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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아동문학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홍
영화 에세이 (15) |
상징과 은유를 통한 계급적 모순의 각축전
봉준호의 <기생충>
김 문 홍
장르의 뒤섞임을 통한 불랙코미디
자본주의의 계급 체계를 도식화하면 피라미드 구조로 나타난다. 상위 몇 프로가 꼭짓점을 이루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진다. 문제는 얼마 되지 않는 꼭짓점의 계급 체계가 부를 독차지하고 전체 구조를 버티게 하는 하부구조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사람이 고루 평등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이상적 공산주의는 한낱 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분을 도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그 격차에서 빚어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두 계층은 끼리끼리 집단을 이루어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둘의 속성에서 빚어지는 차별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 둘이 그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한데 아우러진다면 어떤 현상이 빚어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한 공간에서 조우하게 함으로써 빚어지는 끔찍한 풍경을 상상한다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이다.
봉준호의 <기생충>(2019, 131분)은 이러한 전복적 상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예술적 작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제72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여 세계 모든 영화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작품은 그 주제의식과 소재가 어느 날 느닷없이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봉준호의 이전 몇몇 작품에서부터 그 싹을 보이고 있었다.
권력의 허구성을 풍자한 <살인의 추억>(2004)에서부터 국가 시스템의 허술함을 풍자한 <과물>(2006), 계층이동의 혁명적 의지를 시도한 <설국열차>(2013), 자본주의적 이권의 각축을 고발한 <옥자>(2017)까지, 봉준호의 비판적 리얼리즘의 정신은 그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비판의 예리한 리얼리즘 정신이 <기생충>에서 정점을 찍게 된 것이다. 이전의 작품들이 선 굵은 비판과 저항이었다면 이번 작품 <기생충>은 철저하게 계산된 미장센, 은유와 상징의 촘촘한 문학적 서사, 장르의 뒤섞임을 통한 블랙코미디로 자본주의적 모순과 부조리를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으로 공감대를 크게 형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장르영화의 복합적인 구조의 서사를 이루고 있다. 기택(송강호 분)의 아들인 기우(최우석 분)에서부터 딸인 기정(박소담 분), 그리고 기택과 그의 아내 충숙(장혜진 분) 등 일가족이 글로벌 IT 기업의 CEO인 박사장(이선균 분) 호화주택에 위장취업하기까지의 과정은 블랙코미디의 드라마로 일관한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느닷없이 들이닥친 전 가정부 문광(이정은 분) 일가와의 업치락뒷치락 소동은 서스펜스와 호러, 그리고 후반부 파티장면의 살인극은 전혹극의 장르로 뒤섞인다. 그러나 이러한 장르들은 부딪침에서 오는 생경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만약 이 영화에서 문광의 등장에서부터 파티 장면의 반전이 없었더라면 그저 평범한 드라마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후반부의 서스펜스와 호러, 그리고 잔혹극은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일종의 화룡점정이고, 봉준호의 전복적인 상상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키워드인 셈이다. 또한 영화 전편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상징과 은유의 대화, 빈부의 속성을 드러내는 은유적인 풍경과 오브제들, 무엇보다도 없는 자의 치명적 속성을 냄새로 치환하고 있는 다양한 기호학의 흔적들은 드라마의 예술적 품격을 드높이는데 결정적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지하와 지상의 집, 지상의 집에 있는 지하층,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직의 계단, 물난리와 미세먼지 정화의 역설적 대비, 다송의 인디언 놀이, 소독약과 눈부신 햇빛 등의 은유적 상징의 장치들은 이 영화를 해석하는 실마리로 작용하고 있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속성에 대한 역설적 대비
이 영화는 대화 속에, 미장센을 이루는 풍경과 구조물에, 그리고 오브제를 통한 은유와 상징 속에 여러 가지 기호들을 숨겨놓고 관객들에게 보물찾기의 유희를 제공하고 있다. “부자가 구김살이 없는 것은 돈으로 곱게 다림질하기 때문이다.”, “있는 자와 없는 자는 선만 잘 지키면 탈이 없다.”, “서울대에 문사위조학과가 있다면 수석 입학할 것 같다.”,“마치 내가 이곳에서 태어나 살아온 것 같다.” 등의 대화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속성을 극명하게 잘 은유하고 있다.
