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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있으리니
마 10:16-23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마 10:16-23 / [박해를 각오하라;막13:9-13,눅21:12-17]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게 처신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조심하라. 너희를 잡아 심문하고, 회당에서 매질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18) 너희는 나 때문에 통치자들과 왕들 앞에 끌려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앞에 나의 증인이 되는 기회인 것이다. 19) 너희가 잡혀갔을 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알려 주실 것이다. 20) 이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여 죽게 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원수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식이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내게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느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동네로 피하라. 너희가 이스라엘 동네를 모두 다 돌아다니기 전에 인자가 돌아올 것이다.
예수님은 전도자가 당면하게 될 여러 가지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서 당면할 상황은 핍박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이 새로운 주권과 나라를 선포하는 전도자들을 가만둘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영역에서 생명의 권세를 담대하게 선포하는 영적 전쟁입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6) 이 부분은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는 “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새겨둘 만한 진술이 이어지니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파할 현장이 매우 거칠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 예수님의 제안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입니다. 너무 달라서 조화되기 어려워 보이는 뱀의 지혜로움과 비둘기의 순결함을 대처법으로 말씀하신 것은 복음 전파의 현장을 제대로 분별하여 행동하는 구체적인 실력을 키우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17-20)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13b-14). 그러나 복음의 거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적대와 핍박으로 연결됩니다. 복음을 전하면 제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거부를 넘어 사회적인 차원에서까지 적대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핍박은 종교의 차원(17)에서 시작되어 세속 권력의 차원(18)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이는 복음 전파의 영역이 유대지역과 유대인이라는 좁은 영역을 넘어 넓은 이방 세계로까지 확장될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핍박이 시작되면 권력자들 앞에 끌려가게 되는데,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핍박받는 현장으로 보이는 그 자리는 우리의 아버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21-23) 제자들이 전도하는 시기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중간시기입니다. 고난이 극복되고 있지만, 여전히 고난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사탄과 죽음의 권세를 완전하게 제압하는 새로운 주권자와 그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적용: 복음을 전파하다가 받는 핍박은 당신이 제자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 핍박을 받고 있다면 기뻐하고, 기뻐합시다.
소경 웰리암 문은 자기와 같은 소경들을 위하여 점자를 발명하고 오백여 방언을 이용하여 수백만의 소경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는 소경이 되어 갖게 된 재능에 대해 당신께 감사합니다. 나로 하여금 그 재능을 투자하게 하사 주님께서 오실 때에 소유물의 높은 이자까지 붙여서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 설 교 >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하라!
마 10:16-22 / 이삼규 목사(낙양교회)
아무도 여러분에게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여러분뿐입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생에서나 내세에서나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지금 만나는 역경이나 고난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에 가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마지막에 가면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마10:22/메시지)
예수님은 훗날에 일어날 매우 슬픈 현실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 24: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아마 이렇게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척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와 성공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이 중간에 포기하다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더 안타까운 사실은, 사실 그들은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강력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난 받기 전보다 더 강하고 지혜롭고 열매를 많이 맺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포기합니다. 그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많은 경우에 포기하는 이유는 ‘끈질김’과 반대인 ‘타협’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이야기에서 물살과 반대로 노 저어 가는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명성을 위해 뛰어난 사람이 되려면 세상과의 흐름과 반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의 지혜를 고수해야 합니다. 타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진리를 타협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에 말세의 힘든 현실을 예견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서른아홉 번씩 다섯 번 매를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감옥에서 몇 년을 고생한 사람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을 위해 살기가 더 힘들어 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딤후 3: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딤후 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딤후 3: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바울은 왜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동행하기가 힘든 때를 묘사하며 이런 특성들을 지적하였을까요? 그 다음 구절이 답을 알려줍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바울은, 가장 큰 어려움은 진리를 타협하는 ‘신자들’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들과 함께 바울은 우리 시대에 스스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강건하게 서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의지하지만,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꿋꿋한 전사로 구별해 줄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은 거부할 것입니다. 이들은 노 젓는 것을 멈춘 사람들입니다. 방향은 상류를 향하고 있어도, 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 하류로 흘러 떠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초대 교회 교부들에게 가장 큰 싸움은 ‘율법주의’였습니다. 율법주의는 새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기보다 구원받기 위해 다시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세에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싸움은 ‘무법’입니다. 무법은 변화된 삶은 기대하지 않고 구원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기 전과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그룹에 속했고, 배가 물살을 따라 아래로 흘러갈 때 우리 안에서 통하는 언어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경고가 아닙니다. 그들은 경주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신앙이 있는 사람, 즉 경주를 이미 시작한 사람에게는 “당신이 끝까지 하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신 핵심 단어가 무엇입니까? “견디는”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군대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견디다, 참다, 버티다’ 등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 6.25 전쟁 때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서 얼마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졌습니까? 견디기 위해서는 반대와 저항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버텨내야 합니다.
