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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 10:1-15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0:1-15 / [열두 제자;막3:13-19,눅6:12-16]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자와 허약한 사람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2-4) 열두 제자의 이름은 이렇다.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시몬과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다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 예수를 배반하여 팔아 넘긴 가룟 유다 등이다. 5) [열두 제자의 파견;막6:7-13,눅9:1-6]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지 말고 6) 오직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가라. 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그들에게 선포하라. 8) 병자를 고쳐 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귀신들을 쫓아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9) 돈은 한푼도 가져가지 말라. 10) 식량 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발이나 지팡이도 갖고 가지 말라. 일꾼이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우선 그곳에서 머물기에 합당한 사람을 찾아내어 다음 마을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있으라. 12) 그 집에 머무르게 될 때에는 복을 빌어 주라. 13) 그 집이 복을 받을 만하면 너희가 비는 복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복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14) 어느 마을이나 집이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 15)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 때에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악한 성이 오히려 그 마을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추수와 추수꾼을 비유로 천국 복음 전파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사도로 불러 따로 세우십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 전파 사역이 열두 제자를 부르시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1) 이 절의 핵심은 부르심과 권능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천국 복음의 전파라는 특별한 목적이 있는 소집입니다. 이 소집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 사역을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열두 제자에게 권능을 주시는 것으로 실행되고 있습니다. 권능으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능력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힘을 주십니다. 사명과 권능은 같은 것입니다. 권능이 없으면 사명도 없습니다. 제자의 능력은 이 원리를 얼마나 확신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2-4) 권능과 사명을 받은 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마태는 이 제자들을 사도라는 특별한 호칭으로 표현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서, 보낸 사람의 권위를 대리하고 공유하는 존재입니다. 사도는 열두 명입니다. 사도는 새롭게 태어날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과 교회의 정체성을 참 이스라엘로 확장하여 규정합니다. 열두 사도는 하나님이 여시는 새로운 시대와 그 시대의 새로운 활동과 흐름을 대표하는 상징입니다. 이 새로운 운동에는 더 많은 사람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5-15) 부르심은 파송 명령으로 이어집니다(5-7). 열두 제자가 복음 전파를 위해 찾아가야 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입니다. 교회가 참 이스라엘이 돼야 한다는 사실의 강조입니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제자들이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드러나는 4가지 권능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신호입니다(8). 복음을 전파할 때는 최소한의 장비만 허용되는데, 이는 현장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을 때마다 채우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해보라는 요청입니다(9-10). 제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머물 곳을 찾아야합니다(11-13). 그들의 방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평안의 축복을 받는 일이 되거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자신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는 권능을 주신 제자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인간이 살아가면서 체험하는 쓰라린 아픔 중의 하나는 잃어버리는 고통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잃는 아픔도 비례합니다. 내 것을 많이 가질수록 잃어버리는 고통은 지속되며 또 잃어버릴까 불안에 떨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가지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 때, 잃는 고통에서 해방을 얻고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의 자그마한 소유일지라도 잃어버릴 때 오랫동안 괴로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구원의 심정을 잃는 것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양이 백 마리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찾은즉, 나는 잃은 것을 찾았노라 하면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 설 교 >
너희는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0:1-6 / 박용래 목사(대전교회)
가축을 길러서 먹고사는 나라에 가보면 목자가 수백 마리의 양떼를 몰고 산을 넘어 깊은 계곡까지도 돌아다니면서 양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지에서 풀을 먹고 자란 양보다 깊은 계곡에서 자란 양의 젖이 영양이 좋고 가죽도 품질이 좋아 가격이 높기 때문에 깊은 계곡과 산맥을 넘어 양떼를 몰고 다니면서 양을 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곡과 골짜기 많아서 잃어버린 양에게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목자를 떠나있는 양은 가끔은 근시이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해서 가끔은 절벽에 떨어져 죽기도 합니다.
때로는 맹수의 습격을 당해서 피투성이 된 채로 길가에 죽어버린 시체로 남아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가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은 양을 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목자를 떠난 양, 길을 잃어버린 양은 얼마나 위험하고 죽음의 길에 빠져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목자로, 우리 인간은 양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양같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과 보호에서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를 떠난 양은 계곡에서 떨어져 죽든지 골짜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죽고 맙니다. 양들은 근시이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해서 가끔 절벽에 떨어집니다.
또한 목자의 보호에서 떠나면 맹수들의 습격을 받기도 합니다. 양들이 잘못 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목자를 떠난 양, 양의 우리를 이탈한 잃어버린 양은 대단히 위험한 길에 빠져 사는 것입니다.
► 목자를 떠난 양은 그 자체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 우리에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를 교훈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전도는 바로 이 같은 목자의 사역입니다. 오늘날 이 목자의 사역은 우리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는 사역은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 오늘날도 하나님의 양 우리를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길 잃어버린 양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목자 없는 양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전도의 대상은 잃어버린 양인 것입니다.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하는 사명은 예수님이 세워서 보내신 12사도 뿐 아니라 오늘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해야 될 주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잃은 양을 보고도 찾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양의 대한 책임을 우리 성도들에게 주님은 물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여야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고저 합니다.
1. 잃어버린 양을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6절하)고 제자들에게 전도대상을 밝혔습니다. 그 "잃어버린 양"은 누구를 뜻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라고 길 잃은 양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에 있어야 목자의 사랑의 대상이 될 양이 우리를 떠나서 목자의 간섭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지형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라는 말씀에서 보듯 계곡과 골짜기가 많습니다. 여기에 떨어지든지 골짜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죽고 맙니다.
양들은 근시이기 때문에 멀리 보지 못해서 가끔 절벽에 떨어집니다. 이를 피하려고 무리가 되어 그 더운 날씨에도 뭉쳐 다닙니다. 또한 목자의 보호에서 떠나면 맹수들의 습격을 받곤 합니다.
양들이 잘못 가면 그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인간은 양같이 목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과 보호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그 자체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양 우리에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를 교훈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전도는 바로 이 같은 목자의 사역입니다.
► 오늘날 이 목자의 사역은 우리에게 전승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곧 하나님의 양 우리를 떠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바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가 되는 교회를 떠난 인간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까운 전도와 먼 선교의 대상은 잃어버린 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무리를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불쌍히 여기사..."(막 6: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이 세상에 선한 목자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고 했습니다.
153 총력전도는 한구역이 5주 동안 3명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고자 총력으로 전도하는 기간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도 열외가 없습니다. 모두가 힘써야 합니다. 시간도 물질도 투자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잃은 양을 찾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경건한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 매년 300명 이상을 전도했습니다. 하루에 한 명씩 거의 전도한 셈입니다. 그러다가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석 달 동안 유세기간에 무려 30만 명을 만났고, 30만 명과 악수를 하면서 ‘제가 카터입니다’라고 나를 알리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교회 가서 예배를 드릴 때 양심에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일 년에 300명 정도밖에는 전도를 안 했는데 내 이름을 알리는 데는 내가 석 달 동안에 30만 명과 악수를 하고 다녔으니 나는 하나님보다 대통령을 더 좋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보다 대통령이 더 좋은가? 스스로 묻게 되었고, 앞으로는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복음 전하는데 더 우선하여야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동안에 단 한 번도 주일을 범한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나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선데이스쿨에 나가서 어린 영혼들을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는 시간이 더 행복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이 되면서 수 십 가지의 공직을 다 사표 냈지만 주일날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은 사표를 내지 아니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동안 아무리 바빠도 한 번도 주일을 범하지 아니했고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아니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임기동안 보다 임기를 마친 후 더욱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주님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이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죽어 가는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며, 썩어질 세상의 것만을 위하여 살아가다가 죄 값으로 멸망을 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입니다.
▶ 어떤 사람이 양이 100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한 마리를 찾기 위하여 온 들판을 찾아다닙니다. 잃어버린 양을 목자가 찾아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게 될 양입니다.
벼랑에 떨어져 죽거나 사나운 맹수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길 잃은 양을 생각하면 목자는 밤을 새워서라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목자에게 만일 숫자가 한 생명이 갖는 절대적 가치보다 더 중요했다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가는데 어디 가서 그 양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하루 종일 양 치느라고 피곤한데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지 내일 또 양들을 돌볼 수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아직도 99마리가 남아있지 않은가?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내일 재수가 좋아서 발견하면 다행이고 아주 잃어버려도 할 수 없지 뭐.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남아있는 양들이나 잘 챙겨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것입니다.
▶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목자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99 마리를 뒤에다 두고 그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다른 양들보다 더 잘나고 더 귀하고 더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길 잃은 채 내버려두면 그 양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자는 길 잃은 양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그 한 생명을 찾고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예수님이 바로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는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 한 영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려 평생을 사셨습니다.
▶ 미국에 잔 딜린저(John Dillinger)라는 젊은이가 어느 교회의 부흥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부흥회가 끝난 뒤 그는 제단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당시 딜린저는 문제아요 깡패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제단에 무릎을 꿇은 그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서 기도해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딜린저는 나쁜 아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교회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하나도 그의 곁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실망한 딜린저는 교회 밖으로 뛰쳐나와 공중에 대고 소리를 막 질렀습니다. "I'm never going to a church again!"--"나는 앞으로 절대로 교회에 가지 않을거야!" 과연 그 말대로 그는 악명 높은 깡패가 되어서 시카고의 링컨 에베뉴(Lincoln Avenue)에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때까지 교회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 딜린저가 이와 같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마치게 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가 은혜 받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기 원했던 바로 그 교회 교인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세상적인 잣대로 인간적인 기준으로 한 청년의 순수한 마음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그의 애원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 오늘 우리가 사랑에 목말라하고, 진리를 그리워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절규를 외면한다면 우리가 꼭 그와 같은 교인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이제 또 한해가 저물어 가는 후반기 153 총력전도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여러분 모두가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을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찾으시는가를 힘써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의 능력으로 살리는 153전도 기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
▶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성경은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 5-6절을 보세요.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았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동네에 기쁨의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다.
"양이 길을 잃어버리면 놀라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밤새도록 어두운 밤길을 정처 없이 헤매며 울부짖어 지칠 대로 지치게 될 것입니다. 아마 목자가 양을 발견했을 때 그 양은 틀림없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탈진상태에 빠졌을 것입니다. 이 때 목자는 스스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양을 어깨에 메고 앞다리를 손으로 잡고 돌아갑니다. 사실 양 한 마리의 무게가 보통 30kg 이상이나 되었기 때문에 양을 찾아다니느라고 피곤에 지친 목자가 이 양을 어깨에 둘러메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던 양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자신의 피곤과 고통은 눈 녹듯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동네로 돌아가 온 이웃 사람들과 더불어 기쁨의 잔치를 베풉니다. 왜요? 죽어가던 양 한 마리를 살려냈다는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에이 그까짓 양 한 마리 찾았다고 해서 잔치까지 베풀 것은 또 뭐람." 하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죽어가던 생명, 길 잃고 방황하던 한 생명이 다시 살아날 때 하나님의 기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번 153 총력 전도기간 동안에 길 잃어버린 양 하나를 살리실 때 우리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시고 아름다운 하늘 잔치를 열어 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비유 말씀의 결론은 1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면 하늘에 계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회개할 것이 없는 아흔 아홉 명의 의인들보다 훨씬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 99명보다 한 사람의 죄인에 대하여 더 불쌍히 여기시며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길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길 찾고 진리를 찾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 이번 153 총력전도기간에 여러분 모두가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얼마나 찾으시는가를 힘써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의 능력으로 살리는 153 총력 전도기간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마 10:5∼6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모순입니다.
◆ 그리고
사 49: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면 도대체
마 10:5-6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잃어버린 양"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은 10:16에서 "잃어버린 양"을 "우리에 들이지 않은 양"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10:5-6 말씀의 의미는 너희는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라 는 뜻이 아닙니다.
◆ 마 15:21∼28에 보면 이방 땅 두로와 시돈 지방의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고쳐 달라고 소리칠 때 마 10:6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25- 보면 그래도 여인은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더 심한 말 가혹한 말씀을 하십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예수님은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고쳐 주십니다.
마 15:28 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고쳐주셨고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간청하는 여인을 구원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은 결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 완악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있으며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는 그 백성들까지도 하나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쉽게 포기하시거나 버리시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과 같은 "믿음의 실족한 자녀들"도 하나님은 또 다시 불러주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목자를 떠나 길 잃어버린 자들, 믿다가 낙심된 자들도 하나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면 자존심 상하게 하고 구역질나게 만드는 강팍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양에게로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목자 없이 방황하는 영혼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 교회를 떠나서 길 잃어버린 양처럼 방황하는 영혼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99마리의 양을 우리 안에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가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이번 153 총력 전도기간에 모두가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전도의 열매를 맺는 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머나먼 타국 땅에 선교사로 나가지는 못해도 이번 전도기간에 물질로 전도 헌금도 드리시고 시간과 몸을 드려 잃은 양을 찾아가 전도함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 기뻐하시게 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며 새 생명 축제의 잔치에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구역과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거저 받은 자의 은혜 윤리
마 10:1-8 / 김철현 목사(예중교회)
하루를 멀다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이 인생의 복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을 다 파악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듯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대략 네 종류 정도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늘 무엇인가를 거저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을 만한 노력을 한 것도 아니요, 대가를 요구할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원래부터 채권자인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다.”라고 생각하고 살면서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고립주의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로부터 받을 것도 없거니와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도 없다.” 는 것입니다. 철저히 “너는 너요, 나는 나” 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만만하다 못해 교만하기까지 하며 이기적이며 반사회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매사를 윤리적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덕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며 살아야한다는 의무감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의무감이 자칫 자만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나는 항상 돕는 자로서 도움을 받는 자들 위에 군림하려고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도왔기 때문에 너는 항상 내 아래 있는 사람이다.” 혹은 “내가 그를 먹였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나에게 복종해야한다.”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는 더 이상 윤리적인 사람이 못됩니다.
그런가하면 넷째 유형의 사람은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자요, 그 빚은 내가 평생을 살면서 다 갚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도움을 입었고 이 모든 것이 평생 내가 갚아야 할 빚이라.” 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부모 형제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은 물론이거니와 스승의 보살핌 또한 내가 진 빚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깨달음은 “이 모든 빚의 근본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빚이라.” 고 하는깨달음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모두 다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들 뿐입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이미 받은 것을 다 갚기에는 일생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내 인생 자체를 하나님께 신세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애초에 내 것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요, 그것을 내가 받아 누리는 것뿐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들이 이런 은혜를 거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거저 주는 삶을 살아야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빚진 자로서 갚으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방법의 문제입니다. 평생 우리는 그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채무자들입니다. 채무자란 어떤 방법으로든지 빚을 갚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빚을 갚기 위해서 될 수 있으면 많은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동기는 바로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행하는 것인데 실제의 모습을 보면 그 동기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고도 그 동기가 잘못 되어서 선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말입니다. 그 동기가 빗나가서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되는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자원하지 않는 선, 즉 억지로 하는 것은 잘못된 동기의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와 심판이 두려워서 행하는 율법적인 것이 아니요,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하는 복음적인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적인 사랑은 진실이 없습니다. 거짓으로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꾸밀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감정은 정직한 것입니다. 이렇듯 진실이 없는 사랑, 이것이 바로 율법적인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은혜가 있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함에 있어서 내가 저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나에게 다가올 저주가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그 두려움과 심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베푸는 사랑이라면 그 동기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 사랑은 더 이상 내가 받은바 은혜에 대한 빚진 자로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율법적인 사랑이 되고 맙니다. 진실이 없는 사랑,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두 번째는 보상을 바라는 동기에서 행하는 선, 역시 잘못된 선입니다.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는 마음, 반드시 복을 기대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물론 성경은 선행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준다고 언급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도 복을 받게 되며 자손만대에 복으로 갚아주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받을 복을 꼭 먼저 생각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못됩니다. ‘내가 저를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저는 왜 나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느냐’ 는 마음이나 혹은 ‘내가 교회를 위해서 이런 일을 했는데 교회는 왜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느냐’ 고 하는 맘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동기가 잘못된 선이요, 또한 은혜의 윤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보상을 바라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속히 버려야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선이 아니며 은혜 받은 자가 할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공로주의적인 동기에서 선을 행하는 것도 잘못된 동기의 선입니다. 이 사람은 남에게 주긴 주되 늘 내 것을 준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공로를 쌓아가고, 자기의 선으로 적선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반드시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하고는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자기보다 가난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에 쾌감을 얻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즐기는 것입니다. 자기 우월주의, 자기 공로주의에서 나오는 선의 동기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은혜 받은 자로서 보여서는 안 될 잘못된 선행의 동기입니다. 빚진 자로서는 보여서는 안 될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빚진 자, 은혜의 빚 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의 동기와 은혜의 윤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은 그 은혜의 윤리와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셔서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처음과 마지막을 잘 보면 1절에 “주시니라” 는 말로 시작해서 8절 “거저 주라” 는 말로 끝납니다.
무엇을 주셨고 무엇을 거저 주라는 것입니까? 제자들을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변변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부르셔서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귀신 내쫓는 권세를 주십니다. 말씀의 지혜를 주십니다.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주십니다. 그 다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나 거저 주라”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용기와 성령의 역사뿐만 아니라 받은 모든 은혜를 받은바 대로 거저 주라는 말씀임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주고 베푸는데 있어서 아무런 조건을 내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안 베풀면 하나님이 벌을 줄까봐 무서워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베풀었으니 그도 나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래 내 것인데 네가 불쌍하기 때문에 조금 나은 내가 너에게 준다는 생각으로 남을 대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에게 주는 것은 이미 받은 것을 주는 것뿐입니다. 은혜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은혜로 나누는 것일 뿐입니다. 마땅한 일일뿐 결코 내 자랑이 못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무엇보다도 ‘거저 받았다’ 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거저’ 라는 말은 공짜요, 선물이요, 은혜라는 말입니다. 나의 공로나 나의 의가 조금도 개입됨이 없이 순전히 공짜로 얻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받았으니 무조건 주라, 불가항력적으로 받았으니 불가항력적으로 주라” 이 얼마나 합당한 말씀입니까? 용서 받았으니 용서하며, 사랑 받았으니 사랑하며, 그가 나를 위하여 죽었으니 내가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받은 내가 주는 데 그리 조건이 많아서 되겠습니까? 당연히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주면서 두고두고 자랑거리로 남길 조건은 왜 찾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데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것으로 생색내며 내 것인 양 착각하며 마음대로 쓰지 마십시오. 내가 베풀었더니 저들이 나를 따른다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나의 선행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빚진 자로서 당연히 갚아야 할 은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윤리를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마땅한 은혜윤리입니다. 기억하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은혜 윤리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
마 10:1-4, 27:57-61 / 박한응 목사
할렐루야!!
참 세월이 빠릅니다. 어느새 오늘이 4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봄을 맞이하여 우리들을 끝까지 괴롭히던 꽃샘추위도 가물가물 옛이야기처럼 우리들의 곁을 멀리 떠나갔습니다. 그렇게 화려하게 피었던 봄꽃들도 자취를 감추고 이제 따뜻하다는 것보다는 더위가 가깝게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농촌에서는 본격적으로 농번기를 맞이하여 바쁜 나날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절기에 오늘도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아 멘!>
오늘 예배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기쁨과 축복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아 멘!>
모든 운동경기는 정해진 규정과 룰이 있습니다. 이 규정과 룰에 맞춰 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축구는 골키퍼를 합쳐서 모두 열 한 명이 경기를 합니다. 열두 번째 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탠드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들이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과 같은 마음 같은 정신으로 응원을 할 때 관중들을 열두 번째 선수라는 이름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또 농구 경기에서는 식스맨이란 말이 있습니다. 코트에 들어가 뛰는 선수는 5명인데 벤치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적재적소에 교체 멤버로 투입이 되어 활약하는 선수를 식스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0: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열두 명이지 열 세 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식적인 제자는 분명 열두 명입니다. 그러나 그 열두 명 외에도 제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눅10: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70명을 뽑아서 전도하러 보내시기도 하였습니다.
