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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일조(死生一條)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한 줄기라는 말이다.
死 : 죽을 사(歹/2)
生 : 날 생(生/0)
一 : 한 일(一/0)
條 : 곁가지 조(木/6)
출전 :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이 성어는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에서 공자(孔子)를 두고 한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노(魯)나라에 숙산무지(叔山無趾)라는 울자(兀者; 형벌로 발목이 잘린 사람)가 공자(孔子; 仲尼)를 찾아와 뵈니 공자가 말했다. “그대는 일찌기 행동을 삼가지 않아 죄를 범해서 이 지경이 되었네. 비록 지금 나에게 와서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魯有兀者叔山無趾, 踵見仲尼。
仲尼曰 : 子不謹, 前既犯患若是矣。雖今來, 何及矣?
숙산무지(叔山無趾)가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을 모르고 내 몸을 함부로 하였으니 내가 이 때문에 발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내 발보다 더 존귀한 것이 있어서입니다. 나는 그것을 힘써 보존하려고 합니다. 하늘은 덮어주지 아니함이 없으며, 땅은 실어주지 아니함이 없다고 합니다. 나는 선생을 그런 하늘과 땅이라고 여겼는데 선생이 이럴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無趾曰 : 吾唯不知務而輕用吾身, 吾是以亡足。今吾來也, 猶有尊足者存, 吾是以務全之也。夫天無不覆, 地無不載, 吾以夫子為天地, 安知夫子之猶若是也。
공자가 말했다. “내가 생각이 좁았소. 어서 들어오시오. 내 들은 바를 이야기해 드리겠소.”
孔子曰 : 丘則陋矣。夫子胡不入乎, 請講以所聞。
조금 뒤 숙산무지가 나가자 공자는 그 제자들에게 일렀다. “제자들아, 노력하라. 숙산무지는 을자이면서도 오히려 학문에 힘써 옛날의 잘못을 보충하려고 하거늘, 하물며 완전한 덕을 가진 너희들이야 더욱 그래야 할 것 아니겠느냐.”
無趾出, 孔子曰 : 弟子勉之。夫無趾, 兀者也, 猶務學以復補前行之惡, 而況全德之人乎。
숙산무지가 노담(老耼; 老子)에게 말했다. “공구(孔丘)는 지인(至人; 덕이 높은 사람)의 경지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자꾸만 선생에게 배우려고 하는 걸까요? 그는 또 수수께끼나 속임수 따위의 명성으로 소문나기를 바라는데, 지인은 그런 명성을 자신의 질곡(桎梏)으로 여긴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인가요?”
無趾語老聃曰 : 孔丘之於至人, 其未邪。彼何賓賓以學子為? 彼且蘄以諔詭幻怪之名聞, 不知至人之以是為己桎梏邪?
노담이 말했다. “다만 그로 하여금 죽고 사는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며, 옳고 옳지 않은 것을 같은 이치로 여기게 하여 그 질곡(桎梏)을 풀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老聃曰 : 胡不直使彼以死生為一條, 以可不可為一貫者, 解其桎梏, 其可乎?
무지가 말했다. “하늘이 그에게 형벌을 내렸는데, 어찌 풀 수 있겠습니까?”
無趾曰 : 天刑之, 安可解?
⏹ 인간은 왜 사는가?
며칠 전 집에서 기르던 햄스터가 죽었다. 태어난지 3년 9개월, 귀여운 햄스터가 수명을 다해 죽은 모습을 보며, 인간은 왜 사는지, 이 동물과 나는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본다.
얼마전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 즐겁게 살다가 가자구. 사는 게 뭐 별거냐’ 일리있는 말이다. 50대 이상 남자 80%정도는 이렇게 생각하리라.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왜 사는가?
이 질문은 수천 년 동안 머리 좋다는 철학자들이 풀어보려고 답을 내놓았지만 아직도 진행형이다. 과학으로 인간의 탄생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아직도 진행형인 것처럼...
당신은 왜 사는가요?
이 답을 찾는 데는 2가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첫번째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두번째로 신(神)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 1부 :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
중국의 장자는 사생일조(死生一條)라 했고, 서경덕 선생은 사생일여(死生一如)라 했다. 죽음과 삶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죽음과 삶은 정반대 개념인데 이것들을 하나라고 한다.
인간의 삶은 눈에 보이니까 이해할 수 있겠는데,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을 당해 본 사람이 없기에 죽음이 무엇인지 검증이 안된다. 죽음은 경험 밖의 것이니,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는 과학의 한계를 벗어난다.
그나마 임사체험(臨死體驗)에 관한 글을 통해, 죽음 직후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접해 보지만, 아직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분야이다.
죽음!
