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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시해전날인 10월7일촬영한것으로 추정되는 한성순보사(비밀아지트) 앞에서 촬영한 사진!
일본인들의옷이 증명해주고있다.
한성순보사의 책임자는 바로아다치겐조임!
아래의 살인자들은 확실히 그 죄악이 나타난者[놈]들입니다.
그외에 확인이 되는즉시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살인자 1.
메이지 일왕[ 明治日王]
1852년 11월 3일 - 1912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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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 122대 일왕이다.
본명은 무쓰히토(睦仁)이다.
일국의 국모를 살해하는일에 나라의 수장인 일왕이 몰랐다고 하면 그 누가 믿으랴
또한 명성황후 살해 사건이일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이 점을 알려준다.
명성황후 상해 사건 지휘자들이 일왕의 측근이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해준다.
살해범들은 히로시마 재판소에서 석방되자 마자 전 일본에서 구국적 영웅으로 대접하는 분위기로
동경까지 오는데 모든 연변에서 이사람들에게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도쿄에 도착했을때 일왕이 시종대신을 보내 수고했다고 노고를 치하했다고한다.
일본정부는 애처부터 시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일본정부의 합작으로 저질러진 만행이기때문이다.
살인자 2.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伊藤博文]
1841. 10. 14 일본 스오 구니[周防國]~1909. 10. 26 중국 만주 하얼빈[哈爾濱]에서 대한제국 우국지사안중근 에게 저격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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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대한제국 의민황태자 이은
우국지사 안중근은 재판장에서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살인자 3.
미우라고로[三浦梧樓]
1846 일본 야마구치 현[山口縣]~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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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일본 병부 권소승
1871년 일본 육군소장
1878년 일본 육군중장
1882년 일본사관학교장
1884년 서구 및 미국 병제 시찰, 자작 작위 받음
1888년 일본 궁중고문관
1890년 일본 귀족원 의원
1895년 조선특명전권공사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주도
1895년 친일파중심의 제4차 김홍집 내각구성
1910년 일본 추밀원 고문관
을미사변의 배후조종자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지식인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난자살해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의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제4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구성했다.
명성황후살해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일어나자 히로시마[廣島] 지방재판소의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곧 풀려났다.
1910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으며 정계의 원로로 활약했다.
대한민국 국민이 절대 잊지않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원수이다.
살인자 4.
이노우에 가쿠 고로[井上角五郞]
1836. 1. 16 일본 나가토 구니[長門國] 조슈[長州]~1915. 9. 1 도쿄[東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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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에 일본을 지배한 과두제 정치체제의 일원이었다. 무사 가문 출신인 이노우에는 나중에 일본 최초의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소년시절부터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살인자 5.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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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국민동맹회를 결성해 ‘조선 장악’을 주장했으며 조선 북부와 간도 지방에서 줄곧 지형조사와 정탐활동을 했다.
생전에 “내가 죽으면 장백산(백두산)에 뼈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1909년 병사했다
최근 그 의 외손자가 명성황후의 릉에 살인자 후손들과 참배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용서받을 일이 아닙니다.
천번만번 사죄를 하여도 절대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살인자 6.
이에이리 가키쓰[家入嘉吉]
살인자 7.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육군 포병소좌 출신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당시 일본 전권공사의 수행원이었고, 이후 조선으로 건너와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으로서 많은 조선인 관리들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 정부 요인들조차 그에게 굽신댈 정도로 유명해졌다고 하며, 1897년부터는 중국에서 낭인 생활을 했다
살인자 8.
시바 시로우[柴四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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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일본극우 낭인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소속의 인사들과 긴밀하게
협의하며 미우라를 보좌했다.
당시 조선의 정세를 염탐했으며 필요한 경우 수단 방법을 가리지않고목숨을 바쳐 테러에 가담하였다.
미국 하버드대와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1886년 농상무성대신의 비서관이 됐고, 정치소설을 써 작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892년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에는 김옥균의 후원자 노릇도 했다. 을미사변 이후인 1898년에도 다시 중의원에 당선됐고 이후 10선 의원이 됐다. 1914년에는 내각 외무성 참정관을 지냈다.
