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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테(空手道 / Karate)
가라테(공수도)는 중국 남권에서 유래하여 오키나와에 정착한 오키나와 테라는 무술이 다시 일본 본토에 상륙하면서 개량을 거쳐 대중화된 무도이다. 주먹 공격, 발차기 공격, 무릎 공격, 팔꿈치 공격, 그리고 약간의 유술기가 혼합된 입식 타격 위주 무술이다.
가라테의 유파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수련자 수가 많은 유파는 송도관, 강유류, 사동류, 화도류와 같은 전통 가라테 유파이다. 이 네 유파의 전통적인 쿠미테(組手, 대련) 방식, 그리고 이 네 유파가 가입된 스포츠 가라테 단체인 '세계가라테연맹(WKF)'에서의 쿠미테 방식은 공격하기 직전에 멈추는 슨도메라는 규칙을 채택한다. 이에 실전성을 이유로 반발해 직접적인 타격을 허용하는 극진회관은 풀컨택트 가라테를 발전시켰지만, 안전성을 이유로 얼굴은 주먹으로 가격하지 않는 룰이 생겼다. 이에 또 다시 반발해 얼굴에 보호대를 차고, 얼굴 가격은 물론 관절기까지 허용한 대도숙 공도라는 이름의 무술이 생기기도 했다. 대도숙 공도는 처음에는 극진공수도의 유파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너무나 달라져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찾았기에 아예 독자적인 무술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발음하기 편해서인지 '가라데'라는 표기가 말로도 글로도 널리 쓰이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가라테'가 맞는 표현이다. 일본어 발음을 그대로 옮기면 '카라테'라는 발음에 가깝고 현재 한국 WKF식 가라테 단체인 대한카라테연맹에서는 카라테를 쓰고 있으니 '카라테'로도 들어올 수 있다.
가라테는 뒤의 도(道) 자를 생략한 명칭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아이키도처럼 '가라테도'라고 불러야 '공수도'에 대응되는 풀네임 명칭이 된다.
한국에 들어와있는 가라테는 극진가라테와 전통가라테 뿐이였으나 최근에는 오키나와 테에 가까운 강유류도 들어왔다.
17세기 일본 사쓰마번의 침략에 맞서 당시 류큐 왕국(지금의 오키나와) 무인들은 중국 남권을 차용한 唐手(당수), 말 그대로 중국 무술(당나라 무술)을 수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테(手)의 모체다. 류큐어로는 티 또는 디라고 한다. 즉, '테'는 일본어식 발음이다.
당시 류큐는 상씨 왕조 때부터 개개인의 무기 소유가 금지됐었기 때문에, 외적에 맞서 싸울 방법이 무술밖에 없었다. 1625년에 명나라 사람 진원빈이 류큐에 와서 자국의 권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고 이것은 가라테 역사에서 꼭 다루어지는 사실 중 하나이다.
한편, 중국 당나라를 가리키는 '唐'자도 히라가나로는 '가라(から)'라고 쓰는데, 여기서의 '가라테(唐手)'는 '당나라의 권법'이라고 풀이된다. 일본의 무술로 정착되면서 이후 일본은 '당'자가 중국 당나라를 연상시킨다며 '唐'자는 폐기되고 '空手(공수)'로 통일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가라테 카타(型)도 중국에서 왔다. 물론 류큐인들이 이를 개량, 발전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중국 남파 소림권에서 유래한 중국 남권, 그 중에서도 영춘백학권이라는 권법과 굉장한 유사성을 띤다. 교본을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지만 기본적인 기술 체계도 그렇고 아예 특정 카타(形)와 동작 및 순서가 같은 투로도 존재한다. 가라테의 기본인 삼전(三戰)서기나 삼전카타는 남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형(步形)이다.
