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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종류와 개념.
엡2:5 은혜로 구원을 얻었나니.(과거형)
마24:13, 막13:13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미래형)
바울이 마게도냐를 건너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0, 31)고 한 구원과,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엡1:7의 과거형의 구원과, 미래적으로 얻을 구원, 즉 미래적으로 죄사함을 받을 마24:13과 막13:13의 구원을 구별해야 합니다. 영이 중생한 사람은 죄사함을 받은 구원과, 받을 구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과거형)는 말인데 이는 인격의 주체성인 영이 아담과 하와의 죄책임을 지고 죽었는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이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엡2:1) 여기서의 죄사함은 지옥에 갈 죄를 사함 받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영이 따먹은 것이 아니라 육이 따먹은 것이고, 또한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충동도 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성(마음)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즉 이성에서 죄가 시작되어 몸이 그 죄를 따라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이성이 죄를 지을 그 때 인격의 주체성인 하나님으로부터 창조함을 받은 영(타락 전의 영)은 이를 제재할 수도 없고, 제재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영 자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만 이성과 몸이 지은 죄의 책임을 이 영이 대신 지고 그 죄의 대가로 영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 속의 영은 물질인 빵을 먹지 않습니다. 빵을 먹고 싶은 충동은 이성(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지로 죄를 짓는 것은 몸입니다. 즉 몸이 행동적으로 죄를 짓도록 충동을 일으킨 것은 이성(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인격의 주체성은 영이므로 그 죄의 책임을 영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또한 앞으로 미래에 지을 죄의 책임을 영이 다 지고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영이 중생을 해서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았지만 죄사함 받은 것과 중생만으로는 천국과는 거기가 멉니다. 이는 중생한 사람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라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면에서의 말입니다.
마5:19-20에 ‘인간의 의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의로써만이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의 중에서 최고로 차원이 높고 고상한 의는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공자의 의는 조작배기 의이지만 바리새인들의 이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준수한 의인데도 이것을 가지고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결국 성경을 그냥 글자대로 지키는 것만으로는 천국과는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가져야 천국에 간다’라고 하지 않고 ‘너희는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즉 성경을 액면적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의를 벗어나지 못하니 이것으로는 중생도 못하고 천국에 가지도 못한다는 말로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3년의 삶 전부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33년의 이 삶 중에서 결정적 핵심은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앞에 만족을 드린 제물이 되신 것으로, 이를 통해 우리에게 구속을 완전히 입혀주신 것입니다. 즉 대형(代刑)의 은혜와 대행(代行)의 은혜 이 둘을 우리에게 입혀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신 자신에게 필요해서 이 의를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당신의 의를 입혀주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이 은혜를 대속의 은혜, 속량의 은혜라고 합니다. 바로 이 의를 입어야 입은 그것이 천국에 해당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셔서 죽으심은 앞에서 말한 대로 죄로 인해 죽은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 죽음은 과거와 현재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에 지을 죄값까지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신 것입니다. 고로 이제 우리의 영은 죄책임이 없어진 것입니다. 이제 지옥에 갈 죄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만일 마귀가, 또는 천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죄를 물으며 그에 대한 벌을 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서 ‘내가 대형으로 죽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죄책임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죄를 지은 것’과 ‘죄책임’과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마귀가 우리에게 ‘너 죄 지었지?’ 하고 묻는다면 ‘그래, 죄를 지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값을 다 받았으므로 나는 그 죄의 벌은 받지 않는다’ 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하면 원죄와 자범죄는 결코 사함 받지 못합니다. 공심판은 신불신의 심판인데 예수를 믿는 자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셨으므로 이 공심판은 받지 않습니다. 즉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이성과 몸이었으나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격의 주체성인 영이 그 죄책임을 지고 선악과를 따먹는 그 즉시 죽었고, 육은 서서히 죽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결과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인격의 주체성인 영이 이성과 몸의 죄책임을 지고 죽었듯이 죄책임을 지고 죽은 이 영을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형과 대행으로 죽으셨으므로 죽었던 그 영이 살아난 것입니다. 즉 나의 중생한 영의 죄책임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가서 내 대신 형벌을 받아주셨기 때문에 나의 영은 죄책임을 벗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의 죄를 벗겨 가시고 그 대신 당신의 의를 입혀 주셨으니 이제 나는 예수 믿기 전처럼 죄인이 아니라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내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과 달라진 것은 믿기 전에는 죄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죄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는 내가 의를 행한 것이 없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이제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엡2:1 ‘죽었던’-과거완료) 쉽게 말하자면 죽은 송장은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하므로 죽은 자가 옷을 입으려면 다른 사람이 입혀주어야만 하듯이 허물과 죄로 죽은 내 영 스스로는 하나님의 의를 입을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의를 입혀주셔서 나의 영은 살아났고 나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의를 입은 것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입니다. 