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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청나라 시대신해혁명 (공화혁명, 辛亥革命 )무창 봉기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신군과 동맹회가 봉기했다. 이 봉기는 신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0년 2월에 광주 봉기가 실패한 데 이어 여러 차례의 혁명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고 황화강에서의 무장 봉기마저 불발에 그치자 동맹회 내부에서는 봉기 장소를 장강으로 옮기자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었고 그 계획이 급속도로 구체화되었다. 담인봉(譚人鳳)·송교인(宋敎仁)·진기미(陳其美) 등은 1911년 7월 31일 상해에서 동맹회 중부총회를 결성한데 이어 무한 지방에도 호북분회를 설립하여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봉기 준비를 서둘렀다. 그 해 9월 24일에는 무창에서 봉기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회의가 열렸다. 혁명의 주동역할을 담당하던 문학사와 공진회는 이날 오전 10시 공진회 사무실에서 주요 간부 60명이 모임을 갖고 봉기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숙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1. 봉기 날짜는 한가위(음력 8월 15일)인 10월 6일로 한다. 위 작전의 구체적 실천 계획으로서 우선 전망이 좋은 무창성 밖 공정(공병) 제11영에서 방화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봉기하여 성내의 사산(蛇山)과 봉황산의 대포 진지 및 무기고를 탈취한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무창의 맞은편에 있는 한양(漢陽)에서도 제42연대가 호응하여 무한 삼진(武漢三鎭)을 일거에 장악하기로 했다. 이어서 각 작전 부대의 지휘 책임자와 공격 장소도 상세하게 결정한 후 산회했다. 그러나 이 봉기 계획은 1시간 후에 하마터면 탄로날 위기를 맞았다. 무창성 밖에 있던 포병 제8연대 소속 혁명 동지가 취중에 대포를 끌어내어 세 발의 공포를 쏘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혁명 계획은 누설되지 않았고 공포를 쏜 자만이 처벌받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공포 사건 이후로 무창 일대에는 곧 혁명 봉기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혁명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무창 일대의 방위를 담당한 호광총독 서징(瑞澂)은 9월 30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청국 조정에 보냈다. “호북의 신군은 사천의 폭동 진압을 위해 출동했으므로 호북 지방의 방위를 위해 원군을 보내주기 바람.” 이어 10월 3일에는 군사회의를 열어 주요 기관의 경비를 강화하고 장강 일대에 군함에 의한 순찰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이렇듯 청조의 경계가 강화되는 가운데 혁명군의 주요 간부들이 자리를 비우는 등 봉기 준비에 차질이 일었다. 임시 사령부는 이러한 상태로는 예정된 날짜에 봉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봉기 날짜를 11일 전후로 연기하고 9일에 다시 회의를 열기로 하였다. 그런데 회의가 열리고 있던 그날 뜻밖의 사고가 발생하여 혁명군 간부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혁명군 참모장 손무(孫武)가 러시아 조계에 있는 총기관부에서 폭탄을 만들기 위하여 화약을 섞고 있을 때 혁명군 동지 한 사람이 피우던 담뱃불이 공교롭게도 화약에 떨어지는 바람에 화약이 폭발하면서 굉음이 일어나고 손무가 중상을 입었다. 굉음을 듣고 급히 달려온 러시아 조계 경찰은 혁명회 동지 30여 명을 일망타진하였다. 한편 강을 사이에 둔 무창에서는 아침부터 임시 총사령관 장익무(蔣翊武)의 주재 아래 청군 내부의 동지들이 모여 협의하던 중 폭발사고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혁명 동지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혁명 봉기 가담자 명부까지 압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지들은 이제는 서둘러 봉기할 수밖에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혁명의 성공 여부는 하늘에 맡기고 전원 궐기하자.” 함성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쳤다. 임시 총사령관 장익무는 동지들을 돌아보며 비장한 각오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 오늘밤 12시를 기하여 일제히 봉기하여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을 부흥시킨다. 이 명령을 즉시 각 진영의 대표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전령이 출발했다. 