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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흥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조철형
제15회 시흥문학상’ 수상자 발표
문학의 저변확대와 수준 높은 창작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2015년 9월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한 달 간 공모한 ‘제15회 시흥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응모된 작품 수는 2365편입니다. 국내를 비롯하여 해외까지 총 500여명이 응모하여 시부문 1770편 수필부문 595편으로 예비심사에서 시부문, 140편과 수필 60편의 작품을 본 심사에 올려 4명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하고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제15회 시흥문학상에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아쉽게 입상하지 못한 분들께는 다음 기회에 꼭 만나 뵙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수상자 명단
구 분 |
분 야 |
접수번호 |
성 명(전화번호) |
제 목 |
대 상 |
시 |
82 |
한휼(한교만) 경기도 용인시 |
「털실이 풀리는 저녁」 외 4편 |
우수상 |
시 |
195 |
조현(조경선) 경기도 고양시 |
「각」외 4편 |
시 |
60 |
강경아 전남 여수시 |
「트러블 메이트」외 4편 | |
시 |
5 |
지연(김지연) 전남 전주시 완산구 |
「플레이밍」외 4편 | |
수필 |
108 |
엄옥례 대구시 수성구 |
「타법」외 1편 | |
수필 |
45 |
최호 대전시 동구 |
「부고」외 1편 | |
수필 |
69 |
조미정 경상북도 경산시 |
「유주」외 1편 |
※ 수상작이 기 발표작이거나 표절 등의 의혹이 밝혀지면 발표 후라도 수상이 취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 : 문정희(시인), 박주택(시인) |
수필 : 김종광(소설가), 손홍규(소설가) |
□ 심사위원(위원장- 문정희(시인))
□ 시상식
○ 일 시 : 2014. 11. 29. 토요일
○ 장 소 : 시흥시청 대강당
2014년 11월 03일
시흥문학상운영위원장
< 심사위원 프로필 >
문정희(文貞姬) 시인 약력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서울에서 성장.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나는 문이다><다산의 처녀> <응>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외에 장시집과 시극. 영역시집;<WOMEN ON THE TERRACE> (White Pine Press)미국에서 출판- 외에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 알바니아어 등의 언어로 번역출판. 미국 아이오와대학(1996) 이태리 카포스카리 대학(2011), 프랑스 <시인들의 봄>(2013),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2014)등 문학관련 많은 초청 받음.
수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동국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 수상. 마케도니아 세계시인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수상(2004), 한국예술평론가협회 선정 “최우수 예술가상” 문학부문 수상(2008). 스웨덴 해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수상(2010)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역임/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
박주택 시인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했으며 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꿈의 이동건축』『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사막의 별 아래에서』『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시간의 동공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시론집『낙원 회복의 꿈과 민족 정서의 복원』과 평론집『반성과 성찰』『붉은 시간의 영혼』『현대시의 사유구조』등을 펴냈으며 현대시 작품상, 이형기 문학상, 소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
손홍규 소설가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2001년 《작가세계》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2004년 대산창작기금 받음, 2008년 제비꽃 서민소설상, 2010년 노근리 평화문학상, 2013년 백신애문학상, 2013년 오영수문학상소설집 『사람의 신화』(문학동네),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 지성사)장편소설『귀신의 시대』(랜덤하우스 중앙),『청년의사 장기려』(다산책방), 『이슬람 정육점』(문학과 지성사), 『서울』(창비)
김종광 소설가
약력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8년 계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경찰서여, 안녕> 당선.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해로가> 당선.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2000) 『모내기 블루스』(2002) 『낙서문학사』(2006) 『처음의 아해들』(2010). 『왕자 이우』(2014)
청소년소설 『야살쟁이록』(2002) 『착한대화』(2009)
장편 『율려낙원국』(2008) 『첫경험』(2009) 『군대 이야기』(2010) 『똥개 행진곡』(2012)
신동엽창작상(2000년), 제비꽃서민소설상(2009년) 받음.
