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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설산을 그리며 서울에서 덕유산을 향해 출발했다. 덕유산(德裕山)은 그 이름처럼 왠지 모르게 넉넉하고 너그러워 덕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매서운 바람과 두텁게 쌓인 눈 등 험한 등로를 마다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겨울이면 덕유산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산행버스는 고속도로에서 국도로 내려서서 터널을 지나, 무주군 삼공리 구천동 계곡으로 들어서서, 출발 약 3시간 만에 구천동의 국립공원 덕유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무주군 설천면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상봉으로 이어지는 25km에 이르는 구천동계곡 상류의 덕유산 산자락 깊이 들어온 셈이다.
사림파로 조선 전기 문신이던 임훈(林薰, 1500-1584년)은 <덕유산 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峯記)>에서 구천동(九千洞)의 지명이 9천 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곳이라는 의미의 '구천둔(九千屯)'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아래쪽 긴 계곡과 위쪽의 백련사까지 깊은 계곡을 따라 대(臺) 담(潭) 소(沼) 폭포(瀑布) 탄(灘) 암(岩) 등 '구천동 33경'의 비경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산행은 덕유산국립공원 구천동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출발점의 고도는 해발 600미터로 해발 900미터 백련사와 해발 1130미터 오수자굴을 지나고, 해발 1594미터 중봉까지 클라이맥스 구간을 지나면, 해발 1614미터 향적봉까지 구간은 설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강설로 인해, 당초 예정되었던 안성탐방센터-동엽령-중봉-향적봉-백련사-구천동 탐방지원센터 산행 코스가 무주군 삼공리 구천동탐방지원센터와 향적봉을 왕복하는 원점 회귀하는 코스로 바뀌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눈을 인 산봉우리와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 삼공리 구천계곡과 월음령계곡은 채광, 제련, 단야 등 고대(古代) 철기 제작과 관련된 채석장, 제련로, 단야로, 숯가마, 폐기장 등 '가야의 포항제철'이라 부를만한 대규모 제철유적이 발견된 곳기도 하다. 일대에 풍부한 철광석, 계곡의 물, 울창한 수목 등 제철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겨울의 추위에 아랑곳 않고 진한 녹음의 무성한 가지로 치장한 전나무 가로수가 산객을 맞이한다. 탐방안내소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야영장을 끼고 1.6km여를 오르면, 계곡을 따라 어사길이 4.9km 이어지며 인월탄부터 백련사까지 구천동 16~32경을 차례로 내놓는다.
'어사길'은 조선후기 어사 박문수가 구천동에서 자신의 위세를 믿고 횡포를 부리는 자들을 벌하고, 백성들을 위해서 사람의 도리를 바로 세웠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어사길 입구에서 도포 차림에 삿갓을 쓴 백발 수염의 노인이 추위에 아랑곳 않고 등산객들을 향해 '잘 다녀오세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옛 전설을 살려내어 자기 고장을 선양하고 사람의 도리를 되새겨 보게 하는 정성이 갸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곡 우측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눈으로 덮인 바위와 얼음으로 덮인 계곡 여기저기, 이마를 드러낸 바위 사이 얼음 아래로 봄을 꿈꾸며 흐르는 물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계곡 위 산기슭에는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활엽수림 사이로 산죽이 두꺼운 눈을 뚫고 푸른 잎을 군데군데 드러내고 있다.