그러나 한구에서 있었던 폭발 사고로 봉기계획을 탐지한 호광총독 서징은 무한 삼진의 성문을 폐쇄하고 성내의 교통을 차단한 채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로 인하여 임시 총사령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중화문 밖에서의 신호 포성 또한 울리지 않았다. 그 위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서징은 더욱 경계를 강화하고 본보기로 혁명회 인사들을 참수하는 등 무한 삼진의 거리는 바야흐로 긴장이 감돌았다. 마침내 10월 10일 아침이 밝았다. 그러나 무창의 거리는 온통 혁명파를 수색하는 군경들로 꽉 차 있었다. 동지 간의 연락도 두절되어 경계병이 교대하는 틈을 타거나 상점으로 물건을 사는 것처럼 가장하여 동지들의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혁명의 기운은 식을 줄 몰랐다. 무창 시내의 공병 제8영에 임시 총사령부로부터 봉기 명령이 전달된 것은 10일 아침이었다. 전날 오후 5시경에 장익무가 보낸 전이 그때서야 도착한 것이었다. 공병 제8영의 책임자 웅병곤(熊秉坤)은 동지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회의를 열었다. 개중에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자도 있었으나 “죽음 속에서 삶을 찾자.”는 웅병곤의 용감한 부르짖음에 모두들 용기를 되찾았다. 작전 순서는 지난 9월 24일의 회의에서 정해졌으나 각 부대와의 연락이 문제였다. 특히 혁명군의 주력 부대로 인정되었던 무창 밖의 포병 부대에 대한 정보가 없어 애를 태웠으나 연락이 된 부대만이라도 봉기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봉기 시간은 오후 3시로 정했지만 연락에 시간이 걸려 오후 7시 이후로 연기되었다. 연락이 된 부대는 2개 소대와 1개 중대뿐이었다. 약속 시간인 7시가 되자 마침내 혁명을 알리는 웅병곤의 신호 포탄이 무창의 거리를 뒤흔들었다. 혁명군의 기민한 움직임 앞에 청군은 하나둘 쓰러졌다. 웅병곤은 앞서의 작전 지시대로 무기 탈취를 위해 40명의 동지들과 함께 초망대의 무기고로 돌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무창성 밖 당각(塘角)에 있던 21혼성여단의 제11영도 봉기에 호응하여 이붕승(李鵬昇)의 지휘 아래 사료로 쓰는 건초 더미에 불을 질러 궐기의 봉화를 올렸다. 성 안에서는 제29표의 채제민(蔡濟民)이 봉기에 가담하여 웅병곤과 거의 동시에 초망대의 무기고로 향하고 있었다. 초망대를 지키던 청군 가운데도 혁명에 호응하는 자가 속속 증가하여 혁명군은 손쉽게 무기고를 탈취하였다. 초망대의 무기고에는 독일제 7.9밀리미터 쌍구모젤 1만여 정, 일본제 6.5밀리미터 보병소총 1만 5천 정, 한양병공창 제조 6.5밀리미터 단구총 수만 정, 탄환, 포탄 등이 다량 격납되어 있었다. 무기·탄약이 없어 맨주먹으로 달려오다시피 한 혁명군들은 졸지에 완전 무장을 갖춘 부대로 탈바꿈했다. 무장하는 민중 최신 장비로 무장한 혁명군은 사산의 초망대에 포병진지를 구축하고 성 밖 남호에 있는 포병 제8표에 연락하여 급히 성내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 혁명군 중에는 실력 있는 지휘관이 없어 작전에 어려움이 많았다. 웅병곤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도 많은 병력을 지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초망대의 좌대대관(左隊隊官)이었던 오조린(吳兆麟)을 지휘관으로 추대하였다. 오조린은 다음과 같은 작전 명령을 내렸다. 1. 초망대 가까운 곳에 제30표 헌병영이 있다. 이곳은 만주족이 장악하고 있으니 선제공격을 가해 이곳부터 격멸한다. 오조린의 작전 명령을 받은 혁명군은 헌병영을 공격한 지 30분도 채 못 되어 손쉽게 그곳을 점령하였다. 기회를 보고 있던 청군의 병사들이 속속 초망대로 모여들어 혁명군에 가담함으로써 혁명군은 삽시간에 약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청군의 수뇌들은 참모장 오조기(吳兆麒) 등을 초망대로 파견하여 시찰토록 하였다. 그런데 오조기는 혁명군의 임시 총지휘를 맡고 있는 오조린의 형이었다. 오조기는 상황을 판단한 끝에 동생 오조린을 돕기 위해 청군의 수뇌들에게는 정확한 상황을 숨기고 오히려 청군의 방위 태세를 알려줌으로써 혁명군에게 도움을 주었다. 혁명군은 오조기의 정보를 토대로 헌병영을 점령한 데 이어 제30표를 돌파하고 오후 10시 30분경에는 호광총독 서징의 관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혁명군은 보안문을 탈취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였다. 호광총독은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은밀히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영국 영사 하버트 코페와 혁명 봉기가 있을 경우 영국 군함이 원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약속을 믿고 몇몇 측근들만을 데리고 관저 뒷문을 빠져나와 성 밖으로 탈출, 장강에 정박 중이던 초예(楚豫)호에 올랐다. 서징을 태운 초예호는 한구로 도주하여 장강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뒤에 선체를 숨겼다. 서징은 영국 영사와의 약속을 믿고 영국 군함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했으나 영국 영사는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부하였다. 