대상(시부문)
털실이 풀리는 저녁
한 휼
하루 종일 감긴 저녁의 내부는 단단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감는다 죽은 바퀴벌레를 삼키는 고양이 울음소리 뻐거덕거리는 회사의자와 숙취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와 텅 빈 가죽지갑까지, 무엇이든 감아 표면을 둥글게 만든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뜨개질바늘처럼 늘 아버지의 어깨에 꽂혀있다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노는 저녁은 위험하다 아버지의 올이 풀리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맛있는 고양이 스튜가 될지도 모른다 발톱이 빠질 때까지 닫힌 방문을 박박 긁는 것은 괜한 짓이다 발톱이 털실뭉치 속에 박히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단단한 털실에 턱을 괸 채 밤새 무서운 꿈을 꿔야 한다 몸을 뒤척이다가 고양이 수염이 털실의 눈알을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때 탈구된 털실의 내부가 털실 바깥으로 튀어나와 벽시계가 멈추기라도 한다면,
털실을 요리조리 드리블 하기 위해 고양이의 발톱은 초저녁부터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다 누가 이토록 단단하게 감아놓았나 털실뭉치 깊숙이 파고든 털실의 끝을 찾을 수 없다 털실의 끝을 잡아당겨야 털실 맨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의 미간을 펴줄 수 있을 텐데
털실이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동그랗게 감긴 저녁, 고양이가 발끝으로 털실 아래쪽을 툭, 건드려본다 뭉툭한 앞발로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굴릴 때마다 아버지를 감았던 털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소매 끝이 풀리자 아버지의 손목시계가 9시 정각을 알린다 뉴스 속 가장들이 한 올씩 풀려 나온다 사고뭉치들은 대부분 털실뭉치들이다 화면이 끓어오르고 털실은 계속해서 라면처럼 풀려나간다
털실이 다 풀려버린 아버지의 어깨와 쇄골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어머니가 뜨개질바늘로 고양이의 붉은 털옷을 짓는다 고양이 발톱이 고양이를 밀고 고양이 바깥으로, 빨치산처럼 몰래 빠져나온다
우수상(시부문)
각(刻)
조경선
1.
꽃은 피는데 내가 살지 않은 봄이 온다
나는 지상에서 나무 깎는 노인
나무들은 우뚝 나무로만 서서 한 생을 탕진하는데
우듬지만이 까마득하다
둥지 잃은 새들이 잘린 그루터기에 맴돌아도
나무가 나에게 걸어오는 시간 따윈 묻지 않는다
저 깊숙한 울음까지 새길 수 있을까
환지통을 참으며 나무가 말라갈 때
바람이 무딘 손금을 부추긴다
나무가 모르는 방향에서 칼을 고른다
첫 날(刀)은 표피만 살짝 건드려야 한다
작은 숨소리만 들려도 칼을 뱉어내니
이겨내선 안 된다
무중력 상태까지 나를 놓치며 결을 따라 흘러야 한다
깎아내면 깎아낼수록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나무의 본색(本色)
그때 나무가 칼을 선택한다
살을 내주며 나무가 나를 길들인다
모르는 형상(形象) 안에 칼은 갇히고
끝내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다
나무의 얼굴을 꺼내며 없는 봄을 탕진한다
2.
잘려진 밑동이 다시 잘려 나간다
내력이 둥글게 말리고
날을 삼킨 결이 암호로 풀어진다
또 한 생을 절단 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래된 내 상처가 목장갑 안쪽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관을 주문한 자가 죽어서 관을 기다린다
그가 말한 먼 훗날은 그리 먼 때가 아니었다
먹선을 튕기면 끌은 정교해지고 망치는 거세진다
나무속을 파내는 일이란 불편을 깎아내는 일
그의 체온과 진지한 몸짓을 생각하며 틀을 짠다
막무가내로 박혀있던 울음소리를 걷어낸다
수십 겹의 울음이 뭉쳐져 있다가 풀어진다
그에게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백엔
울음 따윈 없어야 한다
겨우 여섯 개의 판자가 생을 요약한다
뚜껑을 만들기 전 숨을 고른다
관을 닫을 때 어둠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가만히 관에 누워 본다
완전한 처음, ‘내 나무’의 완성을 본다
우수상(시부문)
트러블 메이트
강경아
구부러지기 쉬운 말들의 행방을 구름에게 따질 필요는 없어. 바싹 구워진 자음과 모음은 크래커의 부스러기처럼 번번이 흘리길 좋아하지. 바람의 구둣발 앞에선 일제히 모르쇠로 돌아 서 있으면 괜찮을 거야. 비대칭 언어들의 질주가 오선지 위에 걸릴 때면 한 옥타브씩 지워지는 너의 허밍소리가 그리워 질거야. 정말 괜찮은 거니. 파열음이 쏟아지는 블랙박스 속에서 사잇소리처럼 끼어들기 좋아하는 일인칭 언어들, 그 낄낄대는 된소리의 일방적 좌담들, 한 수 거들지 않아도 비공식적으로 우리는 하나.