커다란 암반 위로 흐르던 여러 물줄기가 넓게 펼쳐지며 쏟아지는 모양이 비파를 닮았다는 제19경 비파담(琵琶潭), 구천동과 백련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쉼터이자 여울목 역할을 하는 곳으로 김시습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는 제25경 안심대, 백련사로 들기 전 맑은 담수에 자신을 비추며 속세에 얼룩진 심신을 가다듬는 장소라는 제27경 명경담, 층암을 타고 쏟아지는 2단 폭포로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즐겨 놀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는 제28경 구천폭포, 사바세계를 떠나는 중생들이 속세와의 연을 끊는 곳이라는 제31경 이속대(離俗臺) 등은 쌓인 눈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
덕유산은 산객들에게 눈이 쌓인 겨울철 산행지로 각광받고 있지만, 기실 그 진면목은 속살을 온전히 드러내는 봄이나 여름철이 산행의 제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스키장이 조성된 산 밑에서 해발 1520미터 설천봉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로 불과 십여 분이면 오를 수 있어, 설천봉과 지척인 향적봉 일대는 겨울철이면 수많은 유람객들로 붐벼서 산행의 감흥이 반감되기 마련이다.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만에 출발점에서 6.4km 거리의 백련사 일주문을 지나고 산기슭 위쪽에 해발 900미터에 자리한 백련사 아래에 도착했다. '덕유산 백련사(德裕山白蓮寺)'라 한자로 쓰인 일주문 편액의 필치가 길쭉하고 날렵한 산죽(山竹)의 잎새를 닮아 보인다. 동양철학의 대가이자 예언가로 알려진 탄허(呑虛, 1913-1983) 스님이 쓴 것이라고 한다.
백련사는 신라 신문왕 때(681-691) 백련(白蓮) 선사가 지은 백련암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신라 흥덕왕 때인 830년 무염 국사(無染國師)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원래의 건물이 6.25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져 1962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고 하지만, 넉넉지 않게 주어진 산행 시간 탓에 지척에 있는 천 년 역사의 고찰을 둘러볼 수 없어 아쉬움이 적지 않다.
백련사에서 두 갈래로 산행 코스가 갈린다. 거의 대부분의 산객들이 향하는 향적봉으로 오르는 짧은 직행 코스를 두고, M과 H가 고집스레 계곡을 따라 오수자굴(吳秀子窟)로 휘도는 방향으로 앞서가며 따라오라 채근한다.
우리가 들어선 코스는 좁은 골을 끼고 느슨한 경사를 오르다가, 가파른 비탈길이 오수자굴과 중봉으로 이어지는데, 좁은 이랑처럼 허벅지 높이로 쌓인 눈 사이로 앞서 지나간 산객의 발길이 다져놓은 길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아갔다.등로에 내리찍는 스틱은 손잡이 부분까지 눈 속으로 빠져들고, 간간이 깊게 파인 구멍이 발밑에 함정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기진맥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수자굴로 올라서니, 중봉 쪽에서 내려던 많은 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굴에는 오수자라는 스님이 득도했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지붕처럼 덮인 거대한 바위 아래 대여섯 평 넓이의 굴 안으로 들자, 땅바닥에서 죽순처럼 솟아 있는 수십 개의 역고드름이 솟아 있는 모습이 신비롭기만 하다.
중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등로에서 마주치는 산객들마다 험한 코스를 잡았다며 위로인 듯 격려인 듯 말을 건넨다. 다져진 길은 미끄럽고 다져지지 않은 눈길은 푹푹 발이 빠지고 꺼져 균형을 잃으며 비틀대곤 했다.
가다 서다 뒤돌아보다 다시 발길을 옮시며 중봉이 가까워지자, 멀리까지 시야가 트이며 칼바람이 몰아친다. 산정에서 뻗어 내린 주 능선과 주 능선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능선 줄기들은 산군을 구획 짓듯 하나하나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이정표가 표지석을 대신하고 있는 해발 1,594미터 중봉에 올라서니, 산객 두어 명만 눈에 띌 뿐 칼바람만 거세게 몰아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노 산객 한 분과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옷을 여미고 벗었다가 다시 낀 장갑 속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향적봉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중봉에서 향적봉까지 약 1km의 능선은 평탄하다. 능선 좌우로 흰 눈을 뒤집어쓴 주목과 구상나무가 듬성듬성 서있고,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의 고사목은 매서운 바람도 아랑곳 않고 솟대처럼 올곧게 서있다.