즉 내가 의를 입은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벗는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벗겨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동시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천국, 지옥’ 하는 공심판은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천국을 가기는 가되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한 개체 개별적인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사심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공을 들여 무궁세계를 주시고 자권 영주권 영생권 활용권 사용권 누림성 느낌성을 주어서 그 천국을 활용할 수 있도록 했으나 이것을 사용할 실력이 없어서 이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 이것은 사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의 대속으로 인해 우리에게 죄책임은 없어지고 예수님께서 만들어 주신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졌는데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합니다. 즉 ‘의를 행했다’가 아니라 ‘의롭게 봐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중생을 하는데 이게 얻은 구원(과거형)입니다. 이 구원으로 우리가 천국의 영주권, 영생권, 무궁세계를 영원한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대형과 대행의 의는 논리적으로는 분리해서 말을 하는 것이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우리에게 입혀지는 것입니다.
영이 죽은 자의 그 영이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이 구원을 얻은 자는 당장 죽어도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됩니다. 엡2:5에 ‘은혜로 구원을 얻었느니’ 라고 했으니 이 구원을 얻은 자가 혹 타락을 한다고 해도 이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마24:13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얻은 구원이 아니라 얻을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빌2:12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얻은 구원을 밑천 삼아 계속해서 얻을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겉으로 보면 대 환난 장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구원의 노다지가 무한히 들어 있습니다. 즉 환난에서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이 노다지(얻을 구원)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얻는다는 뜻입니다.
계2:10에 나오는 생명의 면류관은 환난 때에 이 환난을 믿음으로 잘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잘 이루면 천국을 마음껏 다스리고 누릴 수 있는 영능의 실력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환난이 끝날 때까지, 또한 내 목숨이 끝날 때까지 구원을 잘 이루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면류관’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우리는 얻은 구원과 얻을 구원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얻은 구원(기본구원)은 우리가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독권적으로 당신의 예정을 따라 주시는 것이고, 이 구원을 주시는 것은 얻을 구원(성화구원)을 잘 이루라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주고 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니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미 얻은 구원은 불변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다고 해서 얻은 구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미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는 이 얻은 구원에 대한 것은 걱정할 것이 없고 우리가 걱정할 것은 얻을 구원을 위해서 걱정을 해야 하고, 분초찰나 이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재세기간의 짧은 시간에 이 구원을 더 많이 이루어 더 빛나는 나, 더 값어치 있는 나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얻을 구원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 사건과 환경과 마찰과 충돌과 대립을 겪으면서 이룰 수 있는 것이기에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기본구원을 얻은 자를 그 좋은 천국에 구원 즉시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일정기간 머물게 하면서 각 사람의 믿음의 실력을 봐서 스파링 대상으로 사건과 현실과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다니엘 바울 같은 이가 감옥에 들어가고, 사자 굴에 들어가고, 매 맞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거나, 하나님 앞에 복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더 빛나는 구원, 더 영광스러운 구원, 더 화려한 구원, 영원히 능력이 있는 구원, 가장 고급스런 구원을 이루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 얻을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잘 믿으면 잘 믿는 것만큼 그의 형편과 사정을 따라 적절히 사건과 환경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적인 신자는 이 세상에서 무사태평을 원하고, 안일과 호의호식하는 것을 복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자를 부러워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정신을 가질 바에야 차라리 주인집 아들의 결혼 잔칫날을 앞둔 그 집의 돼지를 부러워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돼지가 예쁘고 고와서 연지곤지 찍고 장가보내려고 이 돼지를 잘 먹이는 것입니까? 이 돼지가 병들까봐 주인이 주사 놔주고 양식(수입사료) 먹이고 하니 그렇게 대우받고 얻어먹는 그 돼지가 부럽습니까? 아무리 대우를 잘 받아도 이 돼지는 그 집 주인의 아들 결혼식 때 손님들의 상에 올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더 구원을 아름답게, 가치 있게, 영광스럽게 이루느냐를 놓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과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가 천국에 가서 대외적으로 대우가 같겠습니까? 천국에서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각자가 주님을 닮은 양대로 자기 주관적으로 느끼는 기쁨 만족 즐거움 영광 존귀 활동이 각기 다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부러워할 것입니까? 바울 이사야 다니엘이 부럽습니까?