때문에 중국에선 중국무술로 여기는 이들도 많고, 가라테에 기반한 태권도까지 중국무술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한 예로 2007년 중국에서 열린 세계 태권도 대회에서 한 국뽕 아나운서가 "태권도는 중국 것이다. 중국무술 가라테를 일본이 일본 것이라고 하는데, 태권도도 한국이 자기 것이라며 왜곡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원래 오키나와에서 명칭은 단순히 테(手)였다고 한다. 슈리 지방에서 성행하는 건 슈리테(首里手), 나하 지방에서 성행하는 건 나하테(那覇手) 하는 식으로 지방에 테(手)를 붙여 부르곤 했다.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오키나와테(沖縄手), 혹은 도테(唐手, 당수)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당(唐)이라는 말은 당나라의 당자 이기도 하고, 중국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 내에서 중국에 대한 적대감정이 강해지자, 당(唐)자를 '도'로도 읽을 수 있지만 '가라'로도 읽힌다는 점에 착안, 당(唐)자를 떼내고, 같은 '가라'로 읽히는 공(空) 자를 붙여서 가라테(空手,공수)라고 부르게 된다. 일본어에서 '가라(から)'는 '비어 있다(空)'는 뜻이고, '테(て)'는 '손(手)'이란 뜻으로, 가라테(空手)는 곧 맨손 무술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70년대까진 국내에서도 당수도라는 명칭을 태권도와 혼용해서 쓰고 있었으며, 북미 등지에선 아직도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당연하지만 이는 태권도가 가라테(당수도)를 모체로 재창작되었기 때문이며, 초기 태권도 창설시 정치적 혹은 개인적 이유로 태권도와의 통합을 거부한 가라테 원로들이 자신의 도장을 유지하면서 가라테의 한자음을 그대로 당수도로 보급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태권도와는 다른 한국화(라지만 역사왜곡, 즉 한국 전통무술로 포장한)를 추구하며 "당수도"로 홍보하거나, 혹은 이름도 갈아탄 "수박도" 같은 경우도 있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당수도(唐手道)라는 표기는 매우 마이너한데, 일본에서는 '당수술(唐手術)'에서 급격히 '공수도(空手道)'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전통 당수를 한다는 몇몇 단체가 당수도 표기를 쓰고 있고, 가라테와는 별 상관 없는 대만의 중국무술 단체 중에 이런 표기를 쓰는 곳이 있다.
왕우 주연 영화 용호투에서는 "당수니까 중국무술이다." 라는 뻘소리를 하기도.
유명인들 중엔 척 노리스와 신시아 로스록이 당수도를 수련했다.
본시 류큐 왕국 주민들이 사쓰마 번의 침공 및 무기금지령에 맞서 수행한 것으로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미 상씨 왕조 때에 내전을 두려워해 전 국민의 무기 소지를 금지했고, 심지어 군인들조차 무기를 왕궁 무기함에 거치해놓고 잠갔을 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싸움이 나거나 들짐승 등의 공격을 받았을 때 맨몸으로 싸울 수 밖에 없어, 류큐인들은 호신을 위해 더욱 가라테 수련에 열심이었다.
사쓰마 번이 점령한 시기에도 일체의 무기를 금지했기 때문에, 호신 겸 사쓰마로부터 독립하려는 열기가 담긴 무술로 수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이 곧 집단적인 가라테 수련도 금지시켜서, 수련도 일본 무사들의 눈을 피해야 한 까닭에 비밀리에 수많은 유파가 집집마다 다르게 전수되었다. 이는 류큐 왕국이 정식으로 일본 제국에 병합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병합 이후 무기 금지령은 해제됐지만, 단체로 모여 무술을 연마하는 행위는 여전히 반란의 전조로 규정됐다.
그 때문인지, 가라테에는 원래 무기술도 일부 포함되어 있는데, 그 무기들이 대부분 무기같이 안생긴 것들이 대부분이란 특징이 있다. 대표적으로 봉이나, 톤파, 쌍절곤같이 평상시라면 농기구의 일부로 보이기 쉬운 것들. 심지어 낫을 무기로 사용하는 곳도 있다. 또한 전통 가라테 수련에서 매우 중요시하는 카타 수련의 경우도 카타 동작이 원래 무기를 갖고 수련하는걸 염두에 둔 동작이거나, 무기술에 근원한 경우가 많다. 즉, 맨손으로 무기를 들고 있다고 가정하고 훈련하는 모습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대표적인 것이 평안 2장으로, 원래는 봉술에서 유래한 카타다.
류큐 제도가 일본의 정식 영토(내지)로 편입되기 전까지 류큐인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가라테에 대해서도 탄압이 심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1900년대 들어 일본이 여러 전쟁을 겪으며 상무적인 사회 분위기가 되면서 검도와 유도 이외의 무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오키나와의 가라테 역시 주목을 받아 일본에 상륙하게 된다.
일본에 가라테를 전파한 사람은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 - 1957)이었는데, 어렸을 때 몸이 허약해 부모가 열심히 운동을 해 몸을 단련하란 의미에서 스승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스승과 후나코시의 집은 거리가 20리나 되었는데, 수련이 금지되어 있어 밤에 몰래 수련하기 위해 제자는 한밤중에 10리를 달려가고, 스승도 10리를 달려와서 정확히 중간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수련했다고 한다. 만약 하루라도 빠지면 상대가 10리를 헛수고해서 달려온 게 되기에, 태풍이 오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심지어 아파도 제자는 스승을 위해, 스승은 제자를 위해 단 하루도 수련을 빼먹지 않았다는 감동스러운 러브 스토리가 전해져 내려온다.