혁명군에게 완강하게 저항하던 청군도 총독 서징이 탈출했다는 사실을 알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혁명군 결사대가 총독관저 건물에 불을 지르자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은 무창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이를 본 청군들은 앞을 다투어 도망치기에 바빴다. 무창의 밤하늘에 솟구치는 불꽃을 장강 대안의 초예호 함상에서 바라본 호광총독 서징은 증원군을 급파해 달라는 전문을 청국 조정에 타전하였다. 10월 11일 새벽까지는 무창 시내의 주요 지대가 거의 혁명군에 의해 장악되었고 최후까지 저항했던 사산 북쪽의 번서(藩署)도 포병의 지원을 얻은 혁명군에 의해 박살나고 말았다. 무창 시내의 청국 관리들은 모두 도망쳐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모든 관공서가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룻밤 사이에 무창 봉기가 성공한 것이다. 신해 혁명 후 귀국하는 쑨원 무창의 봉기 전투에서 전사한 혁명군은 결사대 소속 10여 명이었고, 부상자는 20여 명에 불과하였다. 무창의 혁명은 일단 성공했으나 혁명군을 통솔할 만한 지도자가 없는 것이 혁명군의 큰 약점이었다. 채제민 등 혁명군의 간부들은 우선 군정부를 구성하려 하였으나 도독이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들은 토의 끝에 제21혼성여단장인 여원홍(黎元洪)을 찾아내어 위협을 가해서라도 도독에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여원홍은 이때 48세였다. 천진 수사학당에서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로서 청일 전쟁 때는 기함 정원호의 포술장(砲術長)으로 있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고 이해도 없는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반혁명적 사상을 가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청군의 반격에 시급히 대비하지 않으면 어렵게 성공한 무창 혁명이 어떻게 될지 알 길이 없었으므로 비록 혁명에 찬동하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국민에게 신망이 두터운 그를 도독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혁명군의 실정이었다.
도망치는 청국 고관들 이때 여원홍은 혁명군의 추격이 두려워 초망대 가까이 있는 한 참모의 집에 숨어 있다가 혁명군에게 곧 발각되었다. 임시 총지휘관 오조린이 여원홍을 영접하여 자의국으로 안내하자 혁명군은 정렬하여 나팔을 불어대고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여원홍은 좀처럼 굳은 표정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이때 혁명군은 미리 ‘중화민국 호북군 도독’의 이름으로 된 포고문을 작성해 놓았다. 혁명 간부 이익동(李翊東)이 그 사본을 가지고 여원홍에게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여원홍은 벌벌 떨면서 서명을 주저하였다. 여원홍의 태도에 울화가 치민 혁명군의 한 사람이 권총을 들이댔으나 여원홍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권총을 들이댔던 혁명군이 대신 서명했다.
호북군 정부 여원홍은 마음속으로 자신의 거취 문제를 신중하게 저울질했음이 분명했다. 얼마 후 그는 혁명군이 다량의 무기와 은화를 소유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즉시 만주 풍속의 변발을 자르고 한인으로 돌아가 도독으로서의 업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여원홍은 나중에 원세개와 협력하여 혁명 세력에 대항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혀둔다. 여원홍을 도독으로 추대한 혁명군은 마침내 역사적인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 자의국을 군정부로 한다. 이렇게 해서 중화민국(中華民國)은 그 첫걸음을 내딛었다. 무한 삼진의 함락무창 혁명의 성공 소식이 한구·한양에 전해진 것은 11일 오후 4시경이었다. 청조는 무창 혁명을 은폐하기 위하여 무창과의 교통을 차단하는 등 물샐 틈 없는 보안조치를 취했으나 혁명 동지의 한 사람이 무창성 밖에 내붙인 포고문을 보고 즉시 장강을 건너 한구·한양의 혁명군에게 그 소식을 알렸던 것이다. 한구·한양의 혁명군들은 한구에 모여 작전회의를 열고 오후 8시 30분을 기해 일제히 봉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약속 시간인 오후 8시 30분이 되자 혁명군은 한양 병기창을 기습 점령한 데 이어 가까운 산마루에 대포를 배치하여 위협 포격을 가함으로써 손쉽게 혁명은 성공하였다. 혁명군은 한양 병기창에서 다량의 무기를 노획함으로써 그 후의 혁명 봉기에 크게 위력을 발휘하였다.
