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18 – 11. 25 삼육대학교 박물관 기획전시실 (T.02-3399-3065, 노원구 화랑로)
현상학적 행복
심미경 초대전
글 : 박정구(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동양의 화조화나 서양의 정물화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꽃은 전통적으로 가장 친근한 자연미의 상징인 동시에 미적 표현의 대표적인 주제가 되어 왔다.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꽃을 소재로 삼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화가가 자신의 조형적·미적 관점을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매우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꽃이라는 소재의 특성과 그것의 사실적 재현이라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서는 화사하기만 하여 가볍고 안일해 보이기까지 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굳이 꽃이라는 소재를 택해 ‘재현’하는 것에 관해 작가의 조형적 신념이 없다면 지속적으로 작업한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오랜 시간 꽃을 대상으로 해온 작가들의 작품은 표현의 완결성과 같은 외형적 성과만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오랜 시간 회화가 고민해온 미술 내적인 문제들이 암시되거나 드러나고 있을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도록 해준다.
심미경 또한 오랜 시간 꽃을 소재로 작업해온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러한 그의 그림을 특징짓는 것은 클로즈업한 꽃송이들로 구성된 유백색, 혹은 상아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색조의 화면이다. 꽃이라는 것이 대개 그러하듯 붉거나 노랗거나 희거나 한 단색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는 그러한 꽃들을 자신의 감성을 통해 백색조의 유려하고 세련된 화면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세련된 색감과 화려하지 않지만 장식성이 두드러진 자신 특유의 꽃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을 찾는 단서의 하나를 변함없이 그림의 제목이 되고 있는 ‘현상학적 행복’이라는 문구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보는 이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줄 가장 큰 열쇠의 하나인 작품 명제를 ‘현상학적 행복’으로 삼고 변함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삶 자체에 대한 긍정, 그리고 그 삶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많은 만남과 사건, 수시로 부닥치는 이러저러한 상황에 대해 가지는 감사와 긍정의 태도가 그림을 그리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그의 인생관이자 세계관의 표현이라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예술관으로 직결되는 것이라 하겠다. 자연과 생명, 나아가 번다한 일상에 대해 느끼는 감사와 긍정은 삶을 따뜻하고 밝은 것을 만들어 주며 행복한 것으로 이끌어주게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그에 의해 그려지는 꽃은 자연과 생명의 무수한 개별적 현상들을 파악하는 작가의 상징체이며 동시에 그 현상들의 양태이다. 그리고 그 양태는 행복이다. 그는 꽃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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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점에서 무수히 다양한 꽃들 그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형태를 부분적으로는 단순화시키고 색채 또한 단색조로 환원하는 방식 역시 이해가 가능해진다. 자연 속 꽃들은 제각기 다양한 양태를 취하고 있지만 그 핵심이자 본질은 생명의 절정이며, 그것이 결국 삶의 행복이라 여기는 그의 시각이 환원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겼다는 것이다.
꽃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자연물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모든 꽃을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지는 않다. 색은 물론이고 꽃잎이나 수술의 갯수, 꽃받침이나 암술의 모양 등등 제각기 천차만별인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색의 이파리에 암술과 수술을 그려 넣으면 무슨 꽃인지는 확인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것을 꽃으로 받아들인다. 상상의 존재도 아니면서 포괄적이고 느슨한 관념으로서 꽃은 어찌 보면 이렇게 관습적으로 용인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미경이 그리고 있는 현상학적 행복으로서의 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꽃 그림은 단순화된 외관과는 역설적으로 삶과 그 삶이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이 동일하거나 획일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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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그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이 이치이듯이 열흘 붉은 꽃은 없음이다. 그것은 밝음 속에 깃든 어두움을 보는 것이며, 생명 혹은 삶의 양면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작가가 이야기하는 ‘현상학적 행복’의 또 다른 일면이다. 어찌 삶이 밝음과 행복만으로 가능하겠는가. 밝음으로 해서 생겨나는 그늘조차 행복이라는 보다 큰 삶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고자 하는 태도가 그림 안에 배어 있음이다.
밝음과 화려함에 마냥 도취하지 않고 그것이 배태하고 있는 이면을 인식하되,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음으로써 밝음과 어두움을 하나로 포괄하여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생각하는 긍정이고 행복이며 그의 꽃들이 시사하고 있는 바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