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은 임기 초반에 예외 없이 개혁이라는 명문으로 사회 문제에 메스를 들이댔다.
때문에 정권 초반의 분위기는 항상 얼어붙게 되었고, 국민의 이해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개혁은
보수와 진보로 대별되는 이원론적 갈등 구조의 표출과, 정치권의 공전을 통한 비생산적 국력의 낭비
및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간의 분리와 장벽을 심화시켜 국민적 통합을 해치는 불안전한 사회구조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정치권의 개혁 움직임은 정권의 치세와 당리당략에 의해 정권말기가 되면 흐지부지 둔화되었고
오히려 개혁을 부르짖던 위정자들은 각종 부패에 연루되어 그 다음 정권에 의해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둔감하게 되고,
필요성에 대해서는 무의식중에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소위 386으로 대변되는 정치권의 젊은 진보 세력들이 부르짖는 정치개혁은 경제 여건의 악화와
내수 경기의 장기적 침체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를 상실한 지 오래되었고, 보수 원로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식견의 미흡과 경험의 미숙에서 오는 시행착오로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보수층의 자세는 진보층의 입장에서 본다면
개혁을 저지하는 반동적 수구세력으로 비쳐지게 되는 것이다.
개혁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삶의 뿌리를 세상에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개혁을 바라보는 시각은 직분과 사회적 신분, 연령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들 중에서도 내용면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각과 개혁의 내용에 대한 차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것을 세상적인 잣대로
보수와 진보의 개념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고, 더 나아가 일부 부패한 목회자들이 우익과 반공주의
자로 자처하며 세상적 이데올로기를 교회로 끌어들여 교회개혁의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 의미와
성경의 말씀이 과연 세상의 방식대로 보수와 진보적 시각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는가?
대답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수의 교인들은 어렴풋이나마 교회개혁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일부 진보적 목사들과 의식 있는 젊은 평신도들이 기성교단에 불만을 갖고 시도하고 있는
무모한 치기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10월 초에 방영한 KBS의 '한국교회 위기인가?'의 방영을
중지시키고자 한기총이 보낸 공문에서 나타나듯 "교회에서 제명되거나 이탈한 사람들의 편협된 주장"
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이는 정권에 의한 정치개혁의 실망감에 대한 잠재적 불만 의식과, 목사 중심 교회 생활에 익숙한
한국교회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주의 종을 거슬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슬리는 것"으로
세뇌되어 온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러니 세상에서 생업을 유지하고 교회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일반 평신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수가 교회개혁의 당위성과 명분을 혼동하고
착각할 수밖에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권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늘 단골 메뉴로 시작된 정치와 경제 개혁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것은 역대 정권들이 개혁의 칼 날 위에서 항상 스스로 부패해 왔고, 늘 다음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개혁의 칼날을 통해 사회의 부정부패가 명확히
가려진 적도 없었고 국민들 모두가 개혁의 과정을 통해 삶의 질이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는
평가를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교회개혁은 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의 교회들이 하고 있느냐를 묻기 위해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워주셨고, 이 교회를 통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에 주인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모인 교회는 세상의 친교 모임과 다를 것이 없다.
교회에 주인이 없으니 우리는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누구의 증인이 될 것인가?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도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교회는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생명의 공동체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와 가치와 정체성이 한국개신교에서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개혁의 당위성이요 명분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80만 명의 교인을 거느린 대형교회의 목사는 자신의 아들이 모 스포츠신문의 자금 지원문제에
대한 의혹으로 당회원들이 투명성을 요구하자 많은 수의 장로들을 제명 처분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본주의·신주주의를 주장하면서 교회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망우리에 있는 대형교회인 K교회 K목사는 감독회장 선거비용 등으로 공금(헌금)횡령 및
분륜 합의에 공금을 사용한 혐의로 의혹을 받다가, 세상 검찰에 기소되어 법원으로부터
공금(헌금)횡령 부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가관인 것은 법정 진술을 통해 자신과 교회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음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비성경적인 행태를 나타낸 것이다.