천국에는 남녀가 따로 없고, 결혼도 없는 영의 세계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정성 혈육성은 다 끊어지고 주님과의 인격적 결합성으로만 사는 곳입니다. 이런 세계에 갈 우리를 하나님께서 얻은 구원을 주어놓고서는 이룰구원을 이루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 두지를 않으십니다. 구원을 바로(옳게) 이루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인용해서 이룰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우리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달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다 주십니까? 이 세상은 우리가 누리는 곳이 아니라 구원건설을 하는 곳입니다. 이 구원건설을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으니 도적맞는 것, 실패, 가난, 질병, 떼먹히는 것, 감옥도, 원수도 강권적으로 다 동원하십니다. 나를 위해 언제 어느 때 어느 것을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다 준비해 놓고 우리를 바로 세우려고 하십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성이 주어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거역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데 우리가 이 자유성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사건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가나면 나에게 구원건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르게 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면 현재적 심판과 궁극적인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한다고 해도 마지못해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에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나 자원적으로 할 때는 가장 효력적 효율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시하처를 막론하고 구원을 잘 이루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 14년간 가정적으로 환난이 왔는데 이것은 다윗의 간음죄의 값이 아니라 그 죄를 짓는 시간에 의롭게 살아서 이룰구원을 이뤄야 할 다윗이었는데 그런 짓을 했으므로 그 구원을 만회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기회입니다. 죄값은 천국에 가서 천국의 누림의 축소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후일에 이것을 안 다윗은 그 누구도 원망치 않고 자기를 붙잡고 탄식을 하며 그 사건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지은 값을 죄를 지은 양만큼 살아생전에 다 받는다고 하면 다 죽어나갈 테니 이것을 보고 죄를 지을 자도 없을 뿐더러,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이룰구원이 하나님의 독권과 강권에 의해 되어지게 되니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심판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우리에게 징계를 하시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구원을 잘 이루라고 유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을 크게 얻은 구원(기본구원)과 얻을 구원(성화구원)으로 나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일대속을 둘로 쪼갠 것이 아니라 단일의 그 대속이 영적 존재인 영과 물질적 존재인 심신의 성질에 따라 영에게는 즉각적으로, 마음에게는 점진적으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 적용의 모습을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의 신앙에는 소극적 부정적 신앙과, 적극적 긍정적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얻을 구원을 위해서는 적극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소극적 부정적 신앙의 길을 간 자와 적극적 긍정적 신앙의 길을 간 자의 이룬 구원의 결과는 천지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다 같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힘을 썼다고 해도 어떠한 자세로 구원을 이루어 나갔느냐에 따라 구원을 이룬 결과는 차이가 매우 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신앙적(무조건 믿사오니) 신앙도 금물입니다. 신의를 내 뜻으로 한 긍정적 신앙(성령님을 따라 이성과 몸이 움직여지는 신앙)이라야 이룰구원이 효율적 효력적 능률적으로 잘 이뤄지는 것입니다.