후나코시는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인들의 무술이 인정받게 되고자 가라테를 일본에 전파하게 되었고, 1916년부터 본토에 진출하였다. 이때 중국 색채가 나는 '당(唐)'자를 빼라는 일본 측의 주장에 1929년 이름을 공수도(空手道)로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국민 스포츠이던 유도 강도관 도장에서 수련시간 외에 연구회가 처음 인정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승급체계나 도복 등, 유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그 이후 가라테는 쭉 발전하여 일본에서 검도, 유도의 뒤를 이어가는 주류 무술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는 일본의 대표적인 타격계 무술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어느 정도 유술기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업어치기 후 안면에 정권이라든가.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 무술의 원형은 타격기와 유술기가 혼합된 형태였다. 일본 무도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무기를 든 상태를 상정하며 킥으로 원거리 공격을 보조했다. 또, 근접 상태에서는 펀치가 아닌 유술기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형태였다. 지금은 유술로 대표되는 유도의 경우도 현재의 유도로 정립되기 이전에는 주먹과 발 기술이 있었으며, 심지어 스모조차 과거에는 타격기와 유술기 등을 가진 종합 무술에 가까운 형태였다. 사실 대부분의 무도는 태생을 따라 올라가면 모두 무기+유술+타격이 혼합된 형태에서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각각이 하나의 종목으로 자리잡고 스포츠화 되면서, 다른 무술과의 차별화를 위해, 혹은 스포츠화를 위해 타격이나 유술 한 쪽으로만 발달하게 된 것이다. 가라테에 손 기술보다 발 기술이 훨씬 많고, 카타에 유술기를 상정한 동작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태생적인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라테의 유술기를 볼 수 있는 영상으로, 평안4(平安四段)이라는 카타의 동작을 응용한 기술이다. 전통 유파의 대표로 불리는 쇼토칸에서도 기본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카타이며, 유술기가 완전 금지된 극진의 각 분파에서도 동작 자체는 가르쳐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친이 저술한 가라테 교범에도 유술기 항목이 수록되어 있을 정도.
품새속 가라테 동작들의 모습이 현대의 종합격투기와 기타 유술기 무술들의 모습들과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는 복원 영상. 물론 영상에 예시로써 등장하는 모든 선수들이 가라테 기술을 시전하고 있다고 판단해선 안되겠지만, 기존의 오키나와 테의 실전성과 유술기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는 영상이다.
사실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일본 내에서 가라테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다. 유도가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제압하는 신사적인 전통무도라는 이미지가 있는 반면, 가라테는 깡패들이나 수련하는 싸움이란 선입견이 강했다. 60년대에 만들어진 가라테 영화에서도 제목을 무도로서의 가라테가 아니라 그냥 공수치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따라서 가라테 수련자들은 일본을 떠나 미국, 러시아, 브라질 등의 해외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 가라테가 온전히 일본 무술로 받아들여지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이런 해외 수련자들 덕에 '외국에서 유명한 일본 무술'의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전통 가라테를 뿌리로 두고 있는 무술이나 격투기가 많다. 단순히 영향을 받았거나 이런 기술을 채용했다 정도가 아닌, 발전 계보상으로 보면, 대표적으로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파생되어 독자적으로 발전한 무술이고, 룰과 커리큘럼을 수정한 극진공수도와, 이 극진공수도에 다시 룰을 수정해서 발전시킨 대도숙 공도와 무에타이의 요소와 결합시킨 킥복싱 등도 있다. 그 킥복싱에 다시 새로운 룰을 추가한 슛복싱도 따지고 보면 가라테의 증손자뻘 되는 셈. 그 사이사이의 과도기에 있는 비교적 덜 유명한 무술이나 단체를 포함하면, 훨씬 수가 많아진다. 물론 무술이나 격투기라는 게 룰 하나만 수정해도 완전히 다른 종목으로 바뀌며, 가라테 역시 처음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고 나름대로의 발전을 거쳐온 만큼, 이들이 가라테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계보가 그렇다는 것이다.
각각의 유파들도 자신들만의 발전 방향을 가지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데...
1. 전통 공수의 경우 자신들 무술의 전통성을 강화하고 수련생들이 다치지 않는 격투기로서의 발전 방향을 갖고있다. 주로 노약자, 어린이, 여성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격투기 수련으로서의 특징을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2. 풀컨택트 유파들은 육체의 단련과 강함을 모토로 어떻게 실전에 적용시킬 것인가를 화두로 보고 있다. 이 안에서도 다시 수련방법이 여러개로 나뉘는데, 보호구 없이 맨몸타격을 고수하는가 하면, 보호구를 착용하고 부상을 막는 유파가 있고, 복싱글러브를 착용하고 킥복싱과 비슷하게 변화한 유파도 있다.