죽음은 생명체라면 피할 수 없는 사건이다. 임종환자 500명을 대상으로 심리적 변화를 관찰한 결과, 공통적 과정으로, 1단계로 죽음에 대한 부정, 노여움을 나타내다가, 2단계로 신(神)과의 타협(이제부터 좋은 일 할테니 봐달라 등)을 시도하고, 3단계로 절망, 침울의 단계를 거쳐, 4단계로 죽음의 수용단계로 접어든다고 한다.
시인 릴케(Rilke)는 ‘과일이 익듯이 죽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서서히 익어간다’고 했다.
쇼펜하우어(Schopenhauer)는 ‘더 없이 불행하게 산 사람일지라도 죽음만은 두려워한다’고 했다.
누구나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가고 싶어하는 것이니...
죽음이 가져오는 이별, 외로움, 죽기 전의 질병, 자기 지배 능력의 상실 등을 생각하며, 인간은 철학적 종교적 사색의 깊이를 더해 가지만정작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서 다양한 견해들을 내놓는다. 파스칼(Pascal)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하나 아는 것이 없다.'
죽음 이후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로마 철학자 세네카(Seneca)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음 자체도 거기서 끝이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실레노스(silenos)는,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태어나지 않는 것, 되도록 빨리 죽는 것’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그야말로 인생무상(人生無常; 덧없는 인생)이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바탕 헛된 봄의 꿈)이다.
이번에는 죽음과 삶을 연관시켜 생각한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보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죽음은 아무 감각도 없는 깊은 수면상태이거나,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바꾸어 옮겨가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라면서 ‘신들이 우리의 보호자이며 인간은 신의 소유이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프랑스의 몽테뉴(Montaigne)는 ‘죽는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님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불행하게 살지 않는다.
자주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과 친숙해 있으라’ 한다.
성경 전도서(7:2)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독일의 야스퍼스(Jaspers)는 ‘죽음은 인간으로서 어쩔 도리가 없는 한계 상황이지만 죽음을 통해 제한된 시간으로부터 영원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한다.
죽음을 보는 관점에 따라 삶을 비관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밝고 여유있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데, 세상에 영향을 끼친 현자(賢者)들의 가르침은 극명하게 2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삶과 죽음의 관계에 있어서 2가지 견해로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견해와 죽으면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견해이다.
위 견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견해는 종교와 무관한 견해, 무종교적 견해이고, 죽으면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견해는 종교적 견해이다.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는 종교 문제로 귀결된다.
당신은 종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나요? 무종교적(無宗敎的) 입장인가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 죽음에 대해서
니체(Nietzsche)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 상태에 대해 마음쓰고 있지 않듯이 죽음에 대해 마음 쓸 것 없다.’고 한다.
무종교적 입장에 있는 분은 행복 추구를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 앞에서 나의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여기에 해당되리라. ‘자 즐겁게 살다가 가자구 사는게 뭐 별거냐~’
그런데, 아무리 즐겁게 살더라도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면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마는 것인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아쉬움이 너무 크지 않을까? 멀지 않아 닥쳐올 죽음의 공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의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을 통해 삶의 자세에 대해 강렬한 가르침을 주고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이를 의역하면,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종교적(宗敎的) 입장인가요? 대표적으로 불교와 기독교를 예로 보자.
불교에서는 부처와 윤회(輪廻)사상을 믿는다. 이 세상에서 살다가 부처의 지위(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저 세상으로 간다.
그후 영겁의 세월이 흘러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데 이생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사람으로 또는 짐승으로 환생한다. 그래서 부처가 되고자 수행하고 미물이 아닌 사람으로 환생하기를 소망하며 선(善)한 일을 실천한다.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서 살게 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각자 심령 속에 함께하며 삶을 보호해 주시다가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천국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간다.
기독교에서 천국이나 지옥가는 것은 인간만이 해당된다. 다른 동물들은 다음 세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창조한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떤 삶을 원하시나요?
종교를 가진 삶!
종교는 절대적으로 가져야 한다. 특정 종교를 권면함이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지만, 어쨋든 종교만은 가져야 자신의 삶에 의미를 더 한다.
기독교인들 간에는 이런 권면의 글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다 얻는 것이다.
종교는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종교는 삶의 의미, 삶의 가치, 삶의 목적을 갖게 된다. 허무한 삶, 어두운 삶, 불안하고 두려운 삶,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 종교이다.
절대자(神)에게 의지하여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권면드립니다.