(눅10:1-3)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이 70명을 성경학자들은 전도인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제자 중에 세 명만을 데리고 간 곳이 세 군데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중에 한군데가 예수님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변화산이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딸을 살리려고 갈 때에 세 명의 제자를 대동하셨고, 또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가실 때에도 세 명의 제자만을 대동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런 내용에서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 12명을 분석하여 보면 대충 네 그룹으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함께 어디든지 동행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가 있고
둘째,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하고 크게 활약한 마태와 같은 제자가 있고
셋째, 제자의 이름은 있는데 아무런 업적이 없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넷째, 가룟 유다와 같이 예수를 배반하고 판 제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라고 해서 다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교인이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였다고 해서 다 은혜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또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27:57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장사 지냈는데 성경에는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어떤 사람은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수에 들었어도 별 볼일 없이 일생을 보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들지도 못하였어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지 못한 큰일을 하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두 명의 반열에 들지는 못하였어도 열두 제자들보다 예수님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때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보다 더 큰 일도 했으며 열두 제자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열두 명의 자리에 들었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의 반열에 들지 못하였어도 그 제자들보다 더 큰 일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입니다. 그렇게 믿으시고 다 같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그럼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여 천추에 길이 빛나는 사람들의 행적을 찾아보면서 이 시간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1.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한 여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막14:3-9)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시기도 하시다가 날이 저물면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의 집에 가서 쉬셨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베다니 마을에서 전에 문둥병을 앓던 시몬이란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문둥병 고침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시는 길에는 항상 우발적인 사건들이 자주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실 때에도 열 두 해를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 와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사건이 일어나서 지체가 되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가셔서 죽은 딸을 살리셔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날도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는데 한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제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고 그 여인을 칭찬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속에는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려면 시체에 향유를 발라 악취를 없애고 또 몰약을 발라 쉽게 부패하지 않게 하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가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림으로 해서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고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합니다.(막15:21-)
마가복음 15:21절 이하를 보면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으로 갔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설교를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실 때 쓰러지면 로마 군병들의 채찍이 예수님의 몸을 사정없이 내려칩니다. 그래도 올라가지 못하시니까 마침 구경하러 따라오던 시몬이란 힘깨나 쓸 만한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기로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져야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십자가를 대신 지기로 한다면 예수님께 와서 병 고친 사람이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져야 하고, 예수님께 와서 떡 얻어먹은 사람들이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십자가를 져야 할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구경꾼들만이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시몬이 붙잡혀 십자가를 졌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루살렘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왔다가 큰 구경거리 났다고 구경을 하다가 그만 재수 없게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하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하고 나니까 그것이 축복이 된 줄로 믿습니다.<아 멘!>
그의 가족과 후손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말씀의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다음 그의 아내가 예수를 믿고 바울을 크게 도와서 바울이 선교를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내 어머니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AD312년 기독교를 인정하고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역대의 로마 황제들이 기독교와 무슨 철천지 원수진 일이 있는지 기독교라면 공연히 이를 갈고 기독교를 핍박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황제로 즉위하자 기독교를 인정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바로 이 콘스탄틴 황제가 골고다 길에서 재수 없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의 12대 손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십자가 지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의 믿음은 어떠하였습니까? 정말로 주님의 십자가를 졌습니까? 내 마음에 들면 충성하는 척 하고 외식과 허영과 교만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 바로서야 합니다. 진실 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이 시간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은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 하나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3.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란 사람을 생각해야 합니다.(마27:57,눅23;50-53)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비참하게 운명하신 후에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과 로마 군병 몇 명만이 십자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시면서 운명하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당돌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눅23:5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빌라도는 누구도 죽일 수 있고 살릴 수도 있는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가진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그런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형 집행을 당한 시체는 장사를 지낼 수 없고 독수리와 짐승들이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골고다에는 해골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뒤에 40여년의 세월이 지나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제는 늙어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생시에 하신 말씀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16:28) 고 하신 말씀을 믿고 기다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마태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로마의 박해에 언제 죽을지 몰라 예수님의 행적을 글로써 남기기로 하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이 부분에서 지난날의 비겁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을 장사지낸 요셉을 일컬어 “그도 예수의 제자라” 고 칭찬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신 보다 훨씬 낫다는 그런 뜻도 있습니다.
4.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을 생각해야 합니다.(막16:1-3, 눅24:10)
성경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몇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눈물과 애통과 근심으로 보내고 이튿날 날이 밝아오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세 여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존경해온 예수님이 그렇게 허무하게 십자가상에서 죽고 또 무덤에 장사된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나길 기다려 무덤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다하지 못했던 일들이 후회도 되고 부지중에 당한 일이라서 예수님의 몸에 향유나 몰약도 발라드리지 못하였기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라도 발라 드릴 계획으로 이른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것은 육중한 돌문이었습니다. 돌문이 무덤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낙심천만하여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문을 굴려 주리요’ 하면서 근심하고 있을 때 그들의 근심과 마음을 알아주듯이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고 수직하던 군병들은 혼비백산이 되었고 돌문이 열려졌습니다. 할렐루야!!
그 여인들의 소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 주리요” 라는 말은 부활절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만의 근심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당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들 앞에는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낙심과 근심과 좌절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의 돌문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의 염려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출세의 염려 때문에, 돌문 앞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새벽에 무덤 문이 열려진 것처럼 여러분의 앞길을 막고 있는것들이 아무리 육중한 돌문이라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믿음 앞에는 분명히 열려 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아 멘!>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였고
(마21:21-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5. 예수님의 복음을 온 이방에 전한 사도 바울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행9:1-16)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진멸 하는데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 사울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을 받고 바울로 변화한 사울은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3년간을 수련하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선교에 앞장을 서서 이스라엘 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고, 나아가서 유럽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그 큰 사명을 누가 감당하였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에 전파된 복음은 후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1884년 드디어 우리 한국에까지 전하여 지게 되었고 그 중에 나와 여러분들도 구원받게 된 줄로 믿습니다.<아 멘!>
우리가 신약 성경을 보면 27권 중에서 바울의 기록한 성경이 절반을 차지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1장에서부터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13장부터 28장까지는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또 자신의 사도성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습니다.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 이라고 자신에 대하여 자신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즉 제자라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6.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인은 모든 사람이 칭송하기를 여 제자라고 하였습니다(행9:36-43)
(행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욥바라고 하는 곳에 다비다라고도 하고 도르가라고도 하는 한 여인이 홀로 살면서 그는 삯바느질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여인이 죽었는데 사람들은 룻다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에게 전하여 빨리 오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와서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죽었던 여인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할 것은 죽었던 그 여인이 살아났다는 것 보다 그 다비다라는 여인에게 여 제자라는 대명사가 붙어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다비다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생존 시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사랑하던 여자로써 한 때는 70인의 전도 대열에 끼어서 전도를 하기도 한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가난한 중에서도 옷을 지어 사람들에게 구제 사업을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또 여 제자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모두가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반열에 든다는 것은 분명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가룟유다 같은 사람은 직분을 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옥의 음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에 이름만 있지 아무런 활동이 기록이 없는 제자도 여러 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충성한다는 것 또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못지않은 축복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집사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속장이 아니면 어떻고 권사 장로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비록 그런 직분이 없어도 예수님의 열세 번째 제자가 되어서 천추에 길이 빛나는 그런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 멘!>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한 무명의 여인은 그의 행적이 성경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고 그 여인을 칭송하고 있지 않습니까?
다 같이 찬송가 323장 3절을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소명을 따라 사는 삶
마 10:1-15 / 계강현 목사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것을 우리는 ‘소명’(calling)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름 받은 12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돼있다.(vv3-4)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12지파이고, 이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을 거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들이고, vip 영혼구원과 제자 만드는 소명을 받은 자들이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소명에 관해 살펴보며 은혜 나누자.
1.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에게 소명을 주신다.
12제자의 이름을 보면, 베드로, 요한과 순교한 야고보를 빼고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은 잘 등장하지 않고 복음서 이후에는 거의 안 나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서 소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큰 역할을 한 사람도 아니고, 큰일을 못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거라고 보면 무난하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실패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어떤 필요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인데, 어떤 필요는 사람들 눈에 띄고 업적도 따르는 반면, 어떤 필요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다.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은 아주 가시적인 필요를 위해서 부름 받았다면, 이름이 재등장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도 나름의 필요를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절대 낭비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니다. 사람들 눈에는 위대한 삶을 살지 못했더라도, 하나님 눈에는 위대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걸 시사 하셨다. 마 19:30,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마 20:27, “너희 가운데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도바울도 그런 힌트를 말했다. 고전 12: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들이 다 지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v22, “그뿐만 아니라, 몸의 지체 가운데서 비교적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사람이 보는 거랑 하나님이 보시는 거랑 전혀 다를 수 있단 얘기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의 소명은 하나님의 필요에서 시작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필요가 눈에 띄고, 두 번째는 그 필요를 내가 채워야겠다는 욕구가 생긴다. 그러면서 거기에 응할 때 내가 소명을 받은 것이다. 소명을 뭐 꼭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만 아니고, 어떤 분이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애들의 피폐한 모습을 보곤,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서 주님의 뜻대로 자녀들을 양육하면 잘 된다는 걸 한번 보여주고 싶은 소원으로 살 때 이 분은 가정을 꾸미고 자녀를 양육하는 게 소명이다. 또 어떤 분이 사업하는 사람들의 부패상을 보곤 하나님 뜻대로 정직하게 사업을 성공시키는 모범을 보이고 싶다는 소원을 따라 사업을 하게 되면 이분에겐 그 사업이 소명이다. 또 어떤 분이 노인들을 보면서 이분들의 필요를 좀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결심하고 노인들을 돌본다면 그분에겐 그게 소명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인들은 모두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일에 소명을 받은 사람이 틀림없다.
이런 소명 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허무나 절망 같은 걸 찾아볼 수 없다. 역경이 찾아와도 소명감 때문에 능히 극복할 뿐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이 삶 자체에 기쁨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명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도 보람이나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꾸 세상의 잣대로 봐서 그렇다. 세상 사람의 성공과 위대한 모습을 그리는 동안은 우리 삶 가운데 참된 기쁨과 보람이 있을 수 없고, 적은 역경에도 좌절하게 된다. 사랑하는 교우들 모두 이렇게 소명 받고 소명을 찾아서 기쁨과 보람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이 소명을 주실 때 능력도 주신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셔서 vv1-2,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그들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온갖 질병과 온갖 허약함을 고치게 하셨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사역인데, 그 능력을 사도들에게도 똑같이 주신 것이다. 인류 역사에 유명한 사람들은 말만 하고 하질 못했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직접 전수하셨다. 그래서 소명에 헌신할 때 문제가 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소명을 주실 때 하나님이 능력도 주시기 때문이다.어차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크기로 다가오기 때문에 애당초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내가 할 수 있으면 그건 소명이 아니다.’라고 말한 거다. 어차피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이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시작된 소명이라면, 하나님이 능력도 책임져주신다. vip 전도의 영혼구원과 제자 만들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가 우선해야 되는 것은 소명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필요가 있는가? 내가 이 필요를 정말 채우고 싶은가? 그래서 하나님의 이 필요가 나에게 주신 소원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그 다음에는 그저 믿고 발을 내디뎌 뛰어들면 된다.
3. 소명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능력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12제자를 선택하시고 그 다음에 사역하라고 내보내신다. 이걸 통해서 우리는 소명 받은 삶이 어떤 것이고, 어떤 능력이 함께 하는 지에 대해서 교훈을 얻게 된다.
1)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산다. vv5-6,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6 오히려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거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역의 지경을 정해주신다. 쉽게 말하면, 지금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부르셨으니까, 그곳에서 그것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라는 거다. 여러 가지 질문과 항거가 생길 수 있지만, 그런 건 다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만들고, 이 민족을 통해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복 받게 하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타임테이블이다. 우리가 소명 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타임 테이블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하나님이 “가라” 그럼 가고, “있어라” 그러면 있고, “해라” 그럼 하고, “하지 말라” 그러면 하지 말고, “기다려라” 그러면 기다리고, “즉시 해라” 그러면 즉시 하는 거다. 소명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른다.
목회자나 우리의 꿈이니 비전, 이런 것은 다 알게 모르게 세상적인 시각에 오염되어서 세속적인 기준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소명 받은 사람은 목회 꿈이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와 소원을 얘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다가 가는 거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큰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를 보고 하나님의 소원을 좇아서 일하라고 부름 받은 것에 응답하는 것이 소명이다.
2) 생활의 필요는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여행준비를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vv9-10a, “전대에 금화도 은화도 동전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10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신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아라.” 그 이유가 뭔가? v10b,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내 필요를 채우려고 너희들이 심부름을 하는 거니까, 너희들의 필요는 내가 채워줄 거다!” 약속하신 거다. 물론 사람을 통해서 채워주지만,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래서 소명 받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 생활의 염려로부터의 자유다. 우리가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살다보면 아무래도 생업이나 자녀교육에 남들만큼 악착같이 할 수가 없다. 내가 게을러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주님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런다면 남들만큼 시간을 못 써도 생업이 잘 되게 하시고, 자녀들도 잘 되게 하실 줄 믿는다. 일이 꼬이려고 그러면 끝이 없다. 하나님이 잘 봐주셔야지. 6시간 걸릴 일을 하나님이 2시간에 하도록 해주시면 4시간 이익 보는 거 아닌가! 하여간 일이 꼬이려면 끝이 없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된다. 주님의 소명을 따라 살면 우리의 생활의 필요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이건 주님의 분명하고 엄청난 약속이다.
3) 긴박감을 갖고 산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행 준비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 또 다른 이유는 긴박감 때문이다. vv11-14, “아무 고을이나 아무 마을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어라. 12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예수님의 긴박감이 느껴지지 않나?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듣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집이 더 편한지, 또 거부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아니다. 기다.”하고 있을 때가 아닌 거다. 그냥 빨리 툭툭 털고 또 다음 동네, 또 다음 동네로 가서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런 긴박감이 있다.
소명 받은 사람은 이런 긴박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 내가 건강할 때, 우리 교회가 칭찬 들을 때, 또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때 강하게 주님이 주신 소명을 완수해보자는 긴박감을 갖고 일한다. 가정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을 일일이 붙잡고 설명하고 이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 한 번 정도는 설명하지만, 좋아하고 동의하는 분들하고 같이 일하는 거지, 동의 안하고 비협조적인 분들하고 일하는 게 아니다. 긴박한 때다. 곳곳에 이상기후, 지진, 홍수, 폭설, 한파, 폭우 등 재림의 때가 가까운 징조들이 보인다. 예수님이 오시든지, 우리가 가든지 하여튼 우리가 좀 긴박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 여러분도 정말 소명 받은 삶을 살려면 좀 더 초점에 집중해야 한다. 남들이 하는 거 다 하고 좀 섭섭한 얘기 들으면 마음 아파하고, 그러다가 언제 소명을 감당하겠나? 좀 긴박감을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 vip 5명 명단 찾기도 그런 마음으로 해야지, 주일에 광고할 때마다 ‘아! 깜빡 잊고 있었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이제부턴 소명에 초점을 맞춰서 긴박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자.
4) 하나님의 보호가 따른다. v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나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너희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려라.” 유대인들은 이방 땅을 여행하고 오면 부정한 땅에서 거룩한 땅으로 왔다고 신발의 먼지를 터는 관례가 있었다. 결별의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도 찾아간 집에서 푸대접하면 자꾸 이걸 갖고 다투지 말고, 탁탁 신발을 털고 떠나라는 거다. 그러면서 v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동과 고모라가 당했던 것이 더 견디기가 쉬울 것이다.” 사도들을 거부한 것은 사도를 보낸 예수님을 거부한 것과 같다. 천사를 거절하고 거부한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멸망시켰는데, 천사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아들을 홀대하고 거부할 때 내릴 진노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클 것이란 얘기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보호가 따른다는 것이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축복과 저주로 임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소명 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특권과 보호막이다. 이런 보호막이 소명을 받아 사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따른다. 소명 받은 우리들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걸 알고 좀 우리가 관대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막 대적하다가 하나님께 저주받으면 어떻게 하겠나?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저주하면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싸울 기회나 주위 사람을 격분시킬 수 있는 여지를 피하고, 또 미리 용서도 구하고 화해해서 그 사람에게 행여나 나로 인해서 재앙이 내릴 가능성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
또한 소명 받은 자들에게 따르는 하나님의 보호 중에 하나가 축복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겐 복을 베풀고” 그래서 우리가 이런 축복권을 잘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축복하면 정말 축복이 내리고 또 소명을 받은 사람이 하는 기도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 교우들을 나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나의 기도가 특별한 응답이 있다고 본다. 이것이 소명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권을 잘 행사하라. 서로 하늘복으로 축복하라.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남편과 아버지들은 자녀와 아내를 위해서, 목자 목녀들은 목장 식구를 위해서, 각 팀장들은 팀원을 위해서, 설교자들은 교사들과 교육목자들을 위해서, 교사와 교육목자들은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vip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vip 구원을 이루어주시는 거다.
각자 소명을 찾아서 능력주심을 믿고 뛰어들어, 우리로 인해 주위를 복 받게 하는 복의 근원으로 살자.
제자가 되세요
마 10:1-15 / 유일무 목사
1. 우리가 살고있는 지구에는 강들이 있습니다. 작은 샛강이 있는가 하면 큰 강도 있습니다. 어떤 강은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될만큼 큰 강이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만 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강이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가 보면 복음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마치 4대 문명의 발상지와 같은 큰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의 이름은 제자도(弟子道) 입니다. 제자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 번 부르십니다.
한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에서 구원받으라고 부르십니다. 또 한번은 죄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을 일컬어 우리는 그를 제자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듣는 모든 분이 죄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부르심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2. 복음서를 읽다가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리라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라고 합니다.
저는 무리와 제자를 언급하면서 책 두 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카일 아이들먼(Kyle Idleman)의『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라는 책이구요, 다른 하나는 후안까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의『제자입니까』( Disciple)라는 책입니다.
1) 먼저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의 책『팬인가 제자인가』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것은“나는 제자인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텅빈 그의 예배당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는 주일예배에 몰려올 3만 명이 넘는 인파를 떠올리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 앞에서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이 질문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묵상했습니다. 그는 그 기적이야기를 통해 누가 팬이고 누가 제자인가를 이렇게 구분했습니다.
팬은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과 떡을 원했지만 예수님 자신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팬은 예수님에게서 더 이상 떡을 얻을 수 없을 알게 되자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 성도의 숫자가 아니라 헌신의 깊이 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제자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라는거에요. 제자는 적다는 것입니다.
팬은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을 위해 손해 볼 준비가 되어 있고 또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손해를 보는 사람입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님은 이렇게 팬과 제자를 구분했습니다.
2)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그의 책『제자 입니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목회를 하면서 교회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이런 깨달음을 얻습니다.
“교회가 성장은 했는데 부흥하지 않았고 성숙하지 않았으며 교회는 다만 살이 쪄 있는 것이다 ”
후안까를로스 목사님은 성령님으로 부터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이런거죠. 교회 안에 믿는 자의 수는 많아졌는데 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많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짧은 설교 시간에 책의 내용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또 사실 설교시간이 독후감 발표시간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두 책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는 어떤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제자의 대상이란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과 제가 모두 제자되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닐라은혜교회가 단지 팬(무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아니라 제자 수준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모두가 제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은 제자에 대하여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0장을 읽었는데 제자에 대하여 마태복음 10장 보다 더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다.
2절로부터 4절까지는 예수님의 12제자의 이름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한사람씩 살펴보면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12제자가 특별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거죠.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안드레,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4명은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는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마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벌레처럼 혐오하던 세리(세금 징수원) 출신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그 뜻은“우뢰의 아들”입니다. 성격이 불같고 잔인하다는 뜻입니다.
▶시몬은 가나나인입니다. 가나나는 아람어에서 온 말인데 열심당원이란 뜻입니다. 열심당원은 로마 식민통치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폭력으로 싸웠던 민족주의자 집단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입니다. 어떤 학자는 가룟 유다를 이스라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족주의 집단 중의 하나인 암살자(killer)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 앞에 가룟이란 단어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룟은 암살자를 뜻하는 라틴어 이시카리옷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가 직업적으로나 이념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너무 다양해서 서로 조화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기준은 무엇인가.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거죠.
예수님은 대도시 예루살렘의 엘리트 출신의 사람들을 제자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의 아주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그런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바꿔 말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도 능히 제자로 부르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둘째,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도입니다. 제자는 전도하는 사람이 제자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7-8절입니다.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고... 이것이 제자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천국복음을 듣습니다. 내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면 나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고 나갑니다. 나가서 내가 천국복음을 전파합니다. 내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나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제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일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나 선교사님같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 아닙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일을 행하시면 여러분이 제자입니다.