우리, 우리, 울타리는 뛰어 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했지. 걸려 넘어져도 뛰어 넘어서야한다고 방점을 찍으며 강조할 땐 말라붙은 감정이 움찔거렸지. 눈물 같은 건 방울방울 굴리기 쉬워 걷어 차버리면 그 뿐이라고, 카푸치노의 거품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언어들에 대해, 휘~ 휘~ 저어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해, 기호에 따라 시시때때로 입맛이 달라지는 표정들이 골똘하게 다가오는 저녁이야.
안녕, 프렌즈.
우수상(시부문)
플레이밍*
지연(김지연)
옷을 겹으로 입어도 춥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컴에 들어간다 검지에 매달린 눈들
붉은 눈들이 동동 떠서 당구를 친다
회사에서 잘렸다 아파트 이자 낼 돈이 막막하다
분노는 쓰리쿠션
온탕 속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외면당하며 스친 눈알들이 멈칫
제 눈알을 검지 큐대로 날린다
살아있는 것들은 제 눈알이 받은 충격만큼
회전시킨다 담배를 꼬나물고 쓰발
창밖에 눈발처럼 날리는 진눈깨비
휘둥 녹으며 곤궁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몸을 튕긴다
춥다는 천개의 손 천개의 눈
알몸 같은 욕설들
플라스틱 웃음과 울음 사이
문지르거나 확대하거나 벗기며 벗어진다
검지에 달린 눈이 모락모락 춥다
누군가 나를 친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혈관 터진 눈이 굴러가고 있다
* flaming: 인터넷에서 플레이밍은 공공연히 누군가에게 심하게 빈정대는 것을 의미한다.
우수상(수필부문)
타법
엄옥례
'탁탁!' 큐대에 맞은 공이 경쾌한 소리를 터트리며 궤적을 그린다. 득점에 성공한 선수는 다시 큐 끝을 다듬으며 눈동자를 굴린다.
카운터에 앉아 당구 경기를 바라본 지 몇 년이 되었다. 처음에는 무연히 보던 풍경이었으나 기묘한 공의 움직임에 점점 매료되었다. 타법에 따라 공은 일이삼차 함수의 그래프를 그리기도 하며, 당기고, 밀어내고, 충돌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득점할 때마다 예술 작품을 본 듯 머릿속에 잔영이 남는다. 그 세월이 삼 년 넘자 이제 눈높이는 서당개 풍월을 넘어 관조하는 안목까지 갖추었다.
당구대는 완전히 수평이다. 비탈도 돌부리도 없어 얼핏 쉽게 보이나 막상 득점을 하기란 그리 만만치 않다. 선수는 공의 거리에 따라 힘을 조절해야하고 위치에 따라 각도도 가늠해야 한다. 나름대로 계산을 하고 공을 치지만 예측 못한 충돌이 일어나거나 큐미스가 나는 바람에 득점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렇게 공은 앞일을 다 알지 못하는 우리네 삶처럼 당구대 위에서 인생함수의 그래프를 그린다.
오늘도 김원장, 강사장, 박사장이 모인다.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당구대 위에 빨강, 노랑, 하양, 공을 뿌린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처럼 한 평 남짓한 당구대 위의 공도 알록달록하다. 색깔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이 어울려 당구를 치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큐 끝에 쵸크를 살살 바른 김원장이 공을 겨눈다. 키가 작고 몸집은 왜소해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수학 학원 원장답게 정확하게 각도를 계산한 다음 공을 친다. 신중하게 공을 겨누는 동안 옆 사람들도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그의 타구는 다른 사람에 비해 부드럽고 간결하다. 난이도가 높은 공을 칠 때는 아이스 링크를 수놓는 피겨 선수의 스케이트처럼 궤적이 유려하다. 삼각함수를 잘 푸는 수학 선생답게 어려운 공도 잘 치기에 동네 당구장에서는 고수 대접을 받는다.
