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中宗 5 : 1510 ~ 1560 : 明宗 15)
조선 명종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字)는 厚之(후지), 호(號)는 河西(하서)·澹齋(담재). 본관(本貫)은 蔚山(울산), 전남 장성 대맥동(全南 長城 大麥洞)에서 參奉 齡(참봉 령)의 아들로 태어났다. 慕齋 金安國(모재 김안국)의 문인.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蘇齋 盧守愼(소재 노수신)·高峯 奇大升(고봉 기대승)·秋巒 鄭之雲(추만 정지운)·一齋 李恒(일재 이항) 등과 교유하였다.
1540년(중종 35) 문과(科擧)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에 등용되었으며, 그 후 박사(博士)·부수찬(副修撰) 등을 지냈다.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일 때부터 은우(恩遇)가 깊었으며, 인종이 승하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가 性理學 연구에 전념, 누차 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매년 仁宗 승하한 7월 1일에 산에 올라가 통곡하였다 한다. 천문·지리·의약·점죽·산수·율력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서예에도 능했다. 그는 학문에 있어서 정주학(程朱學)에 기초하여 성경(誠敬)을 위주로 하였으며,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의 학문이 사색에 빠졌다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선학(禪學)·양명학(陽明學)·불교에도 반대하였다.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퇴계(退溪)와 같은 관점을 취하여 理 중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말하였다. 그는 일재(一齋)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비판하면서,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太極)이 음양(陰陽)을 떠나서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 리(理)의 영원성·절대성을 주장하여, 삼라만상에 모두 리(理) 아닌 것이 없으며 理는 시간이나 역사성을 초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인성(人性)을 중(中)으로 파악하고 선악을 화(和)와 과불급(過不及)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중용(中庸)』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천명도(天命圖)」를 그렸는데 여기서 천도를 성(誠)으로 표현하고 그 命은 인성인 중(中)으로 일관되게 이어지게 함으로써 『중용』의 두 기본 개념인 성(誠)과 중도사상으로 천명의 흐름을 나타내었다.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구분에 있어서는,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상태인 본연지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질지성은 비인륜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어 도덕에 해를 끼친다고 하였다. 이러한 악소(惡素)에서 오는 나쁜 마음을 버리고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소학(小學)』·『대학(大學)』 등을 읽어서 수양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수양론에 있어서는 경(敬)을 중시하여, 경(敬)으로써 마음(心)을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마음이 본래 일신(一身)의 주재이지만 기(氣)가 섞여 외물(外物)에 유혹되면 마음이 외부로 치달려서 몸에 주재가 없게 된다고 하면서, 경(敬)으로써 바르게 하면 곧 전과 같이 마음이 몸을 주재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또 마음 가운데 주재가 있다는 것은 곧 경(敬)을 이르는 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퇴계와 더불어 순수한 주자학(朱子學)을 조선 왕조의 지도 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주자(朱子)의 학설에 따르지 않는 점이 있으면 이학(異學) 혹은 이단(異端)으로 논박하였다.
정조 20년(1796)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저서에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