또 우리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저도 제자가 되고 싶긴한데...모든 병든 자와 모든 약한 것을 고친다고 제가 기도했다가 그 병든자가 낫지 않으면 어떡하죠? ”
바로 여기가 내가 무리인가 아니면 내가 제자인가의 경계선입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병든자가 고침받지 못하고 내가 기도했는데 죽은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구요?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셨으면 내가 할 일은 순종밖에 없습니다. 내가 순종하면 예수님이 권능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4. 1) 저는 암환자를 위해 그의 위에 손을 얹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병든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할 때 저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과연 내가 기도한다고 암환자가 나을수 있을까?
그러다가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꿨습니다.
낫고 안 낫고는 내가 알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병든자를 고치라”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내가 할 일은 순종뿐입니다.
2) 저는 죽은 자를 위해서 시체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손을 얹어 기도할 때 저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죽은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러나 저는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꿨습니다. 살고 안 살고는 내가 알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죽은자를 살리라”
예수님이 명령하시면 내가 할 일은 순종 뿐입니다.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은 내 몫, 낫고 안 낫고는 예수님의 몫입니다. 살고 안 살고는 예수님의 몫입니다.
5. 말씀을 마칩니다.
전도에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예수님을 믿으면 좋겠다...전도에 깨어 있으시길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 되시는 은혜가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내심을 받은 12사도
마 19:1-10 / 안효관 목사
19세기 헝가리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요 작곡가인 리스트(Liszt, Franz von)가 여행 중에 조그만 시골 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음악회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포스터는 ‘리스트’의 수제자가 연주회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는 자신의 수제자라며 연주회를 한다는 그 사람의 이름이 너무나도 생소했습니다.
리스트가 그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연주회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실 그 여자는 리스트의 제자도 아닐 뿐만 아니라, 리스트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이 그 유명한 리스트의 제자라고 허위광고를 하고 연주회를 하려고 하는데, 연주회를 계획한 바로 그 날 리스트가 그곳에 나타나자,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여자는 리스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실 저는 피아노를 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답니다. 제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많이 있는데, 제 이름만 가지고 연주회를 연다면 아무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수제자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리스트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피아노 앞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피아노를 쳐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리스트가 보는 앞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리스트는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잘못한 것 몇 가지를 지적하면서, 이것저것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 제자가 된 것이요. 당신은 오늘 저녁 리스트의 제자로서 당당하게 피아노를 치십시오.”
그 날 연주회에서 리스트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연주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연주는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며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리스트가 찾아온 그 여자를 향하여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고 야단을 치고, 사람들에게 그 여자는 자기의 제자가 아니라고 공포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그 여인의 인생은 비참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녀가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까지도 엄청난 시련 속에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옛날부터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좋은 만남을 가져야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많은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습니다. 학년마다 선생님이 달라지고 학과마다 전공과목 선생님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한 선생님 밑에 제자로 들어가면 평생 그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누구의 제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 곧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그 사람의 성공 여부까지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선교의 현장으로 파송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에게는 제자가 12명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6:12-13절에 보면, 거기에도 12제자를 부르신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불러 모아 놓고 그들 가운데 12명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12명에게는 다른 제자와 구별된 ‘사도’라는 칭호를 붙여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 많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처음부터 12명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 가운데는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발적으로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가장 유명한 랍비 가운데 한 분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특별히 택하셨습니다. 그 12명을 성경에서는 종종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12명을 사도라고 부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가 많았던 다른 제자들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12명으로 뽑힌 제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여러분, 그 12명 제자들의 이름을 가만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중에는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다른 랍비들이 자기들의 제자를 뽑을 때 적용했던 기준을 제시한다면, 12명의 제자 가운데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인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제자로서 가장 좋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12명 제자 명단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가롯 유다입니다.
우리는 제자로 뽑힌 12명에게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은 한결같이 촌놈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리 촌에서 태어나 그곳을 떠나본 적이 별로 없는 촌놈들이었습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큰 세상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촌사람들만을 뽑아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열두 제자의 두 번째 공통점은 부자도 없고, 많이 배운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천민에 속한 사람들을 뽑으신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가장 돈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세리였던 마태와 아버지가 여러 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들뿐입니다. 그 외에는 가난하게 살아가던 천민들이었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의 세 번째 공통점은 인격적으로 제자가 될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배운 것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면서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뒤를 따라가면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는 문제로 가지고 옥신각신 싸움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혈기 부리기가 일쑤이고,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 없는 행동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들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될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을 불러서-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보고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지금의 모습보다는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보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똑똑하지도, 잘 나지도 않았지만, 우직하다고 할 정도로 충성된 마음을 품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골 촌사람들이지만, 도시의 교활함에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묻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뽑힌 이 12명은 예수님 살아 계실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얼마나 많이 책망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중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충성된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12명 가운데 10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에서는 16명의 단기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비록 10여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 선교사역을 위해서 수고하겠지만,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갑니다. 쓰나미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16명을 선택하셔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똑똑하고 잘 나서 우리가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을 뽑지 않으십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많아도 우리를 더욱 크게 쓰시기 위해서 훈련하도록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한번 단기선교를 갔다 왔다고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뽑아 사도라는 이름을 주시면서 선교하도록 보내셨습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선교의 경험을 하도록 보내신 것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선교현장으로 파송 받은 후에도 제자들은 실수하고 예수님께 꾸중 듣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선교현장에 한 번 다녀왔다고 해서 완벽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우님들도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단기선교사로 파송 받은 분들이 - 특히 젊은이들이 선교현장에 한번 다녀왔다고 해서 엄청난 일을 해내는 사람들로 부쩍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람을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자식을 낳아서 키울 때에도 제 밥벌이 할 수 있을 때까지 키우려면 최소한 25년에서 30년은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겨우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단 시간 내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의 경험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되고, 성장하는데 계기가 될 수는 있을지라도, 그 한번으로 완전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끊임없이 사람을 키우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는 뻥튀기 기계에 넣고 한꺼번에 커지게 만드는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단기선교를 통해 섬기고 경험한 것이 큰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아주 중요한 경험은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처치’(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열렸던 여름 세미나(Summit)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약 8,000명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도 약 2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200여명 가운데 120명은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온 청년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매년 하는 그 세미나에 서울 온누리교회서 매년 청년 120명씩을 보내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공부하고 갑니다. 서울 온누리교회가 한국교회의 변화에 앞장서 가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다른 교회가 따라갈 수 없는 변화와 섬김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교회의 기둥이 될 때에는 서울만의 온누리교회가 아닙니다. 전 세계의 복음 사역에 중심 자리에 서는 교회로 성장하고 변화해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전주남성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서학동 안에만 있는 교회가 아니라, 전주 안에만 있는 교회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서 뻗어나가는 교회, 세계의 중심 자리에 서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작은 도시 전주이지만, 서울에 가지 못해서 전주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품기 위해서 전주에 남아 있고, 세계를 품기 위해서 전주남성교회를 섬기는 큰 일꾼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굳이 12명을 특별하게 선택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단순히 말씀으로만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가르침을 하십니다. 그건 바로 삶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선택된 이 12명의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하루 24시간 늘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그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현대 교육학에서 그런 교육을 ‘도제교육’(徒弟敎育)이라고 합니다. 도제교육이라는 것은 삶으로 가르치고 삶 자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서 단기선교사 16명을 선택하시고 파송하신 것은 그런 교육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태국 팡아 지역에서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 삶으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삶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는 그 먼 이국땅에까지 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섬기기 전에 먼저 삶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파송받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신 두 번째 이유는 ‘전도하러 파송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선택된 12명의 제자들은 곧바로 전도자로 파송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우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보내심을 받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붙여 주신 것입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 곁을 떠나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게 됩니다.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세상 속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게 제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여기 교회당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과 예수님의 인격으로 훈련을 받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가야 합니다.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게 제자입니다.
단기선교사로 파송 받은 16명의 일꾼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서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서 복음전도에 방해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한 그들은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지켜볼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가지 이름을 평가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입은 옷이나 쓰는 모자에 태극기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동 하나 하나가 곧 복음의 내용이고, 복음의 삶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증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신 세 번째 이유는 나중에 그들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단지 3년 동안의 공생애를 사시고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을 마치신 다음에는 누가 주님의 사역을 이어갈 것인가 하는 중차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사역을 이어가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놓으신 구원사역은 전 세계를 향하여 뻗어가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 누가 주님의 사역을 이어가야 합니까? 교회가 해야 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주님의 사역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의 중심을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앞장서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바로 주님께서 택하신 12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처음 생긴 예루살렘 교회에 이 12명의 제자들이 기둥이 되었습니다.
오늘 단기선교사로 파송 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은 10년 20년 후에 우리 교회에 기둥이 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더욱 큰 기둥이요 일꾼들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선교의 훈련지로 보내셔서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사명을 감당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택하여 전도하러 보내시기 전에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능력들은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나갈 때에, 복음을 증거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12명의 제자들은 잘 난 사람들도, 똑똑한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 그들이 복음을 전하러 나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을 의지하고 나갈 때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지로 파송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선교지에 가서 집을 짓는 일을 할 때에도, 아이들에게 찬양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힘으로 할 때에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본문 10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을 전하러 가는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때 그 때 알아서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힘도 주시고, 지혜도 주십니다. 건강도 지켜주시고, 날씨도 지켜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갖고 가는 것입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게으름입니다. 열심히 봉사하더라도 기도하는 것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오늘도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16명의 단기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그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16명은 몸으로 가지만 우리는 기도로 갑니다. 그들은 가서 몸으로 봉사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무릎으로 봉사하면서 그들이 선교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로 후원하는 후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선택되어 파송 받는 16명의 단기 선교사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의 파송을 받지만, 우리 교회만의 파송이 아님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이 여러분을 파송하는 것이고, 대한민국의 교회가 여러분을 파송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가 없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더럽히는 모습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복음에 장애가 되는 삶이 없도록 기도하며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해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살리는 일에 귀한 열매가 있고,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그들의 앞날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수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단기선교를 기회로 여러분의 신앙이 더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교회에 귀한 일꾼들로 성장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12제자의 파송
마 10:1-15 / 박세갑 목사
본문을 이해하려면 앞 장의 마지막에 있는 주님의 부탁과 연결된 주님의 명령을 연관시켜 확인해야 합니다. 주님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곧 바로 일할 것을 명하여 파송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하라.’ 하신 것이 첫 번 명령이고 두 번째는 ‘너희는 가라.’하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주님의 심정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주님의 안목과 감정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시작한다면 추수할 일꾼들을 데려오는 일을 이미 절반 이상 착수한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기도하라 하시고 그 뒤에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순서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신자는 언제나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 김 창호 목사님과 문 임규 집사님이 하시는 전도도 먼저 교회에 나아와 함께 기도하고 나아가라고 말씀드린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면 11장 1절에서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하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을 확인합니다. 이것으로 보아서 10장은 주님께서 자기를 도와 함께 일할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직전에 자신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을 그들에게 분부하여 가르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돕는 자들로써 열두 제자를 파송하십니다. 이 12제자를 마태는 특별히 사도(apostle)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저 평범한 제자들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도라는 표현은 여기에 처음 나오고 마태는 단 한번 본문 2절에서 사용합니다. 이처럼 그들이 주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고 그들의 사역이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마태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주님의 대리자이며, 첫 번째 messenger이며, 메시야이신 주님을 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을 대리하여 주님의 말씀을 권세 있게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메시야이신 주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주님을 대리하는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그들을 보내시는 준비로 1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하심으로 능력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으로 부터 파송을 받은 12제자가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사역을 감당하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주신 권능에는 오늘 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히 적용되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 나타난 주님의 명령들은 근본적인 원리 몇 가지를 제하고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본문의 말씀에 비추어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활동의 범위입니다. 주님은 5~6절에서 “예수께서 이 열둘을 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하심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집으로 가고, 합당한 자를 찾고, 그 집이 평안을 빌기에 합당하면 들어가 평안을 빌고 합당치 않으면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도자는 이와 정반대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합당치 않은 사람들을 찾고 그들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명령은 우리에게 문자적으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전할 사역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 그들이 전할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은 구세주 즉 메시야이신 주님이 오심으로 그들과 함께 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갈망하던 메시야가 지금 그들의 가운데 계시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기만 하면 메시야를 발견하고 구원을 얻으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는 것은 정말 특별하고도 굉장한 메시지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병을 깨끗이 하며 귀신을 쫒아내는 것들은 그들의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충분히 증명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우리도 그런 일을 해야 하고 그런 권능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적으로 병자를 고치라고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을 하라고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죽은 자를 일으키는 능력도 받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하여 죽은 사람도 일으키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모든 치유는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마귀는 결코 치유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약물이나 다른 의료의 수단에 의하지 아니하시고도 우리를 충분히 치유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 의지하여 치유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자기의 의지에 따라 치유의 능력과 자유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귀신을 쫒아내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일은 열 두 제자에게 부여하신 임무였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셔서 교회를 신령한 나라의 신령한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로 세우시자 이 모든 것들은 취소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만 신령한 복을 전하는 자들로 세워지고 쓰임 받을 뿐입니다.
(마9;35)을 봅시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하신 것같이 주님의 사역은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9:36~39)에 나온 대로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꾼을 구하고 세우셨습니다. 제자들을 보내시는 이유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마28;19~20, 행1;8)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대위임령도 모두 우리를 보내셔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전하도록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제일 먼저 자신이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비록 사도들 같이 8절“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는” 일은 못하더라도 우리가 존재함으로 그 시대와 세상이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도들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내셨지만 우리는 오늘날 믿지 않는 자들과 세상을 향하여 보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복을 빌어주고 복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7~8절을 다시 봅시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요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마태복음에서 지금까지 본대로 귀신을 쫒아내고 약한 것을 고치고 병을 고치는 인간을 고치고 복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신자를 세상에 보내시는 것은 신자로 인하여 세상을 복 주시려는 것입니다. 신자의 존재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도록 우리를 그 자리에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러 오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창18;16~32)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소돔 고모라를 멸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 의인 오십이 있으면 그들의 죄로 함께 멸하실 것입니까? 그보다 열 명이 적으면요? 거기서 다섯 명이 적으면요? 그래서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 고모라를 멸하지 않겠다.’ 하시는 대답을 얻습니다. 그런데도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합니다. 의인 열 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부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열 명의 하나가 되어야 할 책임을 지고 이 자리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은 악과 죄가 가득한 곳이고 그것들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할 바를 모르고 진리가 무엇이고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 믿는 자, 즉 신자들이 존재함으로 심판을 보류 받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신자의 할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셨고 나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이 나에게서 복을 그치게 하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나를 세우셔서 거기서부터 더 많은 영혼들을 만나시고 세우시려고 나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여러분은 언제나 나보다 믿음이 작거나 여린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구나 하는 겸손함과 신실함을 가지고 그들에게 내 안에 있는 진리를 나누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온 사랑 교회로 부르신 까닭입니다.
천국 대표선수로 세상을 살아가라!
마 10:1-15 / 전순기 목사
어떤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설교에 관한 설문조사를 해 보았다고 합니다. 먼저, ‘어떤 설교를 듣기 원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첫째는 ‘축복에 대한 설교'(46%), 둘째는 ‘상한 심령과 병 고침에 대한 설교'(28%)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설교를 들을 때 제일 짜증이 납니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회개 설교', 다음으로는 ‘전도 설교', 그 다음으로는 ‘헌금 설교'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부담 되는 설교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더니 첫 번째가 ‘전도 설교'였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전도 설교가 부담이 되는 설교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에 관한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전도는 우리 영혼이 건강하게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말씀공부, 기도생활, 봉사생활, 다 좋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전도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전도를 영적인 운동으로 비유합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좋은 교육과 훈련을 받고, 성도간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 다 좋습니다. 비유컨대, 이런 것들은 영양가가 높은 좋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좋은 음식만 먹고 운동하지 않으면 비만을 불러와서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처럼, 위로와 치유, 축복에 관한 설교만 듣고, 또 각종 제자 훈련만 받고 전도하지 않으면 필경은 영적 비만이 되고 맙니다.
가장 건강하게 신앙이 성장하는 길은 신앙생활을 출발하자마자 전도하는 겁니다. 은혜 받았으면, 즉시로 그 은혜를 가까운 사람에게 간증하면 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안드레가 주님을 만나자마자 즉시로 자기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로 데리고 오고,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데리고 오는 것을 봅니다. 그들이 전도한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러 말 하지도 않았습니다. “와 보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하고는 “친구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초신자 때 하는 전도는 안드레나 빌립처럼, 확실하게 주님을 만나고 첫 사랑의 감격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오래 믿은 성도들처럼 복음을 능숙하게 설명하지 못하지만, 그 말에 감화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초신자 때에 전도 열매를 제일 잘 맺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영혼의 추수꾼이 되기로 결단하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그의 종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싫어하고 좋아하고를 떠나서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게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이고, 또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종이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거나, 빈둥거린다면, 주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0장에는 예수님께서 추수할 일군으로 열 두 제자들을 선발하여 보내시면서 주시는 명령과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가 이 사건을 여기에 기록해 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신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저는 지난 주간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이 본문을 가지고 깊이 기도하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도하며 묵상할 때에,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영육 간에 얼마나 축복이 넘치는 삶인지, 얼마나 드라마틱한 삶인지가 보였습니다. 이제 그것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천국 대표 선수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발하여 파송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들을 마태가 여기에 기록해 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열 두 제자가 살았던 삶과 같은 드라마틱하고 영광스럽고 복된 삶을 살아보라고 도전하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열 두 제자가 살았던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리고 하필이면 왜 열두 제자입니까? 성경에서 열 둘 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숫자입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온 세상에 하나님이 영광과 권능을 드러낼 사명을 부여받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복 주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천하 만민을 구원할 메시아를 유다 지파 중 다윗의 후손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파송하심으로 천하 만민을 구원하는 일을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선택하여 보내시는 열두 제자들은 구약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계승하는 참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열 두 제자의 삶은 마치 국가 대표 선수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작년에 열린 베이징 올림픽에서 수영의 박태환 선수, 역도의 장미란 선수, 유도의 박민호 선수, 배드민턴의 이용대 이효정 선수, 또 남녀 양궁 선수들, 또 야구 대표 선수들, 정말 잘 싸웠고, 좋은 성적을 거둬서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케 해 주었었습니다.
대표선수가 된다는 것은 매우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가 대표 선수가 되면, 국가가 책임지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훈련시켜 줍니다. 훌륭한 코치들을 붙여서 기량을 향상시켜 줍니다. 해외 전지훈련도 시켜줍니다. 보약도 먹여줍니다. 부상당하면 치료도 해 줍니다. 생활 전부를 책임져 줍니다. 선수들은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열심히 훈련 받고 연습을 많이 해서 기량을 향상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목에 걸면 최고의 영광을 받게 되고, 연금도 받게 됩니다.
천국 대표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서 그냥 무턱대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보내시기 전에 충분히 배우고 익히고 훈련하게 하셨습니다. 이론 교육도 시키시고 실습 훈련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11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천국 대표선수로 활약하는 동안에,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어떻게 먹고 입고 사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가면 이미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12-15절 말씀에는 제자들이 전도를 나가서 어느 집에든지 들어가서 그 집에 평안을 빌면 그 집에 평안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축복하는 권세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 마을은 심판 날에 소돔 고모라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천국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기로 결단하면,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천국의 대표선수들을 보호하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창12:3).
정리해 본다면, 우리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시켜 주시고, 또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영적인 권능도 주시고, 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용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또 우리에게 세상을 축복하는 영적인 권세를 주시고 우리를 해치려는 모든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물론 열 두 제자에 대한 말씀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임 사역자들, 즉 교역자들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전임사역자로 부름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모든 성도들은 사명자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직업 자체가 소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소명이라는 말은 사명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직업을 단순히 생계 수단으로 삼지 않고, 전도의 사명으로 알고, 사명을 감당하고자 애쓴다면, 주님께서는 일반 성도들에게도 전임 사역자들과 동일한 원리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건강을 지켜 주실 것이며, 사업에 복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전도하는 데 필요한 영적인 권세와 능력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도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전도자에게는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고,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어 영혼의 추수꾼이 되는 일을 두려워합니다. 자꾸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먼저 떠 올리며,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 대표 선수는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천국의 대표 선수는 누구나 될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의 면면을 보면, 어떤 특정한 조건이나 자격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믿음을 먼저 보신 것도 아니고, 윤리도덕적인 자격을 보신 것도 아니고, 출신 성분을 고려하신 것도 아니며, 학력을 고려하신 것도 아닙니다.