3.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격투기로서의 순수성에 최대한 집중하며 가라테로서의 특징마저 과감히 포기한, 도복만 입은 종합격투기에 가깝게 변화한 곳까지 있다. 정권찌르기나 카타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수련방식을 포기하고, 격투기 무대 등에서 실전성이 입증된 트레이닝과 기술들에 집중하는 유파들이다.
풀컨택트 가라테
가라테의 실전성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안전상의 이유로 검도의 '슨도메'룰을 적용 시켜 자유대련 중에도 상대를 실제로 가격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진검을 사용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검도와는 달리 주먹은 맞는다고 무조건 뭔가가 잘려나가지는 않기 때문에 완전한 타격까지 원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나타났다.
전후 일본에서도 슨도메 룰만으로는 시합의 공정성 등에 문제가 있다는 유파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자체적으로 수련생들끼리 실제 타격을 해보며 수련하는 도장들이 몇몇 있었다. 그런 유파들의 영향을 받은 최영의가 실제로 가라테 대회에서 우승 후 전국을 돌며 도장깨기, 소와의 싸움 등을 벌여 유명해진 뒤 미국으로 격투기 여행을 떠나면서 이후 세계에 가라테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사실, 미국에 가라테를 알린 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영의의 활약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최영의는 최초로 '대산도장'이라는 이름으로 체육관을 열었으나, 여러가지 사건에 얽혀 도장을 접은 뒤 나중에 다시 '극진회관'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극진공수도를 만들며 실전 가라테를 주장한다.
지금도 전통 가라테는 수련인구나 숫자가 많지만, 극진회관을 비롯한 풀컨택트 가라테 계열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다만 최근 들어 극진 지도자들의 각종 삽질과 지나치게 엄격한 도장 분위기 덕에 극진공수도의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UFC 등지에서 전통 가라테 수련자들이 극진 수련자들에 비해 선전하면서 극진은 실전적 측면에서도 의심을 받고 있다.
단일단체로서 가장 규모가 거대한 것은 대중매체를 잘 이용한 극진회관이었다. 전통유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쇼토칸이 수백만 명 내외였을 때 극진회관은 단일 유파로서 1300만 명까지 커지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실전유파는 극진회관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정도회관 이외의 유파가 거의 없는 반면, 단일유파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군소유파가 무수히 많은 관계로 유파 전체의 크기로 따지면 여전히 전통유파 수련자가 극진 계열보다는 몇 배 많으리라 예상된다. 게다가 분파가 많아질 수록 유파와 수련생 숫자를 제대로 정리하기 힘들기도 하다.
참고로 태권도 역시 분파가 드물어서 단일 집단에 가깝고, 수련생 숫자는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 수준으로 집계된다.
일본의 아이돌그룹 AKB48의 멤버 무토 오린이 초등학생 시절 전일본 풀컨택트가라테 준우승을 차지한적이 있다.
3. 해외 전파
현재에는 일본의 주류 무술이다. 그러나 정작 일본 국내에서 가라테는 다른 전통 무술과 비교하자면 뿌리가 약한 편이다. 이는 가라테가 유난히 분파가 많은 것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본래 일본의 것이 아닌 가라테에 대해서 일본인들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원인으로 추측된다.
이렇다보니 1950,60년대 일본 영화에선 유도 고단자는 정의롭게 나오고 가라테 고단자는 악당으로 나오는 게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라테는 유도의 도복과 승단체계를 도입하고, 이름까지 바꾸는 등 '일본화'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한편으론 이런 이유로 인하여 역설적이게도 한국인 중 가라테에 입문한 사람도 꽤 있게 되었다.
일본에서 뿌리가 약하다 보니 가라테는 오히려 해외 진출에 더 적극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해외 진출 덕분에 오늘날 가라테는 해외에선 일본 무술의 대표주자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3.1. 국제대회
스포츠화로 방향을 잡은 태권도의 성장에 주목하여 가라테를 올림픽 종목으로 하려는 시도가 있다(주로 전통유파). 실제로 2005년 IOC 올림픽 종목 투표에 도전했으나 실패했고, 이미 격기종목이 몇가지 있기 때문에 가라테가 올림픽에 입성하려면 한종목을 밀어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가능성이 낮다. 게다가 많은 유파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룰과 조직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올림픽을 대표하는 하나의 룰과 조직을 만드는 것도 상당히 난항인 것이 사실.