긍정적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감사합니다. 나로 이룰구원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의 일에 써주십니까? 인간의 생각으로는 내가 그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으나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 하겠습니다’ 라는 자세로 순종하는 것이고, 부정적 신앙이란 ‘나는 하기 싫지만 하나님이 하라시니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둘 다 순종을 하기는 했으나 성령님의 의사와 단일의사를 가지고 한 것과, 내 의사는 따로 있으나 전능자 하나님의 명령이니 내 의사는 뒤로 놔두고 할 수 없이 순종한 것과는 이룰구원의 양과 결과에 있어서는 천지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정적인 시간을 활용해서 적극적 긍정적 신앙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짧은 재세기간 동안에 구원을 이뤄 놓으면 천국의 누림은 영원히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한된 고통이 와도 거기에 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잡고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유행가를 부르는 것 자체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다보니 그것을 부를 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죄지을 틈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적극적 신앙입니다. 적극적 신앙에는 같은 힘을 써도 그 수입은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신앙생활로 구원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죄를 지을 틈도 없고, 일부러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신앙으로 나가다 보면 환경에 유혹을 받게 되고 언젠가는 매를 맞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잡고 구원을 이루는데, 말씀대로 살려고만 노력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죄를 짓지 않게 되고 구원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우리가 ‘나를 들어 전도를 시키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긍정적 적극적인 신앙이 아니라 요나처럼 ‘그처럼 어려운 곳으로 왜 나를 보내십니까’ 하고 소극적 부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꾸 내려가고, 결국은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은 신앙의 잠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욘1:5) 이렇게 되면 구원은 완전히 중단되어 버립니다.
육신의 잠은 실컷 자면 깨어지지만 신앙의 깊은 잠은 깨어나질 못하고 깊어지고 깊어지니, 이러다 보면 혼수상태가 되어 죽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는 썩어져서 가는 곳마다 냄새만 풍기는 자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적극적 긍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계속해서 소극적 신앙생활을 하면 결과적으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사람의 성질 성격 하나 고쳐지면 그 사람은 구원을 많이 이루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러나 공자처럼 선천적으로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을 잘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성질이 고쳐진 것과 구원을 이룬 것과는 별개이지만 하지만 내가 구원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성질이 고쳐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외적으로 주시는 마찰이나 충돌과 싸워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대내전과 대외전이 없이는 결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엡4:13에 ‘성장하라, 커져라’ 하는 것은 영인성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성과 몸에 성화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처럼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럽기를, 성장하기를 원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모든 사건과 존재를 어김없이 동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든지 인간을 타락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만들었다면 타락이 안 되고, 선악과를 만들고서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안 했더라면 타락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타락성 오염성 등의 못된 성질은 없었지만 그러나 구원은 이룰 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참 사람과 싸워야 할 스파링의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악과를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령을 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그 선악과를 따먹더라도 죄가 되지 않을 텐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서 그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잘못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는 인간에게 ‘따먹지 말라’ 하고서 인간이 그 선악과를 따먹으니 심판을 하신다고 하니 심통쟁이 하나님처럼 보여지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의 영인성장을 시켜서 이성과 몸에 성화구원을 입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시켜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을 닮게 해서 장차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인격적 애정적 수수관계를 가지며 그 천국을 당신처럼 마음껏 통치하고 다스리고 누리며 쾌락하게 해주시려고 그런 명령을 하신 것이고, 이를 위해 인간에게 타락의 방편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뱀을 강권적으로 막아서 하와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하와에게 뱀을 보냈고, 그 뱀 속에 마귀가 들어가게 한 것도 하나님이요, 그래서 뱀에 들어간 그 마귀가 하와를 꾀었고, 하와는 이 마귀의 꾀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아담도 따먹게 해서 타락이 되게 하셨고, 이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에게는 타락성 오염성 죄악성이 생겼습니다.
