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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는 일군이 됩시다
2024년 1월 20일 / 마 9:35-38
마 9:35-38 / [목자 없는 양] 예수께서는 그 지역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유대인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다 고쳐주셨다. 36) 또 모여든 군중을 보시며 목자없는 양처럼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도 큰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가엾은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3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구나. 38) 그러니 너희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어느 때를 막론하고 복음사역에는 적극적인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였다. 특히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하시어 구원해야 할 영혼이 많음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알곡이 나눠진다. 이것을 세상종말로만 연결해서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현실로 여겨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세상적인 농사도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씨 뿌림이나 가꿈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하지만 추수의 때를 놓치면 씨 뿌림과 가꿈의 모든 수고가 아무 소용없게 된다. 신학대학에 입학하면 1학년 때에 열심히 부르는 곡이 있다. 교회에서는 자주 부르는 곡이 있다. ♬ 찬송가 495장
➊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 내가 어찌 게을러서 앉아 있을까 어서 가자 밭으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➋ 주가 두루 다니시며 일꾼 부르나 따르는 자 적구나 보라 주의 사랑하는 익은 곡식을 어서 거두러 가자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➌ 주가 나를 인도하니 언제 어디나 기뻐 가서 일하리 주가 명령 내리실 때 능력 받아서 기뻐 거두리로다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그런데 이 곡은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철저한 준비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사 6:8 /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길 잃은 양은 누구인가?
길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 힘없는 양에게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더욱 비참한 일이다. 집에서 몇 마일 안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양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길을 찾는 비상한 능력을 타고난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돌아온 래시(콜리는 ‘돌아온 래시’로 유명한 견종이다. 돌아온 래시에서 1943년에 나온 영화 ‘래시 집에 오다’도 영화로 나왔다)'일 것이다. 낯선 땅에서 강과 들, 언덕과 산들, 시골길을 건너 수백 마일 길을 지나 집을 찾아온 한 콜리견의 모험담이다. 수십 일 동안 그 먼 길을 지나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래시는 지친 몸과 상처입은 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개나 고양이, 말, 기타 여러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낯선 땅에서 마침내 농장으로, 방목지로, 농장 뒷문으로 돌아와 깜짝 놀라 반가이 맞는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들이다. 들짐승들의 경우에는 먼 곳에 흩어져 있다가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양만은 예외이다. 폐쇄된 장소에서는 양도 어느 정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양은 자기 초장을 알고 계곡,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곳과 어미양의 젖을 빤 곳도 기억한다. 양은 아침 일찍 한쪽에서 풀을 뜯었으면 나중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그늘에 들어가 쉬는 것은 늘 똑같은 장소이고, 똑같은 그룹에 섞여 잠자며, 풀을 뜯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자기가 원래 풀 뜯던 곳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가엾은 양을 낯익은 땅에서 떠나게 만들면 양은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방향 감각이 전혀 없다. 적응력도 없다. 집 찾아가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한다. 그저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당황했을 때 그러듯 ‘매애애앰’ 소리만 계속 내고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고 적응하지 못하다가 며칠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지대에 있는 방목지에는 울타리가 없는데, 각 목장주가 소유한 양들은 자기네 구역에 그대로 남아 있는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큰 무리의 양들이 모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 8천에서 1만 마리까지 - 그 중 이웃 목장에 속한 양들은 고작해야 이삼십 마리밖에 안된다.
길 잃은 양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진리 그 자체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바와는 반대로) 양들은 매우 아름답고 겸손하며 대단히 영리한 반면 너무나도 쉽게 길을 잃고 방황한다. 일단 길을 잃으면 먹이나 물은 전혀 찾지 못한다. 양떼에게 사시사철 하루도 빠짐없이 먹이를 주고 물을 공급해 주며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수천 명의 헌신적인 목자들이 아니라면 전세계 11억 마리 양들은 얼마 안가서 굶거나 목말라 죽고 말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길 잃은 양의 비유만큼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생생한 묘사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더 적절한 비유를 말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양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하셨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몇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자신이 흘린 냄새를 추적해서 실마리를 찾아내고 동무들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양은 예외이다! 가엾은 양은 길을 잃어버리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다가 어쩔 줄 몰라 포기하고 만다. 이 유명한 비유는 양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며, 목자 없이 내버려진 인류의 애처로운 영적 상태를 말해 준다. 목자로서의 경험과 이사야 53장의 예언적 말씀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잘 알고 계셨다.
이 구절의 심오한 의미는 그것이 기록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오늘날의 현실에 들어맞는다.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자.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예수님께서 사셨던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우리는 자랑스러이 바라보고 있다. 인류는 수많은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왔다. 세상은 과학적, 기술적, 농업적 진보로 가득 차 있으며 온갖 경이로운 일들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다.
남극의 매서운 추위와 사막의 뜨거운 열기, 이 모두 온도조절 장치로써 적당한 온도로 조절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난방, 냉방, 에어컨디셔너 등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새처럼 날아 다니는 것은 과거에 일부 사람들만의 꿈이었지만 이제는 음속보다도 더 빨리 날 수 있으며, 공간의 제약 없이 이웃집에 걸어가는 속도로 세계 곳곳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질병과 고통으로 형제와 자매가, 가족과 친구, 아들과 딸이 열 명에 한 명꼴로 죽어갔지만, 이제는 팔뚝에 주사 한 방만 놓으면 신체의 적 질병에 대해 면역 체계가 생기고 사람들은 건강과 장수를 누리게 되었다. 신체의 각종 부분, 내장, 심장마저도 수리가 가능하고 이식되기까지 한다. 마치 기계공이 자동차 부품을 가는 것만큼이나 용이하다.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고 약을 먹고 잠이 드는 현대인은 자신의 모든 물질적 필요를 조달받고 있다.
과거에 우주는 미지의 영토였으며 하나의 신비로서 남아 있었다. 놀라움과 경이의 원천,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자그마한 존재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가사이한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은 두려움없이 그 발을 우주를 향해 내딛고 있다. 땅을 비추고 광대한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을 인도해 주었던 저 달, 바다와 강의 조수를 움직이게 하며 연인들에게는 낭만을, 기이한 영향을 내려 주던 달도 인간에게 정복당하고 인간의 무거운 발자욱을 느껴야만 했다.
인류는 과연 만물의 영장이다. 어류, 동물, 조류, 기타 모든 형태의 생물들의 조인이며 인간은 그들 위에 군림해 왔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의 군주이다. 인간은 광물의 부도 모두 차지했다. 인간은 원소와 중성자, 양자, 원자력까지 자유자재로 동력화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의 지성과 과학, 기술의 힘을 감지했고, 세상은 보다 낫게 혹은 더 나쁘게 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과거 여느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의 혼과 내적인 영적 성품은 창조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서 위에서부터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한 자들만이 예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의 수수께끼요 모순이며 역설이다. 그토록 진보된 것 같고 영리하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고, 지성의 면에서는 모든 동물 위에 뛰어난 것 같지만 문명의 겉치레 이면에는 가련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참으로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 인간은 ‘놀랍고도 경이롭게’ 지어졌으며(시 139:14),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어졌다(히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이다. 온갖 유한함, 온갖 연약함, 온갖 외로움, 온갖 제약, 온갖 취약점 등을 지닌 인간이다.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지적 존재가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배워 보자. 목자 없는 양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것처럼, 우리 또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없이는 공격에 쉽게 쓰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서운 영적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맹수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 맹수들 중에는 우리의 대원수 마귀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다(벧전 5:8).
▶ 우리는 얼마나 쉽사리 불식간에 붙잡혀 희생당하고 마는가. 특히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거나 무사태평할 때, 또는 '그런 일은 나한테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안도감에 안주하고 있을 때 그렇다. 얼마나 많은 위대하고 능력있으며 똑똑한 사람들이,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지도자들, 고결한 시민들, 유명한 배우들과 작가, 시인, 화가, 음악가, 연설가, 정치인, 군사 영웅들이 그만 저 무서운 맹수 사탄에게 희생당하였는가? 자신이 지닌 천재성과 독창성, 크나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유혹에 빠져 그만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 거대한 악의 세력은 현 세상에 풀려나서 선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약점을 미끼삼아 그들을 죄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타락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처럼 어리석고 말도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인생의 승리자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그처럼 쉽사리 희생자로 변하며,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너무나 쉽게 타락하고 마는 것인가? 왜 강한 자가 그렇게도 쉽게 떨어지는 것인가?