가라테의 올림픽 종목화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가 유럽이 주축이 된 세계가라테연맹(WKF)으로, 2005년과 2009년 IOC 총회에서 종목 신청도 이 단체가 주도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주축인 국제가라테연맹(ITKF)과의 알력 다툼은 심각한 상태로 2005년 IOC 총회 당시 세계가라테연맹(WKF)의 올림픽 종목 신청에 반발하여 로게 IOC 위원장에게 항의서신을 보낼 정도였다. 그 결과 IOC 측에서는 올림픽 종목 신청 이전에 가라테 내부 의견부터 통합하고 오라고 권고 했을 정도.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WKF의 가라테는 우리가 흔히 아는 가라테와 상당히 다르다. 스텝 밟는 것이나 타격 후 소리 지르는 것까지 과거의 태권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때문에 ITKF 일부에선 WKF가 가라테를 망치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는 실정.
올림픽을 바라보는 가라테 유파들의 입장은 유파마다 제각각인데, 올림픽 진출을 환영하는 유파들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유파의 지명도를 올릴 수 있기에 의외로 전통유파들이 많이 원하는 편이다. 반면에 올림픽에 전혀 관심없는 유파들도 많은데, 올림픽에 나간다는 건 IOC의 요구에 맞춰 유파의 조직구성과 수련체계가 변해야함을 뜻하는데, 남의 간섭을 받기도 싫고 굳이 그렇게 해서 유파에 돌아오는 이득보다 실이 크다고 판단하는 유파들이다. 이미 젊은층을 상대로 자체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은 실전 유파들이나, MMA식 격투기 무대에 적응하려는 유파들이 대체로 이런 쪽이다.
이런저런 까닭에 올림픽에 나가고 싶은 가라테 선수들은 태권도로 전향해 올림픽 태권도를 배우는 실정이다.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셰이카 마이타 알막툼 (Sheikha Maitha Bint Mohammad Bin Rashid Al Maktoum). 두바이 왕족으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가라테 은메달리스트이나 올림픽 출전을 위해 태권도로 전향,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나왔다. 그래서인지 태권도와 가라테, 둘 다 잘하는 나라가 많다.
2020년 도쿄 올림픽 후보로 가라테가 도전했지만 최종후보조차 못 들어가고 일찍 탈락했다. 적어도 야구는 제치고 최종후보까진 들어가겠지 이러던 가라테 정식종목 추진회는 그 야구에게도 밀려 탈락하자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그나마 일본 야구선수들의 도박문제가 터지자 다시 정식종목을 노리고 있었다.
결국 2016년 8월 3일(현지 시간) 리우데자이네루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야구(+소프트볼), 서핑, 스케이트보드, 스포츠 클라이밍과 함께 2020년 도쿄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올림픽 어젠다 2020에 따라 개최지가 정식 종목을 5개 정도 추가할 수 있게 되면서 가라테의 올림픽 추가가 성사된 것. 이 때문에 그 이후 올림픽에서는 가라테를 못 볼 가능성이 크다. 결국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퇴출당했다.
아시안 게임에서는 정식종목으로 일본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최근 들어 강력해진 이란이 태권도와 더불어 일본을 추격하고 있다. 아직은 일본이 압도적이지만 이란은 2000년대 와서 일본에 이어 가라테에서 금메달 통합 10개를 넘긴 나라가 되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동메달 3개를 받은 일본에 이어 이란이 금메달 3개, 동메달 2개를 받으며 바싹 추격했을 정도였다. 2018 아시안 게임에선 일본이 금메달 4개, 동메달 2개를 차지하고 이란이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3개로 전체 메달 6개를 받은 일본을 제치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된 뒤로 처음으로 가라테 대회 최다 메달 수로 일본을 제쳤다.(참고로 1994년 일본은 금메달 9개, 동메달 1개로 통합 10개를 받은 게 최고 기록)
참고로 역대 아시안 게임 가라테 총메달은 2018년까지 금 30개,은 10개, 동 9개를 받은 일본에 이어 금 14개, 은 11개, 동 10개인 이란이 추격 중이며 금 8개, 은 7개, 동 16개를 받은 말레이시아도 강세를 보였으나...2018 아시안 게임에서는 말레이시아는 달랑 동메달 1개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2018년 대회에선 대만이 금메달 2개, 은 1개, 동메달 2개를 기록하며 새로운 가라테 강호가 되었다.대만은 참고로 전체 메달 수에서 일본-이란-말레이시아 다음으로 4위다.(금메달 수로는 카자흐스탄과 같이 공동 5위)
미국인들은 영어 발음 탓에 커라릐(Karate(kəˈrätē))... 같은 식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북미에서는 50년대부터 가라테 도장들이 들어섰으며, 전통유파 가라테의 경우 현재에는 고등학교 수업이나 대학교 클럽 등에도 많이 진출해 있을 정도다. 그런 반면에 출처를 확인하기 힘든 사이비 도장도 많이 들어선 편. 북미 출처의 가라테 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겐포가라테가 있는데, 이는 일본권법 겐포와 가라테의 명칭을 합친 단체이다.