1부 (삶과 죽음에 대한 바람직한 인식) 글을 마치며
신(神)의 존재는 불확실하고, 세상 살아가기도 힘들고, 바쁜데 신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에 대해 지구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람 중에 한 사람,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Pascal)은 ‘밑져야 본전’ 이론을 전개했다. ‘신이 있다는 것도 불가해(不可解; 이해할 수 없음)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不可解)하다. 그렇기에 일단 믿고 보는 편이 유리하다. 믿으면 밑져야 본전이지만, 믿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무(無)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쉽게 설명하면, 신이 있다고 믿으며 살다가 죽었는데, 정말 신이 있으면 대박이고 없더라도 본전이다. 신이 없다고 멋대로 살다가 신이 있으면 큰 낭패이고 신이 없다면 본전 아닌가. 결국 '밑져도 본전'이니 신이 있다고 믿고 살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불만을 말할 것이다. '만약 신을 믿고 살았는데 정작 죽어서 보니 신이 없다. 이러면 손해 아닌가?' 그래도 이익이다. 신을 믿고 살면서 누리는 '마음의 평안'을 생각해 봐라.
적정한 예가 될 지 모르겠지만, 만약 신이 없다해도 신을 믿고 살아가면 플러시보 효과(placebo effect/僞藥效果; 가짜 약을 진짜 약이라고 주었을때도 치료 효과는 있다)를 생각하면 '밑져야 본전'을 넘어 남는 결정이다.
파스칼은, 당신의 이성적 판단에 묻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고 있다. '신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증거는 가지고 있느냐', '증거도 못대면서 감히 신은 없다는 것에 너의 목숨을 걸겠느냐?'
파스칼은 신 없는 인간의 비참과, 신 있는 인간의 복됨을 그의 저서 팡세에서 강조한다. 그는 신을 믿는 것은 이성(머리)이 아니라 심장(가슴)이라고 가르쳐준다.
신의 존재를 머리로 이리저리 따지지말고
가슴으로 믿고 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권면드립니다.
🔘 2부 과학과 신
멀리보는 망원경과, 초미세한 것을 보는 현미경의 발달로 과학은 날개를 달았다. 지구는 우주 속의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고, 복제 돼지를 탄생시키는 것은 이제 보통기술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신을 믿어야 하는가?
이에 답하고자, 1)천체세계, 2)원자세계, 3) 생명과학세계 등 첨단 과학세계로 들어가 본다.
1) 大宇宙, 천체(天體)과학과 신의 존재
약130억년전 우주에 빅뱅(Big Bang; 대폭발)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의 과학자들은 대부분 인정하는 것 같다.
넓고 오묘함이 가득한 우주!
2004년 유럽(EU)에서 발사한 로제타 탐사선이 10.8년동안 65억km (지구~태양까지 거리의 42배)를 날아 지구에서 5.1억km 떨어진 '67P혜성'에 2014년 11월 안착, 그곳에 생명체가 존재할 환경이 되는지 자료를 수집, 전송하고 있다.
우주에는 기본적으로 4가지 힘(중력, 전기력, 약력, 강력)이 존재하며, 이 힘들은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이 균형을 통하여 인간은 물리적 법칙, 수학공식을 발견하고 우주의 오묘한 움직임을 계산해서 우주선을 날려 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타원형으로 돌고 있는데 일정한 시간에 지구가 움직인 면적(S1, S2)은 항상 같다고 한다.(케플러 제2법칙)
이처럼 우주가 물리적 법칙, 수학공식 안에서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당신은 우연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신의 손길, 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지?
2) 小宇宙, 원자(原子)세계와 신의 존재
이번에는 생활 속에서 접하는 물체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보자. 물체 속을 보면 마치 우주를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도 수많은 법칙들이 있다.
모든 물체는 분자로 되어 있고 분자는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자에는 +성질의 원자핵과, –성질의 전자가 일정 비율로 구성되어, 전기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며, 전자는 원자핵의 주위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
원자핵의 크기는 10⁻¹⁵m 정도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작은 물질세계 속에서 원자, 분자들이 일사분란하게 각종 화학적 법칙에 따라 합쳐지고 나누어지며 각양각색의 물질를 만든다.
예를 들면, 물 분자(H2O)는 일정한 조건하에서 수소원자 2개, 산소원자 1개로 분리되지만, 원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원자를 인위적으로 분리 또는 융합시키면 어떤 원자는 핵폭발로 반응한다. 지극히 작은 원자인데 우주처럼 신비하고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우주처럼 움직이고 생성 소멸한다.
당신은 이런 것이 우연히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신의 손길, 신의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는지?
3) 생명과학(生命科學)과 신의 존재
생명과학의 첨단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아닐까? (genome; 어떤 생물의 유전자 전체 집합) 즉, DNA(유전물질) 속에는 유전자가 암호형태로 들어있는데, 이 암호를 풀어 유전자 기능을 알아내려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완성되면 유전자 구조를 수정하여 인간의 일부 모양을 바꿀 수도 있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유전물질 DNA는 2중 나선형태로 되어 있고, 유전자 정보는 암호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런 기묘한 형상과 기능들이 우연히 생길 수 있을까? 정교한 신의 작품 아닌가?