▶ 현대 이론, 철학, 심리학에서는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심리학적 방법으로 답을 찾아 보려고 방황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호언장담은 현대판 바벨탑이요 해답을 주는 대신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인간의 이론을 믿고 있다. 여기에도 분명 믿음이 요구된다. 선한 목자의 사랑어린 부르심에 응답하는 데도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양쪽 모두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인간은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상태이다. 양은 참으로 쉽게 길을 잃는다. 이 사실은 양을 도살장으로 유도할 때 사용되는 법칙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약 4천만 마리의 양이 시장에 판매되는데, ‘유다’라 불리는 양이 양들을 도살장으로 이끌고간다. 이 ‘유다 양’은 덩지 큰 거세한 숫양으로 양들을 몰아넣는 우리 맨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에 있는 도살장까지 유도한다. 불쌍한 양들은 코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 그저 따라만 간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유다 양’을 위한 탈출구가 열리고 이 양은 재빠르게 빠져나가 다시 밑바닥에 있는 다른 양들을 또다시 죽음의 장소로 인도하는 일을 반복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영적인 교훈이 있다. 당신이 따라가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주의해야 한다. 올바른 인도자를 따라가야 하고, 올바른 길, 목자이신 주님께서 지도하시는 길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곁길로 빗나가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결코 우리가 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도록 이끄시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우리의 혼을 소생시키신다.
현대인은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선한 목자께서 찾아 주시고 사랑 많은 품 안으로 안아 주시며 그분의 강한 어깨 위에 올려 주시며 사랑해 주시고 먹여 주시며 그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무서운 상실감에서 풀어 주시어 집으로 데려가 주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 우리가 양처럼 연약하고 유한하며 힘없고 자기를 방어할 줄 모르며 공격에 무방비상태라는 것을 알면 그러한 현실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못된다. 선한 목자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맹수 마귀의 기만, 미혹, 유인, 속임수와 계략에 쉽사리 희생당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 우리의 유일한 방어책, 우리의 유일한 대책은 선한 목자께 있으며 그분만이 저 무서운 맹수를 능히 물리쳐 주실 수 있다. 양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힘과 능력 안에는 나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지만, 선한 목자 주님의 양떼에 속해 있는 양이라면 그 양은 어떤 이도 해칠 수 없다. 그분의 양은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나, 주와 함께 행하는 양은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곁에는 선한 목자께서 함께 행하시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있을 필요도 없고, 공포 속에서 당황할 필요도 없으며, 망연자실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목자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되자.
예수님이 보실 때는 언제나 추수할 영혼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라’(37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눈에는 보이는 곳마다 추수할 영혼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그를 따르는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이 마땅한 일이나 너희들이 더 문제니 너와 너희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울라’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불쌍한 영혼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추수해야 할 영혼을 생각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세상이 온통 추수할 곡식으로 가득 차 있다. 주위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면 추수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영적으로 바라보면 여기 저기 영적으로 추수할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추수할 일군에게는 모두가 추수할 대상으로 보인다. 영적으로 추수할 영혼이 보여야 한다.
예수님 보혈의 은총을 힘입고 성령의 안약을 발라서 추수할 대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으로 내 영혼이 변화받고 거듭나서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시기를 소원한다.
♬ 589장 ➊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에 향기 진동하도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때가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 한다 아멘
➋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매우 적으니 열심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➌ 먼동뜰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➍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 이 땅을 거닐고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서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무리를 볼 때 정치가들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한 표로 본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장사의 대상으로 자기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고객으로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무리들을 보았을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양들로 보셨다. 성경이 인간에 관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묘사들을 하는 중에 가장 탁월한 묘사 중에 하나가 양이라는 표현이다. 인생을 양으로 보시는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예수님의 눈에는 목자 없는 양으로 보였다. 목자 없는 양들 방황하는 양들로 보시는 예수님처럼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되자.
♬ 경배와 찬양에 이런 곡이 있다.
➊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➋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 미국의 유명한 부흥 목사님인 찰스 피니는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 거리에 왔다가 거리의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는 분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그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우리도 지옥갈 영혼을 민망히 여기며 추수하는 일군이 되자. 유리하는 심령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되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민망하다는 말은 ‘함께 고통한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리하는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다. 양의 방황이 자신의 방황이었다. 양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고,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이었다. 그들의 방황 두려움 아픔 좌절을 자신의 좌절처럼 아파하셨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은 예수님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 헨리 나우엔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였다. 자신은 건강한 상태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접근해 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셨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또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사 이 땅에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셨다.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셨고, 아파도 하셨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심으로 우리를 이해하셨다.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자,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시며 동시에 제자들에게도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그런데 이 책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인용하였는데, 어떤 랍비 하나가 우연히 예언자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다.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물었다. ‘메시야는 언제 오십니까?’ 그러니까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메시야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아니! 어디 계신데요?’, ‘아마 저기 성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실 것입니다.’, ‘아~ 그래요. 내가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이때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말하기를 ‘그분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상처를 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상처를 풀었다 감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상처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두리번거리며 도울 자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이 바로 메시아일 것입니다.’
추수할 일군은 사람들을 볼 때 민망히 여기며 아픔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좌절할 때 붙들어 주고, 낙심할 때 위로하며 버릴 수 없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 가는 사람이 추수할 일군이다.
내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으나 자기 아픔 속에만 빠지지 않고나 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더한 아픔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웃들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일꾼이 추수할 일군이다.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도 상처가 많다. 아픔도 많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으면 인생은 그냥 자기 상처와 싸우다가 끝난다.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더 깊은 더 예리한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 수많은 영혼, 목자 없이 방황하고 예수님이 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모습을 바로 보는 심령이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유리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눈물 지울 수밖에 없다.
중병이 들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일이 귀한 일이다. 빚을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일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목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과 금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이다.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는 불쌍한 것이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최고의 복이다.
계 14:13 / 또 나는 바로 내 머리 위에서 '기록하라. 드디어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보상받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도 '그렇다. 그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수고와 시련에서 벗어나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착한 행실이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보다는 영혼이 귀중하다. 그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한 번 의미 있게 살고 싶다. 무의미하게 그냥 내 일생의 상처 붙들고 몸부림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되기 원합니다.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원하시면 저를 쓰실 수가 있사오니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도 중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을 생각하며 절규했다 한다. ‘하나님이여! 저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추수하는 일군으로서 이런 영혼을 위한 애정 어린 절규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참된 추수하는 일군이다.
바울처럼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는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모세처럼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진다’하여도 자기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진짜 추수하는 일군의 마음이다(롬 9:1-5).
유리하는 영혼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됩시다. 복음 전파를 위해 쓰임 받는 일군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그의 시대에 효과적인 세계복음화의 전략을 위해서 동료 지도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토의되고 있었다. 갑자기 웨슬레가 일어나더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방법이요?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죄만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100명만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다."