야채가게 강사장은 당구대에 바짝 붙어 서서 삑삑 소리를 내며 쵸크를 바른다. 잔꾀가 많은 그는 공을 모아 대량 득점을 노릴 요량으로 끌어치기를 즐긴다. 끌어치기는 힘을 적절히 조절해야 하고 다음 공을 예측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강사장은 욕심이 앞서 타법이 불안하다. 공이 멈추기도 전에 큐를 드는가 하면 팔에 힘이 너무 들어가 큐미스가 잦다. 그럴 때면 고개를 갸웃거리며 큐 끝을 째려보다가 당구장을 휘휘 돌며 다른 큐를 골라온다. 어쩌다 멋지게 득점할 때면 희색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인다.
그 다음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구경하던 박사장이다. 종업원이 열 명 넘는 중화요리 집 사장답게 몸집도 왕서방 스타일이다. 그저 사람 만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당구 기술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짜장면 말듯 면발만 잘 뽑으면 된다는 주의다. 당구도 일관성 있게 힘으로만 친다. 그러다 공이 깨지거나 당구대 바닥이 찢어질까 염려가 될 정도다. 마음을 비운 탓인지 행운 샷이 빈번히 일어난다. 그럴 때 박사장은 그것도 기술이라며 우기다가 원성이 높아지면 입막음으로 짜장면 한 그릇씩을 돌린다.
그들의 세상살이도 당구 타법만큼이나 개성이 있다. 김원장은 공무원을 그만 두고 약학을 공부해 대형약국을 경영했다. 약국이 부도가 난 뒤, 학원을 차렸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분위기다. 다양한 재능이 오히려 탈이 되었을까. 거기에 깐깐한 성격이 난관을 자초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강사장은 잔 욕심이 많고 입이 쉴 새가 없다. 춘향전의 방자처럼 무엇을 해도 체통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잔정이 많고 붙임성이 좋아 그의 야채 가게는 점심때가 지나면 물건이 동이 난다. 매일, 은행에 들렀다 오는지 보란 듯 카운터 옆 의자에 앉아 통장을 넘긴다. 강사장에 비해 무게감이 있고 일관성이 몸에 베인 박사장은 남보다 학력이 높거나 발 빠른 면은 없다. 그래도 성격이 호탕하고 믿음직스러워 동네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다. 잡기를 모르고 자신의 일을 천직으로 여긴 뚝심 덕분에 탄탄한 부를 쌓았지 싶다.
세계 최고 선수인 '브롬달'은 밀어치기, 그에 필적하는 '자네트'는 끌어치기를 구사한다. 경기에 들면 둘 다 숨이 막힐 듯 정교한 기술로 당구공을 부린다. 브롬달이 짜장면 뽑는데 고수가 아니듯, 김 원장, 강 사장, 박 사장, 이들 역시 당구에는 고수가 아니지만 모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타법으로 득점을 한다. 신이 사람마다 재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기 망정이지 모두 다 똑 같은 재능을 주었다면 사공 많은 세상은 이미 산으로 가지 않았을까.
판화 같은 당구대지만 그 위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역동적이다. 고수들의 진검승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있다. 그런가 하면 김원장, 강사장. 박사장의 경기는 산만하지만 함께 즐기는 재미가 있다. 그것이 당구장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파란 당구대 위에 알록달록 공이 있어야 경기가 되듯 세상도 여러 빛깔의 사람들이 어울려 온전한 그림이 된다.
나는 살면서 어떤 기술을 구사했을까. 욕심을 내서 끌어 치기도 하고 멀리 보고 밀어치기도 해보았다. 그래도 잘 안 되면 비틀어치기도 했다.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에 정신이 흐트러져 큐미스를 내기도 했다. 앞길이 불안해 점집 문을 두드려 화를 피하는 방법을 묻기도 했고 복권 한 장에 행운을 걸기도 했다. 귀가 얇은 탓에 훈수대로 치다가 겪은 낭패야 말하기도 쑥스럽다. 상황에 맞는 기술을 부려야 하지만 다양한 기술은커녕 주특기 하나 없으니 아무래도 나는 인생의 고수는 아닌 듯싶다.
