 것이다. 피라미드를 만들 때 통로를 따로 만들어서 또 일부러 막아놓았다는 말이다. 건축학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한다. 이 통로의 폭은 사람 한명 겨우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서 어떻게 폭 길이와 똑같은 돌로 막아 놓을 수 있었는지.. 이곳은 여왕의 방이나 왕의 방 그리고 대회랑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이다. 그럼 이전에 이곳을 통과한 이들이 없었다는 말이지 않는가? 마문의 인부들은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왔는데 기대했던 그 무엇이 없어서 너무나도 허탈해했다고 한다. 마문 역시 꼭 금은보화가 아닌 실제로는 옛 고대인들의 높은 기술의 도구나 지혜의 책을 찾으려했었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여왕의 방은 남북길이가 5.68미터에 동서 길이가 5.74미터. 천장은 우아한 맞배 구조이고 높이가 6.22미터이며 정확하게 피라미드의 동서 축과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남쪽과 북쪽 벽에는 어두운 환기구멍이 깊숙하게 이어져있었다. 서쪽 벽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동쪽 벽은 중앙에서 60센티미터 남쪽 지점이 니치(niche: 서양 건축에서 장식을 목적으로 벽면을 오목하게 파서 그 안에 선반을 만든 것)로 장식되어있다. 돔 형태로 움푹 들어가 잇는 니치는 높이가 4.6미터에 아랫부분의 폭은 1.57미터이고 움푹 들어간 깊이는 1미터이다. 이런 니치와 여왕의 방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해답을 그 누구도 못 내놓고 있다고 한다. 왕의 방에 대해서 설명하여 보겠다. 왕의 방은 보통 피라미드의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서 높이는 5.8미터, 길이가 10.5미터, 그리고 폭이 5.25미터로서 2:1의 비율로 이루어진 직육면체 방이다. 바닥에는 열다섯 장의 두터운 화강암판이 깔려 있으며 벽은 100개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되어있는데 돌 하나가 돌 나의 무게가 70톤 혹은 그 이상으로 5단으로 쌓여져 있다고 한다. 천장은 각각 무게가 50톤 정도 나가는 아홉 장의 화강암판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왕의 방 서쪽에는 어두운 초콜릿 색 화강암으로 파내 만든 석관이 있다고 한다. 안에는 장석, 석영, 운모의 딱딱한 입자가 들어 있고 뚜껑은 없다고 한다. 쿠푸왕 피라미드 왕의 방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쿠푸왕의 석관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재 쿠푸왕의 시체는 도난 당하거나 훼손당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석관 안쪽의 크기는 길이 1.98미터, 깊이 87센티미터, 폭 68센티미터이고 바깥쪽의 크기는 길이 2.27미터, 깊이 1.05미터, 폭 98센티미터이다. 이 석관의 크기에는 일종의 수학적 계산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안쪽 용적은 1166.4리터이고 바깥쪽 용적은 2332.8리터로서 정확히 두 배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의심스런운 점은 이 석관을 어떻게 제작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피라미드를 어떻게 만들었는가라는 물음과 비슷할 수도 있을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 화강암을 절단하는데 그 당시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접어드는 시기인 이집트 제 4왕조 때의 가장 강한 재질인 철(그 당시 흔치 않았음)과 또 다른 보석으로 절단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톱날에는 무뎌지지 않게 하기 위해 화강암보다 더 강한 어떠한 강한 보석을 달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석관 안을 파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한다. 석관 안을 팔려면 앞에 말한 강한 철로 만들어진 도구와 보석으로 만들어진 직선이 아닌 원형 톱과 같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작업해야만 한다고 한다. 이때 그 원형 톱으로 이 석관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1톤이나 2톤의 하중을 걸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왕의 방 석관의 내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드릴에 강력한 압력을 거는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만약 그 시대 또 다른 가공 기술, 또는 도구가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하여간 화강암으로 된 이 석관을 제작한다는 것으로 이런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왕의 방 전체를 따져보자. 여기에는 지금까지도 설명한 것처럼 수학적 계산이 많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면 높이(5.8미터)는 바닥의 대각선 길이(11.6미터)의 절반이라고 한다. 