진리는 유행을 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고합니다.
딤후 3: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딤후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진리를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결국은 속임수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에서 ‘어려서부터’와 ‘성경’을 강조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것을 기초로 우리는 삶을 세워가며, 그로 인해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식과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진리는 죄를 짓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인간의 욕구와 편의, 또는 소위 ‘정치적 정당성’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마7:14)라고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참된 교리에서 돌아선 교사들을 많이 만들어 냈습니다. 이 교활한 교사들은 우리 문화의 도덕적 붕괴에 적합한 복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제는 진리가 신자들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트랜드를 통해 진리가 수정되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중에 절대적인 도덕적 진리를 믿는 사람이 46%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50% 이상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외에 다른 길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40%만이 사탄을 실제 세력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귀가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기”(고후 6:1)보다는 세상과 함께 침대에 뛰어 들 수 있게 해 주는 말만 들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처음 타협을 하기 시작할 때는 성령의 끌어당김을 느낍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 드린 이야기에서처럼 커다란 배에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세상 물살의 흐름을 따라 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아 버리고, 진리를 들어도 무감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믿음의 영웅들을 끈질기게 믿음을 지킨 자들로 묘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끝까지 믿음을 지켰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가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달려가려면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믿음의 주님, 또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히브리서 11장에 나온 믿음의 챔피언들처럼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진리로 사자들을 에워싸고 의의 흉패로 무장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놓인 경주를 꿋꿋하게 해 나가며, 끝까지 확신을 가지고 원수와 싸우기를 바랍니다. 가장 큰 반대와 공격을 이겨내신 분의 씨앗을 여러분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강함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의 본성이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포기하고, 주춤하고, 후퇴하고, 타협하기 위해 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무리 큰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통치권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시련으로부터 배우시기 바랍니다.
고후 1: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고후 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후 1: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바울의 고난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그와 그의 일행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은 무엇보다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반대를 통하여 더 높은 수준의 권위와 능력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능력)는 언제나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듭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견디며 믿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곧 위대한 승리와 만족과 성취를 맛볼 날이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은 이끌어 이 영적 모험을 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시며 우리 주님이신 예수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점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고전 1:9/메시지)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은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He will never give up on you"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끈질기게 믿음을 지키십시오.
포기하지 않는 자가 받는 상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받는 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들어봅시다.
계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승리하는 모든 사람, 끝까지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줄 보상은 이것이다. 너는 민족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며”(메시지)
얼마나 큰 상급입니까!
바울은 “우리가 참고 견디면, 우리도 또한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요”(딤후 2:12/새번역)라고 말씀함으로써 예수님의 약속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명심할 것은 그것이 단지 미래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은 분명히 끈질기게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잘 끝마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약해지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킴으로써 오는 충만함과 풍성한 삶을 경험할 특권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시 27:14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보냄을 받은 자
마 10:16 / 김철현 목사
어느 날 아이가 항상 책상 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보고 엄마에게 묻습니다.“엄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저 책은 누구 책이야?” 엄마는 깜짝 놀랍니다. 손을 잡고 늘 교회는 다녔지만 어린 것이 뭘 알랴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 친절하게 설명을 했습니다.“응 이 책은 하나님의 말씀이 적힌 책이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책이야.” 그랬더니 이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이“그래? 그래서 엄마가 한 번도 안 건드리는구나.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돌려보내야겠네.”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읽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을 받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그렇게 고백하면서 이 말씀대로 얼마나 행하고 있습니까?