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마귀는 타락한 인간에게 사망적 성격을 넣어준 것인데, 이 결과로 인간의 영적 기능은 타락하면서 즉시 죽어버렸고, 육은 서서히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인간에게는 인간성 타락성 오염성 죄악성이 하나 둘 자꾸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고 나니 이 인간은 원인(原人)의 상태에서는 없었던 각종 죄악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의 인간인 하와의 영을 중생시켜서 새사람을 넣어주셨으니, 이로 인해 인간 속에는 중생된 새사람과 타락된 옛사람의 두 성분이 늘 마찰 충돌 대립을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당시로 보면 미래적으로 4천 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서 확실히 죽을 것이므로 이 효력을 미리 당겨다 중생을 시킨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적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중생한 것입니다.
자신이 중생한 시기는 나도 모르고 아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런데 아담의 중생 시기에 대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무 뒤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중생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가죽을 입힐 때 중생을 했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의 중생의 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중생 여부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말씀을 깨닫고 보니 중생의 그 시각은 혹 모를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됨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중에도 사망적 의를 생명적 의로 보기도 하고, 생명적 의를 사망적 의로 보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공자의 의가(도덕성) 겉으로 보기에는 선으로 보이지만 진리와는 대립이 됩니다. 공자의 도덕적 의와 진리지식과는 대립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 속에는 생명적인 것이 있고, 또한 선적 사망적인 것과 악적 사망적인 것(예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있는데 대개가 악적 사망적인 것은 사망적인 것으로 알지만 선적 사망적인 것은 악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적 사망적인 것도 악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영의 눈이 밝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모른 채 예수를 믿게 되면 공자 식으로 공자의 도덕으로 예수를 믿게 됩니다. 개중에 공자는 동양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무식의 극치에서 나오는 말에 불과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에는 천국성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양면성을 알고 악적인 것과 싸우고, 선적 악적인 것과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건 자신속의 영웅심 허욕심과도 싸워야 하지만 선적이지만 진리가 아닌 일반적 보편적인 것과도 싸워야 합니다. 신사참배, 국립묘지 참배, 다니엘의 금우상, 묘소에 가서 절하는 것, 나는 먹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 예수 믿게 한다는 명목 하에 온 세상사람의 마음을 맞춰주는 것 등과 싸워야 합니다.
내 몸 안팎의 원수대적,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환경 나쁜 환경 등이 존재하는 것은 나 자신의 구원을 잘 이루라고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대내전과 대외전을 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고, 거짓과 참이 공존하고 있고, 생명과 사망이 공존하고 있고, 비단일성 즉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극대 극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우리가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신령한 것)이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이 없이도 각이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며 살 수도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그 기쁨 말고도 더 얄팍하고 좋은 기쁨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맛보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기쁨과 만족에 빠지면 하루저녁에도 도토리만한 술잔 하나를 가지고 논 서너 마지기도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것을 가지고 세상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는가 하니 우리 인간 속에는 세상과 맞는 오염성 죄악성 타락성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부터의 기쁨이 아닌 이런 기쁨들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천국은 이렇다. 지옥은 이렇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천국과 지옥의 카다록으로 그냥 두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이렇게 즐겁지? 그런 것처럼 천국은 즐거움이 영원한 곳이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대해 말하기를 천국과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공존하는데 단순히 자기의 깨달음과 느낌에 따라 다른 곳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밥을 먹을 때 긴 숫가락으로 먹는데 예수 잘 믿은 사람은 이 긴 숫가락으로 상대에게 서로 먹여주어서 천국의 진미를 마음껏 먹기 때문에 살이 찌고,(이 사람에게는 이곳이 천국이 되고) 예수 못 믿고 지옥(천국)에 간 사람은 사랑이 없어서 긴 숫가락으로 서로 먹여주지 않고 자기만 먹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긴 숫가락이 자기 입에까지 오지를 못해서 결국 다 쏟아버리게 되니 음식을 먹지를 못해서 바싹 마른다고 합니다.(이 사람에게는 이곳이 지옥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상상에 불과한 주장입니다.