인간의 눈을 보자. 빛의 양을 자동으로 조절하는 홍체 감정에 따라 환경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동공, 사물의 거리에 따라 자동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수정체, 사물을 입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두눈을 동시에 움직이는 근육, 그리고 각막, 시신경 등.
이 걸작품이 우연히 생길 수도 있다고 믿는가? 이것은 신의 지혜로 생길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번에는 ‘종(種)의 기원’ 진화론에 대해 알아보자.
영국의 찰스 다윈이 주장한, 생물체 안에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시비를 거는 과학자는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생물체가 환경적 요인에 의해, 또는 교잡(交雜; 유전적 조성이 다른 것과 교배)등에 의해, 생명체 안에서의 일부 진화를 입증하는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과 원숭이는 조상이 같다’는 다윈의 추론(推論)은 현대 과학으로도 입증이 안된다. 진화가 진행되고 있다면 사람과 원숭이 중간형태의 생명체가 지구 곳곳에 발견되어야 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신다윈주의자'들은 이렇게 둘러댄다. 어떤 공통 조상이 돌연변이로 인해 사람도 되고 원숭이도 된 것이라서 중간형태는 없다고...
최근 등장한 新다윈주의
과학의 발달로 진화론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新다윈주의가 등장한다.
원래 진화론은 환경조건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며 후손에게 유전되는 방식인데, 현대 진화론은 돌연변이설에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가미한 이론이다. 즉 자연은 돌연변이에 의해 생성된, 그래서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종을 선택하여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新다윈주의까지 등장했지만 무생물(無生物)에서 생물(生物)로 넘어오는 과정은 설명하지 못한다. 수소(H) 원자가 수 억년 후 원숭이로, 인간으로 진화했다 하니 누가 이를 믿겠는가.
유전물질인 DNA가 2중 나선 구조인데 비해, 유전물질 RNA는 하나의 나선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이 RNA가 효소와 같은 기능을 가질 수 있음이 발견되면서, 바이러스에 의한 종의 기원을 주장하는 논리가 최근 힘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논리도 수많은 우연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계는 그대로 상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19~20세기에 진화론이 각광받은 진짜 이유는, 진화론의 적자생존(適者生存)논리 때문이었다.
당시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데 진화론 만큼 적절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중요한 사실은, 과학이 크게 발전하고 있지만 '신이 있다 없다'는 것을 증명한 과학자는 지금까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천체 물리학자로 각광받는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은 무엇을 믿을까?
호킹은 컴퓨터 전원이 꺼지면 작업이 모두 끝나듯이, 인간도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연법칙들을 신의 작품이라고 믿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를 다른 수수께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며,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호킹이 믿는 것은, 신을 전제하지 않고도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탄생을 증명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것은, 신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님을 유념하자.
한편, 자연의 법칙을 신의 작품이라고 믿는 과학자는,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프레드 호일 등이 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은 빅뱅(Big Bang)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던 천체 물리학자이다.
그는 진화론에 대한 파격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날 확률은, 수많은 부속품이 쌓여 있는 고물상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와 모든 부품을 하늘로 올려 보낸 후, 이 부품이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단 한번에 보잉 747 점보 여객기가 조립될 확률보다 더 작다”고 주장하면서 “그런데도 지구상에 생명으로 꽉 차있는 사실 자체가 바로 초자연적 존재,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호일은 천체물리학자인데 왜 전공도 아닌 생물학에 대해 아는체하느냐' 하면서 평가절하한다. 당신은 어떤 의견인가요?
결국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입증되기 어렵듯이, 진화론도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한낱 이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생물과학 교과서에 진화론만 나올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진화론이 생명 탄생을 설명한, 유일한 과학적 이론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창조론! 진화론!
이 둘은 '과학적 입증 부족'의 많고 적음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최근 제임스 맥코시(미국 프린스턴대 학장)같은 학자들은, 창조론과 진화론을 모두 인정한 '진화론적 유신론'을 제기했다. 즉, 창조자의 계획안에서 진화가 이루진다는 논리로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한 것이다.
2부 과학과 신을 마치며
과학이 발달할수록 종교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가?
과학잡지 ‘네이처’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16년에 미국 과학자 중에서 신을 믿는 사람이 40%였는데, 80년이 지난 1996년 미국 과학자 중에서 신을 믿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과학의 발달로 인해 그 수가 훨씬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80년전 수준인 40%를 유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이 문제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이는 오직 믿음의 문제이다
우주를 움직이는 정교한 법칙들, 원자 분자 등 미세 세계의 소멸 생성법칙, 생명체들의 오묘한 구조와 기능 등을 생각하면, 신의 존재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어떤 믿음인가요? 그분의 작품, 그분의 손길을 믿는가요? 아니면, 아직까지도 ‘인간은 우연의 부산물’이라고 믿는 '무신론'인가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자위한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은 신과 종교이다’,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삶이 뭐 별거냐 즐기며 살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비로서 믿는 현대 과학시대에, 신을 믿기 어려운 것은 이해된다.
