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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군(江東郡)
평양직할시 북동부에 있는 군.
정의
평안남도 중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성천군, 서쪽은 대동군, 남쪽은 중화군과 황해도 수안군, 북쪽은 순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53′∼126°17′, 북위 38°57′∼39°16′에 위치하며, 동서길이 약 22㎞, 남북길이 약 32.5㎞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면적 668.23㎢, 인구 8만 409명(1944년 현재)이며, 1개 읍 5개 면 110개 이로 되어 있다. 군청 소재지는 승호읍 승호리이다.
자연환경
동북쪽은 북대봉(北大峰) 산줄기와 지맥이 뻗어 내려 태을덕산(太乙德山, 526m) 같은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중앙부에도 그 여맥이 미쳐 대체로 산지가 많으나, 서쪽에는 대동강이 북에서 서남으로 흘러 낙랑준평원이 전개된다. 이 평야는 비교적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시설도 잘 되어 있어 중요 생산지대를 이루며, 주요 주거지대가 된다.
북쪽으로 강동면의 진산인 대박산(大朴山)은 산세가 가파르고 봉우리가 많아 아름다우며, 남쪽 기슭에 단군릉(檀君陵)이 있다. 서북쪽의 진산인 봉화산(烽火山)에는 봉화대 자리가 남아 있다.
남쪽으로는 만달산(晩達山)이 있는데 곳곳에 굴이 있고 영천(靈泉)이 샘솟으며, 약초와 버섯이 많이 난다. 서쪽으로는 손자산(孫子山)·진사봉(進士峰) 등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봉두산(鳳頭山)·제석산(帝釋山)이 있다.
하천으로는 수정 같이 맑다 해 이름 붙여진 수정천(水晶川)이 만류제(萬柳堤)를 거쳐 서강(西江)으로 들어간다. 서강은 군을 남북으로 관류하며, 대동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남쪽으로는 남강(南江)이 서쪽으로 흐르는데, 삼등에서 능성강(能成江)이 되어 계속 서쪽으로 흐르다가 대동군의 법수(法首)에서 서강과 합류해 대동강을 이룬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의 평안계(平安系)에 속하는 석회암으로, 석탄의 매장도 많을 뿐 아니라 카르스트지형을 이루어 도처에 동굴과 종유동이 형성되어 있어 이 지방의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전반적인 지형은 강동산맥이 뻗어 있는 북부와 동부, 남동부가 높고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대동강변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북서부에는 봉화산(196m)·현명산(530m)·추봉산(514m)이, 북동부에는 태을덕산(太乙德山:526m)·각홀산(631m)이, 남부에는 풍어산(766m)·제령산(499m)이 솟아 있다. 북서쪽 경계를 따라 대동강이 남쪽으로 흐르며 그 지류인 수정천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또한 남쪽 경계로는 남강이 동서로 흐른다. 군의 서부 수정천 하류 연안에는 강동평야가 펼쳐져 있다.
내륙지방에 위치하므로 겨울의 북서계절풍을 막아 주는 산맥이 없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7.3℃, 1월 평균기온 -9℃, 8월 평균기온 25.2℃, 연강수량 1,079㎜이며, 서리는 보통 10월 13일경부터 내려 이듬해 3월 10일쯤에 끝난다.
역사
[고 대]
강동면 문흥리의 고인돌은 강동지방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입증하나, 고조선시대의 사정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칠포리의 아달산 서쪽에 있는 능이 단군의 능묘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진위를 가릴 증빙자료가 없다.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가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고구려의 세력이 강동지방까지 미치게 된 것은 낙랑군을 몰아낸 4세기 초로 추정되는데, 만달산 기슭의 고분에서 고구려시대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전성기에 충주지방까지 뻗쳤던 고구려의 세력이 점차 신라의 북진정책에 밀려 마침내 668년(신라 문무왕 8)나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그 뒤 통일신라의 북방국경이 대동강 하구와 원산을 연결하는 곳으로 정해짐에 따라 이 군은 220년간 신라의 북변에 위치하게 되어 북방의 호족(胡族)과 겨루는 최전선에 놓이게 되었다.
[고 려]
고려 건국 후 태조가 북진정책을 내세워 평양을 서경으로 정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에 성(城)·진(鎭)을 설치해 북진의 거점으로 삼을 당시, 변방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황해도지방으로부터 서북지방으로 주민을 이주시켰다. 989년(성종 8)에는 서경에 설치된 서북면병마사의 관리구역에 편속되었다.