일본의 관 체제나 수련 방식, 도장 문화에서 접근하기 힘든 엄격한 분위기도 많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반대급부로 동양신비주의를 극단적으로 활용해서 마케팅 수단으로 삼는 단체들도 존재한다. 한편, 미국 등에서는 미국 사범들이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아예 중국무술과 검술, 봉술까지 합쳐 우슈 짝퉁으로 수련하는가 하면, 익스트림 마샬 아츠 계열로 컨셉을 잡아 묘기 전용으로 수련하는 등 다양한 도장들이 있다. 때문에 미국등지에서 가라테라고 하면 꽤나 높은 확률로 일본 현지에서 수련되는 가라테와 차원이 다른 이상한 무술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 제대로 된 가라테를 수련하려면 해당 도장이 어떤 유파에 속해있는지, 그 유파가 제대로 된 곳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동양무술이라면 무조건 가라테라고 부르는 경향이 남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할 듯.
또 한국에서 태권도를 공부하거나 현지에 와서 태권도 사범 자격을 딴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도장을 열면서 미국에서 태권도보다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가라테 도장인 척하며 태권도 도장을 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코리안 가라테?
한편, 영화 베스트 키드(원제: 더 가라테 키드)가 미국 서브컬쳐계에서 매우 유명하다. 때문에 이 영화에 나오는 미야기 센세이(미야기 선생님)나 학의 자세에서 나가는 킥은 은근슬쩍 패러디도 많이 된다. 심지어 일본으로 역수입돼서 일본인들도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패러디를 하기도 한다.
일제 시대의 가라테는 본래 그 태생이 오키나와의 무술이었기 때문인지 일본 본토에 기원을 둔 검도나 유도, 스모에 비해 비주류에 가까웠다. 덕분에 비교적 일본 내 식민지인들이 입문하고 뿌리를 잡기 쉬운 분위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최홍희나 최영의 같은 한국계 무술인들이 가라테를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패망 이후 이때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운 인물들이 한국으로 돌아가 가라테 수련을 계속하지만, 유파가 갈리듯 점점 한국식으로 변형되고 한국 무술계에서도 어찌됐든 일본색이 나는 가라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태권도처럼 가라테에 기반한 창작무술을 만들어 당수도 계열 도장들을 점차 통합해, 1960년대 이후부턴 당수도 도장 찾기가 꽤나 어려워진다. 자세한건 태권도/역사 항목도 참조.
하여튼 태권도가 정착한 이후부턴 상대적으로 일본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 지역에서나 가라테의 명맥이 살아남는다. 그러나 남은 가라테인들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가라테 도장이 어느 정도 남아 유지되어 있긴 하고 영산대학교 등에서 공수도팀이 유지되고 있다.
최영의 총재 사후 2천년대 들어 풀컨택트 공수(극진공수도) 유파들이 한국으로 제법 진출해 들어왔다. 국내에선 전통 공수도보다 극진공수도를 비롯한 실전 공수도가 더 흔한 이유. 그 밖에, 아시안 게임에서 공수도가 종목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아시안 게임을 대비하는 전통공수 단체나 도장들이 아직 명맥을 잇고 있다.
'대한공수도협회'라는 단체가 있으나, 현재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인 공수도는 '대한카라테연맹'이다. 대한카라테연맹은 한자시험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극진 기반의 풀컨택 공수도 단체들도 한자시험을 강제하지 않는다.
전국체전 종목이긴 한데 정식종목이 아니라 시범종목이다. 다만 공수도가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이기에 기본적으로 정식종목 채택 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라테 선수들은 국내에서 대회로 벌어먹긴 어렵다. 지원 정식 종목이 아니라 국대 선수들은 태릉 선수촌에 들어가지도 못한다. 국영 훈련장조차 없어 자비로 빌려서 훈련해야 하는 실정.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은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까지 동메달 9개를 받으며 전체 메달 수 19위이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처음으로 동메달 1개를 받은 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 3개,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최고 성적인 동메달을 4개 따냈다. 인천 대회에서 동메달을 받은 가라테 선수들은 태권도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일본 무술이라고 하여 무시당하는 가라테가 금메달을 받았더라면 조금은 더 지원도 받고 관심도 받았을 텐데 동메달을 받은 것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대한체육회에서 퇴출당해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된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가대표 파견은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에도 대한가라테연맹은 국가대표를 출전시키는 등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 올림픽 국가대표 인터뷰 기사도 있어서 국가대표 선발도 정상적으로 진해되었다. 다만 국내 전국체육대회에 대한체육회 정회원이 아니라 참가하지 못한다.