삶에서 나는 치밀하게 계산하고 정밀한 타법을 구사하지는 못해도 큐를 손질하고 당구대를 정돈하는 기술은 제법이다. 소소한 깨달음이나 그것이 나만의 타법이다. 손님이 다 가고 당구장이 고요해지면, 오늘 득점을 셈하고 불을 끈 후, 하루의 셔터를 내린다. 세상의 한 풍경인 나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어둠속으로 종종걸음을 걷는다. 끝
우수상(수필부문)
부고(訃告)
최 호
찢어진 바람이 휘파람을 분다. 죽음을 알리는 소리다. 무거운 소식인데 빠르게 날아온다. 이번 부고는 뜻밖이다.
「대전고등학교 동문 김○○ 심장마비로 사망 충남대병원 장례식장」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식을 접하고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이 가물가물한 탓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는 이름인데. 칠백 명이 넘는 동기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
물어물어 알아낸 건 죽은 동기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것 외에 공유할 기록이 없다. 딱히 모른 체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얼굴조차 기억에 없는 동기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난감했다. 얼마의 틈에서 고민했다. 소식을 자주 나누는 친구들과 연락 끝에 30여년 만에 동창들 얼굴이나 보자는 명목으로 문상에 나섰다.
사람은 만나는 것보다 헤어지는 걸 잘해야 한다. 헤어짐의 완성은 죽음이다.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의 화두는 죽음으로 옮겨간다. 아무런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을 일방적으로 맞는 것은 당혹스럽다.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떠난 고등학교 동기처럼 젊은 가장의 죽음이 그랬다.
형식적인 조문이었으나 영정을 보는 순간 울컥했다. 나와 같은 나이다. 창백하고 지친 얼굴로 조문객을 맞는 그의 아내와 아들을 위로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막연한 미래의 사건이라 회피하기보다는,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하게 발생할 사건에 대해 생각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삶이 선물이라면, 부고는 그 선물을 반납하는 절차인 셈이다. 지난여름, 미국 일간지 시애틀타임즈에 실린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를 쓴 사람은 바로 제인 로터 자신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쓴 부고는 ‘이 아름다운 날, 여기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을 담아, 제인’으로 끝난다. 이 여인처럼 자신을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이가 적을수록 죽음에 둔감한 건 당연하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충격은 늘 존재한다. 십대의 한 때를 함께 보냈던 친구들은 어느새 중년이다. 이번에 죽은 동기 말고도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몇 명 더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늦은 부고다.
작년 겨울에 돌아가신 시장 할머니의 부고도 늦게 도착했다. 동네 사람치고 송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장에서 나오는 종이상자를 모아 팔았고, 언제부터인지 시장의 종이는 모두 할머니 차지였다. 자식이 있는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국수 한 그릇에도 헛돈 든다고 떠신 양반이 웬일인지 흰 쌀밥 한 번 먹어야겠다고 햅쌀 반 되를 사가더래요. 그날이 입동 다음날이었다는데, 바가지에 씻은 살이 그대로 있었대요.”
퇴근길에 세탁소를 들렀을 때 들은 부고였다. 평소에 국수 먹는 돈도 아까워하던 분이 햅쌀 반 되를 구입한 것은 스스로 알린 부고였을까.
신문은 날마다 부고를 알린다. 누군가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죽음은 떠나는 것일까, 지나가는 것일까. 생사가 갈리는 순간, 부고가 시작된다.
고등학교 동기들도 나도 결국 죽음을 맞아야 한다. 죽음은 다음 계절을 예약하지 않는다. 살아온 날을 돌아보는 밤, 안녕이란 말에 담긴 중의적 표현이 새삼스럽다. 친구들의 걱정이 유가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누군가는 소식을 전하고 누군가는 그 소식에 응답하는 것이다. 일생을 사는 동안 주변사람들에게 알리는 소식이 한 사람의 역사라면, 결국 삶은 서사(敍事)다.
술잔을 비우는 내내 친구들은 고인을 되뇌었다. 젊은 가장의 죽음과 시장 송 할머니의 죽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은 부고를 마지막으로 돌아갔다. 죽음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술잔은 느리게 비워지고 빈자리가 늘어났다. 탁자에 술잔을 채워놓고 떠난 친구들은 마지막 잔을 고인의 몫으로 남겨둔 것일까. 나는 왜 부고를 접할 때마다 서툴게 아파야 했나.