또한 정확히 2:1의 비율을 지닌 직사각형의 방으로 "황금분할"이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 외 갱도는 환기통로를 말하고 정신이나 영혼의 통로라 불리는 에너지 통로가 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종교적 믿음이 일치하는 곳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정신이나 영혼의 통로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 이집트인들의 종교적 믿음과 일치하기도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논할 때마다 우선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석기 후반으로 볼 수 있는 고대 이집트에서 어떻게 커다란 피라미드들을 건설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같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다. 구리와 같은 연한 금속의 경우 현재의 합금과 같이 몇 가지 불순물을 사용해 강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았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연장의 대부분이 단단한 석재였다고 추측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했다. 석회암은 석회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연장으로도 능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보다 단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 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으로 부서지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돌항아리가 만들어진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특수 기술을 사용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돌항아리는 현재도 이집트 일부 지역에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법을 그대로 사용해 만들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관광지에서 옛날 수법 그대로 고대 유물을 복제해 판매하는 것과 같이 이집트에서도 단단한 돌항아리의 속을 파내 관광객에게 팔고 있음을 볼 때 특수 기술을 사용했다는 설명은 다소 과장으로 보인다. 대형 돌들을 채석장에서 절단하는 방법론도 논란거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채석장에서 돌을 추출할 때 나무 쐐기를 박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쐐기의 부피가 증가해 간단하게 절단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집트의 채석장에서 수백t의 대형 돌기둥인 오벨리스크가 미완성인 채 발견됐는데, 이곳에 쐐기를 사용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대형의 돌은 채석장에서 어떻게 기자 지역으로 옮겨졌을까. 기자의 대피라미드 석재는 기자 지역 외에 2곳의 채석장에서 공급됐다. 피라미드 외벽용으로 사용된 매끄러운 석회석은 기자 지역 근처의 카이로에서 50km 떨어진 투라에서 채석됐다. 그리고 피라미드 내부에 사용된 화강석은 카이로에서 9백km 떨어진 나일강의 첫번째 급류 부근에 있는 아스완에서 가져왔다. 평균 중량 2.5t, 큰 것은 70t이 되는 돌덩어리를 아스완에서 운반하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거대한 거룻배로 돌을 운반하고, 항구에서 현장까지 썰매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대피라미드 남쪽에서 발견된 '제1 태양의 배'는 당시 이집트의 건조 능력을 보여준다. 현재 원형이 복원돼 전시되고 있는 이 배는 좌우측에 5명씩, 그리고 배 앞뒤에 1명씩 총 12명의 노젓는 사람에 의해 운행된 것으로 보인다. 배의 규모를 볼 때 총길이 42.3m, 폭 5.6m로서 한번에 약 1백50t의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4. 피라미드의 신비
ⅰ) 세계의 중심에 위치-세계 대륙을 4등분
피라미드의 대명사는 이집트 쿠프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피라미드(기원전 2천5백년 추정)로, 과학자들이 가장 많은 연구를 수행한 피라미드다. 대피라미드 옆에는 쿠프왕의 아들과 손자의 무덤으로 알려진 두 개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있고, 왕비의 무덤이라는 작은 피라미드 6개가 3개씩 2줄로 배치됐다. 이 9개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서남쪽 가까이에 위치한 기자 지역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여러 면에서 지리학적인 ‘중심’이라는 점이다. 먼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수직선(동경 31도)과 수평선(북위 30도)을 그리면 전 세계 대륙 면적이 거의 4등분된다. 또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끝 부분을 원호로 연결할 때 대피라미드는 원의 중심에 위치한다(그림 2). 이곳은 고대의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피라미드가 세계의 어떤 ‘중심’이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ⅱ) 현대 기술이 손 든 정밀성