세계 기독교 교회사를 기술한 학자 가운데 라토렛이라는 학자가 1세기의 초대교회를 기록하면서 ‘초대교회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스토리’라고 기록하였다 한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아무나 볼 수 있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삶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사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조직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후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회는 프로그램, 지식, 조직, 후원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너무나 부요해져서 성령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제 할 일은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았다. 권능을 주어 보냈다. 오늘도 추수할 일군에게 권능을 주실 줄 믿는다.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한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면 귀신이 쫓겨나고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게 된다. 추수하러 가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신 말씀대로 성령의 권능 받고 증인이 되자.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마 9:36-38 / 김영규 목사
목자 없는 양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바라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이란 어떤 처지일까요? 양과 목자는 특별한 관계에 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양은 생존하지 못합니다. 양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된 가축입니다. 중석기 시대에 이미 양을 가축으로 길렀습니다. 원래 양은 개 다음으로 가축이 되었다고 합니다. 들개들이 양을 좁은 골짜기로 교묘하게 몰아넣어서 잡아먹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들개를 붙잡아서 가축으로 길들였습니다. 그리고 개를 동원해서 양들을 잡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잡은 양들을 길들여서 가축을 만든 것입니다. 대부분의 양들은 群生을 합니다. 혼자 살지 않고 떼를 지어 삽니다. 양들을 가축으로 기르면서 사람들은 풀이 많은 곳과 물이 많은 곳을 찾아다니는 遊牧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양들은 성격이 온화하고 공격성이 없습니다. 한 번 다니던 길을 다시 찾아가는 성질은 있으나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짐승들은 양이 다니는 길목을 지키다가 잡아먹습니다. 양들은 철저하게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짐승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목자 없는 양들의 두 가지 불행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고생입니다. “고생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skuvllw(스퀼로)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껍질이나 가죽을 벗기다”, “째다, 찢다, 난도질 하다”의 뜻인데 거기서부터,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괴롭힘을 당합니다. 고통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아무도 지켜줄 사람이 없어서 들짐승에게 잡혀 먹히는 양들을 상상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을 보세요. 그들 대부분이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는 환자들이나 불구자들, 장애인들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들것에 들려 온 사람, 남의 눈에 띌까 노심초사 하면서 다가오는 부정한 환자들, 어디 마땅한 의원이 없어서 헤매는 사람들. 둘째는 사회적으로 비천한 사람들입니다. 지위도 없고, 권세도 없고, 양식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이리들에게 억압당하고 수탈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영적으로 얽매여서 시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종교 세계에서도 억압된 사람들입니다. 종교나 관습이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보다는 오히려 얽어 매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엄한 법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했습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합니다.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계율입니다.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만 30가지가 넘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종교가 오히려 굴레가 됩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점쟁이 집에 다니는 사람들은 점쟁이의 말에 따라 꼼짝 못합니다. 점쟁이가 동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점쟁이가 이사 가지 말라고 하면 이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손 있는 날”은 이사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사주팔자 나쁘다고 하면 결혼하지 못합니다. 사단의 노예들입니다. 사이비 종교들을 보세요. 재산을 갈취합니다. 교주의 말을 듣지 않으면 무서운 저주를 받는다고 공갈을 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군중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삶에 찌들려서 고생하고, 종교와 관습의 굴레 때문에 고생합니다.
둘째는 遊離합니다. “유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rJivptw(립토)인데, “던지다, 팽개치다, 떨쳐버리다”의 뜻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내던져지고 버려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누가 잡아가든지, 위험한 곳으로 가든지 말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군중들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삶의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저 누가 병을 고쳐주거나, 양식을 준다고 하면 우루루 몰려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천국이나 영생 얘기만 하면 다 떠나버렸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삶의 목적도 없고 그저 육신의 안일만을 위해 몰려다녔습니다.
오늘의 사람들도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삶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좋다고 하면 다 그 길로 갑니다. 매년 대학에 들어가는 신입생들의 절반 이상이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에 진학하고 있습니다. 醫大가 좋다고 하면 의대로 몰리고, 법대가 좋다고 하면 법대로 몰립니다. 계열별로 입학한 학생들도 결국은 성적에 따라 학과를 배정받아야만 합니다. 목표도 없고, 자기 길도 모릅니다. 결혼, 가정, 직업, 사회 생활에 대한 미래적 비전이 없습니다. 직장인들도 그렇습니다. 나이 40이 넘도록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언젠가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 속에서 직장에 매달려 생활합니다.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나 만족감을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등 떠밀려서 일하다가 등 떠밀려서 퇴직합니다.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어서 이 직장을 떠나야지! 딱히 갈 곳도 없지만, 그냥 싫기 때문에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생 황혼이 됩니다. 부모도, 학교 선생도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친구도 목자는 아닙니다. 철학자도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운 젊은이들이 불건전한 인터넷 사이트로 몰립니다. 목자 없는 양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목자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0장) 목자로서 주님이 하신 역할이 뭘까요? 우선 서너 가지 중요한 역할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하려는 것이라”(요10:10) 주님은 목자로서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구하시고, 생명을 지키시는 목자십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6:48) 생명공학, 첨단과학이 생명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은 사람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명을 지키려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히 생명을 지킬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생명은 사람이 지킬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생명을 지키십니다. 이 세상에는 거짓 목자들이 많습니다. 철학자들, 종교인들, 사상가들, 권력자들... 이들은 인생의 안내자 노릇을 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생명 문제는 관여하지 못합니다. 윤리나 도덕을 논하다가, 생명 문제가 나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참 목자이신 주님은 양의 생명을 관리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5)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로 저주 받아야 될 것을 주님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누구나 심판을 면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목자는 도덕 선생이 아닙니다. 철학자도 아닙니다. 처세술 강사도 아닙니다. 생명을 지켜주는 목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목자십니다. 주님을 믿고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삶을 풍요롭게 하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참 목자는 양들을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단조롭습니다. 찰리 차플린의 모던 타임스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하루 종일 공장에서 하는 일은 나사 조이는 일입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습관이 됩니다. 그래서 거리를 거닐면서도 무의식 중에 나사 조이는 동작을 합니다. 현대 사회는 거대한 기계와 같이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기계의 작은 부품들에 불과합니다. 국가 조직의 부품이요, 기업 조직의 부품이요, 정당 조직, 사회 단체, 각종 조직의 부품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이 어디에 속하여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삶의 시야가 막혀 있습니다.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우주가 얼마나 거대하고 신비하게 움직이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연 만물이 얼마나 아름답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좁은 곳에서 좁은 것만 바라보고, 좁은 일에 몸 바치다가 인생 끝장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나 공부 못하는 사람이나, 출세한 사람들이나 음지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좁게 사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요즘 학교 폭력을 보세요. 혼자 누구를 때리든지 말든지 할 것이지, 왜 조직을 만듭니까? “일진회”가 다 뭐 말라 죽은 겁니까? 그런 조직에 들어가면 손가락 잘라 가면서 오직 두목을 위해서 충성합니다. 인생의 다채로움이나 풍성함을 누릴 기회가 없어요. 우리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멀쩡한 사람들도 물자는 풍성한데 정신세계는 빈곤합니다. 즐거움을 찾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몇 사람이 모이면 고스톱밖에 모르고, 술 먹고 고성방가 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올바로 돈을 쓰는데서 즐거움을 찾지 못하고, 비싼 물건 사들이고 자랑하는 즐거움, 유흥가에서 돈 뿌리면서 놀아나는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나마 이런 즐거움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빼앗길까봐 교회에 못 나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삶은 즐거움과 풍요로운 삶입니다. 어떤 화가들은 평생 기둥만 그립니다. 어떤 화가들은 평생 해와 달만 그립니다. 그래도 다 못 그릴 정도로 이 세상은 다채롭고 다양합니다. 똑 같은 사람 얼굴이지만 사람마다 표정과 느낌이 다 다릅니다. 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 산과 바다, 하늘의 구름 모습이 시시각각 변화무쌍합니다. 자연 만물의 풍성함 만큼 인생도 다채롭고 즐겁습니다. 숨 쉬고 움직이는 것이 기쁨이요, 남을 도와주고 유익하게 하는 것이 즐거움이요, 선한 사업에 열심 내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즐거움이고, 천국 소망을 가지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기도 응답의 즐거움, 구원의 즐거움....즐거움의 삶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도 안에 있는 삶의 풍요를 이렇게 감탄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하박국 선지자는 물질적으로 잘 살든지 못 살든지 자신의 삶을 항상 풍족하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참 목자에게는 풍성한 삶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셋째로, 주님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참 목자는 바른 길의 안내자입니다.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닙니다. 인생이 가야될 길이 있고,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복된 길이 있고, 저주의 길이 있습니다. 천국 길이 있고 지옥의 길이 있습니다. 양은 자기가 가는 길이 잡혀 죽는 길인지, 축복된 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항상 양들을 바른 길로 안내합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3) 오늘날 이 땅 위에 정의를 부르짖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정의가 뭔지 잘 모릅니다. 오늘의 정의가 내일에는 역적이 됩니다. 정의를 안다 해도 정의를 실천할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의가 무엇인가를 외치는 자들이 아니라, 정의롭게 살도록 인도하는 목자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양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강도가 변화되어 성자가 되게 만드십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다시 도적질 하지 않습니다. 간음하는 자는 다시 간음하지 않고, 우상숭배자는 다시 우상과 미신에 빠지지 않습니다. 박해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세리 마태가 사도가 되고, 마니교도 어거스틴이 변하여 그리스도의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깡패 김익두가 변하여 목사가 되고, 노예 상인 죤 뉴턴이 변하여 감독이 되고, 수가성 여인이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 목자 그리스도의 역할입니다. 주님을 따르면 종국적으로는 천국으로 인도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서 올 자가 없느니라”(요16:4)
여러분, 정의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불완전한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정의요, 하나님만이 정의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의롭게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목자 삼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곧 길입니다. 의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정의를 부르짖으나 능력이 없어서 지옥 갑니다. 진실을 부르짖지만 진실이 없어서 지옥가고,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이 없어서 지옥 갑니다. 그러므로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자력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자력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목자를 따를 때에 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추수할 일군이 필요합니다
목자 없는 양들을 보시면서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가을 들판을 보면 익은 곡식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보입니다. 아마 군중들의 모습이 추수할 곡식처럼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수란 천국 추수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목장으로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주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주님의 목장으로 불러들일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로 강조되는 것은 추수의 시기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처음 이 땅에 오셨던 시기를 이미 추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창조된 시기가 있고, 멸망의 시기가 있습니다. 역사의 시작이 있는 반면 그 종점이 있습니다. 죄의 시작이 있는 만큼 죄에 대한 심판의 시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시기가 그런 종말적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종말보다 더 시급한 것은 개인의 종말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그 짧은 인생에서 모든 기회는 너무나 빠르게 지나갑니다. 태어나는가 하면, 자라나고, 늙고 떠나야 합니다. 역사의 종말이든, 개인의 종말이든 우리는 항상 추수에 대비해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둘째로 강조되는 것은 추수할 일군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양들을 주님의 목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에 있는 마태복음 10장으로 가서 보면 열두 사도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양들을 불러 모으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열두 명이 일군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복음의 일군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우리도 다 영혼을 추수하는 일군들입니다.