그러나 성경 (히브리서 11:1)에서는 이렇게 설명해 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즉, 믿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라고 가르쳐준다.
유대인 천재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은,
“인생에는 두 가지 삶 밖에 없다. 한가지는,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삶, 또 한가지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삶. 내가 생각하는 인생은 후자이다”
과학과 종교는 보완적 관계이지, 대체 수단이 아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생명탄생의 비밀이 밝혀지고 생명체 일부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신의 창조섭리를 인간이 알아내고 응용하는 정도가 아닐까?
과학으로는, 무(無)에서 풀 한포기도 만들 수 없다. 과학으로는, 신의 존재를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쉬타인은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 했고, 종교가 과학적으로 뒤받침되지 않으면 소경과 같다고 했다.
천재 과학자 뉴턴은, '성경에서 영감을 얻어 과학을 깨닫고 발견했다'고 고백한 것이 상호보완 관계의 좋은 예이다.
성경(시편139:14)에 다윗의 고백이 나의 마음을 뭉쿨하게 한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 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요? 이웃을 위해 무엇을 권할 것인지? 당신의 마음이 신을 향해 활짝 열려지고, 더욱 확고해지기를 기원합니다.
🔘 3부 종합편
1. 들어가며
인간은 왜 사는가? 정답없는 질문에 답하려 함은 이 문제가 그토록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人間 何處來 何處去)?
서산대사는 인생을 뜬 구름에 비유하였고, 솔로몬은 인생을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하였다. 불자는 외친다.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인생은 정말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일까?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그 사람이 가진 사상, 종교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죽은 후에 다음 세상으로 간다고 믿으면 종교를 가진 사람이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신론자이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2. 요즘 무신론(無神論)이 날개를 달았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 믿다가 쉬는 사람, 믿음이 흔들리는 분이 의외로 많다. 이처럼 무신론적 환경이 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4가지로 압축해 보면,
(이유 1)
무사유와 무관심이 무신론을 부추킨다
무사유(無思惟)의 범죄라는 말이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서 범죄하게 되는 경우이다.
2차대전시 독일의 아이히만은 상관이 시키는 대로 별 생각없이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고, 은신 끝에 체포되어 처형되는데, 그의 심리상태를 분석한 독일의 한나 아렌트가 한 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러려니하고 사는 삶, 무사유'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삶이 더욱 바빠지면서 현대인에게 무사유와 무관심은 일상이 되었고, 신의 존재여부는 관심 밖으로 밀려있다. 얼굴 주름은 노인들의 관심일뿐, 젊은이는 관심없듯이...
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멀리 있는 것 같은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우리가 태여나기 전 상태에 대해 마음쓰고 있지 않듯이 죽음에 대해 마음 쓸 것 없다' 는
니체의 말처럼...
(이유 2)
합리주의 ·, 자기 중심적 사상이 신앙을 방해한다
중세 농경사회까지는 군주에 대한 충성, 신에 대한 믿음이 저항없이 대대로 이어져왔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성적(理性的), 논리적(論理的), 실증적(實證的)으로 판단하는 합리주의가 뿌리를 내린다.
이성적 합리주의가 사고(思考)의 중심이 된 현대인에게, 임마누엘 칸트가 주장하는, '이성(理性)으로는 신을 인식할 수 없다. 신은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라는 가르침은 현대인들의 이성적 머리에 머무를 뿐, 믿음의 가슴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니체는 하나님 믿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목사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강요된 믿음을 거부하고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서, '너 자신이 초인(超人)이니 자기 중심적 삶을 살라' 한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 사상과 합리주의는 인간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유 3)
과학 발달이 신의 존재를 오해하게 만든다
현대 과학은 생명의 기원, 우주의 기원을 규명하는데 큰 진전을 가져왔고,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이성적 판단 범위가 넓어지면서, 과학의 성과가 마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과로 호도(糊塗)되고 있다.
결국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입지가 좁아지듯 인식된다. 우주선이 혜성에 도착, 그곳에 생명체를 탐사한다는 보도가 나오면, 웬지 신의 존재가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바로 이것이리라.
무신론자들은, 우주는 빅뱅(대폭발)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이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고, 생명체는 진화에 의해 우연히 된 것이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한다.
다윈은 원숭이와 인간이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 하고, 한국의 진화론자 최재천 교수는 한 술 더 떠서, 인간과 은행나무는 같은 조상, 한 가족이라고 강론한다.
