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방 일기 4 - 내 마음의 습지 / 안영희
흙은 본래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질을 갖고 있거든요,
그랬다 매일 저승잠만 주무시는 구순의 우리 시어머님
봄이면 유독 부슬대며 흙가루를 흘리는 서른 살도 넘은 항아리
노여움 욕망들의 거친 힘에게 쉽게는 사로잡히지 않고
짧게 헤어나오는 것은 地.水.火.風 그중에서 불이 내게서
등을 보이게 시작하는가 그러나 봄꽃 향내 가을 바람에
대책이 없음 그리고, 그리고
다 놓아 보내고
한사코 귀거래의 몸짓을 하는
저 흙이 뜨겁게 노래케 하는,
도방 일기 5 - 아니면 모레쯤 눈이 내리리라 / 안영희
허억, 화살에 맞은 짐승이네 나는 양동이에 도구들 챙겨들고
작업실 층계 두어 칸 굽어 오르다가 (가건물 천막집 스위치
올리고 어제는 조일토록 혼자 초벌구이 그릇에 그림을 그렸고
가마실 밖 바람받이에 엎드려 오늘은 드럼통만한 유약통들과
통정하느라 저물도록 끼니 굷은 줄도 몰랐는데) 가마실
지붕 곁에 절정 치닫는 불꽃, 11월 단풍나무 한 그루
곱은 열 손가락
실패한 기물인 양 마구잡이로 물감 먹은 몰골의
육체노동자
그러나 단풍나무여
네 모습, 지상의 모든 불이
슬픔이더라
내일, 아니면 모레쯤은 눈이 내리리라
도방 일기 6 - 파편들을 삽질하다 / 안영희
한 때 도자길 했다는 그 여자 말했네
아니요
10년동안이나 함께 살았는데
내 생에 유일한 사랑이었는데
어쩜 그렇게 같지요? 그리 쉽게
한 순간에 깨져버리는 것
완강히 고갤 저었지만
쉽게도 나가는 금, 어이없는 붕괴가
자재 자체의 결함 때문이었던 걸
그 오래 달려 있었던 유일 자재,
사람이 바다모래였다는 답을 얻기까지
내 인생의 전성기를 다 허비해 버렸기로
입었던 옷들 거기 벗어 두고……
나무 사람 집 바위 그 모오든 부서져 온 파편들을
삽질했네 물을 부어 아울러서
내 안의 넘치는 눈물 내 안에서 솟구치는 분노
머리 푸는 바람, 질주 열망하는 바람을
가마 불에게 먹였네
사람을 지었다는 저 본래의 재료 지수화풍에게로
처.음. 에게로
도방 일기 7 - 무장해제 / 안영희
(긴 숄의 흐르는 분위기 연출하길 즐기던
나 언제 1미터 64센치 정제된 도시여자였었나)
낯선 누구의 머언 생인 듯
떠 있네
내가 벗어놓았던 지상의 하루는
시대미상의 수묵화 되어
이전투구
소유권 다툼의 안데스의 영양처럼
모서리 무자비하게 치고받던 사람의 집들도
어느덧 붉고 푸른 별이 되고 있네
유장한 노을 속 서녘으로 나는 세 떼처럼
발을 거두고
깊숙한 그의 들숨에 빨려 들어갔다가
긴 날숨 끝에 뱉어 올려지자
그러니까
저 흙이 온종일 내게 한 짓은
내게서 모조리 무기를 내리게 하는 일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