주님은 추수할 일군이 너무 적다고 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일군이 적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첫째는,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전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전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안 믿는 가족들에게 전도할 때 부딪치는 첫마디가 뭡니까? “당신이나 잘 믿고 제발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는 부탁입니다. 웬만한 마음이라면 두 번 다시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남들이 싫다는 것을 왜 강요합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은 결코 추수할 일군이 되지 못합니다. 추수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않고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저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책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던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만 나가면 당장 이혼하겠다고 아내를 협박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욕하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 년 만에 나온 사람, 5년 만에 나온 사람, 8 년 만에 나온 사람, 10년 넘어 나온 사람 등등, 추수는 계속됩니다. 끈질기게 영혼들을 추수할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자칭 일군은 많은데 참 일군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매년 수 천 명의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졸업합니다. 혹은 목사로, 선교사로, 각종 일군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나름대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이 원하시는 일군들이 부족합니다. 선교사는 많은데 선교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많은데 목회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일군을 보내달라는 기도를 계속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계승할 목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영혼의 일군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 기도 속에는 내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추수군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추수군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추수할 때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농사를 보세요. 농부가 하는 일이 뭡니까? 봄에 씨앗 뿌리는 일을 합니다. 여름이 되면 잡초를 뽑고 거름 주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이 하지 못합니다. 씨앗이 싹트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자라게 하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꽃 피고, 열매 맺고, 익어가게 하는 일을 사람이 합니까? 그런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영혼의 추수도 그렇습니다. 전도는 우리 입으로 하지만,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죄를 깨닫는 일,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일, 내 인생은 주님께 맡기는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8-20) 영혼 추수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마지막으로 꿈 얘기 하나 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길을 가다가 버려진 새 둥지를 발견했습니다. 고운 풀로 잘 만들어진 둥지인데 버려졌어요. 그래서 그 둥지를 주워 들고 있는데 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알을 낳았습니다. 어미 새가 얼마쯤 있더니 날아갔는데 보니까 새끼가 알에서 까고 나왔어요. 아직 털도 다 나지 않은 새끼를 어떻게 기를까 걱정하고 있는데, 사방에 보니까 온 땅에 내가 들고 있는 새 새끼와 같은 새들이 널려 있어요. 너무 너무 많은 어린 새들이 혹은 물에 떠내려가기도 하고, 날개 짓을 하면서 퍼져 있습니다. 이 새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꿈을 깼습니다.
꿈보다 해몽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선교사님께서 하남의 빈들에 학교를 세우시고 예배당으로 된 강당을 지어놓으셨습니다. 이 빈 둥지로 하나님이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학교 주변은 빈들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주변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의 둥지로 인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 인근 강일동에 6000 세대가 넘는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시작에 불과합니다. 2차, 3차, 계속 개발될 것이 분명합니다. 추수할 영혼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 영혼들은 우리가 둥지로 불러들여야 될 영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덕중앙교회에게 참으로 큰 비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영혼들을 건지고 양육할 사명을 주님께 받았습니다.
세상은 목자 없는 양입니다. 고생합니다. 방황합니다. 주님은 참 목자로 오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목자요, 생명을 구하시는 목자요, 생명을 지키시는 목자십니다. 주님은 인생을 풍요롭게 하시는 목자십니다. 주님은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십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 담당 구역 안에 있는 영혼들을 주님의 목장으로 불러 들일 추수의 일군들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열정 예수
마 9:35-38 / 이정선 목사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시골에는 극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마을 공터에 임시극장이 생기곤 했습니다. 커다란 천막이 세워지고, 밤에는 그 안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 그렇게 이동극장이 들어오면 2-3일 정도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골 사람들도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마을마다 찾아다니며 영화를 상영하던 사람들의 열정도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분들이 어떤 동기에서 그런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상당한 돈벌이가 되기 때문에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영화를 보급한다는 투철한 프로 정신에서 그렇게 열심을 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현대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시골 사람들을 위해 봉사정신으로 그런 일을 했던 사람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와 상관없이 시골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매우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 덕분에 그래도 일 년에 한두 차례나마 영화라는 것을 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된 예수님의 행적은 마치 시골 마을마다 찾아다니면서 영화를 상영해주는 그 천막극장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여기 보니까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다고 했어요. 요즘 말로 하면 성은 도시이고 촌은 시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갈릴리 지역의 모든 마을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굳이 마을마다 찾아다니지 않으셔도 사람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거기까지 찾아가지 않으셨더라면 평생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시골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마을, 두메산골 마을까지 찾아가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 각자의 마음까지 찾아오십니다. 내가 아무리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어도, 주님은 결코 그 영혼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소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8:14). 주님께는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신 이 말씀의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예수님의 열정 앞에 너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저도 종종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들과 걱정거리도 생기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짜증나는 것들이고, 이러다 보면 모든 일에 의욕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내가 왜 목사가 돼가지고 이러고 있을까? 나 아니라도 똑똑하고 훌륭한 목사들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내가 목사가 아니고 집사라면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있을까?
그러다가도 이런 말씀, 즉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셨던 예수님의 열정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자동차를 타고 다니셨던 것도 아닙니다. 아쉬운 대로 자전거라도 있었으면 좀 덜 힘드셨을지 모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뙤약볕 아래 먼지 나는 시골길을 걸어 모든 마을마다 찾아다니셨던 주님,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한번은 사마리아를 지나시다가 행로에 곤하여 우물가에 앉으셨다고 요한은 기록했습니다(요 4:6).