대피라미드를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먼저 대피라미드의 엄청난 규모에 일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구조물의 건축학적 정밀성을 확인하고 감탄하기에 이른다. 대피라미드의 네변 길이는 모두 2백30m 정도. 평균 2.5t의 무게와 어른 키만한 돌로 이렇게 길게 받침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각 변의 길이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소숫점 첫째 자리에서 값의 차이가 날 뿐 거의 비슷하다. 과학자들은 대피라미드에서 측정된 각종 수치들을 여러모로 연관시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대피라미드에 숨겨진 천문학적 수치가 드러났다. 먼저 과학자들은 피라미드가 독특한 단위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현재 보편적으로 알려진 1피라미드 단위는 지구의 남북극 거리를 2천만으로 나눈 수다. 이 단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밑변 하나를 이 단위로 나눈 값은 약 365. 잘 알고 있듯이 이는 1년의 날짜다. 지구의 세차 운동과 연관된 수치도 발견됐다. 지구의 적도 둘레는 약 4만75km, 반지름은 약 6천3백78km. 그런데 이를 ‘4만3천2백’으로 나눠 보니 이상한 값이 나왔다. 먼저 적도둘레를 나누면 약 9백27m가 산출된다. 피라미드 네변의 합과 거의 유사한 값이다. 또 지구 반지름을 나눈 값은 약 1백47m. 피라미드 높이에 거의 일치한다. 피라미드의 둘레와 높이가 지구의 크기를 상징하는 셈이다. 문제는 ‘4만3천2백’이란 값이 어떻게 산출된 것이냐는 점이다.
ⅲ) 왕의 방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장소는 일명 ‘왕의 방’이다. 밑면에서 3분의 1 떨어진 곳에 위치해 면도날을 재생시키고 부패를 막는 등 ‘피라미드 파워’를 일으킨다는 곳이다. 이곳에는 어떤 수치들이 숨겨져 있을까. 어떤 학자는 이것이 북극성을 관찰하기 위해 만든 통로라고 주장했다. 피라미드가 세워진 당시의 별자리를 고려한다면 이곳에서 북극성을 보기 위해 피라미드는 정확히 북위 30도에 위치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 피라미드의 위치는 북위 29도58분51초. 이 오차는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한편으로 북극성에서 발하는 빛이 공간에서 굴절되는 것을 고려해 일부러 약간 뒤에 만들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관찰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근소한 오차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ⅲ)새로운 기원설-오리온자리와 일치
대피라미드가 설립된 연대는 확실치 않다. 쿠푸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진 기원전 2천5백년 경에 설립됐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기원전 5세기)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한 승려로부터 듣고 기록한 내용에서 비롯된다. 달리 말해 헤로도투스가 잘못 알았다면 우리의 상식도 잘못된 것이다. 새로운 해석이 천문학 분야에서 제기됐다. 단서는 쿠푸왕과 아들, 손자의 피라미드로 불리는 세 피라미드의 위치가 오리온 별자리 가운데 세 별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제시됐다(그림 3). 현재 이 세 별은 기자의 남쪽 하늘에 있는데, 아래쪽 두 별(알 니탁, 알 닐람)을 직선으로 연결하면 세 번째 별(민타카)은 그 선에서 약간 왼쪽, 즉 동쪽 방향으로 어긋나 있다. 세 피라미드와 유사한 배치였다. 이 점에 착안한 어떤 천문학자는 피라미드를 만든 시기가 혹시 이 별들이 피라미드의 바로 위에 떠있던 때가 아닐까 추측했다. 이를 가정해 계산한 결과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약 1만4백50년이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 시기에 하늘의 은하수는 나일강의 위치에 거의 중첩돼 펼쳐져 있었다. 대피라미드 옆에 선 거대한 돌덩이 스핑크스도 이런 추측을 강화시켰다. 사자 모양을 한 스핑크스가 바라보는 쪽은 정동 방향. 태양은 낮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에 정동에서 뜬다. 고대인들은 보통 춘분점을 천체 시스템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이때를 태양의 1년 주기가 시작되는 지점으로 파악하고 다른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렇다면 스핑크스는 왜 사자모양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춘분에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별자리의 모습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나왔다. 스핑크스가 만들어진 당시 정동 방향에 사자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는 기원전 1만9백70년에서 기원전 8천8백10년 사이. 피라미드가 1만4백50년 경 만들어졌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수치다.