유일한 조건을 찾아본다면, 모두가 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중에 부름을 받았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이 부르실 때에 이유를 달지 않고 자발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순종하고 따랐다는 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인간적인 조건은 따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예,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순종하는 자는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억지로 우리의 팔을 비틀어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인격적인 분이기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따르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결코 주님은 우리 등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위협하며 몰아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열 두 제자를 불러 파송하시던 주님은, 오늘도 세상에서 주님을 대신하고, 천국을 대표할 선수들을 여전히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겠습니다.”라고 응답하기만 하면, 주님은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을 받으셔서 우리가 제자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교육과 훈련을 받게 해 주시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일용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세와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천국을 먼저 경험하라!
부르심에 응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국가 대표선수가 되면, 자기 분야에서 출중한 기량을 쌓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대표선수가 되고자 한다면, 천국을 충분히 드러내고 전할 수 있는 기량을 쌓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까? 7,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전파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먼저 천국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하는 말에 힘이 생깁니다. 예컨대, 어떤 회사의 판매원이 되면, 회사는 먼저 판매원 자신이 팔아야 할 제품을 충분히 누리고 경험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그 제품의 우수성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야 자신 있게 물건을 팔게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압니다.
하물며 주님께서는 어떠시겠습니까? 천국의 대표 선수가 되기로 작정하고 주님께 자신을 드린 성도들에게, 주님은 헌신되지 않은 성도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 신기한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시며 천국을 맛보게 해 주십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자마자 당장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삼년 반 동안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24시간 주님과 밀착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호흡하며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서 수많은 기적과 이사가 행해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경험이었을까요? 얼마나 드라마틱했을 까요? 사는 게 지루할 틈이 없었을 겁니다.
남다른 사명을 감당해야 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는 다른 제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경험도 합니다. 세 사람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홀연히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의논하는 것까지 목격했습니다. 그 때에 너무 신기하고 놀랍고 좋아서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초막 짓고 삽시다.”라고 정신없는 소리를 할 정도였습니다.
또 천국의 대표선수가 되어 세상에 천국을 전하는 삶은, 모든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을 고치며,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눈으로 보면, 병들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약한 것이 없이 모두 다 강하기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딘가 한 부분은 병들어 있고, 어딘가 한 부분은 연약한 부분이 있어 힘든 인생을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천국 복음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고통 받는 자들을 해방시켜 자유케 해 주며, 모든 영육간의 질병을 치유해 줍니다. 모든 약한 것을 치유해서 강하게 해 줍니다. 천국 복음은 화목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래서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 받던 이들을 구원하여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내가 전해준 복음 때문에 삶의 소망을 다시 찾고, 내가 전해준 복음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낫고, 마음의 질병도 치료되고, 심각한 갈등과 분쟁으로 깨어졌던 관계들이 회복되어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일보다 더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멋지고 행복한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의 삶은 드라마틱한 삶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하고 따른 지 만 36년이 다 되어 가는데,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힘들고 곤고한 날도 많았지만, 주님과 동행함으로, 결국에는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시편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고백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시30:5). 또 예레미야 애가 3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내가 지금까지 당한 고초와 재난을 생각하면, 낙심이 되지만, 중심에 회상해 보니, 오히려 소망이 보이는 것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한량없이 큽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고백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애3:19-23).
지금까지 결코 편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앞으로 남은 인생길이지만, 지금까지 신실하게 인도해 주신 주님께서 앞으로도 신실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경험하고 또 전하는 삶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신 표적처럼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과 같은 삶입니다. 천국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물 같은 인생이 포도주 같은 인생으로 변화됩니다. 삶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의 삶은 맹물과 같은 무색무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삶은 포도주 빛깔처럼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삶에 향기가 납니다. 삶의 가치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발을 씻는 허드렛물 같았을 인생이 잔칫상에 오르는 최고급 포도주와 같은 가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이며 여러분들의 고백이기를 소원합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연회장이 말하기를 나중 나온 포도주가 처음 나온 포도주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없는 삶보다 예수님이 내게 오신 후의 삶이 더 나은 삶입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완숙해지고 충만해지고, 더 행복해지는 삶이 됩니다. “지금도 행복하지만, 아직 내 생애 최고의 날은 오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누리고 천국을 전하는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 천국의 대표선수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첫 발걸음을 떼시면, 주님은 여러분들이 충분히 천국 복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히고 깨닫고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슴 속에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민망한 마음이 용솟음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뛰쳐나가게 하실 것입니다(고후5:13,14).
가까운 이웃에게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보면 천국의 대표선수들이 나가서 천국 복음을 전할 때에 지켜야 할 지침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5,6절에 첫 번째 지침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게나 사마리아인에게는 복음을 전하면 안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고, 복음 전파의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선적으로 내 가족을 구원하고, 내 형제를 구원하고, 내 주변의 가까운 이웃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의 우선순위는 가까운 곳부터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친지들, 친구들, 회사 동료들부터 전도하라는 겁니다. 금번 구정 명절에 고향에 가셔서 일가친척들을 만나시면,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예화) 미국의 교회성장학자 엘머 타운즈 박사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처음에 어떻게 교회에 나오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유형별로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친구나 친지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이 가장 많았고(86%), 이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86%) 그 다음으로는 ‘조직적 복음전도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6%), ‘목회자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6%), ‘광고를 통해서 나오게 된 사람'(2%) 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효과적인 전도는 친구나 친지를 전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도 가족이나 친지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내가 가까운 친지들로 인해서 구원의 복을 받았다면, 이제 나도 다른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빚 갚아야죠!
그런데 가까운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나의 삶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얄팍한 사탕발림으로 전도하는 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전도하려고 하면, 그 사람과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 번 잘하는 건, 예를 들어서 지나가다 만난 불쌍한 노인네 한 번 도와주고 구제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시부모에게 잘하는 것, 형제에게 잘하는 것, 직장 동료에게 잘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을 전도한 사람이 여러분에게 완벽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게 뭔가를 대단히 많이 도와준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평범한 관계였고, 그저 만나면 싫지 않은 사이 정도였을 수도 있고, 또는 아주 좋은 사이였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정도라면 전도가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동을 준 사이라면 더 전도가 잘 될 것입니다.
감동을 준다는 게 뭡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하는 겁니다. 본문에 말씀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원리를 보여줍니다. 너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니까, 세상을 살아갈 때에 은혜를 베풀고 살라는 겁니다. 네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조금만 더 양보하고, 조금만 더 희생하라는 겁니다. 그저 보통 하는 정도에서 조금만 더 해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개를 꼭 전도해야 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아직도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식구들이 있는데도 ‘올 해 아니면 내년에 전도하지…, 때가 되면 믿겠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천국과 지옥을 믿고 있습니까?”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른지 알지 못함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내일 전도할 기회가 주어질 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천국의 대표 선수로 부르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성실하게 따라갈 마음만 먹으면 다 천국의 대표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대표 선수가 되면, 천국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생활 일체를 책임져 주십니다. 사명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세를 공급해 주십니다. 천국의 대표선수로 살아가는 삶은 세상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삶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에 도전을 받으시고, 천국의 대표선수가 되기로 결단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당부합니다.
천국의 대표선수가 됩시다
마 10:1-15 / 양인순 목사
최근 개봉한 <국가대표> 라는 영화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단 5명뿐인 스키점프 선수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들은 연습장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드럼통 위에서 훈련합니다. 달리는 차 위에서 속도훈련을 합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은 1년에 30벌의 스키복을 입는데 한 벌로 버팁니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 나갔는데 얼마나 초라해 보였던지 다른 나라 선수가 자기 옷을 선물 합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지원도 해주지 않는 척박한 상황을 극복하고 이들은 동계 올림픽과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든 운동선수들의 최고의 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또한 국가대표는 조국을 대표하는 자리이기에 모든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을 모읍니다. 대표적인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와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환을 보십시오. 하루아침에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타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스런 자리는 하루아침에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피눈물 나는 연습과 훈련의 결과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무슨 대표가 되면 가장 영광스런 모습일까요? 아마도 천국의 대표선수가 아닐까요? 마지막 날에 세상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국 올림픽의 대표선수가 되어 주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 나라의 대표선수들을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의 12제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세상을 향해 파송을 하십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천국의 대표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좋은 코치를 만나야 합니다.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무엇보다 좋은 코치를 만나야 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선수라도 훌륭한 코치를 만나지 못하면 그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로마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 온 국민의 기대를 받았던 박태환 선수가 예선전에서 모두 탈락해서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좋은 코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으로 스타 마케팅을 활용하여 돈만 벌었지 전담코치들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왕대밭에 왕대가 나듯이 좋은 코치를 만나야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스승을 만납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인생이 역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복장애를 가진 헬렌 켈러에게는 위대한 스승 셀리번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를 셀리번은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헬렌 켈러가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훌륭한 인생의 스승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선생이 아닌 인생의 길을 가르쳐주는 참 스승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12제자들은 당시 상황에서 좋은 배경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시골촌놈입니다. 대부분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던 사람들입니다. 학문적으로도 배운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자들도 아닙니다. 성격적으로도 성질이 급하고, 모난 자들입니다. 그나마 가장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예수님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신 기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지금 모습보다는 미래의 변화될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똑똑하거나 인간적인 탁월함을 가지지 못했지만 우직할 정도로 충성된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주님이 부르실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할 당시에는 많은 실수와 약점을 보였습니다. 때로는 믿음이 적다고 책망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후 그들은 새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님의 일군으로 부름 받은 것은 특별한 인격적인 탁월함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이나 수고가 없습니다.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스승은 누구일까요?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미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스승을 만났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 내 삶 속에 다가오셔서 말씀해 주시고, 가르쳐주십니다. 의에 길로,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세상의 스승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스승 되시는 예수님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곁길로 가고, 심지어 배신을 해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잘못이나 허물을 폭로하지도 않습니다.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자들입니다.
둘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좋은 선수가 되려면 부단한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코치가 탁월해도 선수가 훈련받지 않으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받는 태능 선수촌이 있습니다. 그들이 올림픽이나 세계적인 대회를 앞두고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놀랍습니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극한의 상황까지 훈련합니다. 남자도 힘든 유격훈련을 여자 선수들이 받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을 쌓습니다. 그래야 대회에서 영광스런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3장 14-15절에서 제자를 부르신 목적을 보여주십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첫 번째 이유는 자신과 함께 있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훈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동거동락을 하시면서 훈련하십니다. 그들의 약점과 부족함을 다 감싸주시면서 포기하지 않고 훈련하십니다.
두 번째 이유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단순히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스승처럼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해야 될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능력이 필요합니다. 죄를 물리치고, 귀신을 좇아내며, 세상을 이길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1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권능을 부어주십니다.
이 능력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치유와 회복의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초대교회에 임했던 귀신이 떠나고, 병든 자가 치유되는 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나의 삶 가운데 이런 능력이 잘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은 믿음의 부재입니다. 기도의 부재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 사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시는 순간에 산 밑에서는 부끄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악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쩔쩔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자 당신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그 아이의 아버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귀신이 떠나가고 아이가 온전해집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9:28)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주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고치는 능력을 주셨지만 이들이 세상에서 창피를 당한 이유는 바로 믿음의 부족이요 기도의 부족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이미 우리에게 주셨지만 우리들이 그것을 믿음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지 못하기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주님이 이미 허락하신 믿음의 권능, 기도의 권능을 회복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에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영적 야성이 필요합니다.
제가 병원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송함이 있었습니다. 이 목 디스크 하나 못고치고 병원 신세를 져야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바울의 고백처럼 ‘약할 그때가 곧 강함이니라’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함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약함 속에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믿음의 열망을 의미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우리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서 병든 자가 치유되고 회복되고, 문제가 회복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킵니다. 믿음의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믿음의 기도는 탄식을 새 노래로 바꿉니다. 믿음의 기도는 새로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믿음의 기도로 날마다 축복의 문을 열어가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세 번째 이유는 전도자로 파송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시고, 능력을 주신 이유는 바로 전도자로 보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부르신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훈련시키시고, 능력을 주셔서, 전도자로 파송키 위해 제자들을 3년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강한 훈련을 받은 자가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저절로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말씀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배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섬김과 봉사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전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배우기를 멈추는 자는 신앙이 정체합니다. 프로그램을 이수했다고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해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충성스런 믿음의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권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날마다 훈련받기를 즐거워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결국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한 주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훈련의 목적은 믿음의 성숙을 통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5-6) 명하십니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인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복음 전파의 우선성을 강조하신 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교,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서 천국가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를 천국의 대표선수로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 선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망각하는 순간 능력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헛된 야망을 품습니다.
우리들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내 믿음도 부족한데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고 합니다. 내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어떻게 남한테 전도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믿음의 초보일 때가 전도를 잘합니다. 우선 주변에 불신자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나면 가슴이 뜨겁습니다. 오히려 순수하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잘 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선교역사에 중요한 한 분이 있습니다.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라고 하는 조그만 섬에서 태어난 문중경 전도인 입니다. 지주 소리를 들을 정도로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중도라는 섬으로 시집을 갔는데 애를 낳지 못했습니다. 5년을 기다려도 애가 생기지 않자 시댁식구들로부터 모진 핍박을 받았습니다. 결국 가출을 해서 죽기로 결심합니다. 기왕 죽을 바에 사람이 없는 섬이 아닌 서울에서 죽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상경합니다.
그런데 천막을 치고 사람들이 모여서 박수를 치고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부흥사였던 성결교 이성봉 목사님이 인도하는 전도 집회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무엇이 좋아서 저렇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서 뒤에 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자살하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라면 남은 인생은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이 목회하고 계시는 목포의 교회로 내려가서 양육을 받고 전도인이 됐습니다. 한참 전도를 하다가 생각해보니 자기를 구박하던 시댁이 살고 있는 중도로 돌아가서 그들을 전도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네 어귀에 서서 찬송과 성경을 손에 들고 치마 저고리를 입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애를 낳지 못해 구박 받다가 도망간 여자가 갑자기 돌아와서 찬송을 부르니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복음의 열정이 입술을 통해 선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도에서 자기가 태어난 섬으로, 그 지역의 여러 섬들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육이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섬에까지 들어온 공산당이 문중경 전도인을 잡아다가 총살시켰습니다. 그녀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문중경 전도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중에 목사가 된 사람이 68명이나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분들 가운데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도했던 영향력 있는 목사님들이 나왔다는 점입니다.
성결교의 유명한 부흥사요, 한기총 회장을 지낸 이만신 목사님이 있습니다. 지난 세기 동안 캠퍼스에서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복음의 불을 붙인 김준곤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을 통해 수 십 만 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김준곤 목사님의 영향을 받고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홍정길 목사님, 이동원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입니다. 구박받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그분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지역을 변화시키고, 이 민족을 새롭게 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을 배출하는 놀라운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어떤 역사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문중경 전도인이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통해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천국 복음은 겨자씨와 같습니다. 오늘 비록 작은 씨앗을 심지만 그 씨앗이 자라나면 큰 나무가 됩니다. 새들이 깃들이고, 사람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들이 전도자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갈 때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 7-8절에 보면 천국 복음을 전파할 때 병든 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 메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자에게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일군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과 필요를 채우신다는 약속입니다.
제가 대학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활동할 때 거지전도 여행이 있었습니다. 일주일동안 각 지역을 정해서 기도하고 무작정 떠나는 것입니다. 주머니에는 돈이 없습니다. 어디서 먹고, 어디서 잠을 잘지 모릅니다. 오직 믿음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일 주일 동안 한 번도 먹지 못해 굶은 적이 없습니다. 잠자리가 없어서 잠을 자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먹을 것을 주시고, 잠자리를 예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복음을 들고 나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십니다. 성전에만 앉아서 필요를 구하지 마시고, 나가서 힘차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주의 일하고, 주님은 내일을 하시고’ 그렇습니다. 내가 내일을 하는 것보다 주님이 내 일을 해주실 때 더 확실한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 문제를 붙잡고 염려 근심가운데 살지 마시고, 믿음으로 맡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질병이 떠납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막혔던 문이 활짝 열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할렐루야!
오늘 좋은 청년 비젼트립 파송식이 있습니다. 짧은 4박 5일 동안이지만 이들이 복음을 들고 나아갑니다. 필리핀 톤도 빈민지역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눕니다. 틀림없이 놀라운 주님의 능력과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좋은 청년들의 가슴 속에 놀라운 부흥과 비전이 불타오를 것을 믿습니다.
다음 주에는 그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인도의 리안 목사를 우상의 땅 인도로 파송합니다. 아직 구체적인 사역의 일정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복음의 파수꾼으로 파송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전도자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파송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끊임 없이 우리들이 세상을 향해 전도자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을 천국을 대표하는 대표선수로 선발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의 부르심에 헌신해야 합니다. 가든지 보내든지 우리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침내 주님의 보좌 앞에 서는 그날 ‘너는 나의 충성된 종이었노라’는 칭찬과 영광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천국의 대표선수로 달려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찬양으로 헌신을 다짐합니다.
정직함으로 세상을 고치라
마 10:1-15 , 신 6:18 / 김동호 목사
우리 교회의 이름은 높은 뜻 숭의교회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동안교회의 지원으로 시작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이름에 동안이라는 이름을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에 했었지만 동안교회 당회가 지원은 하되 분립개척의 형태에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 이름에 동안이라는 이름을 넣지 않았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동안교회와 함께 숭의학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숭의학원 캠퍼스 안에 세웠기 때문에 교회 이름을 '숭의'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대개 교회 이름을 지을 때 가장 무난한 것이 그 지역의 이름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崇義라는 학교의 이름은 높을 崇, 옳을 義로서 義를 높이는 학교라는 의미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로서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義는 단순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의 正義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義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義는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곧 하나님의 義요 그 하나님의 義가 이루어지는 나라가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숭의교회라는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높은 뜻'이라는 말은 崇義를 우리말로 한번 풀어 준 것입니다. 崇義라는 말을 우리말로 풀어 줌으로 그 뜻을 분명히 하였고, 반복을 통하여 그 뜻을 강조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가 좋습니다. 정말 완벽하고 완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 예배 때마다 주기도를 읽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주기도문 중에서도 저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말씀이 제일 좋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사는 곳이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할 것 없이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의 '높은 뜻'은 우리의 높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영어 이름은 'God's Will Soongeui Church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이름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이름이 제일 좋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름대로 사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거기서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자기의 소원과 뜻을 이루는데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과 소원에 관심을 가지고 그 뜻과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뜻과 소원이 주안에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 즉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 주일 우리 교회 강단을 통하여 선포되어 지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반복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읽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냥 교인이 되어 예수 믿는 것을 즐기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자 같은 교인들이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치유하고 고치는 교회와 교인이 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와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에 주시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기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교회입니다. 병들고 귀신 들린 세상을 가슴에 품고 저들 속으로 들어가 저들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라고 하나님은 이 귀한 동산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병들고 귀신 들린 세상을 치유한다고 할 때 도대체 우리나라의 어떤 병을 고치고 어떤 귀신을 쫓아내야만 하는 것일까요? 저는 몇 주에 걸쳐서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일 먼저 다루려고 하는 주제는 '정직'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서 배우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선진국일수록 정직하고 후진국일수록 정직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선진국의 바탕은 '신용'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신용을 잃으면 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그런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진국에 살아도 신용이 없으면 후진국 수준의 삶 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용은 정직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탈바꿈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의 능력은 절대로 세계 어느 곳에 내 놓아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백성들이라고 믿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도 쉽게 선진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신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투명하지 못합니다. 정직하지 못합니다. 원칙과 기본이 아직도 자주 무시되는 그런 후진성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발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병중에 하나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과 '원칙'이 나라를 살립니다. '거짓'과 '요령'이 나라를 망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와 같은 나라의 병을 고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거짓된 세상을 고치기 위하여 우리가 하여야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냥 우리들이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고 좁은 길을 가는 것과 같이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정직하게 살기를 힘쓴다면 점점 세상이 고쳐지게 될 것입니다. 바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정말 그것을 믿습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거짓 말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짓 말을 하지 않고 살려고 하면 첫째, 생각과 말이 같아야 하고 마음과 말이 늘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 곧 우리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말과 생각, 말과 마음이 다른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살다보면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말을 아끼면 됩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책임 질 수 없고 책임 질 마음도 없는 말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도록 조심하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성경도 사람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약 3:2)
생각과 다른 말, 마음과 다른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만의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거짓 말을 하지 않고 산다면, 그것을 위하여 날마다 자기 입에 파숫군을 세우고 조심하며 기도하며 산다면 이 땅에 치유 받게 될 것입니다. 건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둘째, 말과 행동이 같아야만 합니다. 말은 생각과 마음과도 같아야 무엇보다도 행동과 같아야 합니다. 생각대로 말을 하고 말을 했으면 말한 대로 행동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옳고 바른 말을 한다고 하여도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로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쟁이'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말은 번듯하게 하는데 사는 것은 그 말과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말에도 신용을 얻어야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행동과 삶에 있어서 신용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집사님 한 분이 아주 오래 전에 친구 빚 보증을 잘 못 서서 집을 팔아 그 빚을 대신 갚은 적이 있습니다. 채권자가 그 집사님에게 당신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하니 보증을 선 당신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집을 팔아서라도 갚아 줄 터이니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집을 팔아 보증 선 친구의 빚을 갚겠다는 말에 그 채권자는 그것이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은 그 채권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 한대로 합니다"
그 집사님은 정말 집을 팔아 보증 선 친구의 빚을 갚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서울 변두리로 나아가 땅을 사서 다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변두리가 어디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한남대교를 건너가면 리버사이드 라는 호텔이 있는데 그 호텔 바로 옆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곳이 변두리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 집사님이 저에게 해 주셨던 다음과 같은 말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지금 이 집을 팔면 그때 보증 때문에 잃어버렸던 집 세 채 사고 조금 남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말 중에 하나가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 한대로 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 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신용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말을 바르게 하는 것과 행동을 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사는데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르지 않고는 말과 행동이 바르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생각이 발라야 됩니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은 이 잘못된 속담이 우리 민족의 철학이 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철학이 지금 우리 민족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요령과 편법을 원칙보다 발이 빠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칙과 법을 고수하기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요령과 편법을 쓰게 됩니다. 요령과 편법이 처음에는 빠른 것 같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령과 편법이 통하기 시작하면 모든 사람이 다 원칙을 따르지 아니하고 요령과 편법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요령과 편법이 서로 얽혀서 오히려 힘들게 되고 불편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과 법을 고수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편합니다.