우리가 지난번에는 열정이 지나쳐 일을 그르친 고침받은 소경들을 살펴보았지만, 오늘 우리의 문제는 열정이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 복음에 대한 열정, 교회를 위한 열정, 이런 것들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열정이 식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열정을 아직 가져보지 못한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그 감격 속에서 열정이 솟아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쨌거나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우리 주님이 보여주신 그 열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주님을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 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열정을 가지고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하신 일이 첫째는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합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믿는 것도 알아야 올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교리의 내용은 어떤 것인지,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지, 이단들이 여러 주장을 하는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등등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성경공부도 하고, 제자훈련도 하고, 세미나에 참석도 하고, 그렇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말합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일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또 예수께서 하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선포하신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고, 산상수훈에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시면서 천국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천국 복음의 핵심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해서 그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선포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가 구현될 수 있도록 필요하면 투쟁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선포해야 할 것은 천국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이 천국 복음을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이르러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이것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합니다.
또 예수께서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하신 일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신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9장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지만 고치지 못하고 재산만 없앤 그 여인을 고쳐주셨을 때,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은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뿐인 무남독녀 열두 살짜리 딸이 죽었는데, 그 고통과 슬픔 속에서 딸을 살려주셨을 때,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었겠어요? 이처럼 예수께서 하시는 일들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행하시는 예수께서 큰 도시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시골 두메산골까지 모든 마을들을 친히 찾아다니신 것입니다. 정말 세상을 사랑하시고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 역시 세상을 치유하고 섬기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존재, 손가락질이나 당하는 교회라면 제대로 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떤 때는 교회가 세상을 치유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의 대상이 되는 수가 있어요. 물론 지상의 교회가 완전하고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과 역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두루 다니시며 자기 백성을 불러 모으실 때 절실하게 느끼셨던 것은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불러서 회개시켜 구원얻게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일꾼이 부족하다는 말은 묘한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들립니다. 한편으로는 일꾼이 남아넘쳐서 부작용이 많은 반면, 또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일꾼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는 일꾼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충성스러운 일꾼들로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린 선지자는 즉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일꾼이 부족하다고 탄식하시는 주님 앞에 우리도 나아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일꾼으로 써 주십시오. 내가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받고 싶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내가 복음 전해서 사람들을 주님께 데려오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에 들려 귀하게 쓰임받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영혼의 추수꾼이 되기로 결단하라!
마 9:35-38 / 전순기 목사
지난주에 저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말씀의 의미와 적용에 대한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는 말씀이고,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신다면, 나는 그 분의 종이 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된다면,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하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종 된 우리에게 시킬 일이 뭐냐?”는 겁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본문 말씀에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시는 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35절에서 38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삼년 반의 사역을 요약해 놓은 말씀입니다. 35절에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흔히 우리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시는’ 일을 주님의 삼대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36절에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일을 하신 이유와 동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고치셨는가 하면, 인생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것을 보면서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37,38절에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심으로, 주님은 당신이 하고 계시는 이 위대한 천국 복음 사업에 제자들도 동참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일생에 걸쳐서 해야 할 평생의 사명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
우리 성도들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국적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 받은 백성들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부를 해도, 직장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건강을 추구해도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바울 사도는 외쳤습니다.
영혼을 구하는 추수꾼
우리가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가장 최선의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 곧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진술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삼년 동안 가버나움에 전도 본부를 두시고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부지런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유대인들은 결코 발걸음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수가성에도 가셔서 방탕한 삶을 살던 한 여인을 전도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전도하려고 한낮의 뙤약볕을 받으며 그 먼 길을 가셨을 때에, 주님은 너무도 많이 지치셨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쉴 틈도 없이 수가성 여인이 물을 길러 나오자, 주님은 그녀와의 긴 대화를 통해서 그녀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기쁨에 겨워 물동이를 던져두고 마을로 달려 들어가는 여인을 보시면서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피곤도 잊으시고, 배고픔도 잊어버리셨습니다.
지치신 주님께 드릴 음식을 구하려고 마을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은 너무도 생기가 넘치고 기쁨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보고, “방금 전만 해도 무척이나 지치신 모습이었는데, 지금 이 모습은 너무도 생기가 넘쳐 보이시네. 어떻게 된 일일까?”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 식사하시지요.”라고 권했더니,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누가 주님께 먹을 것을 가져다 드렸나?” 궁금해 합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오해하자, 주님은 내 말은 “내가 지금 빵을 먹어서 배가 부르다는 게 아니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라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 보니 너무 기뻐서 배고픈 줄 모르겠다는 말이다.”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너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할 때에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배고픈 줄 모르겠다.”고 표현합니다. 또 병이 들어서 많이 아프던 사람이 정말 간절히 보고 싶던 사람이 병문안을 오면, “너를 보니, 아픈 게 다 나은 것 같다.”라고 말합니다. 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럴 때에 우리 뇌에서 엔돌핀이 많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세상에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은 내가 전도해서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소위 말해서 은혜 받은 성들에게 있어서 전도하는 일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은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 전도하는 일보다도 더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예수님께서 한 영혼이 구원받고 돌아올 때에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지를 보여주는 세 가지 잃어버린 것을 찾는 비유가 나옵니다. 100마리 양 중에 한 마리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목자의 비유, 열 개의 드라크마 중에서 한 개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여인의 비유,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아버지의 비유, 이 세 가지 비유는 같은 내용이면서도 백에 하나, 열에 하나, 둘에 하나로 점점 강도를 더해 감으로 그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찾을 때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싶어하시는지, 그리고 찾을 때에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당신처럼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열정을 가진 추수꾼들이 되도록 도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최고로 기뻐하시는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삼년 반 동안 예수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행하셨던 일이 전도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신 목적이 전도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성도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우리 인생들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허무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게 하고,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일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토록 중요한 일인 전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요? 우리가 전도하는 일을 잘 하려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36절에서 그 비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주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 구름떼처럼 나오는 군중들을 보실 때에, 그들의 모습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모습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모습을 보실 때에 창자가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민망히 여기는 마음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다니는 열정적인 설교와 가르침과 병 고쳐 주시는 사역으로 나타났습니다.
민망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자식을 길러본 부모님들은 다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자식이 많이 아플 때,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자식이 사고를 당해서 생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부모의 마음은 창자가 찢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식 때문에 애간장이 다 탄다.”고 하는 겁니다.
애간장만 타는 게 아닙니다. 부모는 병든 자식을 낳게 해 주려고 밤을 새우며 간호를 합니다. 좋은 약이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갑니다.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심장이라도 떼어줄 수 있습니다. 그게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며 열정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신 영혼을 향한 이런 사랑과 열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실 때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불쌍한 존재들로 보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어떤 양입니까? 우리가 이미 많이 들어서 알고 있는 것처럼 양은 목자가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다른 야생 동물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야생 동물들은 스스로 투쟁해서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양은 오직 목자의 돌봄에 의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입니다.
양은 눈이 어두워 멀리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인도해 주지 않으면 어디에 좋은 풀이 있는지 마실 물이 있는 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리는 짧고 몸통은 뚱뚱해서 잘 뛰지도 못하고, 날카로운 이빨도 뿔도 없어 자기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찾아 산과 들을 방황하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맹수의 밥이 되기도 합니다. 목자 없는 양은 비루먹고, 맹수떼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거나, 상처를 받거나, 또 잘못된 풀을 먹고 병들어 고통 받다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겔34:2-6).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그러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고,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왕은 건축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고율의 세금과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 종교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은 돈으로 그 직분을 사고 팔 정도로 타락했었습니다.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봐줄 수 있는 지도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 일반 백성들은 그야말로 헐벗고 굶주리는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백성들의 상태는 정말로 비참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선한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 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들을 돌보시느라, 온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삼년 반을 사셨지만, 다른 사람들이 삼십년 살면서 할 일보다 더 많이 일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양을 치던 선한 목자이셨습니다. 결국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양들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고자 한다면,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사람들의 영적인 실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예수님처럼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끼는 마음,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온 몸과 마음을 바쳐서 영혼 구원하는 일에 몰입하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경제 태풍에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신문을 읽다가 햄버거 난민이라는 말을 보면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24시간 문을 여는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하나를 시키거나, 아니면 콜라 한 잔을 시켜 놓고 밤을 지새우거나 첫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는 겁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찜질방이라도 갈 텐데, 그 정도의 돈조차도 없는 겁니다.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방황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마음이 많이 닫친 시대입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공허해지고, 불안해 지고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하나님 은혜 받을만한 때입니다. 또 사람들이 복음 앞에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때이기도 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세상의 위기들은 세상의 본질을 폭로합니다.