이 세상은 천국 같은 환경과 지옥 같은 환경이 공존하는 세상이지만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이 땅과 같은 곳이 아니라 장소적으로 천국과 지옥이 정확히 분리가 됩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지옥성이 조금도 없습니다. 또한 천국은 고통이나 괴로움을 외래적으로 줄 자도 없습니다. 반면에 지옥에는 외래적인 기쁨과 즐거움을 줄 자는 전혀 없는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성격적 성분적으로도 완전히 다릅니다. 천국은 신령세계로 단일의 세계이니 천국은 하나님의 뜻으로 의사가 단일인 곳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하나님 한 분의 단일의사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용납이 되지 않는 세계이니 만약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뜻(성경 66권의 뜻)을 모른 채 살다가 그 나라에 가면 그 자는 그 나라에서 멍청이가 됩니다.
따라서 성도 각자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에서의 누림에 격차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화(하나님이 객관을 나의 주관화) 시키지 못하면 이룰구원이 중단이 되고 맙니다.
또한 의사만이 아니라 생명적 단일의 세계이므로 천국에 간 모든 자들은 개체 개별적으로 하나님 한 분의 생명으로만 살게 됩니다. 이는 마치 한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가 모든 가정에 전선으로 연결이 돼서 각 가정에서 동시에 전등의 불을 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발전소의 전기가 꺼지면 각각 켜진 전등불이 모두 꺼지듯이 하나님의 한 생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자식 모두 개체 개별적 생명을 가지고 삽니다. 사람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부가 동시에 죽었다고 해도 한 생명을 가지고 살았다고 속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내가 지금 이대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으로 단일이 되지 못했다면 단일이 되지 못한 그 부분은 결코 살지 못합니다. 그냥 다 녹아버립니다.
4천 년 전에 중생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생명도 중생할 때 다 한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직접 받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자식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고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은 성경 66권인데 인간은 누구든지 이 성경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권리와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이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바로 깨달아 나가야 하는데 이 성경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학문이나 인간의 지식이나 인간의 역사에 붙여서 깨달아 나간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진리의 말씀인 성경은 초현실적 초논리적 초과학적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과학에 맞지 않는 것은 성경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과학이 하나님의 지식에 비해 부족해서 성경말씀, 진리에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과학도 언젠가는 성경으로 다 돌아오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궁극의 그 나라는 하나님의 것으로 자체화된 것만 가지고 가는 세계이니 내가 성경말씀으로 자체화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건 말씀을 깨닫고 성령을 따라 실천을 하면 실천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의사가 자기 자체화 되고, 능력도 하나님 한 분의 능력으로 자체화 되고,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체화가 되어서 자체화 된 이것을 가지고 그 세계에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체화시켜 나가려면 언제나 하나님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지 단절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사도 단절이 되고, 능력도 단절이 되고, 기쁨도 영광도 존귀도 행복도 모두 단절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기쁨을 맛보며 얼마든지 살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이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결코 용납이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으로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령 지옥에 가서 살면 되지 않을까? 즉 천국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지옥에 가서 기쁨을 누리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지옥에는 물질세계에서 육적으로 즐기던 것은 일체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 간 성도에게도 육적으로 즐기는 낙의 요소도 일절 없습니다.