오늘날 강동군으로 부르는 지역은, 고려 문종대에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경기4도(西京畿四道:東道·西道·南道·北道)를 철폐하고 6현(縣)을 두게 되었을 때 강동현과 삼등현의 두 현을 합한 지역이다.
1136년(인종 14) 네 향촌(仍乙舍鄕·班石村·朴達串村·馬灘村)을 강동현으로, 성천현(成川縣)에 속하던 세 부곡(新城·蘿坪·拘牙)을 삼등현으로 편제하였다.
1216년(고종 3) 몽고군에 쫓긴 거란족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강동땅은 격렬한 전란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쫓겨온 거란족들이 약 2년간 서북 각지에서 만행을 자행하던 끝에 1218년 12월 강동성에 주저앉게 되자, 합진(哈眞)이 이끄는 1만 명의 몽고군과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지휘하는 동진(東眞)의 군사가 이를 토벌하려고 강동성으로 진군해 왔다.
이 때 고려는 서북면원수 조충(趙沖)과 서북면병마사 김취려(金就礪)로 하여금 몽고·동진의 군과 연합해 5만여 명의 거란인을 격파하였다.
이 때 생포한 일부 거란인을 각도에 분속시켜 살게 한 결과 거란장[契丹場]이 생겨나게 되었다. 강동성싸움이 있은 지 10년 뒤부터 약 30여 년간에 걸쳐 몽고군의 고려침략이 자행되었고 이 때 강동땅은 전란에 휩싸여 황폐해졌다.
[조 선]
조선이 건국된 뒤 전국 지방행정구역이 8도로 구분되면서 서북면으로 불려 오던 서북지방이 평안도로 개명되고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이 때 강동현은 현감, 삼등현은 현령이 수령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강동땅은 사람이 드물게 살아 조공의 영송(迎送) 및 교역을 담당하기에 너무 힘에 겨웠다. 이에 세종은 1438년(세종 20)과 1440년 두 차례에 걸쳐 남쪽의 하삼도(下三道:慶尙道·全羅道·忠淸道) 사람을 서북 각지로 옮겨 살게 하는 이주정책을 적극 펼쳤다. 이로써 강동현·삼등현에 사람이 많이 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435년에 강동 사람 곽거(郭巨)가 현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강동현이 폐현되고 삼등현에 합쳐지게 되었다. 이 때 현의 명칭은 삼등현으로 되었지만 치소는 강동현 자리로 옮겨졌다. 1482년(성종 13)에 다시 삼등현에서 분리되어 강동현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이일(李鎰)의 5,000명의 군사가 강동지구에 포진했다가 평양수복작전에 참가했으며, 1811년(순조 11)에 서북지방을 휩쓴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는 강동현감 이진연(李晉淵)이 강동의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참전하였다.
[근 대]
이 군의 장정들은 한말 의병운동에 적극 참여해 국권수호의 애국운동에 헌신하였다. 이 군을 근거로 해 활약한 의병장으로는 김성률(金成律)·김흥석(金興錫)·박장손(朴長孫)·서광도(徐光道)·신병두(申炳斗)·장정원(張正元)·정홍근(鄭弘根) 등이 있다. 주로 삼등지방에서 게릴라식 전투를 전개해 일본관헌을 혼란시켰다.
지하자원이 풍부해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의 경제수탈이 심해 승호리의 시멘트와 각지의 무연탄광이 강제로 개발되었다. 이에 인적·물적 희생이 컸으므로 8·15광복의 기쁨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가슴 벅찬 일이었다.
강동이란 지명의 강은 대동강(大同江)을 의미한다. 북쪽은 평안남도 평성시·성천군, 동쪽은 회창군, 남쪽은 황해북도 연산군, 서쪽은 삼석구역·승호구역과 경계를 이룬다.
산림은 군 면적의 약 76%를 차지하며 산림의 약 80%가 침엽수림으로 되어 있다. 지질은 대체로 중생대 평안계에 속하는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석탄의 매장량이 많고 카르스트지형을 이루어 도처에서 종유동 등이 발견된다. 토양은 대부분 인 성분이 많은 갈색산림토가 분포한다.
유물·유적
고천면 고성리에 있는 토성인 고읍성(古邑城)은 한때 강동현의 치소가 있던 성터로 고려 고종 때 3년간이나 거란족에게 점거되었으며,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게 섬멸된 격전지이다. 강동면 칠포리아달산에는 둘레 136m의 거대한 능묘가 있는데, 예로부터 단군릉으로 전해져 현아(縣衙)에서 관리해 왔다.