송파구에 있는 K교회 장로들은 당회를 열고 은퇴하는 K목사에게 퇴직금 26억 원, 전별금 30억을
지급하겠다고 결정한 뒤 이를 K목사에게 권유했다. 이 밖에 분륜과 목회자 세습,
그리고 예배당을 팔아치우고 줄행랑을 치는 목사들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이 인터넷으로 전파된다.
교회의 머리가 주님이시고, 우리가 몸된 교회의 지체들이라면 목사나 장로나 직분의 차이일 뿐인데
어떻게 평신도들이 정성껏 하나님 앞에 바친 헌금을 목회자가 함부로 전용하고 횡령할 수 있는가.
당회원이라는 사람들이 구제와 선교에 소중히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임목사 은퇴 전별금과
퇴직금에 수십억 원을 집행하겠다는 엄청난 발상을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벽돌로 된 교회 건물에 8백억 원을 쏟아 부을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고도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자들의 구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지금의 교회들은 목사와 당회가 중심이 되어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목사와 당회가 결정하면 그 결정은 신성불가침이다. 당회장과 제직회장, 그리고 공동의회 의장을
담임목사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데 어느 교인인들 감히 찍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인들 교회에서 숨소리나 제대로 내실 수 있겠는가?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요, 당회가 전권을 휘두르는데.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교인들이 몇이나 될까.
망우리 K교회 K목사의 말처럼 교회와 목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심각한 인본주의적 세뇌에
직면한 대다수 교인들은 오늘도 되뇔 수밖에 없다. "주의 종을 거슬리면 죄 받는다"
KBS의 보도에 항의하려 집회에 동원된 대형교회 교인들의 절규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이 억울해하는 것의 진실과 실체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이 예수를 믿는 제자들의 모습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내 머리에는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공산당의 구호만이
계속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왜 이처럼 성경을 덮어버린 무지한 신앙이 교회에서 버젓이 자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소경 목회자들의 율법 선생 노릇에 맛들인 까닭일 것이다.
아직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구분 못하고, 자기 과시를 위한 건물, 헌금, 지배의 극대화를
위해 목회자의 편리대로 구약의 율법을 교인들에게 문자 적용시키는 무속적 속성 때문은 아닐까?
시효 지난 약을 처방해주고 환자는 그것을 전혀 의심 없이 먹으며 죽어간다면,
성경대로 소경이 소경을 만난 연고 외에 무슨 답변이 있겠는가? 목회자가 율법을 교인들에게
주입시키면 교인들은 최선을 다해 목회자를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다.
순진한 교인들은 목회자만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목회자에게 맡긴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율법에 중독돼 율법의 노예가 되었으며 억지와 형식, 기복과 저주 속에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참 자유를 강탈당하고 자유의지란 없는
종의 신앙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개혁의 당위성이자 명분이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울의 개종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중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되고, 다메섹에 가서야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떼어낸 후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그는 세례를 받은 후 평생을 주님의 사도로서 헌신하게 된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떼어낸 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새롭게 발견한 사건은
언제 읽어봐도 참으로 신비롭지 않을 수 없다. 그 비늘 같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카페 게시글
♣ 。교회개혁방
개혁설교
한국교회 개혁이 왜 필요한가? (뉴스엔조이에서..)
대학생
추천 0
조회 133
06.06.17 09:16
댓글 3
다음검색
첫댓글 당이 결정해도 한번 해보세요 아주 적은것부터 그러면 따 당하지 ㅎㅎ 그래두 정당 한것이면 아닌것은 아니라고 해야합니다 율법의 노예로 만드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대학생님 좋은글 고맙습니다
소경목회자!!!!! 결국 삯군을 말함이지만 웬지 부드럽고 신선하네요~~ 소경목회자에 소경성도.... 사울이 바울됨과 같이 그들에게서도 비늘같은것이 떼어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눈을 뜰텐데.....
주님 이땅에 주님의 양을 주님께로만 이끄는 좋은 목자들을 많이 세워주소서. 그리로 주님으로 인도하는 좋은 목자들을 잘 따르는 좋은 양이 되소서. 우리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