철학자[파스칼]은 그의 책<팡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않고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사람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러니 보세요.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칼 바르트]는 말하기를“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을 만날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어 가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군지를 알고 그리고 내 운명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항상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매일의 영적 양식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은 흔히 소명장, 사명장, 파송장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렇게 부르느냐 하면 먼저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십니다. 그 다음에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쫓고 병과 악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하고 보내십니다. 1절부터 5절까지를 보면 이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옵니다.
우선 1절에“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하는 말씀이 있고, 역시 1절에“권능을 주시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이 열둘을 내보내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영어로 Calling, Giving, Sending이라고 하는데 즉<부르시고>,<주시고>,<보내시는>위임을 받은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내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이제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는 내 삶의 현장이 바로 Mission Field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내 전도 현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신 데는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서 모든 자격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부르실 때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능력이 있든, 무능하든 그런 것은 따지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꼭 능력 없는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 변명할 것도 없고 나의 능력에 대해서 교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부르셨다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부르셨으니 따라갈 뿐입니다.
그리고 주셨다는 말씀 또한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신 다음에 권능을 주십니다. 이 말을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적으로 당신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그 주신 권능을 우리가 쉽게 알 길이 없습니다. 무슨 자격증을 준 것도 아니요, 수료증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권능을 주셨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받아들여집니까?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우리 모두에게도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나타나는 권능의 증거는 오직 하나 순종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순종해 보지 않고는 그 권능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믿고 순종할 때 그 권능이 나타난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것을 은사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여간 오늘 말씀에도 분명히 밝히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권능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권능을 알기를 원하신다면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그 권능이 여러분에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내가 너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내시는데 어떻게 보내시느냐 오늘 본문입니다.“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식적으로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은 천성적으로 바보 같은 동물입니다. 무능합니다. 독도 없습니다. 순진하고 순종만 할 줄 압니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인도해 주어야만 그 길로 갑니다. 아무리 수백 마리의 양이 있어도 목자 혼자서 충분히 다룰 수가 있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순종적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양이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이리 가운데로 보내진 양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떼가 우글거리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뜯고 싸웁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혈투가 벌어지는 그런 곳입니다. 이기는 자는 남고 지는 자는 사라지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서 양처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양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양이 이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양은 언제까지나 양이어야 합니다. 양이 양을 만났을 때는 양이요, 이리를 만났을 때는 이리요, 호랑이를 만났을 때는 호랑이요, 사자를 만났을 때에는 사자가 된다면 이미 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양은 언제나 어디서나 양이어야 한다는 이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 목사라고 부릅니다. 목사라는 말이 원래 목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네, 양이라는 말입니다. 그럼 목자가 가자는 길로 양은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따라가면 되는데 가끔 보면 염소가 있어요. 양은 뿔로 들이박는 경우가 없는데 염소는 수시로 뿔로 들이받거든요. 어떻게 되나 보자 싶어서 괜히 뒤에서 툭 툭 받아 봅니다. 양은 양이어야지 염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면서“너희는 양이라.”말씀 하시는 의미입니다.