살인자 9.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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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신보사의 사장인 아다치 겐조.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입니다
1894년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조선시보(朝鮮時報)를 발행하다 갑오경장 이후엔 서울로 올라와 한성신보의 발행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을미사변 이후인 1902년에는 제국당으로 출마해 중의원 의원이 된 뒤 줄곧 당선돼 14선 의원이 됐다. 1925년 가토 내각에서 체신상이 됐고 뒤에 내상도 역임했다. 1932년엔
국민동맹회를 결성해 총재가 되기도 했다.
살인자 10.
사세 구마테쓰[佐瀨熊鐵]
의사 출신으로 조선에서 경무청 의무(醫務)등을 지냈으며 1902년 중의원에 당선됐고, 1905년 일진회의 을사조약 찬성 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1906년엔 한국 농상공부 촉탁이 돼 평양에서 무연탄광 개발에 참여했다. 다케다 한시(武田範治)는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 운동을 전개했다.
살인자 11.
토오 가쯔아키[藤勝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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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쿠시다 신사에 보관중인 토오 카쯔아키의 칼
이 칼에는
"一瞬電光刺老狐(일순전광자노호-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는 글귀가 선명히 적혀있다.
살인자 12.
스기무라
살인자 13.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살인자 14.
오사 키 세이키치[大崎正吉]
살인자 15.
호리구미 구마이치[掘口九萬二]
동경제국대학 법학부출신의 엘리트 지식인이다.
살인자 16.
미즈노 렌타로[水野練太郞]
살인자 17.
스기야마 시게마루[衫山茂丸]
살인자 18.
나카무라 다테오
살인자 19.
다케다 한시[武田範治]
‘조선 사정 전문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문필가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에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일진회를 조종하면서 ‘합방’ 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측 가담자.
살인자 .
우범선[禹範善] '씨없는 수박'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1857~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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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의 한 명
한말의 개화파 무인으로서 일찍부터 친일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1895년에 우범선은 휘하의 장병을 이끌고 명성왕후의 살해(을미사변)에 참여했다.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者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3년 독립협회 부회장을 지낸 바 있는 고영근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이로써 고영근은 대한제국으로부터 포상되었다.
살인자 .
조중응[趙重應, 법부대신]
명성황후 시해 가담. 고종 퇴위 강요.
1909 친일지 <법정신문> 발간. 자작. 1910-19 중추원고문, 1916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 회장 일훈 1등 대욱장
살인자 .
이주회 [李周會]
동학농민군 진압한 명성황후 시해 주범
후에 체포된 뒤 대역죄인으로 1985년 12월 19일 처형당하였다.
살인자 .
이두황 [李斗璜] 1858 서울 ~ 1916.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등 반일적 정책을 취하는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패와 군을 동원하여 학살한 을미사변에 훈련대를 이끌고 광화문의 경비를 맡았다.
그 후 아관파천이 일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일본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비호하에
1907년 특사가 되어 귀국, 친일파를 심으려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배려로 중추원부찬의가 되고 전라북도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도 전라북도장관으로 죽을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동안 여러 차례에 걸친 서위와 거액의 상여금을 일제로부터 받았다.
살인자 .
이진호[李軫鎬] 창씨개명 : 李家軫鎬 1867~1943
이들 중에는 미국
하버드대 출신도 있었고, 훗날 일본 정부의 각료나 중의원 등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다. 이것은 을미사변이 ‘무지한 폭력배’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침략’이라는 커다란 밑그림 위에서 치밀하게 계획됐고, 극우 지식인들에 의해 실행된 작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을미사변으로 재판에 회부됐던 일본인들은 모두 56명이었고, 이중에서 ‘민간 낭인’으로 분류된 자는 모두 32명. 특히 규슈 지방의 사족(士族) 출신이 많았다. 메이지유신 이래 정치적으로 소외돼 불평불만을 지닌 사람들이 조선과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정치활동을 하려 했던 이른바 ‘대륙 낭인’의 전형적인 사례인 것으로 분석된다.
첫댓글 살인자의 얼굴들 잘 보세요!
능지처참을 당해도 시원치 않을놈들 ........
슬프네요... 일본이라는 나라는 알면 알수록 싫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