한편, 봉진면에는 고구려 동천왕릉(東川王陵)으로 전해지는 한왕묘(漢王墓, 일명 皇帝墓)가 있으나 정확히 누구의 묘인지 확인할 수 없다.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인 조호익(曺好益)이 이곳에서 15년 이상이나 귀양살이한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고지산(高芝山)의 풍뢰당(風雷堂)은 제자를 가르치던 서재이고, 청계서원(淸溪書院)은 강동의 선비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서도팔경의 하나인 삼등면에 있는 황학루(黃鶴樓)는 1667년(현종 7)에 재건되었으며,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워 문인들의 시상(詩想)을 키워 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고천면 열파리에 있는 사각 정자는 본래 서강원(西江院)이라 불렀으나, 중종의 부마인 여성위(礪城尉) 송연(宋宴)이 열파정(閱波亭)이라고 개칭하였다. 수정천의 북안에는 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한 만류제가 있어 지역주민의 소풍지가 되기도 하였다.
사찰로는 삼등면 가산 절벽 위에 있는 가산사(架山寺)가 유명하다. 갈현(葛峴) 길가에는 이공림송(李公林松)으로 불리는 반송(盤松)이 있는데, 근처 솔밭을 모두 벌채할 때 이동욱(李東郁)이 아깝게 여겨 길 일대를 매입해 보호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 밖에 삼등면의 봉두산 기슭에 고려 때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동림사(東林寺)가 있으며, 강동면 문흥리에는 고인돌이 있어 그 부근의 지명을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육·문화
교육기관은 문헌상으로는 1672년(현종 13)에 청계서원이 건립되었고, 향교가 있어 유교적 교화기능을 담당하였다. 한말 국권수호 및 애국계몽운동의 기풍이 이곳에도 미쳐, 기독교를 통해 개화문명을 깨우친 인사들과 애국지사에 의한 교육구국투쟁의 방법으로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1907년 박도현(朴道鉉)이 경신학교(敬信學校)를, 김상준(金尙俊)이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석문(李錫文)이 숭덕학교(崇德學校)를, 이용균(李龍均)이 보성신숙(普成信塾)을 세웠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선각자 김순석(金淳奭)은 신흥학교(信興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에는 승호읍의 김병두(金秉斗)와 오복원(吳復元)이 삼성의숙(三成義塾)을 설립, 이 군의 근대적 중등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또 1920년에는 만달면에 삼성소학교(三成小學校)가 건립되어 신학문교육에 기여하였다. 8·15광복 당시 이들 사립학교를 개편하거나 공립학교를 신설해 총 6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한편, 한말 평양으로부터 장로교가 전도되어 신흥·숭덕·계명(啓明) 등의 기독교학교가 건립되었다. 강동읍에 종리원(宗理院)을 두었던 천도교는 민족사상을 심어 주었으며,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회(儒林會)에서는 학술강습소를 조직하고 자주 명사초청강연회를 개최해, 산협지대로 인한 폐쇄적인 지역의 낙후성을 극복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31년에는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치해 유교도덕을 진작하였다.
이 고장에 전래되고 있는 설화에는 「이부평전설(李富坪傳說)」·「황학루전설(黃鶴樓傳說)」·「관굴전설(官窟傳說)」 등이 있다. 「이부평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등면 아차천 서쪽에 있는 들을 이부평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송림산 아래에 큰 못이 있었고 이부라는 사람이 근처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이부가 못에 가 보니 물 위에 이상한 생물체가 떠 있었다.
그가 놀라 용이라고 소리쳤더니, 그 날 밤 꿈에 푸른 옷을 입은 소년이 나타나, “나는 이 못에 수천 년이나 있었지만 아름다운 이름을 얻지 못해 승천을 못했는데 당신이 나를 용이라 불러 주어 승천하게 되었으니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연못을 옥토로 변하게 해주겠다.”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 날 큰비가 쏟아져 부근의 능성강이 범람해 물길이 남쪽으로 바뀌어 흐르게 되니 못은 큰 평야가 되었고, 이부는 이 땅을 부지런히 경작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황학루전설」은 삼등면 능성강 기슭에 있는 누각에 얽힌 이야기이다. 옛날 이곳에 마음씨 고운 노부부가 주막을 차려 놓고 술을 팔아 살아갔다.