요령과 편법을 쓰지 아니하고 답답해 보여도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아직도 요령과 편법 그리고 불법이 난무한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원칙과 법을 고수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처음에는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그 손해를 무릎 쓰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나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와 같은 사람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 여러분 사랑하는 우리나라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법과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하다 못해 교통 신호 하나라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되십시다. 공중도덕을 지키고 작은 룰 하나라도 세웠으면 우직하게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사랑하는 세상의 병을 고치는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거짓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어려움과 손해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바보 될 것 같습니다. 손해 볼 것 같습니다. 망할 것 같습니다. 실패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면 복을 받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정직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신 6 :18)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의 법과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요령과 꾀를 좇아 거짓되게 살던 사람들이 정직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저들도 우리들을 따라 정직하게 법과 원칙을 따라 살려 할 것입니다. 자연 세상의 병이 치유되게 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는 자라 하였습니다. 거짓된 세상의 꾀와 요령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정직하게 살기를 힘쓰는 사랑하는 높은 뜻 숭의교회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약속된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 시냇가의 나무 같은 복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복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그 복을 부러워하여 저들도 정직한 삶을 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짓이라고 하는 중병에 걸리 세상을 고치고 바꾸고 치유하며 살아가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명 받은 삶은 이렇습니다
마 10:1-15 / 최영기 목사
우리 주위에 보면 삶에 보람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냈을 때에 소명을 주어 보내셨고 우리는 소명 완수를 위하여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 개인의 행복 추구에 인생의 목표를 세우니까 바쁘고 잘 나갈 때에는 모르지만 좌절을 경험하든지 자신의 일이 없어졌을 때에는 인생 전반에 관하여서 회의를 느끼고 허무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명을 갖고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사명을 소명이라고 부릅니다. 소명을 위하여 사는 삶에는 기쁨과 보람이 있고 역경을 당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본문에는 특별한 소명을 받아 예수님께 부름 받은 12 사도 들이 등장을 합니다.
I. 소명 받은 사람의 자격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선택하셨는데 우리가 사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12명을 뽑으신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2 지파로 이루어져있는데 새 이스라엘을 시작하신다는 의미가 가장 크겠습니다. 그런데 가정 교회를 해보니까 12 명이라는 인원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12명이 진정한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최대 숫자라는 것입니다. 목장 식구가 12 명이 넘으면 친밀도가 떨어집니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앉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목장은 12명이 되면 칼날같이 분가를 하는 것입니다.
1-4절에는 사도들의 명단이 나와있습니다. 마가 복음과 누가 복음에도 명단이 나와있습니다. 세 명단의 공통점은 베드로가 처음에 나오고 가롯 유다가 마지막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2절에 '첫째로' 라는 단어는 베드로는 사도 중에서 머리 노릇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차이는 누가 복음에는 다대오 대신에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나오는데 같은 사람인 것 같고 유다라 예수님을 배반했기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유다 대신에 다른 이름 다대오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또 이들의 이름을 열거한 순서도 약간씩 다른데 3그룹으로 나누면 세 복음서 다 첫 이름은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빌립과 알패오 아들 야고보가 그룹 리더가 아닌가는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에게 소명을 주신다
이들 열두 명의 이름을 보면 12 사도 명단에만 한번 등장하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나 다대오 혹은 열혈당원 시몬은 다음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성경에 한번 정도 이름이 등장을 하기는 하지만 후에 어떤 사역을 하였는지는 대부분이 잘 알려져 있지를 않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12 사도들이 예수님에게 직접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역사에 남을만한 업적을 남길만한 큰 인물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12 사도들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장렬하게 순교를 했는지에 관한 전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것은 문자 기대로 전설이지 신빙성은 결여되어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도 소명을 위하여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1) 인간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그들의 일이 역사에 남길만한 일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쓸모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시선을 끌지 못할 만큼 크지는 못했을 망정 그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에 없어서는 안될 일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이러한 사람들을 선택했다는 것이 큰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 전서 12 장에 보면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했고 눈에 뜨이지 않고 작은 지체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고전12:12, 22). 눈에 뜨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눈에 뜨이지 않는 사역,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아니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역이 하나님에게는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할 때에 이것을 기억하여야합니다. 눈에 뜨이는 가시적인 결과가 있는가 없는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가 않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다음 질문을 던져야합니다. 주님의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2) 충성할 때에 소명을 완수한다
소명 받았다고 하면 목회자가 되겠다고 하는 분들 가운데에서 시작점을 자신에게 두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도저히 더 세상일을 못하겠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 외에는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시발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주님의 필요에서 시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필요는 반드시 목회자가 되어야함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필요의 대부분은 목회자에 의하여 채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명은 목회자와 되느냐 안 되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 나에게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하는 욕구가 있는가 없는가 입니다.
깨어진 가정들이 눈에 뜨이고 이러한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파괴적으로 되는 것이 안타깝고, 그리하여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한 가정을 꾸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건한 자녀를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면 이분에게는 가정이 소명이 됩니다. 부패한 사회,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의 부정 부패에 대해 분개하게 되고 주님의 뜻대로 사업을 하여서 이를 키워보겠다는 강한 욕구 가운데에 이러한 사업을 일구기를 위하여 일하면 이 사람에게는 사업이 소명이 됩니다. 소외받은 노인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자신이 이들을 돌보아 드려야 할 것 같은 당위성이 느껴지고 이를 위하여 일할 때에 이분에게는 이것이 소명이 됩니다.
분명한 소명을 받았으면 사람들이 알아주는지 안 알아주는지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은 충성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상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때에 소명이 완성이 되는 것이고 소명을 완수하며 살 때에 사람들이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해주지 않는다 할 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소명 받은 사람에게는 능력도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부르셨을 뿐만이 아니라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세상에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났고 또 많은 추종자를 불러모았지만 예수님처럼 능력을 전수해주었던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어떻게 하면 능력이 나올 수 있는지 가르쳐준 사람들은 있었지만 예수님처럼 능력을 전수해준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일을 사도들이 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전수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소명 받은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소명을 완수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실로 소명을 주셨다면 보나마나 그 일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언제나 내 능력의 한계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바꾸어야합니다. 하나님의 필요가 있는가? 나에게 이 필요를 채워야할 사람이 나라는 확신, 아니면 이 필요를 내가 채우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습니다'라고 하면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소명 받은 사람의 삶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신 후에 두 명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내십 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을 통하여 우리는 소명 받은 사람의 삶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습니다.
1.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산다
예수님은 이방사람의 길로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로나 시돈 즉 북이나 서쪽으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요단강 동쪽으로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즉 남쪽으로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갈릴리에 있는 유대인에게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의 뜻입니다. 그러나 계획과 순서가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유대인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있어서 복음 전파에 지장을 줄 것이라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에게는 당신의 계획이 있으시고 time table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순종하여야합니다. 갈릴리에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갈릴리에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쓰임 받는 제자의 태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꿈이니 비전이니 하는 단어를 경계합니다. 목회의 꿈이나 비전을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 ‘큰’ 사역을 말합니다. 나는 10명 교인의 시골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 비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회 꿈과 비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필요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소명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목회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필요와 소원을 위하여 일하여야합니다.
2. 생활의 필요는 하나님에게 의지한다
주님께서는 여행을 위한 돈이나 여별 의복 등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 니다. 이유는 사역하면서 생기는 필요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군이 자기 먹을 것을 얻는 것은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생은 출장이다" 라는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회사 일도 출장 가는 사람의 출장비는 회사에서 대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의 분명한 부름이 있어서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는 사람의 생활 책임을 주님이 책임져주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소명이 분명하다면 생활의 필요를 채워주실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뛰어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명을 위해 살면 사업이나 직장, 가정에 희생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소명을 위해서 살자면 생업의 성공이 인생 목표가 된 사람들처럼 많은 에너지를 쏟을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부모들처럼 자녀들에게 신경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명을 따라 살면 다른 사람만큼 시간과 정력을 쏟지 않아도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길도 열어주시어서 사업이 번창하고 자녀들과 남만큼 시간을 못 보내어도 자녀들이 잘 자라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 소명을 따라 사는 자들을 돌보아주십니다.
3. 긴박감을 갖고 산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에 당도하면 합당한 집을 찾아서 한 곳에 머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찾아서 평화를 빌어주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이면 그곳에 머물고 그러나 거부하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떠나라는 것입니다. 집을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거룩한 유대인이 이방인들의 땅을 밟고 돌아와서 쓰는 제스처입니다. 부정한 땅과 결별한다는 뜻입니다. 마을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도 마을에 대하여 같은 제스처를 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느끼는 것은 긴박감입니다. 앞에서 준비 때문에 시간을 쓰지 말고 즉시 떠나라는 것도 긴박감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다음 집으로 다음 마을로 옮겨가라고 하시는 명령 가운데에는 짧은 시간에 최대한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다급함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교적 이러한 다급함을 느끼며 사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항상 건강하라는 법이 없다. 우리 교회가 항상 성령 충만하라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항상 내 말에 귀를 기울이리라는 법이 없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질 때에 사명을 완수해야한다는 긴박감 가운데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를 만든다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가정 교회 전파라는 우리 교회에 특별히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 외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총회니 연합회니 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제가 그런데 정신을 쓸 마음 여유가 없습니다. 저와 의견이 다른 분들과 만나 옳다 그러다 논쟁을 벌일 마음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이 같은 분들과 사역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긴박감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남 하는 일에 다 끼어들고, 오해가 있으면 다 변명하고, 섭섭한 일 당하면 다 상처받고… 이래 갖고는 소명을 이루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소명에 집중하여서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소명과 상관이 없는 것은 무시하고 소명에 방해가 되는 것은 피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4. 하나님의 보호가 따른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벌보다 더 심한 벌이 내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자들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대표해서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을 거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역자에게는 이러한 보호가 따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이 자신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벌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에 어떤 성도들은 반발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그 목사님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일군들에게는 그러한 보호가 따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저주가 따랐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창 12:2,3).
우리들이 주님의 사역자가 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귀한 존재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따랐던 축복과 저주가 같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이러한 것을 알 때에 우리는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태권도 고단자는 자신이 남의 급소를 쳐서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싸우지도 않고 힘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같이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이러한 조심성을 가져야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태권도 고단자가 누가 도전해와도 그냥 넘기고 싸울 기회를 피하듯이 우리도 어떤 사람이 우리를 대적하게 되는 위치에 들어가지 아니하도록 배려하여야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소명 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저는 전에는 어떤 분이 기도 요청을 하면 본인이 직접 하라고 하였습니다. 본인이 하거나 목사인 내가 하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소명 받은 사람에게 따르는 특권이 있다는 것이 서서히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명 받은 사람이 복을 빌면 진정으로 복이 내리고 기도하면 더 응답이 잘 온다는 것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도 소명을 따라 살면 이러한 특권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웃을 위하여 기도해주고 축복해주는 일에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남편과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목자는 목장 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역부장은 사역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도에 더욱 더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권능을 주시니라
마 10:1-15 / 박지온 목사
오늘 제목을 "권능을 주시니라" 그랬습니다. 10장 1절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그랬습니다. 앞에 말을 다 쓰지를 않았습니다. 고치는 권능을 주시는데 어떤 권능을 주시느냐? 이럴 때에 본문에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할렐루야!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마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로 신앙생활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말씀한 것처럼,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신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또 그렇게 말씀을 했고, 로마서 10장 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고,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모든 문제 해결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흑암에 세력이 떠나고,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했다는 그 속에, 약함과 병듦과 그런 모든 정신적인 것과 귀신의 역사들 완전히 해결한다! 이렇게 말하고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하는, 이런 어떤 배경들이 많이 나옵니다. 뭐 예를 들어서 계속해서 귀신을 쫓아내는데, 쫓아 낼 때는 나가는 것 같다가 또 들어오고, 또 뭔가 낫는 것 같다가 또 아프고, 또 뭐 되는 것 같다가 또 안되고, 되었다가 안되었다가, 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막말로 해서 '지 마음 대로라!' 그래서 어떤 사람은, '뭐 하나님이 엿장수냐? 마음대로 하게... 지 마음대로 왔다가 갔다가' 그래서 이런 배경 때문에 불 신앙이 오기도하고, 염려가 오기도 하고, 걱정이 오기도 하고, 그런 부분들이 많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쫌 붙잡고 우리가 기도해야 되겠는데, 쫌 원천적인 면을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그 우리 훈련을 받는다는 것, 요즘도 가끔 합숙에 가고, 팀 합숙에 가고 이렇게 하는데, 그 훈련을 받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흑암 세력을 꺾는 사실에 대한 실제적인 힘이 됩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아무것도 그런 어떤 준비가 안 되면서도 '안 된다, 안 된다!' 그런 분들이 많이 있는데, 실제적으로 여러분 훈련받는 과정 속에서 이런... 뭐가 되느냐? 인격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쫌 그 기초적인 면을 우리가 붙잡고, 또 그런 면을 확인하면서 어떤 면관으로 또 적용이 되고, 적응이 되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흔히 '우리가 사단을 쫓아낸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사단을 쫓아낸다는 말이, 그게 상당히 어패가 많아요. 왜냐하면, 사단은 여러분에게 쫓겨나갈 존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다가섰던 그런 놈이니까! 이건 뭐 근본 적인 그런 문제인데, 사단을 쫓아내었다고 나가고, 안 쫓아내었다고 들어오고, 이런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확인해야 됩니다. 그러니 뭐 혹시 그 뭔가 이렇게 귀신에 시달린 사람들 많은 경우 여러분들이 아마 듣고, 또 경험한 사람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요.
어떤 경우에 뭔가 쫌 귀신에 시달리고, 어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뭔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쫓아내니 나갔더라!' 그런데 뭐 금방 들어왔는데요. 그리고 금방 또 들어왔더라! '쫓아내니 나가고, 놔두니 들어오고...' 그런 배경이 아니고 그런 배경, 근본적인 그런 문제를 조금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해서 여러분들이 아무리 쫓아낸다고 사단이 쫓겨나갈 존재가 되고, 다시 여러분이 안 쫓아낸다고 들어올 그런 힘이 없는 존재는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어떤 느끼는 것과 상관없이 사단은 엄청난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쫌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는 분은, 늘 말씀을 들어도 이게 별로 그렇게 실감이 안 나는가봐! 자기도 할 수 있는 것처럼 자꾸 생각을 해요. 여기서 빠지는 것이, 이제 신비로 빠지고 뭐 다른 노력으로 빠지고 그럽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신비주의는 불 신앙에 또 다른 형태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내가 노력하고, 내가 뭘 하겠다!' 하는 그 배경은 이런 배경으로 우리가 흘러갔던 것이 뭔가 신비주의 배경으로 많이 흘러갔었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불 신앙에 또 다른 형태입니다.
그런 어떤 사실을 알고 흔히 우리가 사단을 쫓아낼 수 있다는 이런 배경 자체가 다른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를 가지게 되고, 그런 어떤 쓸 때 없는 헛된 싸움을 하게 되는 이런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단에 존재를 '쫓아낸다! 결박한다!' 뭐 이런 어떤 단어들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오직 한 분밖에 다른 분이 없어요. 누구라 구요?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예수그리스도 말씀을 이렇게 안 붙이는 것은, 바로 설명을 근원적으로 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사단을 꺾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이 외에는...
그래서 이 사단이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어디로 쫓겨났느냐? 장소를 이 땅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임금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다! 그렇게 별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와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사로잡았어요. 왜? 언제? 언제입니까? 그게! 창세기 3장에 늘 말하는 창세기 3장! 그러니 인간들을 사로잡고 불행과 고통으로 이끌어왔죠.