ⅳ) 공간의 미학, 황금비-자기 유사성 가진 조화
왕의 방’에서 발견된 황금비는 12세기 이탈리아 수학자 피보나치가 발견한 수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피보나치 수열은 연속적으로 배열된 수에서 앞의 두 숫자를 더해 다음 수가 배열되는 방식에 따른다. 즉 1, 1, 2(1+1), 3(1+2), 5(2+3), 8(3+5)…의 형태다. 이때 뒤로 갈수록 ‘앞의 수:뒤의 수’가 황금비와 유사하게 일치해간다.
이집트 문명에서 대표적인 예술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파라오는 고대의 유물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인 영향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불멸의 정신을 상징화 해준 것이다. 제3~제5왕조 시대에 성행하였던 파라오는 현대에서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그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재료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불가사의 한 면을 남기기도 한다. 거의 정확하리만큼 예측은 하고 있지만 결국 그 예측이 맞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른다. 건축설은 여러 방향으로 분분하여 있고 증거자료도 확보되어 있지만 말이다. 또한 피라미드에서 나타나는 신비한 점들은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것으로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 한 점이라 현세에서도 사람들은 그 매력에 이끌리는 듯 하다.
기자 피라밋
- 카이로 인근 기자지역에 위치한 3개의 피라밋은 제 4왕조(BC 2613- 2494)의
Khufu왕, Khafre왕, Memdaure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70여개 피라밋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기자에 있는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가 유명-기원전 25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피라미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국왕, 왕비, 왕족 무덤의 한 형식으로서, 그 어원은 그리스어인 피라미스(pyramis)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메르(mer)’라고 불렀으며, 아랍어로는 ‘아흐람(Ahram)’ 복수는 ‘아흐라마트(Ahramat)’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로는 현재 80기(基)가 알려져 있으며, 이 중 대부분이 카이로 서쪽 아부 라와슈(Abu Rawash)에서 엘-라훈(el-Lahun)에 이르는 남북 약 90 km인 나일강 서안 사막에 점재해 있다. 그러나 많은 수가 붕괴되어 벽돌 혹은 돌로 이루어진 산의 형태만 갖추고 있거나, 심지어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있어, 옛날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적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Giza)의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 파라오의 피라미드로 가장 규모가 크다.
즉 스핑크스는 지키는 역활이고 피라미드는 왕과 왕비, 왕족의 무덤이다.
쿠푸왕 피라미드
카프레왕 피라미드
카프레왕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카프레왕 프라미드와 쿠푸왕 피라미드
높은 지대에 세워져 있어 보는 위치나 각도의 따라 가장 높은 것같이 보인다. 3대 피라미드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고 표면의 상단과 하단에 외장용 화강암이 일부 남아 있어 이집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지닌 피라미드로 꼽힌다. 카프레왕 피라미드 동쪽에 피라미드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전체 길이 약 70m, 높이 약 20m에 달하는 거대한 스핑크스가 자리 잡고 있다.
멘카우레왕 피라미드 |
'기자 3대 피라미드'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쿠푸왕의 손자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이다. 쿠푸왕 피라미드와 카프레왕 피라미드의 절반 정도라 할 만큼 규모가 작다. 높이 65m, 밑변 105m의 규모이며 훼손이 가장 심한 편이다. 이에 반해 멘카우레 왕의 석상은 보존이 훌륭해 국보급 유물로 이집트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멘카우레 왕 피라미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안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관람객이 적고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