천체과학자 스티븐 호킹(영국)은 ‘신이 없어도 생명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무신론을 주장, 큰 영향을 미친다. 그가 '과학은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과학의 한계를 말했지만 이 말은 사람들에게 무시된다
이들 주장에 대한 과학적 반론은 쉽지않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마구 주장해도 되는 것인가?
(이유 4)
기독교계의 잘못으로 인해 신과 멀어지게 한다
① 17세기 이전 교황청 등 종교 지도자들은 천동설(天動說)을 진리처럼 가르쳤다.
1632년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갈릴레오에게 종교재판을 통해 그의 주장을 포기하게 했지만, 그후 지동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면서 기독교의 신뢰는 훼손되고, 기독교와 과학은 대립관계, 갈등관계로 인식되는 계기가 된다.
(이 문제는 360년 후 1992년 교황 바오로 2세가 이해부족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사과함)
② 인간의 탄생 시기에 대해 창조과학회에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인간 탄생을 5000년~1만년 전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4~5백만 년전에 최초인류가 등장했고 현대인 다운 모습(호모 사피엔스)은, 4만 년전 경부터 라는 것이 상당부분 인정되면서, 무신론자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이 도마 위에 올라간다. 이 문제를 통해 과학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③ 성직자는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일부 교회의 탐심과 무기력은, 사람들이 종교(특히 개신교)를 멀리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제는 사회가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이 일상 용어처럼 되면서 교회 출석을 주저하게 만든다.
3.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과연 신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과학의 한계를 이해하면 신의 존재가 믿어진다. 무신론자의 주장이 과학의 발달과 함께 날개 달고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만, 과학의 한계를 바르게 알면 무신론의 허점이 금방 들어난다.
1) 우주의 기원에 대해
우주는 빅뱅(대폭발)으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정설이 되고 있지만, 빅뱅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은 과학으로 입증하지 못한다. 이는 과학으로 영원히 풀지 못하는 신의 영역아닐까?
2)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
진화론자는 새의 부리가 변화되고 인간의 꼬리뼈가 퇴화되는 등 용불용(用不用)에 따라 진화되거나 퇴화되는 '부분적인 생체 변화' 몇개를 입증한 것 가지고, 감히 '종(種)의 기원(起源)은 진화'라고 주장한다. 원숭이, 은행나무가 인간과 같은 조상이라고 까지 주장한다.
결정적으로, 진화는 생명체가 생겨난 이후에 현상을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체 자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진화론에서 입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무생물(예, 수소)이 생물로 진화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과학으로는 무(無)에서 풀 한포기도 만들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 외에는 생명탄생에 대한 과학적 대안이 없으니, 진화론 만을 과학책에서 가르친다.
3) 과학의 한계를 연구하는 특별과제가 생겼으면 좋겠다.
과학으로 설명 못하는 영역은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이며, 과학의 끝은 곧 종교의 시작이다.
그런데 현대 무신론의 대표격인 리처드 도킨스는, 세계의 모든 자연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신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으므로 신을 믿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과학으로 입증 할 수 없는데도, 과학의 영역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미지의 넓은 영역을, 무신론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 맹랑하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많은 과학자들이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과학잡지 '네이처'에서 미국 과학자의 신앙 변동 추이를 1916년~1996년까지 조사했더니, 80년간 과학이 크게 발달했음에도 신을 믿는 자가 그전이나 그후나 똑같이 40%로 나왔다 한다.
궁극적으로 과학은 신앙에 기여한다. 천문학 박사 우종학 교수는 우주를 연구하다가 '이토록 광대한 우주는 신이 아니면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의거 신을 믿게 된다.
미국의 인간 게놈(genome)프로젝트 책임자인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는, '진화는 하나님이 생물을 만드신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신을 믿게 되는데, 직원 2000명과 함께 게놈 연구를 진행하면서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게된다.
아인슈타인이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했듯이, 과학과 종교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관계가 되는 것이 정답이다.
4) 성경의 기록에서 과학의 한계를 넘은 예(例)를 들어본다.
창세기는 지금부터 3,500년 전인 BC 1,500년에 쓰여진 것이다. 인간이 죄를 자꾸 범하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을 결심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120년으로 제한하겠다고 말씀하신다(창세기 6:3).
인간 수명을 120년까지로 정하셨는데 과연 인간을 몇년을 살고 있는가? 홍수 이전에 살았던 므두셀라는 969세, 노아는 950세,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은 점점 줄어서 모세는 120세, 다윗은 70세...,
2017년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고령자는 이탈리아의 '엠마 모라노' 할머니인데, 2016년 11월29일 117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 먼 옛날 옛적 3500년전,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 끝 무렵인 고조선시대에, 어떻게 이토록 정확히 인간수명을 예언했을까?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과학은 창조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호킹박사의 고백처럼, 과학은 '신이 없다'를 증명하지 못한다. 과학과 신의 존재는 별개의 문제로서 상호 보완적관계이며, 오히려 과학은 신의 작품이 얼마나 웅대하고 정교한지 밝혀나가는 도구로 쓰임받고 있다.