한양 무기공장 한구는 12일 새벽에 이르러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곳에서는 폭도들의 약탈과 방화 등의 사건이 있었으나 무창으로부터 원군이 투입되어 질서 회복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강의 요충지 무한 삼진은 마침내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무창 봉기 2일 후인 1911년 10월 12일 오전 6시경 무창의 전화선이 복구되자 군정부는 즉시 도독 여원홍의 이름으로 전국에 무창 혁명의 성공을 선포하고 각지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때를 같이 하여 청조에 대하여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청군에 소속되어 있는 한족 출신 장병들에게 투항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발표하였다. 무한 삼진의 혁명 성공은 청조의 무능함과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내어 혁명의 기운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그 결과 혁명의 불길은 요원처럼 타올라 무창 봉기 후 불과 한달 사이에 15성이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 각성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흡수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신해 혁명의 어려운 숙제로 넘겨졌다. 무창 혁명의 소식이 북경 조정에 전해진 것은 10월 11일 오후였다. 당황한 청나라 조정은 그 이튿날인 12일 무창에서 도망친 총독 서징을 파면하고 육군부 대신 음창(蔭昌)과 해군부 부대신 살진빙(薩鎭氷)으로 하여금 육해군을 거느리고 혁명군을 제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패전의 책임을 전적으로 서징 한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군의 위신을 회복하고 아울러 철도국유화 정책을 제청해 추진하던 우전부(郵傳部) 대신 성선회(盛宣懷)를 민란 발생의 책임자로 몰아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철도국유화는 당초 장지동이 추진한 정책으로 민간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었다. 철도를 국가 소유로 하여 그 이익을 국고로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철도 건설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는 조정으로서는 외국 차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국내 자본가들의 강한 반발과 이에 동조하는 민간들이 파업과 소요 사태를 일으킴으로써 큰 실정(失政)으로 지탄을 받았다. 무창 봉기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련의 소란 사태의 하나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1909년 장지동이 죽자 성선회가 그 직무를 이어 추진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 실정의 책임을 성선회에게 지워 그를 파면하였다. 뒤이어 백성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고관들을 숙청하여 민심 수습을 꾀하는 한편 일찍이 발의 병을 이유로 파면했던 원세개를 다시 기용하려 하였다. 청나라 조정이 원세개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혁명군 토벌 명령을 받은 음창과 살진빙이 청군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원세개의 신식 육군을 모체로 이홍장의 회군까지 흡수한 북양군은 원세개가 편성한 군대로 개인의 군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다. 청나라 조정은 북양군을 제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원세개의 명예를 회복시켜 그가 전군을 통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청조는 원세개를 호광총독에 임명하여 혁명군을 토벌하도록 명하였으나 그런 정도에서 쉽게 응할 원세개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섭정왕인 순친왕이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수염을 깎고 노동자로 변장하여 3등 열차로 어렵게 북경을 탈출하여 하남 땅 고향에서 권토중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호광총독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청조가 자기를 파면할 때의 이유였던 ‘발의 병’이 아직 낫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조의 다급한 사정을 이용하여 최대한 수확을 거두자는 속셈이었다. 다급해진 청나라 조정은 당초 예정했던 호광총독에서 흠차대신으로 격상시키고 육군부 대신 음창을 소환하는 한편 원세개의 부하였던 풍국장과 단기서를 각각 제1, 2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청국의 육해군 및 장강수사라는 직책까지 겸하여 모든 군권을 원세개에게 위임하였다. 선통제는 10월 30일 ‘스스로를 죄하는 조서’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선통제가 나이가 어리고 정사에 어두웠던 탓으로 정치를 그르쳐 고관들이 사리사욕에 빠져 백성들에게 피해가 막심했다는 자기비판으로서 국민의 노여움을 풀어보자는 것으로 청나라 조정으로서는 매우 과감한 행동이었다. 원세개는 10월 30일에야 겨우 하남성 신양에 도착하여 음창으로부터 모든 군권을 인수하고 혁명군에 대한 회유공작에 착수하였다. 