박사장 집을 간신히 빠져나온 기택, 그리고 기우와 기정은 빗속을 뚫고 끊임없는 계단 이동을 통해 아래로 내려온다. 그것은 곧 한낱 춘몽과도 같은 부자 흉내의 술판에서 끝을 모르게 추락하는 없는 자들의 절망적 오딧세이아 여행이다. 이 장면에서의 이어진 계단은 빈부의 수직적 계층 이동을 상징하고 있다. 다송이 줄곧 시도하는 인디언 놀이는 빼앗긴 자의 절망적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은 인디언들인데, 그들은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청교도들에 의해 터전을 빼앗긴다. 이 영화에서의 인디언 놀이는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가난한 자들의 절망적 상황을 상징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역설적인 시퀀스는 전 가정부 문광이 등장하고부터 다송이의 생일 파티 장면까지다. 이전까지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이들 두 계층의 기묘한 동거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문광이 등장하고부터는 기택 일가와 문광 일가의 대립과 갈등으로 일관한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동거와 공존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키고 상대에 대한 예의만 지키면 별 탈이 없다. 그러나 없는 자들 끼리의 대림과 갈등은 생존의 위협에 대한 본능적 대결이다. 문광 일가는 지하층을 빼앗기면 목숨을 담보할 수 없고, 기택 일가는 그들의 위장취업이 탄로 나면 다시 가난의 냄새에 찌들어야 한다. 결국 문광의 남편은 최후 반격을 하게 되는데, 그 대상은 지금까지의 기택 일가가 아니라 있는 자인 박사장 쪽으로 향한다. 기택의 딸인 기정이 그의 칼에 찔리고, 그는 다시 기택의 아내인 충숙에 의해 산적용 꼬챙이로 희생된다.
다음 장면에서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대립과 갈등으로 첨예화된다. 박사장이 문광 남편의 가난 냄새에 코를 찡그리자, 이에 분노한 기택이 박사장을 찔러 죽인다. 없는 자들끼리의 적대 관계에서 있는 자에 대한 본능적 혐오와 적대감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은 기택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기택은 없는 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면, 박사장의 냄새에 대한 민감한 반응을 촉매로 하여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과 정체성으로 의식화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없는 자들의 절망적 상황을 희비극적 톤의 블랙코미디로 펼쳐보인 우울한 픙경화일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은 끔찍한 살인의 잔혹극 이후에 일말의 희망적 징후를 매설해 놓고 있다. 그 이후에 이 영화는 기택과 그의 아들 기우가 벌이는 판타지로 전환된다. 기택이 지하층에 의도적으로 갇히게 되면서 꾸는 꿈과 돈을 벌어 박사장 저택을 사겠다는 기우의 현실적 꿈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후의 에필로그적인 시퀀스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없는 자들을 몹시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배우들의 생활 연기가 방점을 찍다
이 영화에서 기택이 박사장 저택의 지하층에 갇히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표층적 의미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지금의 자본주의적 구조 속에서는 가난의 절망적 상황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깨달았으니 다시 시작하면 계층 이동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적 징후가 심층적 의미일 수 있을 것이다. 기택이 지하층에서 전등 불빛을 통해 모르스 부호를 지상의 아들에게 타전하는 것은 깨달은 자들끼리의 연대감일 것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모르스 부호는 그들 두 사람만의 희망적 연대의 끈이다. 생 떽쥐베리는 <인간의 대지>에서 연대의 힘을 설명하고 있다. 수 천 피트의 상공에서 외로운 야간비행을 하는 조종사는 문득 저 아래 마을의 불빛을 보면 위안을 얻는다. 구 불빛은 마치 “당신이 위험에 처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달려가 당신을 구해줄 것이다.”라는 희망의 모르스 부호로 파악하고 위안을 얻는다.
그런 측면에서 엔딩 시퀀스의 판타지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지하층에서 올라온 기택은 정원으로 걸어나가 아들인 기우와 뜨겁게 포옹한다. 뒤이어 엔딩 크레딧에서 감독 봉준호가 작사한 ‘소주 한 잔’이란 노래를 기우 역의 최우석이 직접 부른다. 가사 내용을 살펴보면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허덕이고 있는 젊은이의 고단한 일상과 희망적 메시지가 뒤섞여 일말의 희망의 불빛을 보내고 있다.
이 작품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한국영화 100년 역사에서 기적 같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계층적 갈등은 한국적인 상황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모순과 부조리를 겪고 있는 세계 각 나라에도 해당되는 희비극적 상황이다.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인식과 공감으로서의 주제의식과 상징과 은유의 디테일로 영화의 예술적 품격을 높였다는 성과를 인정받아 최고상을 수여한 것인 만큼 얼마든지 뽐내고 우쭐거려도 될 쾌거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관객의 수용미학적 측면이다. 영화는 대중예술이기 때문에, 통찰력이 있는 자들은 영화 속에 포진하고 있는 상징과 은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관객들은 이러한 예술적 상징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신분이나 계층의 차이 없이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공동체이다. 이 영화의 위대한 점은 재미와 예술성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있는 자나 없는 자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성찰의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있는 자에게는 베풀고 끌어안는 포용의 미덕을, 없는 자들에게는 공동체적 연대감으로 역시 포용하고 아우른다는 미덕을 갖게 해준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가난에 대한 인식과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것을 통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꿈 꿀 수 있는 판타지를 갖게 했다는 점이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재미와 예술적 성취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는 보편적 공감대의 승리이다. 한국영화 100년 사에 축포를 터뜨렸다는 점과 제2, 제3의 봉준호 같은 시네 아스트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고 성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