공수도연맹의 전 회장인 정도모와 그 가족들이 사유화한 상태에서 뿌리까지 썩어있었다. 정회장의 장녀가 연맹상임부회장 겸 경기력향상위원장, 장남이 심판위원장, 차남이 심판위원, 처남이 경기위원장 등을 맡는 등 회장 일가가 연맹의 운영 및 시도지부 임원, 각 분과위원장 등 주요 직위를 맡았기에 대한 체육회가 연이어 경고했음에도 배째라 버티다가 결국 대한체육회는 2013년 10월 친인척 사조직화와 횡령 혐의로 인해 공수도연맹을 관리단체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후 관리위원회가 맡으면서 또 말이 많았었다. 대한체육회는 관리위원장에 민병덕 전 국민은행장을 임명했는데 이 민병덕은 국민은행장 시절 개차반으로 알아주곤 5억원 성과금을 챙기며 비난을 받던 인물이었다. 이러니 정도모가 민병덕이나 나나 차이가 뭐냐고 맞서며 말이 많았고 내부 분열로 3년째 회장도 뽑지 못하는 등 2년 이상 관리단체 지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2016년 8월 22일에는 이근수 사무국장이 당시 새누리당 아무개 후보를 도우며 공수도인들에게 지지를 강요하는 일로 공수도인들 반발을 사고 문체부 앞에서 파면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런 분위기 속에 2016년 9월 4일 대한체육회에서 퇴출당했다. 손영익 공수도 국가대표 감독은 “전화 한 통으로 통보를 받았다”며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 반면, 대한체육회 측은 “(대한공수도연맹은)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거냐”며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다만 체육회 측은 공수인들이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적인 가맹절차를 밟을 경우 다시 받아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1년이 지난 2017년 12월까지도 여전히 서로 다투고 있다는 사실. 내부적 문제 해결도 안되니 한국에서 가라테 입지는 더더욱 어둡다.
이 후 2018년에 기존 대한공수도연맹과 다른 대한카라테연맹(http://www.koreakarate.or.kr)이 대한체육회에 준회원으로 가입했다. 올림픽에 관여하는 WKF쪽과 관할하니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엔 출전할 수 있을 듯. 현재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국가대표를 출전시키고, 경찰시험 등에 가산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단체는 대한카라테연맹이다.
2018 아시안 게임에서는 남자부에서 동메달 1개에 그쳤다.# 그래도, 한국은 여태 동메달이 전부였지만 같이 동메달 1개에 그치며 역대 최악의 결과를 맞은 말레이시아 가라테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2014년 전 대회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2개. 2010년 대회에선 금메달 2, 은메달 1 , 동메달 2개로 이란을 제치고 가라테 메달 2위에 오르기도 하고 일본과 이란 다음으로 가라테 통합 메달 순위 3위인 말레이시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는 금메달 2개,은 1개, 동메달 2개를 받았던 만큼.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은 이웃 인도네시아 대회인만큼, 기대를 더 받았더니 사상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4. 종합격투기에서의 가라테
1980~90 년대 미국에서의 겐포 가라테의 인기는 상당한 것이었고, 종합격투기 무대에도 많은 선수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오키나와나 일본 본토의 수련자가 아닌 미주의 겐포 선수들이었는데, 제랄드 고르쥬, 키스 해크니 등이 대표적인 겐포 파이터들이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믿기 어렵겠지만 프랭크 미어는 가라테로 격투기에 입문, 척 리델의 타격 역시 겐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래플링과 그라운딩의 부재로 그다지 강세를 보이진 못했다. 9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겐포의 참여율은 크게 감소하고 MMA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후 Rings, Pride의 출범을 계기로 종합격투기의 중심이 일본으로 이동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이 인식은 료토 마치다가 UFC에 입성할 때까지 지속됐다. 2007년 옥타곤에 모습을 드러낸 쇼토칸의 마치다는 가라테와 스모가 혼합된 독특한 스타일로 기존의 강자들을 올킬하며 -93kg급 챔피언에 등극한다. 그 파이팅 스타일이 기존 MMA의 타격에 비해 상당히 독창적이고 특이해서 MMA에서의 가라테는 재조명을 받기에 이른다.
반면 일본의 선수들은 딱히 종합 무대에 진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극진을 비롯한 본토의 유파들이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본 내에서 그 입지를 탄탄히 다져, 자체적으로도 권위있는 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K-1이라는 프로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종합보다는 입식으로의 진출이 두드려졌다. 프란시스코 필리오, 앤디 훅, 사다케 마사아키, 모리 아키오(무사시), 세미 슐트, 에베르톤 테세이라 등이 이 방면에서 활약한 선수들이다. 다만 일각에서 최강으로 불리던 극진공수도 출신 선수들이 KO당하는 모습도 보여 그 환상이 깨지기는 했다.