그런데 이 인간들에게 실제적인 이 고통과 괴로움의 사단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단의 세력을 꺾기 위해서, 쉽게 말해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우리가 누구라 그랬습니까? 예수라 그랬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하는 성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누구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방법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 땅에 인간과 교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과 교통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안됩니까! 그래서 그 방법이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이라! 그걸 우리가 아는 크리스마스라! 예수께서 이 땅에 성탄절 성육신 하셨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바로 그분을 우리는 뭐라 그랬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뭐냐하면, 우리 개념에서 반드시 뭔가 아이를 낳아야 아들이 되고, 그런 개념보다도, 여기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럴 때에 한번 물어봅시다. 아들과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까, 같습니까? 질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내 아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 결국 뭔가 성경에서 이것이 상당히 우리 그 뭔가 육신적인 예로 이해가 잘 안 되어요.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라 그렇게 말씀을 했죠. 말씀하면서 하나님이신 것을 한마디로 말할 때에, '주는 그리스도시오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 이걸로 신앙고백해서 말씀을 분명히 확인을 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오셔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인간을 사로잡고있는 흑암에 세력을 잡고있는 사단과 전쟁이 한판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 흑암에 세력을 완전히 꺾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 예수님께서 어디 가서?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누가 됩니까?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로 믿는다! 그럴 때에, '예수만 믿어서 된다!' 간단한 말은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그럴 때는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제게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믿습니다. 뭐냐? 왕으로 오셨고, 선지자로 오셨고, 또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이 일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왕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과 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과 제게 이런 사역이 성취되지 아니하면, 사단에게서 해방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했다!' 로마서 8장 1절에 말씀한 사실을 십자가에서 뭐라 그랬습니까? '다 이루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내가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것은 뭐냐하면 바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믿습니다! 내가 모십니다! 내가 영접합니다! 내가 그 인격을 내가 모십니다!' 바로 이런 사실이 믿음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영접과 믿음은 같은 뜻으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뭐냐하면, 요한 복음 1장 12절에 말씀한 것처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뭐라 그랬습니까?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느니라' 그랬습니다. 권세를 주었느니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사단을 쫓아내고 여러분들이 흑암의 세력을 쫓아내고, 그런 것이 내가 노력하고, 내가 많이 막 노력하고, 많이 기도하고, 많이 그렇게 부르짖었더니 흑암이 나가고 사단이 쫓겨 나갔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그 하나님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승천하시고, 그 다음에 다시 나가야 됩니다. 그 다음에 누구로? 하늘에서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셔서 여러분과 저에게, 개개인에게 임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임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실제로 누가 내 안에 오십니까? 성령께서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께서 삼위 하나님이신 내 안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안에 동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성령내주!'라 그럽니다. 이 상태는 우리는 '영접'이라 그럽니다. 이 상태를... 그러니 여러분들이 입으로 뭐 그냥 이렇게 해 가지고 영접하는 것, 이것은 영접이 아니고 내가 영접할 때에 성령으로, 영의 역사가 실제로 내 안에 하나님과 아들과 성령으로 삼위 하나님이 내 안에 실제로 오시는 사역을, 우리는 '성령내주'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영접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영접하는 순간에 여러분과 저는 신분이 확 바뀌어 버렸습니다. 누가 되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신분을 확인할 때마다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신분을 확인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때부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 나와 동행하신다! 이럴 때에 누가 감히 역사하지 못하느냐? 누가 들어오지 못합니까? 사단의 역사가 떠나갑니다. 내가 '나가라!' 그래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정확하게 성령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순간에, 내 안에 오시는 순간에 사단의 세력은 그때부터 발붙이지 못합니다. 떠나가게 됩니다. 추방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실이 안되면 아무리 눈 부릅뜨고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예수 이름으로 사단아 나가라!' 고함을 질러도 사단은 조롱을 합니다. 오히려 '오냐, 내가 여기 있다!' 그러고, 그게 나가는 게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근본적인 사실이 안되니까 자꾸 문제가 옵니다. 그래서 이 근본적인 사실이 확실히 이루어지고, 이것이 뭐냐하면 생활 속에, 생각 속에, 느낌 속에, 감각 속에 전부 자리잡게 되는 것을 가지고 우리는 뭐냐? 복음 체질이 되어야 된다! 그러고 이것이 뭐냐? 복음에 뿌리를 내려야,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사단이 발붙일 장소가 없어요.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내가 눈 부릅뜨고 '가라!' 그래야 가고 '가지 마라!' 그래서 안 간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일하는 사건마다, 흑암에 세력이 다 추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뭐 사단을 축출한다! 추방한다! 이런 단어를 쓰는 것도 사실은 합당한 것도 아니에요. 내 속에 추방하는 권세가 있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흑암에 세력은 추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고 뭔가 자꾸 하려고 그러면, 인본주의 나오고, 열심만 나오고, 애만 먹고, 금식할 때 배만 고프고, 어렵다! 이겁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안되어요. 자꾸 다른 방면으로... 우리가 지금 현재 확인하고, 바로 붙잡아야 될 것이 뭐냐? 근본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붙잡아야 돼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조금 설명을 앞에 드린 것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뭘 주었어요? "권능을 주시니라" 그랬는데, 여기서는 권능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권세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에 내가 권세를 받았습니다. 권세를 받은 자가 권세를 사용할 때에 나타나는 증거입니다. 힘입니다. 그러니까 권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데 권능이 나타난다! 그러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내가 복음이 안 되어있는데, 막 권능이 나타난다! 이상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다른 역사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뭔가 자꾸 신비주의에서 조심하는 것이 뭐냐하면, 뭐 복음이 안되었는데도 막 기도하면 무슨 역사가 일어나고, 그것은 반드시 복음의 역사가 아니고, 다른 이상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그런 역사가 나타날수록 어렵고 힘든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우리가 예수가 그리스도로 우리 안에 확실히 자리잡고, 우리 안에 뿌리가 내리고, 복음으로 바로 붙잡아 지게 될 때에 흔히 그런 말씀하죠. 이때부터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우리 7가지 축복이라 그래요. 7가지 축복! '7가지 축복' 그럴 때에 간단하게 신분과 또 뭘 주셨어요? '권세를 주었다!' 그랬습니다. 신분 그럴 때에 3가지라 그랬죠. 첫 번째 뭡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죠. 하나님의 인도 받으면 어떤 역사가 나옵니까? 기적의 역사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신분이 바꾸어지면, 그러니까 여러분 신분 바꾸어 졌다! 그럴 때에 간단하게 나오는 게 아니고 엄청난 그런 변화가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로 확인되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분이 바꾸어 졌다!' 그러면서도 우리 존재가 엄청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안 되어요. 신분 바꾸어 졌는데도, 생각과 마음은 옛날 그대로입니다. 그러면서 나오지 않는 배경이 뭐냐하면, 권능이 안나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믿음 회복이라!' 그러고 '영성 회복!' 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이렇게 뭐 여러 가지 말합니다 만은, 권능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권세 위에 사용될수록, 권능이 나오게 되는데, 여러분 신앙의 삶에 권능이 안나오고, 이런 신분이 바꾸어지게 되면 주신 것이 자연적으로 네 가지 권세라 그럽니다.
그러니 기초적인 면을, 이걸 뭐 맞다, 틀린다! 그래서 사용하라, 하지 마라! 이런 여러 가지 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만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뭐 천군 천사 동원 권이다! 있다, 없다! 할 것 없어요. 여러분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제일 먼저 그 부여된 힘이 바로 알아야 될 것이, 흔히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단 결박 권이라 그랬는데, 여러분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로 내 안에 오시는 순간에 내 안에 있는 사단은 결박한다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사족을 못쓰고 도망가 버립니다. 뭐 결박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이것을 조금 이해를 하셔야 돼요. 권세가 주어졌다! 그럴 때에 그 권세가 주어진 사람의 상황에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 조금 후에 좀 설명을 한다 그러면 이런 배경이 나옵니다. 10장 10절 말씀 보면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제대로 일꾼이 되면 먹을 것 입을 것 생긴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마 10:11)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 10: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마 10: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어떻게 된다 그랬습니까? '돌아온다!' 그랬습니다. 너희가 그 집을 향해서, 그 집에게 평안을 빌 때에 그 집이 평안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받을 수 있는 인격이,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러면 임할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 '합당하면' 하는 말은 그릇을 말하거든요. 쉽게 이것은 인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권세를 받았습니다. 권세를 받고 어느 수준에 그릇이 되어야 뭐가 나옵니까? 권능이 나옵니다.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받기는 받았는데, 전혀 이것이 안되니까! 우리에게, 나가도 이 사실적인 역사가 안 나와요. 뭔가 쫓아내었기 때문에 많이 나온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막 눈을 부라리면서 막 가는 곳마다 '사단아 나가라!' 그러고, 눈 부릅뜨면서 돌아다니고, 이런다고 사단이 나가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이 뭔가 권세를 받았고 인격이 되었다! 그릇이 되었을 때는 가는 곳마다 흑암에 세력은 꺾여버리는 겁니다. 묶여지게 되는 겁니다. '나가라, 들어가라!' 할 것도 없어요. 흔히 이런 것을 보죠. 가정에 귀신들린 문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참 상상밖에 많습니다. 일본은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도 점점,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게 집사는 올 때는 오는 즉시 아이가 괜찮아요. 그 다음에 있는 동안에는 자기도 괜찮아요. 평안해요. 그러면 나가면 또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 저기 먼저 일본에 있는 박상회 우리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시죠. 나가면, 자기가 가면 괜찮테요. 그러니까 막 같이 있어달라고 막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잖아요. 가면 또 자식이 또 발악을 하고, 또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뭘 나가라 들어가라 했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 내가 권세를 받은 자로서 그릇이 되어졌을 때는 내가 가는 곳마다 사실적인 뭐가? 권능이! 뭐 말을 했다, 안 했다!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역사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자꾸만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단의 사단 결박 권이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이 바로 되어 있으면, 흑암에 세력은 저절로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가는 곳마다 흑암에 세력을 꺾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렇게 되는 배경이 뭐냐하면, 여러분들이 가는 곳마다 여러분 갈 때마다 나와 함께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그럴 때에 뭐 천군 천사 동원도 해야 되는데, 이걸 자꾸 붙이고 그러면 복잡해요. 뭐냐하면 여러분 가는 곳마다 누가 함께 하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럴 때에 구체적으로 삶에 생활에 천군 천사 동행하시는 실제로 역사 하시는 겁니다. 이 사실이 뭘 천군, 천사 오너라, 가라! 이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나가는 곳마다, 여러분의 삶과 생활에, 또 여러분이 경영하고 연결된 모든 사건과 일들마다 구체적으로 이런 영적인 역사가 이루어진다 그랬습니다.
그 다음에 이 땅에 비록 발을 붙이고 살지만, 이미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이겁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시오. 누가 인도하십니까? 성령이 여러분 인도하십니다. 나는 이 땅에 있지만 흑암과 사단의 인도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이루어 나가십니까? 세계를 정복하는, 그래서 여러분 세계 복음화 그럴 때에 내가 복음을 잡았다 그러면 세계복음화와 연결되는 겁니다. 따라오는 문제예요.
그러면 이런 문제가 안 되는 배경 때문에, 여러분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이런 배경, 이미 여러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하고, 너희를 건드리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한다고 그랬고, 또 오늘 제가 말씀 이미 읽어드렸습니다 만은,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뭐라 그랬습니까? 결단코 없으리라 그런데도 이 잘 안되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을 지금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 이 부분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제가 지난번 새벽기도를, 우리 부교역자들이 이 교육받으러 갔을 때 이틀을 인도를 했어요. 이틀 인도하면서 제가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좀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렵게 말씀을 안 드리겠습니다. 복음을 이미 받았습니다. 복음을 받았었는데, 이걸 가지고 우리는 복음의 체질이 된다! 그러고 복음의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일이나 사건이나 그 다음에 모든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나, 이런 것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 나와함께 계시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사건과 사실을 확인한다! 믿음이라는 그런 어떤 막연한 것으로 아니고, 실제로 이 사실이 되도록 뭔가 내 생각과 마음과 느낌을 완전히 바꾸어 버려야 됩니다.
그러니 뭐라 할까, 분위기 그러니 여러분들이 집에 딱 들어가면 분위기라는 것이 안 있습니까! 그 가정에 들어가면, 어떤 분위기라는 것이 안 있습니까! 딱 들어가면 뭔가 믿음의 분위기가 되어야 된다는 말이, 하도 늘 이렇게 뭔가 이야기하는 말이, 그런 말이 더 이상 다른 말이 없기 때문에 표현이 별 다른 게 나오지 않더라 구요. 그러니 뭐 나를 딱 보면 믿음이 생겨 버려야 됩니다. 믿음이 느껴져야 됩니다. 믿음의 생각을 하도록 되어야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내 생각과 느낌과 마음과 분위기가 오직 뭐가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 전체 우리 삶에 분위기가 믿음의 분위기로,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의해서 이끌려 가는 믿음의 분위기! 이 사실이 되어지게 되면, 누가 역사가 안 되느냐? 흑암 세력이 역사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미 내게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내 안에 와 계시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뭐가 되었습니까? 자녀가 되었는데, 이 권세가 모든 분야에 영향이 역사 될 수 있어야 만이, 비로소 뭐가 옵니까?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될 수 있는 일 뭐냐? 이걸 가지고 뭐라 그랬습니까? 우리는 무시기도라 그러고, 정시기도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늘,
그래서 정시기도는 먼저 번에 그 목사님 '새 가족' 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 구요. '리듬을 타는 것이다!' 내가 계속 하나님의 인도를 쭉 받아오는 리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리듬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뭐냐? 정시 기도로 그 리듬을, 하나님의 인도의 리듬을 맞추는 것이 정시기도입니다. 그러니 무시기도라는 것은 뭐냐하면, 일하는 것 무슨 일이 딱 생기잖아요. 일이 딱 생기면 어디 있느냐? 그 리듬 속으로 집어넣어 버려야 됩니다. 사건이 딱 생긴다! 그러면 그 리듬 속으로 집어넣어 버려야 됩니다. 문제가 딱 생긴다! 그 리듬 속으로 집어넣어 버려야 됩니다. 그래서 일에도, 그리스도 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 생각 속에서도, 그리스도!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뭐로 연결해라 그랬습니까? 기도로 연결해라! 기도를 해라! 이렇게 되는 순간, 오늘 성경에 말씀대로 뭐라 그랬습니까? 여러분과 제게 '권능을 주시리라!' 그랬습니다. 바로 이렇게 되는 순간에,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사단을 물리 쳤다! 사단을 떠나 보냈다! 그런 말이 아니고 여러분 가는 사건과 가는 일과 가는 곳마다 누가 역사 합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기적의 역사가 증거 되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이런 역사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안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자꾸만 인본주의! 자기도 모르게 자꾸 인간적인 생각이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면 자꾸 뭔가 육신 적인 생각이 나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자꾸 욕심 적인 생각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뭔가 붙잡아야 될 것이, 내가 자꾸 뭔가 일이나 사건 만나면, 욕심 적인 생각이 자꾸 나오고, 인간적인 생각나오고, 자꾸 인본주의 수단이 자꾸 나오려고 그러고, 그건 뭐냐? 지금 하나님의 인도의 리듬을 못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말하자면, 분위기가 하나님의 자녀의 분위기로 살아가는 축복과 주권을 주었는데, 이것을 놓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느냐? 여러분과 제가 전에 어디 있었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녀! 우리가 너무 그곳에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의 역사에 변화가 되어졌다! 그럴 때에 그 변화에 맞추어 져서 우리 분위기가...
그래서 이걸 자꾸 체질이라 그러는데, 분위기와 느낌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리듬을 탈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지 아니하면, 자기도 모르게 뭐냐? 옛날에 숙달되었던 그곳에 미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에베소서에 보면,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그랬습니다. 틈타게 될 때에 역사가 나오는 거죠.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이런 방향, 이런 어떤 역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은 뭡니까? 실 컷하고 망하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또 뭐냐? '하나님의 방향 맞추라!' 자꾸 그러죠. 하나님의 방향을 맞춘다! 막말로 해 가지고, '여러분 지금 방향 맞추어 버리면 됩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지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맞추면 다 된다!" 그게 다 되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듬만 타면, 흔히 그런 말합니다. 줄만 잘 서면된다! 안 그럽니까?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에 우리 리듬만 바로 맞추면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건이 생겼다! 기도 드리면 됩니다. '하나님 이 일이 있습니다.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 또 문제 생겼습니다. 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이 일이 생겼습니다!' 그때 굳이 뭐 이걸 사단이 이런 다 싶어서, 눈을 부릅 떠가지고, '주 예수 이름으로 사단은 물러갈 찌어다!' 그러고 이렇게 안 해도 됩니다.
여러분 일 생기고, 사건 생길 때마다, '하나님 지금 내가 여기 섰습니다.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사건 속에 섰습니다!' 이럴 때에 누가? 흑암의 세력이 감히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다 차단됩니다. 이게 다 막혔습니다. 이 사건을 여러분 조금만 붙잡고, 이제 우리 사건이나 일에 다른 게 아닙니다. 이미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모든 문제 해결되었습니다.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리듬을 타고 나가면 됩니다.
그래서 내 욕심과 내 생각으로, '내가 뭔가 해야 되겠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조금 이만큼도 힘이 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여러분 힘이 필요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내 모든 것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맡겨 버리고, 주 예수께서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분, 그 언약의 약속을 딱 잡고, 생각 고치고, 마음 고치고, 하나님 앞에 리듬타면 돼요. 쓸 때 없는 걱정 고치고, 그런 생각 다 버리고, 쓸 때 없는 싸움 다 버리고, 그러면 여러분과 제게 엄청난 비전을 주시는데, 어제 핵심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큰 비전! 왜? 세계 복음화입니다. 큰 비전이 뭐 큰 일을 한다!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구체적, 근본적인 비전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세계 바꾸라는, 이런 축복과 은혜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나를 통해서 세계 바꾼다! 엄청난 역사입니다. 우리 송현 교회를 통해서 세계 바꾼다! 지금 세계 바꾸는 일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뭡니까? 당장 교회를 건축한다!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건축한다!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가정 건축입니다. 그것이 리듬을 타고 비전만 바로 잡게 된다면, 누가 일하십니까?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도록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잡고 나가면 이를 방해하는 흑암의 세력은, 여러분이 '나가라, 들어가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서서 나갈 때에 다 추방된다는 것이 아니고, 들어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만약에 들어온다! 만약에 들어와서 어떤 역사가 있다! 그때마다 우리가 뭘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큰 계획이 지금 이 안에 있구나! 이 사실이 자기도 모르게 와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확실히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는 세계복음화 하기 위해서 큰 비전을 이미 주셨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생각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내가 뭘 하려고 벌벌 떨지 말고, 내가 뭘 하기 위해서 인본주의 쓰지 마시고, 내가 뭘 해야 되겠다고 또 한계를 두지 마시고, 하나님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이 뭘 걱정하다가도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를 계획하셨다면 하나님이 일을 하시기로 계획하셨다면, 이 일을 지금 하고 계신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답 나오잖아요. 걱정하고 벌벌 떨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뭐가 나와야 됩니까? 감사가 나옵니다. '하나님 오늘 내게 이 축복과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 축복을 우리는 확인하고, 이 사실을 누리는 큰 기쁨과 사실적인 역사가 이 한 주간도 성취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제자
10:1-4 / 김영규 목사
열두 제자의 임명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행하신 일차 전도는 여러 병자들을 고치시는 이적과 더불어 성공리에 마쳐졌습니다. 이 성공적인 사역 후에 주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자면서 생활로써 훈련을 받아온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마태는 이 열두 제자의 선택과 파송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제자도의 헌장입니다.
제자의 수는 열둘입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충분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과, 열두 지파가 있습니다. 신약에는 열두 사도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14의 말씀에 보면 천국에 열두 문이 있고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열두 기초석이 있고 거기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온 천하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은 이 열두 명을 내어 보내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는 특별한 신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제자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제자가 할 일은 무엇이며, 제자들에 대해서 교회는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제자요 사도들입니다
본문에는 열두 명을 가리키는 명칭이 둘입니다. 첫째는 “제자”이고 둘째는 “사도”입니다. 이 두 가지 명칭은 제자들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제자”(maqhthv", 마데테스)라는 명칭입니다. 제자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제자는 스승이 하던 일을 계승하는 자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본문 7-8절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감당케 하기 위해 주님은 열두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나가서 주님이 하시던 일을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제자는, 스승의 삶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淸貧無私한 삶을 살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모든 물욕에서 멀리하여 전대에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평화의 사도가 되어 평안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박해와 희생을 두려워 말고 담대히 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란, 어떤 의미에서 전문가에 속합니다. 즉, 신앙의 전문가입니다. 요즘은 전문가들이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미국의 예를 들면 기업의 생산성이 연간 1%만 상승해도, 130만 명의 노동자들이 실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미래에 각광 받는 직업은 기계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업종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대접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집니다. 신앙을 지키기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의 전문가만이 살아 남습니다. 여러분 어영부영 믿지 마세요. 신앙의 전문가들이 되세요. 그것이 바로 제자들입니다. 모두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사도”라는 명칭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제자”라고 부르는 대신“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apostolo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자란 말보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이 말은 옛날에 왕명을 받은 全權大使를 의미했습니다. 사도들은 에수님께 특명을 받아 파송된 전권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생애의 목격자들입니다. 특히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행1:22,고전9:1,요일1:1,3) 이들은 예수님이 직접 임명하셨고 성령께서 친히 임명하신 사람들입니다.(마10:1,고전9:1) 자타가 인정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입니다. 성경은 열두 사도와 바울에게 사도란 명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받은 특수 임무는 뭘까요? 첫째는 교회 창설의 사명입니다. 주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이 교회는 주님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에서 창설되었습니다. 120여명의 사람들이 한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시고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이 최초 교회에 사도들은 기초석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예루살렘과 각처에 교회를 설립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는 성경 기록의 사명입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혹은 사도들의 감독 하에서 신약 성경의 대부분이 기록되었습니다. 마태, 요한, 바울, 베드로 사도가 직접 성경을 기록했으며, 마가, 누가, 야고보, 유다 등이 사도들의 승인하에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셋째로, 주님이 행하시던 이적을 계속하는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죽은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중풍병자를 비롯해서 각종 병을 고쳤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와 같은 이적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가짜 지도자들과 구별하는 증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사도의 직책이 있습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곳곳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교회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는 우리가 보냄을 받은 교회입니다. 내가 속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사명을 깨달으세요. 요즘 사람들은 좋은 교회만 찾아다닙니다. 좋은 교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약한 교회에 속하여 든든히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너도 나도 좋은 교회만 찾아다니니까, 큰 교회로 몰리고 작은 교회들은 다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둘째로, 우리가 속한 삶의 현장입니다. 내가 속한 가정은 내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 부모 역할, 이 모든 것을 사명을 갖고 감당해야 합니다. 요즘 사회가 왜 무너집니까? 가정이 무너진 결과입니다. 부모 사명 없이 자식을 낳아 기릅니다. 남편과 아내로서의 사명감 없이 결혼합니다. 내가 속한 직장도 내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가정의 사도직을 잘 감당하세요. 내가 경영하는 사업도 내가 보냄을 받은 곳입니다.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기업가의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직업의 사도직, 기업의 사도직을 잘 감당하세요. 이런 사명 없이 사회생활을 하면 세상이 엉망으로 돌아갑니다. 내게 주신 사도직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 대해서 평가가 매겨졌습니다
다음은 제자들에 대한 평가입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것은 주후 60년 이후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지 30여년이 경과된 시점입니다. 그 시점에서 사도들의 행적이 정확히 평가되고 있습니다. 어떤 평가가 내려졌을까요?