휴대전화에 저장된 부고를 다시 천천히 읽어본다. 유명인사가 아니기에 오비추어리(Obituary)처럼 누군가 대신 부고를 써놓지도 않을 터, 예약할 수 없는 소식을 내가 미리 써두는 것은 어떨까. 최근 들어 통념을 깨고 자신의 부고를 미리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옛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써두곤 했다는데, 죽음을 미리 헤아리는 것 또한 남은 삶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친구들이 명함을 건네며 다음에 한번 보자는 말을 한다. 대부분 형식이란 걸 안다. 하지만 살아서든 죽어서든 부고를 받고 재회할 것이다. 인연은 매순간 찾아오지만 모두 같은 거리에 있지는 않다.
나는 되도록 말을 아낀 채 죽은 동기보다 내게 닥쳐올 죽음을 오래 생각했다. 심중의 언어는 타인이 읽지 못한다. 잔이 채워지면 병은 비워지게 마련이다. 고인을 위해 마지막 잔을 채웠다.
함께 간 친구들을 따라 일어섰다. 잠시 빈소에 멈춰 흰 국화꽃에 둘러싸인 망자를 보았다. 영정 속 그가 웃고 있다.
친구야, 나는 너를 잘 모른다.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르지만, 이제 그만 쉬어라. 이 땅에서 고생했다.
고인의 생애에 인색한 부고 대신 살아온 삶을 되짚어 알리는 부고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았다.
보름 달빛을 끌고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은 내가 보지 못하는 길로 다닌다. 보이지 않아도 길이 있다. 그 길의 끝에 대문처럼 우뚝 서 있는 부고 통지서. 죽음은 언제나 궁금하다.
우수상(수필부문)
유주
조미정
서원을 품은 대니산 기슭에 늙수그레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노란 등불을 켰다. 위로 쭉쭉 키가 자란 보통의 은행나무와 다르다. 키보다 더 넓게 옆으로 뭉텅뭉텅 가지를 벌렸다. 여러 그루의 나무가 일가를 이룬 듯 웅장한 은행나무는 몇 개의 쇠기둥에 구부정한 몸을 기대어 서 있다.
위풍당당해 보이던 모습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그간의 풍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우람하던 한 쪽 가지는 부러지고 반대쪽으로 뻗은 가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찢기듯 벌어진 몸통 여기저기에는 썩은 살을 덜어낸 수술자국이 선명하다. 노인의 주름이 한 생애를 대변하듯 상처투성이의 은행나무는 볼 때마다 가슴이 짠해진다. 사실 은행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나무 중의 하나이다. 제 이름 속에 여러 무리의 친척을 거느린 다른 나무와 달리 이 세상에 오직 한 종만 있다. 수피를 만지면 화석나무라 불릴 정도로 오래 살아오는 동안 외롭고 고달팠던 마음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쓰다듬듯 가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손가락 두어 마디만큼 돋아난 돌기를 발견한다. 여인의 유두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유주(乳柱)가 분명하다. 세어보니 모두 세 개다.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에서만 발견되는 유주는 공기 중에 뻗은 뿌리이다. 굵은 가지에 종유석처럼 매달려 나무의 호흡을 도와준다. 생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컸으면 은행나무는 흙이 아닌 허공에 뿌리를 내렸을까. 늘그막에 새 삶을 선포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라 멈춰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다 돌아가신 엄마의 세 번째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었다. 아버지가 털어놓는 노년의 쓸쓸함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재혼이란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혼자 지내는 것이 안쓰러워 수차례 모시겠다고 해도 싫다하던 아버지가 아니셨던가. 난데없이 오며가며 만났다는 고향분과 살림을 합치겠다니 단단히 노망이라도 난 듯했다. 살아생전 고생만 하셨던 엄마 생각에 눈물부터 솟구쳐 올랐다.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고생이 많았다. 기댈 언덕바지 하나 없어 자주 설움을 삭이던 아버지에게 엄마는 나무의 뿌리와도 같았다. 풍파에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고, 따뜻한 위로로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언짢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지극한 정성 덕분인지 아버지는 비바람 속에서도 튼실한 가지를 뻗어나갔다. 늘그막에는 동네에서도 제법 무성한 가지를 가진 큰 나무가 되어있었다.