하루는 백발노인이 찾아와 술을 청하므로 정성껏 대접했더니 먹고 그냥 가 버리기를 닷새 동안이나 하다가 엿새째에 누런 종이로 학을 한 마리 만들어 주면서 잘 간직하라고 한 뒤 갑자기 사라졌다.
그 부부는 학을 장롱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 날 장롱문을 열어 보니 누런 학이 살아 나오면서 춤을 추었다.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에 장사가 잘 되어 부부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하늘이 주신 복이라 생각하고 황학을 기념해 이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관굴전설은 봉진면 봉당리에 있는 굴에 얽힌 이야기이다.
산업·교통
대동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는 대체로 밭농사가 이루어져 보리·조·밀·콩·수수 등의 농산물이 풍부하며, 양잠·담배재배·축우사육 등을 부업으로 한다.
특산물로는 누에고치·땅콩·밤이 산출되는데 땅콩은 한때 1만2000석 이상 산출되어 전국에서 수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누에고치는 강동고치[江東繭]라 해 전국적으로 유명했고, 이곳 평양밤은 맛이 좋아 함종·강서·성천 밤과 함께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광업은 평안남도 남부탄전 동부구역의 주요부를 이루며, 무연탄의 매장량이 많다. 동부구역의 탄전은 대략 삼각형을 이루는데, 동서 26㎞, 남북 18㎞에 걸쳐 분포해 있다. 만달산·강동·삼등의 각 탄광에서 비교적 많이 채굴되었고, 이 밖에 질이 좋은 석회암이 도처에 많아 승호리 시멘트공장의 원자재가 되었다.
산간 각지와 대동강 연안의 오지에는 정기시장이 개설되었다. 강동면 아달리의 현내장(懸內場)은 3·8일장이고, 삼등면 문왕리의 조양장(朝陽場)과 원탄면 고비리의 고비장(高飛場), 봉진면 봉당리의 봉진장(鳳津場)은 1·6일장이며, 승호읍 승호리의 승호리장(勝湖里場)은 5·10일장이고, 고천면 열파리의 열파장(閱波場)은 2·7일장이다.
조양장에서는 주로 농산물이 거래되며, 승호리장에서는 직물과 수산물의 거래가 활발하다. 현내장·승호리장·열파장에는 가축시장도 병설되어 있으며, 특히 열파가축시장은 거래가 활발하다.
교통으로는 평덕선(平德線:승호리∼덕천)이 남쪽 경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다가 흑령 부근에서 북행하는데, 입석(立石)·승호·화천(貨泉)·흑령·석름(石廩)·강동의 여러 역이 설치되어 군내 교통의 중요한 구실을 한다. 도로는 평양∼원산간의 1등도로가 원탄·고천·강동의 각 면을 통과하고, 평양∼삼동, 사인장∼열파, 강동∼승호리간에는 3등도로가 완성되었으며, 강동∼삼동, 강동∼사인장간에는 등외도로가 개통되었다.
대동강의 수운은 뗏목과 신탄(新炭)을 운반하는 데 이용될 뿐이다. 이 고장은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 많으며, 강동군이 아직 현으로 있을 당시의 ‘강동팔경’과 조선시대 삼등현 일대의 ‘삼등팔경’ 등이 특히 유명하다.
강동팔경은 대박산에서 고사리 꺾는 모습(大朴山採薇), 대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臺山寺暮鐘), 수정천에서의 낚시질(水晶川釣魚), 사인암에서의 매사냥(舍人巖放鷹), 봉악의 맑은 날 설경(鳳岳霽雪), 날 저물 때 용교에 배를 댄 풍경(龍橋晩泊), 진사봉에서의 달구경(進士峰玩月), 모운대에서의 관등놀이(暮雲臺觀燈) 등 여덟 곳의 빼어난 정경을 말한다.
삼등팔경은 가산사의 저녁 종소리(架山暮鐘), 묵촌의 봄밭갈이 풍경(墨村春耕), 매바위에서 낚시 드리우는 모습(鷹巖垂釣), 앵무주와 배 떠 있는 풍경(鸚洲泛舟), 황학루 가을달(黃鶴樓秋月), 봉두산과 아지랑이(鳳岑晴嵐), 고산에 내려앉은 기러기(孤山點雁), 광한정에 눈 날리는 풍경(廣亭飛雪) 등의 정경을 말한다.
면적은 516㎢, 인구 22만 1,539명(2008년 추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