그러시면서 이리 가운데서 양처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무엇이라 하십니까?“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것이 그 말씀입니다. 왜 하필이면 뱀입니까? 뱀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배우라는 것입니까? 세상에 많은 짐승 중에 뱀처럼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드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의 구조가 공통적으로 비슷합니다. 다리가 있든지, 날개가 있든지, 그래서 걸어 다니든지, 날아다니든지 합니다. 그런데 뱀은 생긴 것이 기다란 막대기모양입니다. 손도 없고 발도 없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열악한 환경에 있지만 뱀은 그 불편한 몸을 가지고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지느러미가 없는데도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고, 손발이 없는데도 나무를 잘 타고, 다리가 없지만 숲속에 달릴 때 보면 엄청나게 빠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아무 것도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뱀의 그 지혜를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평합니다. 어떻게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리가 사는 세상에 살라는 것이냐고, 왜 날개도 없이 날라고 하고, 왜 발톱도 없이 싸우라고 하느냐고, 이 험난한 세상에 뿔도 없이 살아가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우리는 불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에게 무엇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뱀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없는 것만 바라보고 한탄하고 있으면 끝이 없습니다. 있는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훨씬 필요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불의한 세상에 살지만은“비둘기와 같이 순결 하라”고 하십니다. 비둘기의 순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비둘기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먹어서 안 될 것은 안 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둘기 하면 아주 순결 그 자체로 꼽습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꼭 비둘기가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을 봅니다. 바로 이 비둘기의 순결 때문입니다. 제물은 언제나 가장 깨끗한 것을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정하거나 더러운 것이나 흠이 있는 것은 제물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는 가장 깨끗하고 순결 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주님께서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시는 것은 비둘기의 이러한 특징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유감스럽게도 마음만 먹으면 이것 저 것 아무 것이나 먹을 게 많고 또 먹으면 독이 되는 것들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에 합당하게 살려면 비둘기와 같이 순결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욕심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세상입니다. 불의가 수시로 유혹하는 세상입니다.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이리처럼 살거나, 혹은 이리가 되어서 어떤 불의를 저질러서라도 욕심을 채우겠다고 한다면 우리를 부르시고 권능을 주셔서 양으로 보내신 주님의 뜻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주님은 이 세상이 이리 같음을 아시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부르시고 권능을 주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궁극적으로 보내시고자 하셨던 곳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어쩌면 점점 더 이리 같은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훨씬 더 거친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고 권능을 받고 보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나의 나됨을 다시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할 길이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할 이 길에서 너무 쉽게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양으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가 이리가 되어 있어서 문제입니다. 양으로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마지막까지 양이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분별과 성결
마 10:16 / 박세갑 목사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본문의 “뱀 같이 지혜롭다.”는 말은 고대의 중동지역과 몇몇 문화권에서 ‘신중하고 분별력 있다.’는 뜻을 나타내는 속담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움이 순박함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쉽게 교활함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들에게 지혜와 순결을 당부하시며 최선을 다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윤리와 도덕이 있어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게 합니다. 세상의 윤리 도덕은 흔히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정의가 인정을 받고 악이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의와 진리와는 아주 많이 다릅니다. 기독교가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 기독교의 의와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 모두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자리하고 있지만 세상의 윤리와 도덕은 언제나 인간의 자만심과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기독교의 의와 진리는 인간의 능력이나 자랑이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무릅 꿇는 회심과 하나님으로만 정당한 자리에 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인간의 참다운 가치와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사상은 세상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뱀 같이 지혜로워라”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열심과 충성이 이렇게 세상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함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음을 읽어 봅시다. (17~18절)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계속해서 (21~22절)을 봅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얼마나 적대적인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과 봉사를 행하면 세상이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이유와 동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내세우면 적대시 합니다. 성도의 선행과 봉사는 언제나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고 따르는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말하면 극렬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 합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에 바로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고귀한 신앙의 결단을 하면 우리의 앞에 순탄한 길이 열리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으로 착각합니다. 마치 홍해가 열리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우리 앞에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자답게 살기로 결정하고 첫걸음을 시작하면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방해를 받습니다. 마땅히 나를 돕고 내 편이 되어야 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여러분을 대적합니다.