2차에 걸쳐 혁명군과의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나 혁명군이 거부하자 풍국장으로 하여금 한구를 공격토록 하여 손쉽게 한구를 수복하였다. 11월 16일 원세개는 경친왕의 후임으로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직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조병균을 민정대신에, 당소의를 우정대신에 임명하고 입헌파의 중진 장건(張謇)을 농공상부 대신, 보황파(保皇派)인 양계초를 사법부 대신에 기용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하려 하였으나 장건과 양계초가 입각을 거절함으로써 연립내각의 구성은 실패하였다. 원세개는 화평을 내세우는 한편 혁명군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하였다. 그는 한구를 수복한 데 이어 한양에 대하여 총공세를 취했다. 혁명군도 즉각 항전에 나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원세개의 무력 앞에 격퇴당해 27일에는 한양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한구·한양을 모두 빼앗긴 혁명군은 황흥의 지휘 아래 무창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가운데에서도 혁명의 불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혁명군은 전국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여 하나의 구심점으로 집결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미 15성이 청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으나 통일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외국과의 교섭에 불편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통일정부 수립의 움직임이 구체화되어 마침내 11월 30일 제1차 각 성 대표회의가 한구의 영국 조계에서 열렸다. 회의 결과 대다수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청나라는 이름만 남아 있을 뿐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오늘 이후의 문제는 혁명군과 청조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군과 원세개 사이의 문제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더 이상 한족끼리의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원세개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원세개는 혁명군과 교전 상태에 있는 적인데도 혁명군의 대표회의에서 이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된 것은 원세개의 사주를 받은 동맹회의 중진 왕조명(汪兆銘)의 책략에 의한 것이었다. 그 해 12월 2일 남경이 혁명군의 수중으로 들어오자 무창의 대표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남경으로 옮긴 후 7일 이내에 각 성 대표회의를 열어 10성 이상이 참석하면 임시 대총통을 선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무창에서 대표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상해에 남은 진기미(陳其美)·정덕전(程德全) 등은 무창의 결의와는 달리 황흥을 대원수, 여원홍을 부원수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대원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대권을 가진다고 결정함으로써 무창과 상해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당시 외국의 일부 신문에서는 중화민국 초대 원수로 쑨원이 가장 유력하다는 내용의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혁명파 중에는 쑨원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혁명파 내부의 동정을 예의 주시하던 원세개는 실력을 기르는 한편 혁명군 회유공작을 폈다. 당시 장강 이남 지역은 거의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원세개가 청국 주재 영국 공사인 존 조르단을 통하여 혁명군과의 강화를 모색하자 조르단은 한구 주재 영국 영사 하버트 코페에게 혁명군과의 접촉을 의뢰했다. 12월 1일 청군은 무창에 대하여 맹렬한 포격을 가한 후 오후 6시쯤 코페의 지시를 받은 영국 민간인 밴이 군정부에 찾아와 정전을 제의하였다. 정전 기간은 당초 12월 2일부터 3일간으로 되어 있었으나 원세개의 요청으로 2번이나 연장되어 정전 기간은 무려 15일간에 이르렀다.