4. 무신론자의 삶과 죽음은 어떠한가?
무관심과 무사유, 자기중심적 합리주의, 과학의 신봉 등은 종교를 멀리하게 한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의 삶과 죽음은 어떠할까?
어떤 친구가 말한다. '내가 살고 싶어 사냐? 부모님이 낳아 주셨으니까 사는 것이지', '즐겁게 살다가 가자구. 사는게 뭐 별거냐'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음 자체도 거기서 끝이난다.
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과 나 자신을 그냥 살다가 그냥 사라지는 똑 같은 존재로 여긴다. 이것이 무신론자의 삶과 죽음이다.'
죽음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언젠가 혼자 설수 없는 때가 오는데, 죽음의 아쉬움, 공허함, 공포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는데 진정 즐거울 수 있을까?
무사유와 무관심 속에서 추구하는 단순한 행복이 과연 올바른 삶의 자세인가?
신을 믿지 않지만 혹시 신이 있다면 바르게 살았으니 잘 해주겠지 하고, 막연히 양다리 걸친다면 이는 자신이 만든 신을 믿는 것일 뿐이다.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 자기중심적 사고는 꼭 필요하지만 여기에 머므르면 이것으로 끝이다. 초현실적 존재, 신비적 체험을 인정하고 사모할 때 인간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5. 천지만물은 누가 만들었을까?
거리에 있는 빌딩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만물을 누가 만들었는지 성경은 알려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히브리서 3:4)
빅뱅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던 영국의 천체 과학자 프레드 호일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우연은 부품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면서 여객기로 조립되는 확률보다 훨씬 어렵다’고 진화론을 비판하면서 ‘지구상에 생명으로 꽉 차있는 있는 사실 자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 과학은 신의 창조 비밀을 알아내고 이를 활용하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지구는 시속 1,670km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지금도 돌고있다. 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기묘함을 밝혀낸다. 인간은 신의 솜씨을 감탄하고 신을 경외(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존경)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오히려 과학의 성과가 무신론으로 비쳐지고, 그 선전에 많은 사람들이 현혹되고 있는 현실에, 나만은 속지 않겠다.
인체는 약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각 세포 안에는 우리 몸을 만드는데 필요한 DNA라는 유전자 정보가, 2중 나선형(screw shape)구조에 암호로 저장되어 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누가 100조 개에 달하는 세포로 인간 육체를 만들고, 각 세포 안에 이처럼 정교한 유전자 정보를 암호로 저장 시켰을까?
진화론에서 말하는 우연히 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우주 만물은 신의 탁월한 작품이다.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0)
우주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은 3,500년 전에 이렇게 답을 알려주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애굽기 3:14)
6. 신을 믿는 자의 삶과 죽음은 특별하다
지금까지 신의 존재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내용을 제시했는데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신의 존재가 믿어져야만 신앙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賞)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위 말씀중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오는 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God)의 존재가 믿어져야만 신앙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에게 신은 말을 걸지 않는다.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신이 계심을 고백하자. 신을 불러보라.
가슴으로 신의 존재를 믿는 자가 되어
이 세상 만물을 다시 보라. 자연(自然)의 아름다움, 오묘함에서 신의 손길을 느끼게 되고 감탄하게 되리라. 삶의 새로운 지평(地平)이 열리고, 깊은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리라.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믿으면 죽어서 하나님 나라, 천국에서 살게 된다', 또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고 하셨다.
성도(聖徒)는 이것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기쁨과 평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천국에 대한 소망,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7. 이 글을 마치며
폴란드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류 시인 쉼보르스카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
답다.'
그래, 인간은 이렇다. 신을 믿기 전에는 이런 글에서 깊은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다른 인간이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이다. 자기의 고집을 포기하고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그 댓가는 실로 크다. 기독교인들 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얻으면 다 얻는 것이다.'
신을 믿고 안 믿고는 생사(生死)의 문제이며 영생(永生)의 문제다. 신을 믿으면 삶의 의미, 삶의 가치, 삶의 목적이 달라진다.
종교는 절대적으로 가져야 한다.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고 싶으면, 종교가 제시하는 가르침에 따라야 할 것이다. 무신론적 환경에 현혹되어 신을 믿지 않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간다면 너무나 억울하지 않은가.
아일랜드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에 써 놓기를,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면서 우리들의 결단을 촉구한다.
프랑스의 천재 과학자 파스칼은 '밑져야 본전이니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보라'고 권한다.