목사들에게도 이것은 예외가 아닙니다. 일제 치하에서나 공산당 아래에서는 목사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고 전쟁 후에 목사는 굶을 것을 각오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굶는 것은 시험이 아닙니다. 제일 큰 시험은 목사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성공을 목표하도록 요구하는 요구들입니다. 이것은 신자들 모두가 은근히 요구하고 심지어 어머니와, 우리 사모님은 아니지만 목사의 아내까지 그렇습니다. 심하면 ‘당신이 기도안하고 공부하지 않으니 이 꼴이지.’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기도하지 아니하여서 십자가를 지셨고, 사도 바울은 공부를 안 해서 그렇게 고생하며 끝내 순교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감당할 일이였고 바울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였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려고 할 때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줄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서 신앙의 문제는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에 아무도 내 편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요15;18~21)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너희를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적한 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적입니다. 좋은 예로 우리 교회에서 노인들을 모시고 도와드리는 것에는 박수를 치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정신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명령임을 말하면 오히려 핍박하고 반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행위로 쉽게 세상의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오해하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신자이기는 한데 신자로 살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 때문에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저주하고 적대하여 싸워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롬12;17~21)을 봅시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세상이 우리에게 공공연하게 이유 없이 적대시하고 악하게 대합니다. 단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게 잘못한 것이 없고 세상에 대하여 봉사하며 선을 행하여 의와 진리로 다가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우리를 대적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상대에게 우리가 당한 것보다 더 악해지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악하면 더 악하고 싶고 상대를 죽이고 내가 올라서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와 싸워서 상대를 죽이는 싸움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상대를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고 그 은혜와 구원의 자리에 상대를 동참시켜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고 기도하심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비둘기의 순결함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의 것으로 세상과 더불어 싸우려고 세상에 보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으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참된 모습과 가치를 가지고 죄와 사망으로 신음하며 죽음과 멸망으로 나아가는 자들을 우리가 가진 복된 자리로 데려와야 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올라가고 상대를 이김으로 내 몫을 챙기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상대도 가지게 하고 내 것을 나누는 사람으로 보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를 밀치고 내 자리를 확보하거나 상대를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이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이며 내가 당신과 어떻게 다른가, 또 당신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고 당신의 자리가 얼마나 비극적인 자리인가, 당신이 왜 나의 자리에 와야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필요 합니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은 혼합되지 않는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엡4;21~24)입니다.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가져야 할 내용들입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함으로 지켜 나아갈 책임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할 내용은 의와 진리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이루는 것이고 이 모두는 “하나님을 따라”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목표가 어디 입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몰아내고 우리 끼리 모여 천국에 가고 행복을 누리자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복된 자리로 불러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져야하는 책임이고 먼저 은혜 받은 자로 세상에 보내지는 이유입니다.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증명하는 책임을 가진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이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하고 권세와 지위를 구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세상이 우리를 악하게 공격해 옵니다. 그것이 세상이 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맞서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자와 용서와 귀하고 복된 것을 나누는 자세로 세상 앞에 섭니다. 기독교는 역사 속의 어디에서도 힘에 힘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힘으로 맞서서 승리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우리의 변화된 모습과 세상과 구별되는 모습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승리 하였습니다. 로마의 변혁과 십자군 운동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교회가 커야하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지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며 복음 전파 사역을 맞기십니다. 여러분이 신자로 살지 못하는 핑계가 무엇입니까? 교회와 목사에게로 넘기지 마십시요. 여러분이 외면하고 핑계하며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도망친 신자의 자리를 다시 확보 하십시요. 그리고 충성하십시요. 여러분에게 승리와 기적이 평생을 함께할 것입니다.
지혜로움과 순결함의 균형
마 10:16 / 이규현 목사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파송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늘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계속해서 함께하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다닐 때에는 제자들에게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며 제자들은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을 직접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 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귀신 들린 아이를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오랫동안 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제자들도 기적을 능히 행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과 세상에서 생활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을 때에는 마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능히 승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생활하다 보면,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할 때가 많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을 하며 생각하는 것과 살면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다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과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에는 우등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삶의 현장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교회용이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을 교회 안에서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훈련받은 사람이 교회 안에 머물러있으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교회 생활을 잘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더욱 잘 하기 위해 기도하고 훈련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승리하기 위해 훈련받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듯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삶 속에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검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서로 누가 큰가 쟁론했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속으로 나아가지 않고, 교회 안에 머물러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소모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제자들에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리 가운데’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리는 강하고 매우 공격적입니다. 이리의 이빨은 굉장히 날카롭습니다. 이리는 항상 먹잇감을 찾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양은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나운 동물의 공격을 받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며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성도를 위기 가운데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신자에게 교회는 안전지대입니다. 신자들이 교회 안에 있을 때에는 위기의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향하면, 신자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점점 무신론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기독교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습니다.
노방전도, 축호전도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전도지를 쉽게 받지 않습니다.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던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매우 위험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환영하는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결같이 배타적이었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대조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좋습니까. 사람들은 교회에 있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교회 공동체는 세상으로 파송 받은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살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머무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은 험악합니다. 세상은 위험합니다. 그에 비해 양은 매우 연약합니다.