그러나 2010년을 기점으로 FEG가 삐걱거리기 시작하자 일본의 유파들도 MMA 진출을 고려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극진공수도를 수련한 MMA 파이터 중 챔프에 오른 유명한 이들로는 바스 루턴과 조르주 생 피에르가 있다. 일찍이 UFC헤비급 챔프와 판크라스 챔피언을 지냈던 바스 루틴은 극진 분파 중 하나인 극진무도회에서 2단까지 수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스 루틴은 MMA 트레이너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자신의 레슨에서도 극진공수도를 인용한 설명을 보이기도 한다. 웰터급 챔프인 생 피에르는 어릴 적 불량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게 싫어서 극진공수도를 시작해 격투기에 입문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타락(?)하여 레슬게이가 되었다. 안돼 다만 생 피에르는 맷 세라와의 1차전 이후에 완전히 레슬링 스타일로 전환했으나 타격 시에는 여전히 가라테 방식을 쓴다고 본인이 말한 바 있다.
2016년 웰터급 최고의 신성으로 떠오른 스티븐 톰슨이 겐포 가라테를 수련했다고 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쪽은 조르주 생 피에르와 달리 그라운드나 클린치 플레이 없이 순수한 가라테 스타일로 싸우는 타격가다. 다만 이쪽의 경우 다른 가라테 스탠스 선수들에 비해서도 가드가 더 낮아, 태권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웰터급의 거너 넬슨 역시 가라테가 베이스이며, 톰슨에게 "누가 가라테를 더 잘하는지 승부를 가리자"라는 도발을 날리기도 했다. 챔피언을 그만 해먹을 생각이 없는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패배했지만 그외 선수들에게는 동양인으로서 극강의 강력함을 자랑했던 호리구치 쿄지 역시 가라테를 베이스로 싸웠다. 헨리 세후도는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굴욕패를 당한 후 가라테 스탠스를 장착하고 나타나며 웰라운드 파이터로 변모했고, 결국 드미트리우스 존슨에게 벨트를 가져오게 되었다.
UFC의 유명인 코너 맥그리거도 어렸을 때부터 가라테를 수련했고, 이 영향인지 그의 스탠스는 가라테와 복싱을 결합한 듯한 독특한 스탠스다. 미들급 챔피언 로버트 휘태커 역시 어릴 때부터 가라테를 배웠기 때문에 타격 스타일에 가라테의 영향이 드러난다.
대체로 가라테 스탠스 스타일의 선수들은 스탠스 자체가 복싱 타입에 비해 유니크하다 보니, 마치 영화 속 무도가와 같은 모습 자체만으로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가라테 스탠스의 경우 대체로 상대적으로 좋은 신체조건을 바탕으로 카운터와 콤비네이션에 능하며, 초반 라운드에서 강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풋 워크와 반사신경의 비중이 크다 보니 체력이 부족한 후반일수록 공격력이 떨어지고, 한 방의 허용 확률이 점점 커지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체력이 대체로 좋은 경량급에서는 제법 보이는 스타일이지만, 체력 소모량이 큰 중량급에선 상당히 보기가 힘들어진다.
다른 무도와 비교했을 때 가라테가 갖는 가장 독특한 특징은 스탠스, 즉 기본 자세에서의 발의 너비(立ち方-타치카타)에 있다. 물론 가라테에서도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앞발과 뒷발을 넓게 벌린 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가라테 외에는 홍가권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스탠스를 취한다.
하지만 실제 경기 양상을 보면 티치카타를 거의 쓰지 않는다. 종합격투기 스탠스처럼 양발을 거의 붙이거나 복싱자세처럼 묘족서기를 한다. 스탭도 거의 밟지 않는다. 전통 가라테의 가장 유명한 교리이자 기본적인 이론은 "가라테에는 선수先手가 없다" 즉 치고 빠지기가 아니라 "요격"이다. 가라테의 기본 쿠미테나 용법은 전부 먼저 상대의 공격을 받고 반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전통 가라테의 주요 유파들 모두 각각의 공방 방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회 등에선 다들 쇼토칸 식으로 쿠미테를 하는 것이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다. 상기된 넓은 스탠스는 분명 전통 가라테 유파의 전반적인 특징이나 우에치 류 등 삼전 자세를 기본으로 삼는 유파도 있고, 고주나 와도 등도 어쨌든 쇼토칸보다는 좁은 편이며 무술 이론 상 접근전을 중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쿠미테 영상을 찾아보면 거의 대부분 쇼토칸 대회 영상과 별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