한국 교회의 모순들이 가끔 언론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극히 부분적, 일시적 현상이며, 믿는 자의 거룩한 길을 막지 못하는 것이니, 부디 믿음의 공동체(교회)에 속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국을 향하여 나가시기를...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서 43: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절대자를 믿고 의지하고 절대자의 뜻에 순종하며, 영생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권면드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다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사회부연(死灰復燃), 이미 때가 지난 후에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세상만사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생자필멸(生者必滅), 불교에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는 네 가지 고통 즉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의 고통을 이르는 말을 생로병사(生老病死),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무리 곤궁하여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구불망(生口不網),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생지生知하는 성인을 이르는 말을 생이지지(生而知之), 죽은 자를 살려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큰 은혜를 베풂을 이르는 말을 생사골육(生死骨肉), 사람이 태어난 뒤 사흘 동안과 죽은 뒤 이레 동안을 부정하다고 꺼리는 기간을 이르는 말을 생삼사칠(生三死七), 몹시 곤란한 지경에 빠져 삶이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말을 생불여사(生不如死), 기운이 꺾이지 않고 본디의 기운이 아직도 남아 생생한 모양을 일컫는 말을 생동생동(生動生動),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산 채로 삼키고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는 뜻으로 남의 시문을 송두리째 인용함을 이르는 말을 생탄활박(生呑活剝), 나면서부터 알아 쉽게 행한다는 뜻으로 배우지 않아도 사물의 도리를 알아 쉽게 그것을 실행한다는 말을 생지안행(生知安行), 일속을 잘 알지 못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을 그릇 책망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생면대책(生面大責), 태어나서 만나 본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생면부지(生面不知),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뜻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생살여탈(生殺與奪), 거듭나서 유전한다는 뜻으로 만물이 끊이지 않고 변해 감을 이르는 말을 생생유전(生生流轉)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條(가지 조)는 ❶형성문자로 条(조)는 통자(通字), 条(조)는 간자(簡字), 樤(조)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攸(유, 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攸(유)는 쭉쭉 뻗은 모양으로, 修(수; 가지런히 하다)와 뜻이 통한다. 條(조)는 쭉쭉 뻗은 새 가지, 줄기, 한 갈래 한 갈래로 나눈 물건이나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條자는 ‘나뭇가지’나 ‘맥락’, ‘조목’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條자는 木(나무 목)자와 攸(바 유)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攸자는 회초리로 사람을 때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회초리질 하는 모습을 그린 攸자에 木자를 결합한 條자는 회초리의 재질인 ‘나뭇가지’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이다. 이처럼 條자는 나무의 곁가지라는 뜻으로 만들어졌지만, 나뭇가지가 나무에서 파생된 것처럼 조항도 법을 중심으로 파생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항목’나 ‘조항’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條(조)는 (1)몫을 뜻하는 말. 일부 명사(名詞)나 대명사(代名詞) 아래 쓰임 (2)조목(條目), 항목(項目)의 뜻을 나타내는 말 (3)어떤 단서(端緖)나 근거(根據)로 될 만한 것이라는 말 등의 뜻으로 ①가지 ②조리(條理) ③맥락(脈絡) ④조목(條目) ⑤끈, 줄 ⑥법규(法規) ⑦유자(柚子)나무 ⑧통(通)하다 ⑨길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사물이 성립되거나 발생하는 데 갖추어야 하는 요소를 조건(條件), 주로 법률이나 규정 등의 차례로 나누어 정해 놓은 낱낱의 조나 항목이나 조항을 조목(條目), 낱낱이 들어 벌인 일의 가닥을 조항(條項), 조목을 세워서 약정한 언약을 조약(條約), 일을 하여 가는 도리를 조리(條理), 조목으로 나누어 적은 글을 조문(條文), 밭에 고랑을 치고 줄이 지도록 씨앗을 뿌리는 일을 조파(條播), 분위기가 매우 쓸슬함을 소조(蕭條), 굳게 믿고 있는 생각을 신조(信條), 하나하나의 조목을 개조(個條), 무슨 일에 어떤 조건이 붙은 것을 조건부(條件附),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아무런 조건이 없음을 무조건(無條件), 도리에 어긋나거나 불합리한 일을 부조리(不條理), 아무 조건도 없는 것을 무조건적(無條件的), 어떠한 일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조건을 전제조건(前提條件), 금옥과 같은 법률이라는 뜻으로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규칙이나 교훈을 금과옥조(金科玉條), 썩 엄하게 규정을 세움을 엄립과조(嚴立科條),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를 위하여 맺는 조약을 우호조약(友好條約), 동산의 풀은 땅속 양분으로 가지가 뻗고 크게 자란다는 말을 원망추조(園莽抽條)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