이리와 같은 악한 사람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리와 같은 악한 사람은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9~3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 이리와 같은 악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악한 사람들은 어그러진 진리와 거짓으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대신 자신을 따르게 하려고 했습니다.
교회 안팎에 이리와 같은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리 떼와 같은 마귀의 공격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사나운 이리에게 잡아먹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위험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 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위험한 일을 겪으면 예수님께서 도우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를 보내시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책임지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만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위기를 경험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할 때, 이리 가운데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지혜롭고 순결해야 합니다. 지혜와 순결, 두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합니다. 지혜로운데 순결하지 않거나, 순결한데 지혜롭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지혜와 순결, 두 가지를 다 갖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혜로운데 영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수하고 착한데 무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매우 잘 압니다. 사람들에게 속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닮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을 경험하면서 세상에 물들었습니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경험하다 보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험한 것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지혜로운 것 같고, 똑똑한 것 같지만, 순수하지 않습니다. 순수할 수 없습니다.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다 보니 영악해졌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방법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속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피해를 보더라도 우리는 속임수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속에서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자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지혜와 순결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은 세상 가운데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신자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신중하다, 분별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살면서 위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위기를 경험할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해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분별력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문제가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려운 문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살면서 위기를 경험할 때, 우리는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솔로몬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창기 두 여자가 한 아기를 데리고 와서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솔로몬은 매우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솔로몬은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왕상 3:25)”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3장 26절에 보면,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왕상 3:27)”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지혜롭게 판결했습니다. 이 재판의 핵심은 공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꾀를 사용하여 죄를 짓는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그런데 영악한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에도 머리를 씁니다. 다윗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자신의 죄를 숨기는 데 자신의 머리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꾀입니다.
오늘날 사람을 살리는 일에 머리를 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머리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에 머리를 쓰지 않고, 사람을 해치는 일에 머리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와 꾀는 다릅니다. 꾀를 쓰는 사람은 영악합니다. 꾀는 순결하지 않은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지혜가 부족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 지혜가 부족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처럼 무지(無知)한 사람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무지해집니다.
그런가 하면 지혜가 있음에도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지혜로워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계속해서 배우려고 합니다. 계속해서 지혜를 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미련합니다. 미련한 사람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올바르게 선택하지 못합니다. 잘못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로우시고 순결하십니다. 지혜의 최고 모델이십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와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6~17)”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을 질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마 22:18~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는 동전 데나리온을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동전을 가리키며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마 22:20)”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들은 그 여자를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라고 물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에 명한 대로 돌로 치라고 하시면, 사랑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보내라고 하시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질문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자를 살리셨습니다. 율법을 깨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책을 느끼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의 계략을 분별하시고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악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악인의 꾀를 능가하는 하늘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길을 아는 사람은 신나게 달려갑니다. 그러나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두렵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삶이 형통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사람은 문제가 발생한 후에도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반복됩니다.
잠언 9장 10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충만합니다.
둘째, 성도는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순결해야 합니다. 세상에 오염되지 않아야 합니다. 순수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솔직해야 합니다.
순결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경우에든 순결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하여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뱀의 지혜는 순결한 지혜가 아닙니다. 이처럼 순결하지 않은 지혜는 부정적인 일에 사용됩니다. 사탄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지혜를 사용하는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에 지혜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지혜를 사용하는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불순하게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좋은 머리를 좋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6~8절에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시위대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기록한 옥중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마음이 깨끗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악한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평강의 하나님으로 인해 밝고 정결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혜롭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마음이 순결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정결해야 합니다.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깨끗해야 합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깨끗하지 않으면, 핵심과 본질을 정확하게 볼 수 없습니다.
순결하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을 뿐 아니라 영혼이 맑아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사람은 적습니다. 욕망으로 인해 순결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혜와 순결을 갖출 때, 엄청난 힘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상 속에서 승리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오염되고 있습니다. 오염된 세상 속에서 순결한 사람을 능가할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순결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시편 12편 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영혼이 순결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거짓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제거해야 합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십니다.