은행나무는 어느 나무보다 깊게 뿌리를 박는다. 그래서 잘 쓰러지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운 앞날조차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가 아니던가. 어느 해 불어 닥친 태풍에 은행나무는 반쯤 뿌리가 뽑혀버리고 말았다. 흙을 돋우고 지지대를 세워 나무는 소생했지만 엄마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웬만한 비바람에 끄덕도 없을 것 같던 아버지도 엄마의 죽음 앞에서 생가지를 뚝뚝 부러뜨렸다.
아버지는 나날이 야위어갔다. 평소 밥상을 차려주지 않으면 끼니를 드시지 않던 분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쌀을 안치는 일부터 집안일까지 혼자서 도맡아 했으니 그간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텅 빈 집에 혼자 계시는 일이었다. 한낮에도 종종 형광등을 밝혀놓은 채 외출을 하는 아버지께 연유를 물었다. 해 저문 후 집에 돌아왔을 때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대답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람하던 한 쪽 가지를 잃고서 외롭고 쓸쓸하던 아버지의 나무에 유주가 살포시 자리 잡았나 보다. 유주는 살갑기 그지없었다. 아버지도 벙글거리며 나긋하게 굴었다. 엄마를 대할 때는 잘 볼 수 없던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겨우 주저앉혔던 마음이 다시 뒤엉클어지곤 했다. 남은 생애만큼은 아버지가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마음 벌리기는 쉽지 않았다.
“니가 잘 한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 하겠노?”
멀리 떨어져 사는 오빠는 나를 달래었다. 사실이 그랬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참이라 무어라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굵은 뿌리는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지탱을 해주고, 가는 뿌리는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거나 호흡을 한다. 은행나무는 가는 뿌리가 발달되지 않아 천 년 이상 오래 살다보면 숨 쉬는 것도 힘에 부치는 일이 많다. 그럴 때 유주는 나무의 든든한 지원군이 틀림없다 싶다.
지상을 쓸듯 바닥으로 주저앉은 가지는 다시 몸을 추켜들고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다. 줄기 끝에는 어느 나뭇가지보다 크고 색이 진한 잎이 무성하다. 은행나무가 소생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눈물 한 줄기 흘렸을 뿐 유언을 남기지 못했던 엄마의 임종이 떠오른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유증으로 말 한 마디 못했던 엄마가 마지막 남기고 싶었던 말은 홀로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을까. 어디 잠시 여행을 떠날 때에도 아버지 끼니 차려드릴 걱정에 내게 수십 통씩 전화를 하던 엄마였다. 그 때처럼 내 두 손을 꼭 잡고 엄마는 아버지의 노후를 부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는지…….
언젠가 한번만이라도 엄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을 받고 싶다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시는 그럴 수 없을 거라며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은 앙상한 뼈를 드러내고 힘없이 구부러져 있었다. 수 년 동안 엄마의 병상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여다보느라 더욱 굽어진 등이다. 이제라도 아버지의 무거운 등짐을 내려 드리라고 은행나무가 묵묵히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돌아가신 분께도 지극정성을 드리는데 살아계신 아버지 마음을 살펴드리는 것이 무에 어렵냐고 말이다.
이제는 나무가 잎을 떠나보내듯 가슴에 응어리진 섭섭함을 떠나보내야 할 때인가 보다. 가을이 물들어가는 이파리처럼 순해진 계절 속으로 내 마음 한 자락을 덜어낸다. 마음을 비우니 비로소 은행나무가 아름답게 보인다. 유주는 엄마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빈 곳을 대신 채워주는 것이라는 말에 얼어있던 마음이 풀린다. 은행나무와 유주는 한 몸인 것처럼 서로를 껴안고 어우렁더우렁 여생을 살아가리라.
어디선가 딱따구리 한 마리가 나무를 쪼아대며 한낮의 정적을 깬다. 오랜 세월 홀로 꿋꿋이 견뎌온 침엽의 나무, 숱 많은 은행나무 그늘 속으로 내가 걸어들어 간다.
첫댓글 당선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립니다.
대상 수상작 다시 읽어봐도 역시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