평생 물질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쌓아놓은 물질이 날아가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되면, 물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위기는 덧없는 물질에 매여 있던 영혼이 물질주의의 결박을 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비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러니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은혜 받을 기회이며 복음을 전할 기회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만 보고 복음 전하기를 주저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외모로만 보지 말고 그들의 심령 깊숙이 있는 공허함, 피곤함, 고뇌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보다 돈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나름대로 세상을 재미있고 멋있게 사는 것 같습니다.
예화) 예수를 오래 믿어서 신앙이 좋다고 생각되는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잘사는 불신자를 보며 무심결에 “우리는 언제 저만큼 살아보나?”하고 부러운 듯이 말을 했습니다. 무심결에 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 분의 영적인 마음 상태를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로는 전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면, 불신자들이 가진 부나 명예나 지식을 부러워하거나, 저들의 신분과 지위 때문에 주눅이 들지 않고, 저들의 영혼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불쌍한 상태임을 보는 신령한 눈과 민망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화) 어떤 전도사님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집 모퉁이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첫눈에도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이 전도사님도 하루 종일 전도를 하느라 지쳤기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부담이 오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전하고나 가자.” 그래서 그 아저씨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히 여겨지는지, 예수 믿으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당신 누군데, 왜 날 끌어안고 우시오?” “예, 아저씨. 예수 믿으시면 너무 좋은데…,” 이 전도사님의 진실한 사랑에 낯선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는 방법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전도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같은 열정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이 없기 때문에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전도 대상자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방법이 보일 것입니다.
추수꾼으로 날 보내주소서!
주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자! 영혼의 추수꾼을 보내 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미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이제 전도하는 일을 하게 되면, 세상의 추수밭에는 수확을 기다리는 영적인 열매들이 널려 있음을 보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만 가지고는 영적 추수를 끝낼 수 없는 줄 알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자신도 추수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만, 추수하는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추수꾼을 더 많이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추수꾼이 될 마음이 없이, 나는 못하니까, 다른 사람을 전도자로 보내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전도자로 헌신하면서 다른 전도자들을 많이 일으켜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진리를 본문이 가르쳐 줍니다.
성도 여러분!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양을 부르는데,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사는 길은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전도는 성도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어떤 방법, 어떤 모양으로 하든지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종 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눈과 마음이 주님을 닮아서 사람들을 볼 때에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는 존재들임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들의 영혼을 보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지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전도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신다고 했으니, 성령 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날마다 쉬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전도는 억지로 의무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못됩니다. 전도는 증인이 되는 것인데,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회를 오래 다녔는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와 주님이 되심을 보고 들은 사람!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게 좋으면 전도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게 행복하면 전도하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권세 있는 영혼의 추수꾼이 되어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작년까지도 안양교회 부흥과 성장을 이뤄 오셨지만, 올해는 더 큰 부흥과 성장의 역사를 일궈나가실 것을 확신케 하고 기대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최근 며칠 사이에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했던 복을 안양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지하 1층과 2층의 일부를 교회가 사도록 소유자 측에서 제안이 들어왔고, 그래서 교회는 아주 놀라운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충성스러운 장로님들의 지혜로운 노력과 더불어 아버지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셔서 성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장막터를 더 넓혀주셨고, 화분이 더 커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화분을 키우시고 장막터를 넓히시는 것은 이 화분에 심긴 안양교회라는 나무를 크게 키우시겠다는 뜻인 줄로 믿습니다. 안양교회라는 나무를 키우시는 것은 우리가 복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지경을 넓혀주시겠다는 뜻인 줄로 믿습니다.
장막터를 넓히시고, 화분을 키워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복 주심의 의미와 뜻을 알았다면, 이제 우리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파하여 안양교회라는 나무를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올 해는 새롭게 마련된 주보를 전도지로 활용하여 남녀 목장이 일주일에 하루씩 전도하기로 했습니다. 주보 한 장을 나누더라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표어 말씀에 순종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정성껏 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주보 전도지 한 장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혼의 추수꾼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올 해를 안양교회의 부흥과 성장의 새로운 원년이 되게 하실 계획을 가지고 추수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안양 교회 부흥과 성장의 주역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추수꾼이 되기로 결단하고, 능력을 얻기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나가서 준비된 영혼들을 추수하십시다.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
마 9:35-38 / 유영설 목사
몽테뉴는 “재물이 부족한 것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회복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약 2:26)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에 보다 거룩하고 절제된 삶을 통하여 내 영혼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구원하려함이라”(마 18:14)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공생애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순절에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을 품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한고 생각하십니까?
1.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라.
우리사회는 지금 영혼이 파괴되고 황폐해진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옳은지도 모른 체 쾌락과 방탕에 의존해사 살아가는 패역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혼이 망가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합니다. 그러자면 우리가 영적으로 살지 않으면 도무지 영혼의 중요성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예수님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시 119:136)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내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왜 저렇게 잘 우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조지 휫필드 목사님은 “여러분은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여 울지 아니하니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애통해 하는 것이 경제가 아닙니까? 그 눈물은 이제 거두고 예수님처럼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망가진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재물과 지식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영혼을 위해 예수님의 눈물을 배웁시다. 눈물이 있어야, 불쌍히 여김이 있어야 비로소 구원이 완성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을 때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은 기도의 동기가 됩니다. 훌륭한 지식과 지위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영혼을 생각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에게는 화려함과 명성 뒤에 숨어 있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마귀의 일에 깊이 빠져 부끄러움을 당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름답고 하려하지만 영혼을 들여다보면 곤고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영혼이 파괴된 죽음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며 죽는 모습을 지켜본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물질 소유욕망을 가진 자들,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바라보는 백성들, 죽어가는 예수님을 비웃으며 말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이 보여 주는 행동은 한마디로 영혼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으니까 죄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이들은 영혼이 파괴된 체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도하고 섬기게 됩니다. 기도해주고 섬겨주어야 영혼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순절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기를 원한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3.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육체의 바탕이 되는 실체입니다. 영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완전한 모습을 말합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육으로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살전 5:23)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와 무슨 관계를 맺더라도 목표는 영혼 구원입니다. 전도는 시간이 남거나, 할 일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 때문에 전도합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과 혼과 육이 있어야 완전한 인간입니다. 육체에 영과 혼을 심어주기 위한 인간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고는 어느 누구도 친구와 이웃 내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전도하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품는 열정
마 9:35-38 / 유영설 목사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영혼의 중요성을 체험한 한 사람이 영혼을 위한 헌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이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의미, 생에 대한 애착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셨습니다. 모세도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고 품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슬픕니다. 이 백성들이 금으로 신상을 만드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주십시오.”(출 32:31-32) 모세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구원 받았다는 확신, 그리고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열정을 품었습니까?