열두 제자의 이름을 거론한 성경은 마태복음 10:1-4, 마가복음 3:16-10, 누가복음 6:14-16, 사도행전 1:13-14 등입니다. 그런데 각 성경마다 이름이나 순서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열두 명을 세 그룹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 그룹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네 명입니다. 둘째 그룹은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입니다. 셋째 그룹은 알매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모, 가룟 유다입니다. 어떤 성경이나 이 세 그룹으로 나눈 것은 똑 같습니다. 둘째로, 각 그룹의 첫 번째 사람의 이름도 순서상 똑같습니다. 첫 그룹은 베드로로 시작되고, 둘째 그룹은 빌립으로 시작되고, 셋째 그룹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로 시작됩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맨 앞에 있고, 가룟 유다가 맨 뒤에 놓여 있는 점도 어느 성경이나 동일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분류는 사도의 서열을 매기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을 신분상 분류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 가서 계급을 매기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서열이 사도들의 행적을 평가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은 거의 동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나 성실성, 혹은 열의에서 차이가 났습니다.
사실상 제1그룹은 가장 출중한 사역자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언제나 으뜸의 추종자였습니다. 앞장서서 따라가고, 앞장서서 질문하고, 앞장서서 훈계를 받고, 앞장서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복음서 전체에 그의 행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승천 후에도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어 사도행전 전반부의 주인공이 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성직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사도들 중 가장 늦게까지 활동하면서 요한복음, 요한 서신,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여 결정적인 계시의 전달자가 되었습니다.
제2그룹에서는 빌립이 주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복음서에 몇 번 언급되었습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도마는 한 두 번 의심 많은 질문을 던진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3그룹은 성경에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내용이 두드러진 기록이라면 기록입니다.
열두 사도들은 나름대로 다 충성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들의 사역을 분명하게 평가했습니다. 똑같이 주님에게 임명받은 똑같은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수행하여 어디든지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중요한 장면마다 우리는 열두 명의 이름 대신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는 이름만 언급된 곳을 많이 봅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체험하는 자리에 이 세 명이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자리에 이 세 명만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자리에 이 세 사람만 있었습니다. 감람산의 종말론 강론 때에 이 세 사람과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까요?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더 열심히 주님을 따르고 배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올라가기 싫어하는 높은 산에 따라 올라갔습니다. 이슬을 맞으면서 기도하시는 자리에 따라갔습니다. 남들이 피곤해서 하기 싫어하는 일, 귀찮아서 싫어하는 일을 맡아서 했습니다. 주님도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이들을 따로 데리고 다니신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평가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도 나름대로 사회에도 이바지 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나름대로는 충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적은 정확하게 평가되고 비교되고 분류될 것입니다. 문제는 달란트의 차이가 아닙니다. 열심의 차이요, 성실성의 차이입니다. 기왕이면 열성적으로 하세요. 예배도 열성적으로 드리고, 기도도 열성적으로, 전도도 열성적으로 하세요. 가정 생활, 직장 생활, 사업, 다 열성적으로 하세요. 다섯 달란트도 좋고, 두 달란트도 좋습니다. 제자로써, 사도로써 범사에 성실히 행하며 열심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등급으로 매겨지는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 중에 예수님을 판 자도 있습니다
열두 제자 주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단테의 글에 보면 가룟 유다는 시이저를 반역한 부르터스와 함께 지옥의 맨 밑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질적으로 가장 나쁜 사람은 의로운 사람을 배반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신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셨을 때에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좋아하셨습니다.(행13:22) 다윗은 의리에 죽고 사는 “의리 맨”입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왕으로 지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사울왕이 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다윗을 사울의 신하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너무 총명하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고 별의 별 짓을 다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 창을 던졌습니다. 숙소에 자객을 보내서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맹렬한 전투에 앞장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는 3000명의 군사를 풀어 숨어 있는 다윗을 추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사울 왕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에 다윗은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다윗의 신의는 사울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을 왕자들과 함께 자기 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삼하9:10) 이와 같은 다윗의 의리는 곧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신의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다 주님을 위해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가룟 유다만은 주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룟 유다의 신앙과 인격을 보면 몇 가지 배신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지나치게 돈에 욕심을 냈습니다. 마리아가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때에 가룟 유다는 즉각 비난했습니다. 그것을 팔면 300데나리온 어치는 될 텐데,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왜 허비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상습적으로 훔쳤습니다. 돈에 인색한 사람일수록 사람과의 의리를 팔아먹을 확률이 높습니다. 돈에 인색한 사람일수록 신앙을 팔아먹을 확률도 높습니다. 돈에 인색하지 마세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신24:19-2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5:7,8,10) 물질에 대한 욕심이 결국 가룟 유다의 신앙을 망쳤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인간성을 나쁘게 만듭니다. 부모 자식을 갈라놓고, 형제자매를 갈라놓습니다. 돈은 우리의 관심을 영혼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돈에 관련된 것이며 무엇이든지 후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사세요. 그것이 신앙의 배신자가 되지 않는 비결입니다
둘째로, 가룟 유다는 사상의 노예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사상의 신봉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상도 결코 인간 자신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사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허점투성이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 근 70년간 극성을 부리던 공산주의 사상이 막을 내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극단적인 유대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면 유대인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야는 유대인 국가를 창설하고 유대인은 온 세계 사람들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야는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고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세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어디 유대인만을 위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잘못된 사상 때문에 주님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았는데 자기가 알고 있는 사상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왕권을 사용하기는커녕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신앙은 비판하고 이방인들의 믿음은 칭찬하셨습니다. 유대인의 교권이나 정권은 비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유다의 사상과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을 은 30냥에 팔아버렸습니다. 노예 한 사람의 값입니다. 주님을 무가치하게 본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가룟 유다가 갈리리 출신의 무식한 어부들이었다면 사상이고 뭐고 없었을 겁니다. 조용히 주님을 따르고 배신자는 되지 않았을 겁니다. 잘못된 사상이 유다를 망쳤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젊은이들이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사상은 시대가 지나면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메시야는 변하지 않고, 구원도 변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가룟 유다는 자존심과 고집으로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痼疾 病者였습니다. 예수님이 극형에 처해지는 것을 목격한 후에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극도로 번민했습니다. 자기가 받았던 은 30냥을 도로 성전 맡은 자들에게 갖다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 신앙이란 참 회개를 동반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 것이 회개입니다. 후회만 하고 고침이 없다면 회개는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죽이고 때리던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쳐서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평생 남을 죽이고 빼앗는 일만 했던 강도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천국에 가면 자칭 죄인들로 가득합니다. 큰 죄인, 보통 죄인, 작은 죄인, 유명한 죄인, 무명한 죄인, 높은 죄인, 낮은 죄인, 한국 죄인, 미국 죄인, 잘 생긴 죄인, 못 생긴 죄인, 부자 죄인, 가난한 죄인....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다 회개한 죄인들이요, 용서 받는 죄인들이란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을 고칠 줄 모르는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대하여 배신자가 되지 맙시다. 예수님의 제자 열두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배반자였습니다. 확률적으로 본다면 십이분의 일이요, 8.3%의 확률입니다. 오늘날 이 땅위에 천만 기독교인이 있으니까 그 중에 대략 100만 명은 가룟 유다일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혹시 내 자신이 배반자가 되지는 않을까? 각자 근심하며 주님께 물었습니까? “주여 혹시 저는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자신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주여, 주님을 말아먹을 자 중에 혹시 나도 끼어있지는 않습니까?” 돈 때문에 주님을 팔고, 사상 때문에 주님을 팔고, 자존심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님을 판 가룟 유다는 아닙니까?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란 스승의 유업을 계승한 자들입니다. 주님이 하시던 복음 전파, 약한자 병든 자를 돌아보는 일, 하나님 말씀 가르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삶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깨끗한 삶, 욕심 없는 삶, 이타주의 삶, 희생과 봉사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도들입니다. 즉, 특별한 사명을 받고 곳곳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가정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직장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사회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내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각자 속한 곳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사도직을 수행하시 바랍니다.
제자들의 등급이 매겨졌습니다. 그들의 행적을 지켜 본 교회의 증인들이 평가하고 분류했습니다. 기왕이면 성실하고 충실한 사역자들이 되세요. 주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가는 제자가 되세요. 후대에, 혹은 하나님의 평가에서 좋은 점수가 매겨지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 중에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돈 때문에 주님을 팔았습니다. 사상 때문에 팔고, 자존심 때문에 팔았습니다. 오늘 내 자신은 어떻습니까? 가룟 유다 정도는 아닐지라도 주님께 신의를 지키지 못하는 비겁한 제자는 아닙니까? 참 제자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확장되는 왕국
마 10:1-14 / 이정선 목사
알렉산더, 칭기즈 칸, 나폴레옹, 이 세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서 3대 정복자로 꼽히는 사람들입니다. 알렉산더는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어 33살에 요절할 때까지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통곡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특히 그의 제국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아우르는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켰습니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한 유목민 집단 출신으로, 부족들을 통합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고, 그 여세를 몰아 유럽대륙을 휩쓸면서 거대한 몽골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몽골 기병대의 기동력과 공격력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고, 그 앞에서 유럽대륙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의 격동기 이후에 활약한 군인으로서 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결국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는데, 나폴레옹 치하에서 프랑스 군대는 온 유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특히 나폴레옹의 제국은 프랑스혁명에서 발견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정신을 유럽에 전파하는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비단 이러한 정복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 혹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자는 왕국을 확장하려고 하는 운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이 없으면 침략을 당하고 결국 망하게 되지만, 힘이 있을 때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국도 다윗과 솔로몬의 치하에서는 영토를 넓히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확장이 되다가도, 내부적인 부패나 갈등, 또는 외부적인 강적의 출현 같은 변화에 의해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남왕국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어쨌든 어떤 나라나 그 나라의 왕이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오신 분으로 서술하고 있는 마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왕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기업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잃어버린 하나님의 기업이란 바로 죄 아래 거하게 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가 죄와 어둠의 왕국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보내셔서 많은 영혼들을 그의 왕국으로 불러 모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 왕국을 확장해 가시는 방법을 보세요. 먼저 그는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왕국을 확장하기 위해서 하늘의 군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앞, 9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탄식하셨습니다. 이것은 일꾼이 없어서 힘들다는 푸념이 아니라 일꾼들을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일꾼으로 자원하여 나서라는 부르심입니다. 또한 듣는 사람들 중에서 일꾼들을 부르실 터이니 준비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열두 명을 부르셨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열두 아들에서 나온 열두 지파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열둘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과거의 이스라엘처럼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천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열두 명의 개인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펴봅시다. 과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왕으로 오신 메시야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새 이스라엘의 대표들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왕의 특별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이 구비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일에 사용하기 위하여 특별히 채용하시는 사람들이라면 인류를 대표할 만한 명성이나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 열두 명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이력서는 과연 얼마나 화려하고 대단한 것일까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즉시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은 Ph.D. 학위를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사법고시나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수재들도 아니었습니다. 노벨상을 받을 만한 능력이나 업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거느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그들은 하층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장 천대받고 무시를 당하는 갈릴리 지역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세리는 좀 배운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매국노 취급을 당하는 직업이었습니다. 또 그들 중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도 몇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높이 사서 부르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와 그 일행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요소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보세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지금까지 행하시던 모든 권능을 그 별 볼일 없는 열두 명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풍랑과 싸우며 물고기 잡던 사람들, 또 로마 권력에 빌붙어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는다는 소리나 들어야 했던 세리, 독립운동 한답시고 나서는 바람에 지명수배를 당해 붙잡히면 모진 고초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도피생활을 해야 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음과 동시에 그 왕이신 예수의 모든 능력을 한순간에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꿈같은 일 아닙니까? 어떻게 한 사회의 하층민에 속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왕의 권능을 소유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그렇게 부르심을 받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게 된 데는 그 사람들의 자격이나 능력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왕의 권능을 소유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며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주님의 일꾼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무식하고 똑똑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참으로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원리가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똑똑함과 능력으로 일하려고 할 때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신도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 감추고, 즉 똑똑함도 주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무능함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 주시는 권능으로 교회를 섬기게 될 때, 이곳에 하나님의 왕국이 크게 확장되는 역사를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열두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께서 행하시던 것과 똑같은 권능을 가지고 각지로 파송될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께서 하시던 것과 똑같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게 될 것입니다. 즉 이들은 제2의 예수가 되어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가 하시던 일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이 열두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로 도래한 메시야의 시대를 맞아 새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갈 특수한 직책으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이 열두 사도들의 위치와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 열두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서도 열두 제자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경은 이 사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나 요한 같이 많이 언급되고 유명한 사도들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도들은 베드로나 요한처럼 많은 일을 하지도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단지 그들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을 뿐이지 다른 사도들 역시 대단한 활약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이 사도들이 각지로 흩어져서 중요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를 들면 도마는 페르시아와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에 인도와 교류가 있었는데, 당시의 유적에서 기독교 유물로 추정되는 것들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도마의 십자가라고 알려진 모양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120명도 아니고 열두 명의 사도라면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하되 지나치지 않을 것인데도 성경이 그들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을 시사해줍니다. 그들에게 영광이 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열두 사람이 영광받기를 거절하고 있다면, 오늘 우리가 뭐 조금 했다고 생색내고 칭찬받으려고 하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24 장로들이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주 하나님만이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합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했다가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겸손의 영을 부어주셔서 우리 교회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발을 씻겨주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사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보세요. 정말 기가 막히게도 예수를 팔아넘긴 사람이 사도들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그렇게 악한 역할도 필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즘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유다복음의 주장처럼 유다가 예수를 위하여, 또는 예수의 지시에 의하여 스승을 팔아넘겼다고 말할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팔아넘기는 유다에게 고마워하신 것이 아니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그에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그의 삶이 저주받은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영광스러운 사도의 직분과 왕의 권능을 받은 사람이 배신자가 되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며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입고 또 놀라운 능력을 행했다 할지라도 타락하고 실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하나님의 큰 일꾼이라고 칭송을 받던 사람들이 정말로 허무하게 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버린 사건들을 우리가 종종 보지 않았습니까? 마귀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보다 오히려 믿음이 크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공격해서 넘어뜨리려고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훨씬 넘어뜨리기 쉽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도 높아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받은 계시가 지극히 크기 때문에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의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크게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는 데 있어서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원리는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섬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셔서 그의 왕국을 확장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여러분 각자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 확장되는 귀하고 복된 일에 쓰임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다라 사람들과 중풍병자의 차이
마 10:1-8 / 이정선 목사
8장 마지막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가셨다가 배척을 당하셨던 사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구름처럼 모여드는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던 가버나움을 떠나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었습니다. 거기서도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과정에서 돼지 떼가 몰살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떠나달라고 했습니다.
일이 꼬인 것일까요? 만약 가다라 지방에 가셔서 중풍병자부터 고치시고 리모트콘트롤 방식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면, 그 동네 사람들도 예수님을 환영하고 복음을 듣게 되지 않았을까요? 귀신을 쫓아내셨어도 돼지들이 몰살당하는 없었더라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굳이 배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어쨌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가다라 지방 미션은 시작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시려는 예수님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야 했습니다. 배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만 내다보시면서 깊은 한숨을 쉬셨고, 제자들도 서로 눈치만 볼뿐 아무도 선뜻 나서서 분위기를 바꾸어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선교사님들이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데, 어떤 선교사님들의 사역보고서는 기쁨과 활기가 넘쳐납니다. 마치 추수를 기다리는 가을 들판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선교사로서의 감격과 행복을 누리는 분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어떤 선교사님들의 사역보고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10년을 사역하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지만 한 사람의 신자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독교에 대한 거부와 박해가 심한지 선교사들이 투옥되고 추방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복음에 갈급한 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그래서 칭찬도 많이 받고 인기도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배척당하는 곳에서 일하는 선교사들은 인기도 별로 없고 후원이 끊어지기도 쉽습니다. 그분들이라고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선교지에 가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없겠어요? 그들이 미련해서 그렇게 척박한 곳에서 고생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런 열매도 없고 자신의 신변마저 안전하지 못한 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다라에서 돌아오는 배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말없이 호수만 내려다보시던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마 23:37).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피맺힌 절규입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배 뒷켠에서 가다라 지방을 향해 그렇게 절규하셨을 것 같습니다. “가다라야 가다라야, 하나님나라의 복음보다 돼지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는 자여, 내가 너희에게 천국을 가져왔건만 너희가 원하지 않는구나.”
여러분은 그런 심정을 가졌던 적이 없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단에 빠졌는데, 마치 그 이단집단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것처럼 충성을 합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가정도 돌아볼 새가 없고 친구도 다 필요 없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믿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가 나가는 이단 교회만이 진리이고 참된 교회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자기가 나가는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원수가 됩니다. 정말이지 그런 사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10년 20년을 살면서 어렵게 복음을 전하지만 한 사람도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이 없는 현실 앞에서 선교사님들이 속수무책입니다. 천국을 전파하시려고 일부러 가다라 지방까지 가셨는데, 돼지 죽였다고 떠나달라는 그 사람들 앞에서 주님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속수무책의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까? 꼭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아무리 예수를 믿으라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친구나 가족 때문에 슬퍼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근심하셨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근심을 공유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근심 가운데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를 주님께서는 무척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다라 지방을 떠나서 예수님은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가버나움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풍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실려 왔습니다. 제가 전에 레스트홈에서 일하면서 중풍에 걸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중풍은 몸이 마비되는 병입니다. 처음에는 몸의 반쪽이 마비됩니다. 한 쪽 팔과 다리를 전혀 쓸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앉아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한 쪽 팔은 쓸 수 있으니까 혼자서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말도 하고 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증상이 악화되면 다른 쪽까지 마비가 진행됩니다. 그러면 거의 식물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은 말짱할지 모르지만 육체는 내 것이 아닌 상태입니다.