이 세상은 번식을 하는 세상이므로 남성과 여성이 있고, 인간은 육체를 입었기 때문에 남자의 육체와 여자의 육체가 있고, 이로 인해 생식이 필요하고 생산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런 게 일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이 주던 것을 가지고 좋아하고 즐기던 것, 명예 영광 권세 등의 모든 성질 성격 자체가 죽음과 동시에, 맥박이 정지하기 전에 모두는 그 인간을 다 떠나고 맙니다. 기능이 먼저 떠나고, 맨 나중에는 숨이 떠납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부활(?)을 보면 인생관을 잘 묘사해 놓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고 처음엔 ‘병들었다’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잔다’고 했다가, 또 그 다음에는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리아가 ‘나사로가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축소시켜 놓은 인간의 모델케이스입니다. 이게 예수를 믿지 않는 일반인간의 종착역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우리가 지옥에 간다면 그곳에는 우리가 기대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을 좋아하던 성격, 그 기능, 돈 명예 부귀공명 오락 쾌락 음란방탕 등 이런 기능이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지옥에 가지고 간다고 해도 그것을 즐겁게 해 주는 기관도 존재도 그 지옥에는 없습니다. 그 세계는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산 사람들이 영원히 느낄 고통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기쁨과 고통은 실물이 아니라 하나의 견본에 불과합니다. 기쁨은 천국을 보여주고, 고통은 지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코 실지가 아닙니다. 실지는 죽음의 선 너머 천국과 지옥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삼위 중에 제 2위의 신성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성은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는 마리아가 분명하지만 육신의 아버지는 말씀입니다.(요1:14)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이 우리의 영과 같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영은 예수님의 영과는 달리 피조 된 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제 2의 아담이라고 한다면 제 1의 아담은 인류의 원조입니다. 제 1의 아담의 영은 죄 없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 1 아담은 가범성적 가사성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제 2의 아담인 예수님도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둘 다 죄가 없지만 제 1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제 2의 아담이라고 하는 것은 제 1의 아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영을 창조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2 아담의 영은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창조이므로 원죄가 유전이 되지 않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요셉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으므로 원죄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 1의 아담은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을 창조함 받았지만 범죄 해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은 전부 원죄를 유전 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타락된 영과 육을 유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아울러 우리와 같은 연약성이 있는 분이므로 죄에 넘어갈 수도 있지만 우리에 대한 애정성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100% 만족을 드린 삶을 사셨으므로 자범죄도 없으십니다. 고로 모든 피조물이 그 분께 무릎을 꿇게 되는 가장 영광스럽고 기쁘고 존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조직신학의 ‘타락관’에 있어서 죄의 시초를 대개는 선악과를 따먹음과 동시에 죄를 범했고, 이것이 죄의 시초라고 보지만 실은 선악과를 따먹기 그 이전에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들이 에덴동산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범죄이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 에덴동산에 자신들을 살게 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으니 자기에게 현실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그게 물행죄나 심행죄 이전에 이미 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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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더 구원을 아름답게, 가치 있게, 영광스럽게 이루느냐를 놓고 살아야 합니다
영이 죽은 자의 그 영이 살아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이 구원을 얻은 자는 당장 죽어도 결국은 천국에 가게 됩니다. 엡2:5에 ‘은혜로 구원을 얻었느니’ 라고 했으니 이 구원을 얻은 자가 혹 타락을 한다고 해도 이 구원은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마24:13에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얻은 구원이 아니라 얻을 구원을 말하는 것이고, 빌2:12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얻은 구원을 밑천 삼아 계속해서 얻을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을 주고 나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니 자신에게 주어지는 시간 시간마다, 사건 사건마다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우리에게 징계를 하시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구원을 잘 이루라고 유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의 신앙에는 소극적 부정적 신앙과, 적극적 긍정적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가 얻을 구원을 위해서는 적극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소극적 부정적 신앙의 길을 간 자와 적극적 긍정적 신앙의 길을 간 자의 이룬 구원의 결과는 천지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외적으로 주시는 마찰이나 충돌과 싸워야 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대내전과 대외전이 없이는 결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양면성을 알고 악적인 것과 싸우고, 선적 악적인 것과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남이 뭐라고 하건 자신속의 영웅심 허욕심과도 싸워야 하지만 선적이지만 진리가 아닌 일반적 보편적인 것과도 싸워야 합니다. 신사참배, 국립묘지 참배, 다니엘의 금우상, 묘소에 가서 절하는 것, 나는 먹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술을 따라주는 것, 예수 믿게 한다는 명목 하에 온 세상사람의 마음을 맞춰주는 것 등과 싸워야 합니다.
본문에서 상기 댓글을 발췌 했읍니다. 이유는 읽으면서 머리에 바로 입력이 되게 말씀을 너무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니 감동입니다 얻은구원과 얻을 구원(이루어야 할구원)을 알기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