쑨원의 입상 정전에 이어 강화교섭이 시작되어 혁명군 측에서는 오정방(伍廷芳), 청조 측에서는 당소의가 각각 대표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이홍장의 인맥에 속하는 사람으로 특히 오정방은 외교면에서 이홍장의 후계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미공사까지 지낸 외교통이었는데 당시 상해에 거주하고 있어 혁명군의 설득으로 강화교섭의 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12월 18일의 1차교섭에서 혁명군 측의 대표 오정방은 4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만청 정부의 폐지 그러나 1차 교섭은 잠정적인 정전에만 합의하고 20일에 다시 2차 교섭에 들어갔다. 2차 교섭의 관건은 국체에 관한 문제였다. 오정방은 1차교섭에서 주장한 대로 “청조를 폐지하고 공화정부를 수립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당소의는 국민대회를 열어 정체 문제를 결정한다는 선까지 양보하였다. 당소의가 이같이 양보하게 된 것은 원세개의 조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세개는 대총통의 자리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혁명파의 무창 대표회의에서 자기를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결의를 현실화시키려 하였다. 그는 입헌군주파를 설득, 무마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혁명파와의 강화교섭만 성공한다면 대총통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고 계산하였다. 쑨원의 귀국이러한 상태에서 1911년 12월 25일 혁명파의 원로인 쑨원이 상해로 돌아왔다. 혁명파는 열광적으로 쑨원을 환영하였다. 무창 혁명이 성공했을 무렵 미국에 있던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그것은 청조에 대한 4개국 차관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공화정권에 대한 경제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4개국 차관의 중심국이었던 영국은 쑨원의 요청에 따라 진행 중인 차관을 중지하고 새로운 은행단을 신정권에 파견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쑨원의 귀국은 임시정부 수립의 교착상태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25일 쑨원이 상해에 도착하자 각 성 대표들은 임시 대총통 선거준비를 서둘러 12월 29일 정식으로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 참가한 성은 호북·강소·절강·호남·사천·운남·산서·섬서·안휘·강서·복건·광동·광서·봉천·직례·하남·산동의 17성으로 선거권은 각 성 1표씩이었다. 개표 결과 쑨원 16표, 황흥 1표로 쑨원이 압도적 다수의 득표로써 초대 임시 대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취임 선서에서 쑨원은 “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해 복무한다.”고 서약하였다. 새로운 공화국은 연호를 쓰지 않고 1912년을 민국 원년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유사 이래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 군주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의에 의한 정치와 민중을 위한 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공화정치가 실현되게 되었다.
쑨원과 동지들 육군총장 황흥, 차장 장작빈(蔣作賓)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육군, 외교, 교육의 3총장만이 동맹회 회원일 뿐 나머지는 모두 청조의 구관료와 입헌파가 차지한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실무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 1월 28일 임시정부 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에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 제1조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임시약법은 주권재민, 내각제도, 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 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원세개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남경에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는 하였으나 북경에는 여전히 청조가 존재했고 실권자 원세개가 청국군의 전권을 배경으로 버티는 가운데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무렵 세계 열강은 원세개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열강들은 원세개에 의해 남북의 통일이 실현된다면 중화민국을 승인하지만 남경 임시정부는 승인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경제적으로도 임시정부가 지배한 지역의 세관은 열강의 억제 정책으로 인하여 임시정부의 재정이 매우 곤란한 상태였다. 이 같은 사태는 모두 원세개의 책동이나 조종에 의한 결과였다. 쑨원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기 전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신념 아래 대총통의 지위를 원세개에게 양도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격동하는 정국을 무대로 자신의 야심을 키우는 데 급급했다. 