세상은 점점 악해집니다. 미혹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마귀는 이단, 무신론, 다원주의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점점 더 강하게 공격합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결해지면,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교제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지혜롭고 순결하게
마 10:16-23 / 배영진 목사
오늘은 지혜롭고 순결하게, 이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복음사역 현장으로, 실습을 보내시면서 알려주신 필수지침입니다.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게 16절입니다. 오늘 문맥만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 맞지만, 이 말씀을 초대교회 성도들, 주님의 제자들이 돌려가며 읽는 시점에서 본다면 이미 교회가 로마제국 박해로 상당히 고난을 겪는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1차적으로는 열두제자에게 하신 말씀, 2차적으로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더 확장시키면 이 땅에서 예수님 제자로 복음사역을 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10장 전체가 제자들 파송하시는 말씀인데 서두에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님의 권능을 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라!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상황이 좀 심상치가 않아요. 16절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낸다. 양은 자기방어 무기가 그 몸에 하나도 없는 동물입니다. 양앞에 이리 한 마리만 나타나도 위태로운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양을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곳` 한가운데로 보낸다 그래요.
그런데 이게 어쩌다 우연히 일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이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는 일 자체가 본래 이 정도로 험악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잡혀가는 얘기, 미움받고, 고발당하고, 끌려가고, 채찍질당하고, 죽는 얘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제자들에게 적대적 고난의 상황은 예수님 자신의 얘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복음전하신 상황이 다 고난, 결국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독생자를 보내신 상황과, 오늘 예수님이 제자를 보내신 상황이 다 마찬가지, 매우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 보내실 때 주신 두가지 지침, 이 두가지 마인드를 붙들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뭐예요? 지혜롭게! 순결하게, 이것을 풀어야 합니다. 뱀같이 비둘기같이, 이것을 오늘 두가지로 설명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치밀한 전략을 짜라. 둘째는 진실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말라 이것입니다. 치밀한 전략, 첫째, 뱀같이 지혜롭게! 이것은 전략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현장에 무작정, 현장을 모른 채 가면 안된다, 그건 지혜롭지 못하다, 그건 어리석다 이것입니다. 둘째,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이것은 진실입니다. 이것이 거룩함의 정체성입니다. 복음현장에 어떤 경우라도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첫째, 치밀한 전략으로 가자. 이것이 뱀같이 지혜롭게! 라는 뜻입니다.
16절 다같이 읽어봅니다. 뱀과 같이 슬기를 가지라,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근데 하필이면 뱀이 주님의 지침에 나온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뱀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성경에 나온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합니다. 왜 뱀같이 지혜롭게 하라, 굳이? 뱀을 언급하셨을까요? 뱀은 에덴동산에서 가장 간교한 동물이라 했어요. 간교하다 다른 말로는 교활하다, 그래서 영어로 커닝이 그겁니다. 속임수에 능한 동물, 그래서 뱀이 하와를 넘어뜨리고 아담도 넘어뜨렸죠. 그렇다면 뱀의 간교를 배우라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간교하게 누군가를 사기치려면 엄청 준비를 많이 합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했을 때 얼마나 기회를 노리고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는지 몰라요. 지금도 마귀는 궤계, 계략을 꾸밉니다.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요.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마귀의 입장에서 한 성도를 넘어뜨릴 때 얼마나 전략을 치밀하게 써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마귀는 치밀합니다. 우리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가장 허름한 틈을 타서 강력하게 치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대부분 마귀의 시험에 넘어질 때, 언제 넘어졌는지도 모르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복음전할 때 치밀하게 준비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쟁을 벌일 때 아무 전략도 없이, 그냥 돌격앞으로! 하고 나가면 승리하나요?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전하는 현장을 영적 전투현장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합니다. 양이 이리소굴로 들어가면서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복음전하려고 할 때, 아무 전략도 없이, 무작정 vip에게 예수믿으라 소리치면 예수믿나요?