여기 나오는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운 채 들려온 것으로 보아 아주 중증 환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 중풍병자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낙도 없었습니다. 병이 나아서 다시 두 다리로 걸어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그렇게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병자는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존엄성도 없고 추구해야 할 가치도 실종되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식물인간처럼 누워 꼼짝도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고, 자기가 누워 있던 침상을 들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던 삶이 보석 같은 특별한 체험을 간직한 삶으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앞에 나왔을 때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한 가다라 사람들과 예수 앞에 나와서 이렇게 기적 같은 변화를 경험한 중풍병자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로 하여금 그 두 가지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가다라 사람들은 아마 넉넉하고 풍요롭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돼지를 2000마리씩이나 키울 정도면 지금 기준으로 봐도 엄청난 규모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들은 생명의 구주를 거부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진 것이 많아서, 그래서 의지할 것이 많아서 굳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반면에 중풍병자는 모든 면에서 비참하고 불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의지할 것도 없었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골프를 치면서 자꾸 못 치니까 같이 치는 분들이 힘을 빼라고 하더군요. 힘으로 쳐야 될 것 같은데 힘을 빼면 어떻게 칩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그렇게 치다가 지쳐가지고 힘이 빠졌답니다. 그래서 힘이 없이 치니까 잘 맞더래요. 의지하고 믿을 것이 많아서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과,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서 예수님밖에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그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났을 때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만남으로써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던 중풍병자가 온전하게 나았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물론 돼지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돼지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면 그보다 큰 비극이 없는 것입니다. 사업도 중요하고 노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고 내 믿음이 영향을 입게 된다면, 그것은 가다라 사람들의 선택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 그런데 이 중풍병자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오게 되었는지가 또 아주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중풍병자는 아무리 원해도 혼자서는 예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중풍병자가 원해서 친구나 가족들에게 자기를 예수님께 데려다 달라고 했는지, 아니면 그를 데려온 사람들의 의지로 오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저희가 누구인지, 즉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만 의미하는지, 아니면 병자까지 포함되는 것인지는 학자마다 견해가 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장의 구조로만 본다면, 저희라는 대명사는 그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받습니다. 어쨌든 중풍병자가 포함되는지 안 되는지 여부를 떠나서, 예수께서는 그 중풍병자를 데려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변화되는 것은 바로 그를 데려온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였습니다. 상당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이 중풍병자는 절대로 혼자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사람인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려온 덕분에,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속수무책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무거운 마음으로 근심해야 했습니까? 하나님을 거부하고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 내버려두면 백년이 지나도 예수님 앞에 나올 사람 같지 않지요?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되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러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데리고 나와야지요. 억지로라도 끌고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이 누군가를 억지로라도 끌고 나오는 그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속수무책이라고 근심만 해가지고는 그 사람 구원 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이 여기서 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꼭 예수 믿어야 할 사람, 교회에 나와야 할 사람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오잖아요? 그런 사람들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억지로 끌고 나오든 선물을 줘서 데려오든, 예수님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데려오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실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교회에 꼭 데리고 나와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한두 사람 마음에 집히지 않습니까? 내 옆에 중풍병자가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데, 그거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끌고 예수님 앞에 가면 살 수 있는데, 그냥 내버려둔다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내 손에서 찾지 않으시겠어요? 교회 안 나오는 사람, 내가 억지로라도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 얻을 수 있는데, 내가 가만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못 나오는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비즈니스도 바쁘고 해야 할 일도 많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만나서 구원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의 행동하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귀한 일들이 우리 가운데,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마 10:5-15 / 박신진 목사
♡ 저를 찾아 주소서 ♡ / - 챨스 웨슬리의 기도문 -
예수님, 제가 당신께 확고하게 설 전망은 전혀 없는지요?
언제나 당신 얼굴을 바라보며 영원한 은혜를 누릴 가망은 영영 없는지요?
오, 제 마음은 실낱같은 바람에도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요!
오, 제 마음은 얼마나 빨리 살아계신 하나님 곁을 떠나는지요!
저는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잠시도 머물러 서지 못합니다.
지금은 믿음이 강한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이면 모든 힘을 잃어버립니다.
찾아주소서, 오 주님, 저를 찾아주소서.
제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오셔서 다시는 떠나지 마소서.
성장하는 교회는 무엇을 해야할까? 본래 처음에 했던 일,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이 명하여 실천한 일, 그것이 세 가지 있는데, 첫째가 예배요, 둘째가 기도요, 셋째가 전도다. 우리는 한 주도 예배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잃은 것, 잃은 양
이제 교회적으로 정말 중요한 것이 전도하는 일이다. 지금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전도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모든 일이 때가 있다고 하면서,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전3:6)고 하였다. 믿음의 과정에도 잘 살펴보면,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 잃는 것은 슬픔이나 찾는 것은 기쁨이다. 욥은 열 자녀와 많은 재물을 하루 아침에 잃고 슬픔으로 인하여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다(욥1:20). 그러나 연단한 뒤에 갑절로 모든 것을 되찾았다. 욥기의 결말은 밝고 기쁨이 충만하다! 야곱도 요셉을 잃은 후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애통하며 울었다(창37:). 그러나 가뭄을 관리하는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는 아들을 되찾고 야곱은 만족하였다(창45:28, “족하도다!”).
누가복음은 ‘이방인의 복음’, 혹은 ‘잃은 자의 복음’이라고도 하는데, 잃은 양과 잃은 돈과 잃은 아들의 이야기가 연속하여 비유로 나온다. 양 한 마리를 잃은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닌다고 하였다. 또 찾아낸즉 그 되찾은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와서 이웃을 불러모아 잔치하였다. 어떤 여자가 은전 열 개가 있었지만, 잃어버린 은전을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찾았고,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즐겼다고 누가는 적고 있다. 탕자로 불리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잃은 슬픔이 큰 것처럼 찾는 기쁨은 더욱 크고 감격스럽다!
사람들은 신분증을 잘 잃어버린다. 지난 5년 동안 주민증록증 분실건수가 무려 8백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1년에 160만 명이나 분실하니 30명 중 한 사람꼴로 잃어버린다. 분실신고를 해야 하고 사진도 새로 찍어야하니 참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분증은 다시 발급하면 되지만 어떤 것들을 한번 잃어버리고 찾지 못하니 아쉬움만 남기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잃은 것을 되찾으시는 분이신데, 특별히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목회는 “잃은 자를 찾는 운동”이었다.
1. 제자들을 보내심(5-6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기 위해서(6절) 제자들을 둘씩 보내셨다. 양은 정말 쓸모있는 가축이다. 가죽과 젖과 고기를 준다. 버릴 게 거의 없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에도 거의 양을 쓴다. 거룩한 제물은 가끔 소나 비둘기를 드리기도 했지만, 주로 성전에서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 구약의 제사는 거의 양 제사이다. 양은 찾아도 좋고 안 찾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양은 뿔이 아래로 나 있다. 이 말은 공격형 짐승이 아니라는 말이다. 양은 사람 곁에, 사람과 함께 있어도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도 무능하다. 몸을 기우뚱거릴 뿐 발이 빠르지 않다. 작은 토끼보다 느리고 맹수를 피하기가 어려워 먹이가 되기 십상이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다른 선배 양들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닌다. 광야와 초원에서 양들이 이동한 흔적을 보면 막대기로 줄을 그어놓은 것 같다. 양들이 앞의 양이 밟은 길로 그대로 따라가서 그렇다! 양은 귀소본능이 강해서 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것이 고작이다. 양을 잡는 영상을 보았는데, 충격이었다. 양은 살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는다. 목자가 양을 잡으면 가죽을 다 벗길 때까지 가만히 있어, 그냥 자기 가죽과 고기를 다 내어준다.
양은 목자가 있을 때 안전하다. 목자가 없으면 큰일 난다. 한 주도 혼자 살 수 없다. 목자의 피리소리와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내하는 것으로 양은 배부름을 얻고 생명을 보전한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은 인간이다. 인간은 목자가 필요하다. 70억 인구가 수십 번 멸망 당할 수 있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번 코로나 같은 전염병도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른다. 기후위기, 식량위기, 자원위기를 비롯하여, 지금 최첨단으로 개발되는 인공지능(AI)도 인간보다 더 똑똑해져서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죄 가운데 사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어야 인간은 안전하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양들에게 목자를 소개하는 것이 전도다! 양은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안 된다. 오직 목자에게 돌아와야 한다. 주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세상으로 보낸 것은 양을 목자에게 데려오기 위함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하여 교회로 모이고, 양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전도를 위하여 세상으로 흩어져간다. 매 주일마다 거룩한 성전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 집과 거리와 시장으로 흩어져 가는 것은 양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하려는 사명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부지런히 양들에게 가서 목자를 소개하고, 목자에게로 안내하기 바란다!
2. 가서 하는 일(7-11절)
1)들어가야 한다.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은 그냥 겉으로 스쳐 지나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들어가라는 말씀이다. 전도하는 것은 기독교가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끼리 신나, 우리끼리 통하는 말 가지고, 우리끼리 ‘잘 한다.’ ‘너 옳다.’ 하면서 교인들끼리만 어울린다. 우리, 이걸 벗어버려야 한다.
세상의 정치, 문화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감정과 기분에 들어가야 한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바다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빠져들어가버리지 말고 세상을 잘 항해하여 가서, 목적한 항구까지 안전하게 가는 것이다. 세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믿음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명심하라! 잃은 양을 찾으려면, 그 사람들 기분에, 행동방식에 들어가야 한다. 그 사람들하고 섞여야 한다.
2)전파하는 것이다(7절).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잃은 양들을 찾으려면,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전해주어야 한다. 여러분은 좋은 말을 하면서 하는가? 순진한 어린이들 얘기를 들어보자. 아이들에게 “예쁜 말 알아?” 라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영상]
우리가 전해줄 수 있는 제일 좋은 말, 그것은 “천국이 왔다! 천국이 이뤄졌다.”는 말이다.
오래 전 미국 LA에서 유명한 보험 세일즈맨이었던 안승화 할아버지가 있었다. 90세 보험 할아버지였는데, 뭐가 유명했느냐 하면, 고객이 자그마치 1만 명이었다. 하도 보험세일즈를 잘 해서 상도 많이 받고 보험계의 스타였다. 그런데 그의 놀라운 성공요인 중 하나는 그가 생일 카드로 매년 수많은 지인들에게 축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잃은 양을 찾아 둘씩 나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평안을 빌어줄 것을 명령하셨다. 좋은 말, 힘이 되는 말, 예쁜 말, 지혜로운 말을 많이 하라! 내 안에 예수가 확실히 계시면, 그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이 내 입술에 예쁜 말을 무수히 넣어주신다. 그러면 잃은 양들을 엄청나게 찾을 수 있다!
3)찾아내야 한다(11절).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세상이 치우치는 것은 물질 얻는 것이요, 쾌락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사람 찾는 운동에 열중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태초의 인간 아담 때부터,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을 찾으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제자들을 만나시고 당신을 따라오라 사람을 부르셨다.
전도를 다녀보면, 마음같지 않음을 많이 경험한다. 준비가 잘 되어서 건드리기만 하면 복음이 좔좔 나오도록 준비하여 가면, 이상하게 꼬이고 거절당하고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데 기도만 하고 갔을 뿐인데, 거기에 합당한 상황이 생기고, 예수 잘 믿는 사람의 친척을 만난다든가, 오랫동안 교회에 나가고 싶어했는데 누가 가자는 사람이 없어 못 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하나님이 찾아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을 통하여 잃은 양을 찾아내도록 하신다!!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그 성에 복음 전하기 합당한 자로 염색옷 장사 루디아를 찾기까지 안식일이 되도록 한 주간을 헤매어 찾아야 했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뭘 아파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성도들은 잃은 양을 찾아내야 한다. 잃은 것을 찾다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찾기보다 잃은 것을 다시 확인할 뿐일 수도 있다. 발명왕 에디슨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 가지 시험에서 200회 이상 실패한 경우도 수두룩했다고 한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잃은 양을 찾아내야 한다.
3. 보상이 있다(8, 12-13절)
전도는 보상이 따르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제자들에게 귀하고 아름다운 보상을 약속해주셨다.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3절) 하나님 나라를 전해주면, 거기에 평안이 생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순례자이며 평화의 전달자이다. 우리는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미워하는 자를 위해서도 평안을 빌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전도는 발명왕 에디슨보다 더 거친 길이다. 실패할 확률이 성공할 확률보다 높다.
그러나 전도하면 보상을 주시는데,
첫 번째 보상은 평안이다. 잘 되면 잃은 양을 찾고, 잘 안되어도 자신에게 평안이 있다. 이런 수지맞는 일, 전도를 왜 안 한단 말인가? 전도하는 사람 보라! 매주 화요일 전도대, 사람들 보면, 평안이 있다. 얼굴이 환하고 예뻐진다. 아무개 권사, 아무개 권사, 정말 요즘 무슨 일 있어? 아름다와졌다니까! 전도해서 그렇다. 평안을 주시니까!
두 번째 보상은 치유와 영적 승리다. 전도하러 가는 길에는 질병이 있고, 귀신이 있다.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전도하러 나갈 때,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어려워했다. 그런데 마태 10장 1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하였다. 제자들이 무슨 안수기도를 받거나 성령대망기도회를 했거나, 특별은사집회에 3박4일 참여했던 것도 아닌데, 권능을 받았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능력을 안 주신다고 생각하는가? 일 안하니까, 전도 안하니까... 전도하는 사람에게 보상이 있는데, 권능을 주신다.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열심! 그리고 이웃과 벗을 불러서 잔치를 여는 기쁨은 전도에 몸바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보상이다. 교회는 항상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있었다(8절). 여기서 주의를 주고 넘어가야 하겠는데, 너무 병고침과 귀신 쫓는 사역에 외적으로 치우치면 신비주의 이단에 빠진다.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 중심교회> 이초석 목사 같은 이들이 이런 이단적 색깔을 띠고 있다. 미신을 물리쳐야 하는데, 예수 이름으로 미신을 불러오는 경우가 있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전도하면 하나님이 권능을 주시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예수 이름으로 나가는데, 사탄과 영적인 대적들이 길을 막으면 안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물리쳐주신다!
전도의 길에 나타나는 세 번째 보상은 문화가 바뀐다는 것이다. 갈등과 다툼이 물러가고, 오래된 악습이 치유된다. 거의 귀신들린 것처럼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어지럽혔던 악한 문화들이 완전히 사라진다. 한국교회가 열심히 전도할 때 신유의 은사가 곳곳에서 일어나 개인의 질병도 나음을 받았지만, 사회가 치유되고 미신우상과 전통폐습들이 지역마다 사라졌다. 동네마다 미신우상 엄청나게 섬기던 것이 거의 다 물러갔다. 몇 년 전에 부족한 내가 삼기연 회장할 때 대입학력고사 앞두고 학교마다 고사지내던 일이 계속되고 있어서 시내 고등학교에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더니, 난리가 났다. 미풍양속을 왜 깨느냐는 식으로...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 돼지머리 갖다놓고 선생님들과 함께 절하고 입에다가 주욱 돈을 꽂아놓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 교육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하였더니 이듬해부터 없어졌다.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잃은 양을 찾아 거룩한 교회 우리로 들어오게 하는 일이 있다. 그리하여 잃은 양을 찾는 역사가 나타난다. 수많은 영혼들이 어둠으로 달려갈 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 부름받은 일에 아무 관심도 없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보상의 기회를 한 번에 잃어버리는 일이 된다. 바울이 고전 9:16에서 외쳤듯이 우리도 외쳐야 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 모든 평안, 치유, 영적 승리의 보상을 다 잃어버리고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전도의 일선에 지금 서라! 어서 속히 잃은 양을 찾아나서라! 하나님을 떠난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은 잃어버린 양떼로다!”(렘 50:6) 하였거니와, 우리도 이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잃어버린 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잃어버린 양을 향해 가라! 지금 그들을 향해 예수 안에 천국이 있다고, 생명이 있다고 전해라! 지금 잃은 양을 찾을 때 보상이 있음을 깨닫고, 때를 놓치지 말고 나서라! 전도자들에게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임하며, 귀신이 놀라 떠나가고, 교회 안에는 치유의 은사가 넘쳐나서 건강한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전도자의 축복
마 10:5-10 / 박용규 목사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성도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복음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교회를 출석하고 봉사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않는 자입니다. 둘째, 복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여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 즉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셋째,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날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며 그 복음의 능력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는 자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당신도 사랑합니다"는 영혼의 언어가 있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구절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구약 성경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곧 생명입니다.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랑, 평안을 찾을 수 없다" 는 것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기기 전에는 모든 인간은 끊임없는 방황자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사랑에 목말라합니까? 그러나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지친 영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면 언제나 조건적이고, 이기적이며 본성적인 사랑에 빠질 뿐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하는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느낌, 감정이 아니라 생명, 확신이라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명령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남기신 명령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고 무리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하시면서 해야 할 사명을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이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는 자들이며 그 스승을 닮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예수를 따라가는 자들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있으므로 그 사회, 교회, 가정이 축복 받는 것입니다.
무슨 복입니까? 우리가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은혜, 축복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그 땅을 불쌍히 여기신 것이고 심판을 하시기보다 구원의 축복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심령 속에 넘칠 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1) 전도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5,6절)
마태복음 10장 5-6절은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라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다른 민족에게 전도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네 가정, 형제, 이웃들에게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평생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서 선교했지 않습니까? 그러한 그가 로마서 9장 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도 바울도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자기 동족, 형제를 향한 뜨거운 애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교, 전도는 자기 민족, 형제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마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은 분이십니다. 팔레스틴의 목초지는 척박한 땅입니다. 험준한 계곡과 황무지와 같은 땅입니다. 이곳에서 목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하루 종일 풀을 뜯게 하였다가 저녁에 양 떼들을 우리에 몰아넣을 때,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면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먹지 않고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양입니다. 만약 잃어버린 양이 있다면 목자의 관심은 잃어버린 양에게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라고 하신 것은 우선적으로 내 형제, 이웃에게 먼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주님의 관심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6월 11일 행복나눔축제를 준비하면서 한 영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비신자를 작정하려고 합니다. 예비 신자, 말 그대로 마치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잠재적인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면 누구나 우리의 예비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가족을 위해서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족 전도는 눈물의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저희 교회에도 새생명축제를 통해서 안 믿던 남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눈물로 기도하게 하십니까? 남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족전도는 한 두 번의 기도로 되지 않습니다. 평생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가 좋습니까?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맛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나 혼자 예수 믿고 천국 가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최대 관심은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함께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관심을 이루어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엘머 타운즈" 라는 교회성장학 교수는 처음 교회 나오게 되는 유형의 86%가 친구나 친지를 통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다고 합니다. 노방전도는 6%, 목회자를 통해서 6% 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믿지 않는 형제나 이웃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주님의 관심에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2) 전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다(7-8절)
마태복음 10장 7-8절은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라고 말씀합니다.
전도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이 능력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능력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전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전도자에게는 수많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8장 5-8절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내려가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그때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걷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성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왜 복음을 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까? 복음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먹고 움직이면 우리 하나님이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 가운데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영적인 능력을 잊어버리고 삽니까? 복음을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입술을 열어서 예수를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능력이 없습니까? 예수 믿으라고 전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차라도 타고 다니지 않고 오랫동안 세워두면 차의 기능이 떨어집니다. 자동차는 일정한 기간동안 주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동차의 제 기능이 유지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 수고, 힘쓰고 애쓸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전도는 능력이 있고 은사 받은 분들이 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적인 수준과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창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을 잘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그 영혼을 마음에 품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나가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영접하게 됩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전도해도 비웃기도 하고 "너나 잘 믿어라" 하던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소개할 때 관심을 보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누가 설득해서 되겠습니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줄 믿습니다.
1863년 12월, 23세의 청년이었던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들어왔는데, 꽃다운 나이에 아내를 잃습니다. 이 청년에게 중국의 한 모퉁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아직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는 중국어로 된 성경을 배에다 싣고 대동강 쪽을 향하여 올라왔습니다. 그러자 관군들이 그 배에 불을 질렀고 그는 강변으로 끌려내려 와서 칼에 맞아 순교를 합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그 순간에 자기 목을 치려고 하는 조선 사람에게 성경을 건내주고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래사장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난 후, 성경받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병졸은 성경받기를 거부하고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쳤습니다.
이 병졸이 박춘권이라는 사람입니다.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박춘권은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자신이 죽어가면서 건내주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동료들 몰래 흩어진 성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영접하고 훗날 평양 영주교회에 최초 영주(장로)가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무기력하게 대동강 변에서 피 흘리며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성령의 능력이 임해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워지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고 복음을 전하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전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줄 믿습니다.
3) 전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다(10절)
마태복음 10장 10절은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가 자기의 생활에 염려해서는 안 된다. 옷, 신, 지팡이는 하나님께 맡겨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주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수고할 때에 신령한 축복이 있습니다. 일꾼이 자기 먹는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인물 가운데 노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방주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게 한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맑기만 하고 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세상을 물로 멸할 것이니 산에다 방주를 지으라’ 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120년간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서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를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노아 영감! 왜 시간 낭비, 헛된 일을 합니까?" 하고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홍수가 나서 물이 땅을 덮을 때,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아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도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창세기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장 5절은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라고 그가 전도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어려워도 복음 전도를 위해서 충성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령한 축복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전도, 선교할 때, 교회, 국가, 가정, 개인의 삶에 하나님이 축복하여 주십니다. 축복을 받으려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생과 삶을 책임지시고 지키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때, 나를 통해서 전도 받고 구원받은 성도를 만났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권사님! 집사님! 내가 당신을 통해서 전도 받은 아무개 집사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어서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하고 고백을 받는 영광과 축복이 있기 바랍니다. 또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