그 중간에는 눈에 덮인 덕유평전(平田)이 자리하는데, 6~8월이면 각시, 골잎, 노랑 등의 이름이 붙은 원추리가 함께 무리 지어 온통 노랗게 꽃을 피운다고 한다. 해발 1,000m 부근의 아고산대에서 자란다는 원추리 군락이 융단처럼 일제히 꽃을 피운 덕유평전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환상적이다.향적봉 턱밑에 자리한 대피소 부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느긋하게 휴식을 하거나 음식을 들며 설산의 장관을 만끽하고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비탈 눈길에서 동행 H가 갑자기 대퇴부 경련으로 주저앉았다. 매주 빠짐없이 북한산을 비롯한 인근의 여러 산을 섭렵하던 H는 퇴직과 겨울이 겹쳐 한 달 이상 산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뒤따라 도착한 B와 함께 H의 상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려, 다행히 M이 되돌아 마중 나온 향적봉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향적봉에서 다시 합류한 M은 모자를 챙겨 오지 않은 탓에 나뭇가지에 긁혀 눈썹 위에 상처가 나 있다. 너그럽고 덕스럽다는 덕유산이 산행에는 늘 마음을 낮추고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향적봉 정상에는 세로글씨로 '덕유산 향적봉'이라고 적힌 자연석 표지석이 두 개 서있다. 두 표지석 부근에는 줄을 서서 인증 사진을 남기려는 인파로 북적댄다. 그들 대부분은 향적봉에서 800미터 거리 해발 1520미터 설천봉까지 케이블카로 올라온 사람들이다. 두 봉우리를 잇는 능선길을 두 줄로 서서 마주 보며 걷는 인파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많은 사람들이 '기차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임훈(林薰)은 1552년 음력 8월 25일부터 29일까지 덕유산 향적봉 등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거창군 북상면 출신인 그는 필시 동엽령 남쪽 해발 1492미터 무룡산의 동편 거창 산수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원점 회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승려 혜웅(惠雄)의 말을 빌어, 덕유산 주변 동서남북 산들의 분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선산의 냉산과 금오산, 대구의 팔공산, 성주의 가야산, 현풍의 비슬산, 지례의 수도산과 가야산, 진주의 지리산과 구례의 반야봉, 순천의 대광산, 진안의 중대산, 금구의 내장산과 부안의 변산, 고산의 대둔산, 공주의 계룡산, 보은의 속리산, 지례의 대덕산 등 멀찍이 떨어진 산들까지 언급하고 있다.
기실 덕유산은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해발 1,614미터 향적봉을 중심으로 무풍의 삼봉산에서 수령봉, 대봉, 덕유평전, 중봉,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영호남을 아우르며 백여 리에 걸쳐 백두대간을 이루는 웅장한 산인 것이다. 실제 북으로 황악산과 계룡산, 서쪽으로 운장산과 대둔산, 남쪽으로 지리산과 반야봉, 동쪽으로는 가야산과 금오산이 조망된다고 한다.
삼십여 리 험한 눈길을 헤치며 도달한 산정에서의 감흥은 남달랐지만, 치친 몸과 시간에 쫓기는 마음은 북적이는 인파와 날 선 칼바람에 옛 선인들처럼 천천히 주위를 조망하는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앞서 설천봉에 도착했다는 M과 H는 뒤쳐진 B와 나를 기다리기며 케이블카 하행 편도권을 사기로 했다. 설천봉에서 일행과 다시 만나 케이블카 탑승을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줄에 합류했다.
오랜 논란 끝에 금년에 착공하여 내년 10월 완공 후 2027년부터 본격 운행에 들어간다는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기사가 떠올랐다. 케이블카로 15분 만에 대청봉에서 약 1.5km 거리의 해발 1,602미터 끝청에 올라 인파로 넘치는 설악산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이십여 분을 기다려서 8인승 케이블카에 올랐다. 창밖으로 설천봉 정상에서 산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은빛 스키장 슬로프를 미끄러져 내려가는 스키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이징가(J. Huizinga, 1872-1945)는 인간의 본질을 유희를 추구하는 인간, 즉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갈파했다. 생산의 주체로 노동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지닌 우리들 호모파베르(homo faber, 工作人)에게 힐링과 웰빙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실존(實存)을 되새겨 보게 한 탁견이란 생각이 든다.
구천동 계곡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 귀로에 올랐다. 눈이 녹고 녹음이 무성한 계절에 덕유산을 다시 한번 더 찾아오고 싶다. 그때는 덕유산이 눈 속에 감추고 있던 무주구천동 33 비경을 비롯한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