1.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한 영혼을 바로 세우고 책임지기 위한 눈물을 흘려보았습니까? 예수님처럼 인간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신 사랑과 위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사람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내 눈에서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립니다.”(시 119:136)라고 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과 함께 18세기 위대한 복음 설교가인 조지 휫필드는 설교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람들은 조지 휫필드를 보고 “왜 저렇게 잘 우냐”고 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여러분은 내가 눈물을 흘린다고 책망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여 울지 않으니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은 경제적 빈곤 때문에 가장 많이 눈물을 흘립니다. 경제를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것은 경제만가 전부 아닙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내 자식이 보다 많은 지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자녀의 영혼을 품는 열정과 사랑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 위해선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2. 영혼을 품는 열정이 있으면 기도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기도의 동기가 됩니다. 기도해준다는 것은 사랑의 행위인데 기도의 능력은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방법과 교제하는 내용에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의 형편을 이해하게 됩니다. 미국의 신학자 리차드 포스터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은혜로우신 성령이시여, 제 생활의 너무 많은 활동들이 제 이익과 안녕에 집중된 것 같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이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롭도록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겠지요. 저를 도우시어 칭찬이나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 갈 수 있게 하소서.” 영혼에 대한 열정을 품는 기도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기도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십니다. 다른 사람 문제를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기도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 무엇을 위해 기도하든지 영혼을 위한 열정을 품고 기도하면 응답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열정을 품는 기도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전도합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은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혼이 주님 앞에 인도되도록 하기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통해 전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전도를 보면 항상 성령께서 전도의 문을 여셨습니다. 영혼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구원과 관련을 맺고 관계의 동기를 갖게 합니다. 전도행위가 어떤 방법이 되었든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못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전도에 대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 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다양합니다. 필요한대로 적절하게 사용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일은 공생애 3대 사역으로 오늘의 제자 비전을 가진 자들이 해야 할 영혼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영혼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인들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됩니다.”(눅 10:5)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해진 사람이 구원 받도록 모든 목표를 거기에 두고 관계를 맺고 생활해보십시오. 성 프랜시스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일만 번의 고통을 당하여도 싫어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목자 없는 양은 많은데 이들을 인도할 목자가 없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목자 없는 양에게 필요를 충족시켜주었던 것이 그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혼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이 필요합니다. 눈물에 담긴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능력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자를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의 초청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사랑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추수할 것은 많은데
마 9:35-38 / 남 호 목사
예수님께서 도시와 시골로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 특별히 천국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병들고 연약한 자들을 치료하시고 돌보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하시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 천국에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 병들어 허약한 사람 등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이 일을 맡을 일꾼이 적다' 고 하시면서 하나님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본문의 내용처럼 예수님은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지옥 갈 사람을 살려내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 가치관이 결정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놀이터로 보기 때문에 지금 안 놀면 언제 놀겠는가하며 놀려고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전쟁터로 알고 남과 싸워서 이기고, 정복하고, 자기의 탐욕을 목적으로 삼고 끊임없이 사람을 짓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성공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사람을 살려내는 일터로 보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죄인을 의인 만드시고, 소망 없는 사람에게 소망을 가르치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을 강한 사람으로 만드는 등,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일하는 곳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일을 위해서 일꾼이 너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될 일임을 기억하고 몇 가지 생각하면서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Ⅰ. 추수해야 될 일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야 될 일이 너무 많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하신 일 3가지를 말씀드린다면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 전하시고, 병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신탄진 지역 사회만 해도 말씀을 모르는 사람의 숫자가 7-8배가 더 많습니다.
천국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 정도 되고,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은 배나 더 많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이런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은 '추수할 것이 많다'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눅19:1- 삭게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삭게오는 부자요, 세리장이였습니다. 권력도 있고, 물질도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부러움의 대상이요,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행복하지 못했고,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난 다음에 삭게오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며, 사람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백하
기를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고, 자기 것에서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삭게오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일이며, 값어치가 있는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독하고, 외롭고, 만족하지 못하던 삭개오를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11:1-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가난하고 외롭고 부모 없는 고아들이 힘겹게 살아가다 동생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누이들만 슬픈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전체가 슬퍼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내시면서 누이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위로와 슬픔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눅16:19-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면서 살았고,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간에서 부스러기나 얻어먹고 사는 신세였습니다. 죽음이란 부자나 가난한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둘다 죽었는데, 한 사람은 음부에, 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품에 갔습니다.
부자는 물 한 모금이 없어 목마르지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음부에 갔습니다. 부자는 물 한 모금 얻어먹으려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형제 5명이 있는데, 그들만은 이곳에 오지 않게 부탁합니다만 다시 거절당합니다. 부자가 간 곳에는 어떤 사람이든지 가지 않게 해야합니다.
이런 곳에 가지 말고 주님이 예배해 놓으신 천국(요14:-)으로 인도하는 일이 주님이 하신 일이요,
제자 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Ⅱ. 일꾼이 필요합니다.
추수할 일이 많다고 하신 말씀은 살려내야 할 일들이 많다는 말씀이고, 살려내는 일을 위해서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일꾼이란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 병들고 허약해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 복음을 접하지 못해서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전도는 소망을 불러일으키고 강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참일꾼은 생명을 살려내는 사람입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한 의사가 간증을 했습니다. 이분은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하는 일이 그날 진료 받은 사람들의 카드를 확인하고, 그날 수입을 계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계속 하다 어느 날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카드를 가져와서 숫자를 계산하고 돈을 계산하는데 성령께서 그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너는 매일 환자의 카드나 보면서 돈이나 계산하고 네 일생을 끝낼 것이냐! 왜 환자의 영혼은 한번도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교회 집사더냐!"
그는 순간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나는 매일같이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요, 돈버는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는 그 다음부터 찾아오는 환자의 영혼을 돌보는 의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성껏 환자를 치료하면서 환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일과가 끝나면 구원의 영혼 카드부터 점검하겠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이 넘치고 친절한 의사로 그 병원은 엄청난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병원뿐만이 아니라 사업하는 성도들은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사업적 관계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문제까지 관계를 가지고 기도하고, 친절하게 돌보아줄 때, 사업뿐 아니라 생명을 살려내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요3서 2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혼을 살려내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범사와 강건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사람 관계만 하지 말고 그들의 영혼에도 관계를 가지고 관심을 기울여서 생명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참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에 어느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을 전하면 비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말을 안 듣던지 어떤 때는 예수님 안 믿으려거든 지옥이나 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년만에 서울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목사님 안녕하셨습니까? 제가 옛날 아무개입니다 목사님 그때 제가 목사님 말씀을 안 들었지요? 그러나 머릿속에는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제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라고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기뻐서 "집사님, 참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어서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영광스러운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일꾼이 일터를 떠나지 않고 계속 일하다 보면 큰 열매, 작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
Ⅲ. 일꾼을 찾아야 합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은 추수할 주인에게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추수할 주인만이 일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아무나 일꾼으로 쓰지 않고,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만 골라 일꾼으로 사용합니다. 도둑을 일꾼으로 보내면 도적질할 것이고, 부정적인 사람을 보내면 일이 잘 안될 터이니까 주인이 알아서 아주 적
합한 사람으로 보낼 것입니다.
연세대학 캠퍼스는 선교사 언더우드가 자기 형님에게 돈을 가져다가 산 땅인데, 그때 학교를 세우는 일을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렸습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미래의 한국을 위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결국 연세대학을 세웠는데,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는 어마어마합니다.
현재 땅이 20만평, 가족수가 수만명, 졸업한 인재까지 생각하면 대단한 것입니다.
한국의 최초 선교사 언더우드는 원래 인도선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신학교 졸업 무렵 한국 선교가 절실하다는 보고를 듣고 좋은 선교사가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주여 내가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드디어 그는 한국에 와서 복음의 대국을 이루어내는 큰일을 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사6:2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됩시다. 이 지역에, 이 나라에, 이 세상에, 누가 가겠습니까?
추수할 일꾼을 찾습니다
마 9:9-35-38 / 이중표 목사
예수님의 일생은 사람을 살리는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각 전부가 '내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좋은 일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을 다니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또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병들고 약한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정신을 살리고, 병든 몸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일관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없구나!' 하고 마음 아파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을 놀이터로 알고 놀려고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꽃밭으로 알고 관광하는 것을 최고의 삶의 가치관으로 삼고 구경하는 맛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을 전쟁터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과 싸워 이기는 것, 정복하는 것, 착취하고 자기의 탐욕을 채우고 그래서 끊임없이 사람을 짓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명감에서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은 일터로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일터는 먹고 살기 위한 일터요, 남과 싸워 이기기 위한 전쟁터지만 믿는 사람들의 일터는 세상을 살리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기 할 일을 찾는 일터가 됩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둡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밭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밭에 씨를 뿌려서 백배, 육십배, 삼십배의 열매를 거둘 것을 기대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두려고 하는 열매는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것에 대한 열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열매를 생명으로 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을 열매로 거두어 그를 살리는 것이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추수는 생명을 거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을 번다든지, 명예를 얻는다든지, 유익을 얻는 것을 추수라고 생각합니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곡식을 거두는 것이 추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는 추수는 생명을 거두는 것입니다.
첫째, '추수할 것이 많다.' 하였습니다.
