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 버림과 따름을 실천해야 합니다.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강론>
(2025. 3. 4. 화)(마르 10,28-31)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구원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린다는 뜻입니다.
재물이든지 권력이든지 명예든지 간에 믿음 없는 사람들이
가지려고 애를 쓰는 그런 것들은 구원의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고, 구원받는 데에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한 행복과 기쁨과 평화와 안식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다른 것을 더 얻을
필요도 없고, 다른 것을 얻으려고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2)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것을 얻는다.”가 아닙니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에게 가져와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0,21).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는 길이 아니라, 사도들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빈손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루카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기적을 일으키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루카 5,6).
그런데 그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예수님께서
잡게 해 주신 그 많은 물고기들도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면 바칠수록 복을 더 많이 받는다고
강조하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백퍼센트 사이비 종교입니다.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한 말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 15,22).”>
3)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버리는 이유와 목적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신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또 다른 종교에서는
‘무소유’ 자체에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소유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부자에게 하신,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에도 그런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그냥’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뜻인데,
‘버림’ 자체가 아니라, ‘사랑 실천’을 위해서 ‘버림’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사랑에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두 포함됩니다.
또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시작 단계일 뿐이고,
그 ‘버림’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기만 하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그 경우에도 버리는 일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4) “박해도 받겠지만”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이고,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입니다.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내세에서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은,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내세에서의 처지가,
부자와 라자로처럼(루카 16,25)
정반대로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데’는 ‘그러므로’로 바꿔야 합니다.>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정반대로 역전되는 일이 무조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버림’과 ‘따름’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시작 단계일 뿐이고,
그 ‘버림’은 ‘따름’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