그는 혁명정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1월 16일 청조에 대해서도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내용의 상주문을 국무대신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명릉에 참배한 쑨원 “…만약 내전이 장기화되면 외국의 간섭을 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혁명군의 조정에 대한 감정 또한 악화되어 어떠한 유혈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 하루속히 민의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혁명군이 목적하는 정치체제는 군주제가 아니고 공화제입니다. 하루속히 대세를 살피시어 민심에 따르시기 바라옵니다.” 청국 황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격이 되었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원세개로부터 결정적인 배반을 당한 셈이다. 청조의 최후원세개의 내각으로부터 황제의 퇴위를 강요당한 청국 조정은 1월 17일부터 매일 어전회의를 열었다. 원세개에게 설득당한 경친왕 등은 공화제도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였으나 부위(溥偉)·재택(載澤) 등 만주 귀족들은 군주제를 고수하여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청조의 귀족인 양필(良弼)은 종사당(宗社黨)을 결성하여 청조의 붕괴를 끝까지 저지하려 하였다. 종사당은 원세개의 내각을 무너뜨리고 종실 내각을 구성하여 철량(鐵良)을 군정대신으로 삼아 최후까지 청조를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1월 26일 종사당의 영수 양필이 암살되었다. 암살자는 경진동맹회(암살단) 소속의 팽가진(彭家珍)이었다. 양필은 폭탄을 맞아 왼발에 부상을 입고 다리를 절단했지만 끝내 숨지고 팽가진은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양필은 죽으면서 “이제 청조는 마지막이다!”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양필이 죽자 귀족들은 재산을 외국에 도피시키고 천진·대련 등지로 빠져나가 외국인의 보호하에 들어감으로써 청나라 황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무렵 임시정부는 강화 책임자인 오정방·당소의를 통하여 원세개와 황제 퇴위에 관한 구체적 문제를 논의하였다. 대총통 쑨원은 “청제가 퇴위하고 원세개가 공화정에 찬동한다면 원세개에게 임시 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할 것임을 선언”하고 5개 조항의 최종안을 원세개에게 제시하였다. 1. 황제는 퇴위하고 원세개는 청국 황제가 퇴위했음을 북경 주재외국공사에게 통지한다. 원세개는 이 5개 조항을 받아들였으나 청국 황제의 퇴위를 직접 요구하지 않고 호광총독 단기서로 하여금 장군 42명의 연명으로 된 상주문을 올려 ‘공화제’를 요청하게 하였다.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청조는 이제 퇴위하는 길밖에 없었다.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는 마침내 퇴위를 결심하고 2월 3일 원세개에게 전권을 양도하여 임시정부와 퇴위 후의 청국 황실에 대한 처우 문제를 논의케 하였다. 2월 11일 원세개와 임시정부 사이에 청국 황실에 대한 처우 문제가 결정되었다. 1. 청국 황제의 존호를 폐지하지 않고 외국 군주에 대한 예로써 대우한다. 청조는 이튿날인 12일 이를 수락하였고 원세개는 퇴위 조서를 정서하여 융유 황태후에게 바쳤다. 황태후는 그 조서를 읽기도 전에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고 옆에 있던 7세의 어린 황제 선통제는 황태후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대신들은 황태후를 위로했고 시종들도 슬픔에 잠겨 넋을 잃었다. 서세창(徐世昌)이 조서에 옥새를 찍었고 퇴위 조서는 곧 선포되었다. 이로써 청조는 세조 순치제가 북경을 점령한 1644년 이래 267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통제의 퇴위 조서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퇴위 조서의 기초자는 임시정부측의 장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서의 원고가 원세개에게 전해지자 원세개는 원문에 “원세개가 전권으로서 공화정부를 조직하여”라는 구절을 삽입하였다. 때문에 단순한 ‘퇴위선언’이었던 조서가 원세개에게 ‘양위’한다는 뜻을 포함하는 내용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이런 일에서도 후일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던 원세개의 야심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원세개의 정치 프로그램은 우선 공화국의 대총통이 된 다음 공화제가 중국에는 타당하지 않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글 김희영집필자 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