가을이 오면 봄에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가을은 추수하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 영혼을 추수해서 천국 곶간에 들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하나 하나가 생명의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열매입니다. 이 열매를 주님께서 추수해서 천국에 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하나님은 심은 종류대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두고 나쁜 씨앗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거둡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심습니다. 그 열매가 생명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 심령속에 악한 것을 심어서 가라지로 만들어 불구덩이에 넣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3:25절 말씀에 보면 어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어 열매를 거두려고 할 때 가라지가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그때 주인이 마귀가 밤에 모르게 뿌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밭에 알곡도 가라지도 동시에 있습니다. 알곡은 모아서 곶간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구덩이에 불사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심령속에 불구덩이에 들어갈 악한 씨를 심어서 그 영혼이 빈 영혼, 생명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심어서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한 알의 밀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생명의 씨앗을 심는 비밀이었습니다. 농부는 밭에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에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내리기 위해서는 열매 하나가 썩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고 그 생명을 심어 우리에게서 거두게 하십니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많은 영혼이 맺힐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21절에 보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고 예수라는 이름 속에 많은 자기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열매입니다. 지금 보이지 않는 세상의 열매가 많이 있습니다. 그 열매를 우리 주님께서 친히 보시면서 "추수할 것이 많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추수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에 가셨을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오는 것을 보시고 전도를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전도할 때 그 상황에 맞게 말씀을 전합니다. 물 길러 온 여인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라고 하시면서 물을 가지고 전도를 합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이 분은 우리 민족이 기다리는 메시아구나, 나의 과거를 알고 내 인생의 미래까지 아는 것을 보니 이는 분명히 선지자구나!' 하고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가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를 봤다 가자'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를 향해서 옵니다.
그때 마침 마을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와서는 "랍비여 잡수소서" 할 때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습니까?" 할 때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추수할 밭을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는 지금 곡식이 파릇파릇하기 때문에 곡식이 익으려면 아직도 넉 달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하신 것은 수가성의 여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추수할 것이 너무 많아 넘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 눈으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사람을 살리러 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을 추수할 영혼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열매는 영혼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이 구원받은 열매로 천국에 추수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 4:36)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요 4:38)
주님께서 장차 거둘 우리들의 열매를 보면서 즐겁게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열매를 거두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고 거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은 십자가에 죽는 피흘림입니다. 수고와 헌신은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가서 거두는 기쁨만 누리면 됩니다.
인간의 모든 사업이라는 것은 다 자기가 심고 자기가 거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심는 자도 따로 있고 거두는 자도 따로 있습니다. 이 가을에 많은 영혼의 추수가 있기 바랍니다.
둘째, 일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일꾼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일꾼이 적기 때문에 탄식하십니다. 농부는 밭을 보면 할 일을 압니다. 탐스럽게 익은 열매를 보면 추수하고 싶은 의욕이 생깁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일꾼은 많이 필요한데 일꾼이 적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 일 할 수 잇도록 부르십니다. 세상 일꾼은 많습니다. 언제나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은 모자랍니다.
일꾼은 추수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는 일꾼이 아닙니다. 직분입니다. 명예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 일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라디오를 통하여 한 의사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은 개인병원을 하는 분인데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하는 일이 그 날 진료받은 사람의 카드를 매일 밤마다 확인을 하고 그 날의 수입을 계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과를 계속하던 어느날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카드를 가지고 와서 숫자를 계산하고 돈을 계산하는데 성령께서 그 마음을 감동했습니다. "너는 매일 환자의 카드나 보면서 돈이나 계산하고 네 일생을 끝낼 것이냐? 왜 환자의 영혼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느냐 네가 교회 집사냐?" 그는 순간 충격을 받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나는 매일같이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요, 돈 버는 장사꾼이었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부터 찾아오는 환자의 영혼을 돌보는 의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성껏 환자의 병을 치료하면서 환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일과가 끝나면 구원의 영혼 카드 수부터 점검하였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친절한 의사로 그 병원은 엄청나게 축복을 받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전도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뿌린다는 의미가 있고 하나는 거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뿌린다는 것은 전도의 의미가 약합니다. 우리 주님이 생명을 뿌렸으니까요. 또한 순교자들이 선교사로서 이 땅에 복음을 뿌렸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창세 전에 우리 주님께서 씨앗을 뿌려서 지금 익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선교사들이 와서 그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뿌린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 창세전에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하시고 그 씨를 창세 전에 뿌려서 자라게 하시고 때가 되매 익어서 거두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전도를 씨 뿌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거두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므로 익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겠습니다.' 하면 '익었구나' 하고 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구니 들고 가서 따 담는 것이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밤중에 두려운 생각으로 기도하는데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부지런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느 영혼이 익어서 추수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 믿는 것을 보고 놀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혀 생각지 않은 사람이 예수 믿고 목사 되고 장로 된 사람 많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제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저를 비난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말을 안듣던지 어떤 때는 "예수 안믿으려면 지옥이나 가라"고 할 정도로 얄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년만에 서울에서 우연히 그 분을 만났는데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제가 옛날의 아무개입니다. 목사님, 그때 제가 목사님 말씀을 안들었지만 머리 속에는 들어갔습니다. 제가 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제가 너무 너무 기뻐서 "집사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말썽꾼, 구경꾼, 일꾼이 있습니다. 말썽꾼은 파괴자입니다. 사단의 무리에 속한 자들입니다. 구경꾼은 '잘하나 못하나 보자'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보람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주인의 삯을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자기 자신을 천국의 일꾼으로 생각하십시오.
셋째, 우리는 일꾼을 찾아내야 합니다.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할 주인에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추수할 주인만이 일꾼을 보낼 수 있습니다. 자기 밭에 익은 곡식을 추수할 자를 아무나 보내지 않습니다. 도적을 추수꾼으로 보내면 큰일납니다. 도적은 추수해서 주인의 집에서 도망을 칠 것입니다. 주인이 보내는 추수꾼, 주인이 알고 주인의 밭에서 주인의 열매를 거두어 주인의 창고에 들이도록 파송하는 파수꾼을 우리는 찾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영혼의 추수꾼으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일 전체가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 따로 있고 세상 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계요, 우리는 그 곳에서 일하는 일꾼입니다. 장사를 하든, 농사를 짓든, 학교에서 가르치든, 연구하든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주소서 하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추수할 주인이 누구입니까? 추수할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에게 일꾼을 청하라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때 씨 뿌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비료 주고 농약 주는 것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는 아무나 못합니다.
회사에서 물건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돈을 가지고 은행을 출입하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돈 가지고 도망치면 헛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려 구원한 열매를 만약에 사탄에게 맡긴다면 주님이 헛 것 하는 것 아닙니까 가장 신뢰할 사람이 전도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신뢰할 일꾼으로 파송해서 영혼을 추수해오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연세대 대학교에 강의하러 가서 연세대의 땅을 밟으면서 언더우드 선교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대학 교수님이 그래요. "이 연세대 캠퍼스가 20만평인데 연대 가족이 수만 명입니다." 그래요.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요,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를 자원하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할 때 어느 선교사 보고 시간에 한국에 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때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여,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일꾼을 보내주소서." 그때 성령께서 "언더우드야 왜 네가 갈 생각은 않고 다른 사람을 보내려고 하느냐"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드디어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가 한국에 복음을 전하므로 오늘날 천만이 넘는 복음대국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주의 부르심에 내놓은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가 성전에서 듣던 음성이 필요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이사야는 추수할 밭을 향해 일꾼으로 나갈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고백이며 사도들의 사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기를 원하시며, 내 손을 통하여 복음이 전달되기를 원하시며, 내 발걸음을 통하여 복음 소식이 전해지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3-15)
전파해야 듣습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전도는 예수님께서 가장 신뢰하는 일꾼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러 갈 때는 '아, 주님이 그 고귀한 영혼을 나에게 맡겨서 추수하라고 하셨구나!' 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추수꾼이 되어 알곡을 모아 천국 곶간에 들이는 주인의 추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신임받는 최고의 일꾼이요, 주인의 지극한 칭찬을 받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주인이 눈물 뿌려(피흘려) 심어놓은 열매를 우리 손에서 거두라는 명령은 최대의 영광이요,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