올해 초 우리나라 국민들 설문조사 했는데요, 현재 우리 국민들이 한국기독교, 한국교회 신뢰도가 열명중 두명, 21%에 불과합니다. 다섯명 중에 한명꼴입니다. 3년전 2020년 설문조사에는 31%였어요. 그런데 3년만에 21%로 떨어졌습니다. 우리 국민 열명중 여덟명이 교회를 불신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전하는 전략도, 뱀같이 지혜롭게 치밀하게 전략적으로 하려면 어때야 할까요? 길거리 노방전도 vs 관계전도, 뭐예요? 아무 때나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빨갛게 십자가 막대기 들고서, 회개하라, 예수 안믿으면 지옥간다! 이것은 전략적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요? 21세기 복음전도는 뱀같이 지혜롭게! 나의 주변에게 삶의 향기로 복을 전하고 복음을 전해주자 이것입니다. 내 삶에 평강과 희락이 풍기는 전도!
매질할 것이다, 18절은 너희가 나 때문에 고발도 당할 것이다. 21절 가보면 네 형제나 부모도 너희를 비난할 것이다, 22절 다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 정도의 상황입니다. 아무 대비없이 간다구요?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살면, 예수님 이름을 전하면, 다시 말해, 마지막시대로 갈수록 예수님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 이 배타적 전도는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23절, 너희는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박해를 받는다 이게 선택이 아닙니다. 보내심을 받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복음전할 때 만나게 될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대비하고 전략을 짜서 가라! 이게 뱀같이 지혜롭게입니다.
예를 들어 VIP를 만나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내 은사를 동원하고 내 기술도 동원하고 내 물질도 동원하고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갖고있었어요. 다급하면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활용합니다. 로마시민인 나를 이렇게 다룰 수 있는가? 로마시민권은 로마황제에게 직접 상소할 권리가 있었어요. 그것을 활용합니다. 이게 뱀같은 지혜입니다. 또 예를 들어 내가 가진 사회적 위치도 활용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도 활용합니다.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상담을 활용합니다. 심리치료라는 도구로 vip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신자도 상담하고 비신자도 오거든요. 물론 상담시간에 전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제가 목사인 걸 압니다. 저에게 있어 상담이라는 도구는 그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전략이죠.
때로는 vip에게 복음전하는 모든 시간에 밀고 당기는 밀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언제 마음을 여는가? 어떤 경우에 마음을 닫는가 이것을 파악합니다. 예를 들어 가족구원, 부모님에게 전도하려고 할 때도 치밀하게 타이밍을 맞춘다. 덮어놓고 아무 데나 예수천당 불신지옥! 아닙니다. 심지어 23절 핍박을 당하면 피하라고 명하십니다. 여기서 반대하면 저기로 피하라. 사도바울도 핍박받으면 그냥 나 목숨걸고 여기서 순교할래! 하고 무작정 버티지 않아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다메섹에서 성벽문으로 도망친 기록도 나옵니다. 성도들이 바울을 광주리에 담아서 성벽밑으로 내려줍니다. 그러니까 오늘 너희가 뱀같이 지혜롭게, 이것은 내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 복음전하라. 아무런 대비없이 무작정 가면 한 영혼도 건지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복음이 전하려고 사는 것 맞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치밀한 준비, 어떠한 전략? 무엇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할까?
둘째, 정체성을 버리지 말자. 이것이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16절 다시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비둘기같이 순진해라, 이러면 완전오역입니다. 순진함과 순결함은 다릅니다. 순진함이란 아기같고 아직 미숙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아이는 순진해요. 천진난만해요. 그래서 속아넘어갑니다. 유괴당하고 아이스크림 사주면 아무나 따라갑니다. 우리 예수님은 순진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둘기같은 순결함은 진실과 정직으로 성숙하게 세상에 맞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 문제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이란 세상과 다름에서 옵니다. 너희는 빛이다. 어둠에 빛을 내라, 너희는 소금이다. 네가 세상의 부패를 막으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구별된 정체성에 관한 얘기예요. 거짓과 타협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상으로 복음을 전하려면 제자의 정체성을 잃지않는 겁니다. 복음은 진리이고 생명이니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22절 보세요. 다같이 22절 읽습니다.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고 위험해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같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 뭘 하라구요? 끝까지 견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가 끝까지 순수성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나요? 중요한 것이 뭐냐? 두려움과의 싸움에서 맞서는 것입니다. 너희가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면 상황이 어떻다구요? 상황이 적대적일 것이다. 적대적 상황이 오는데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두려우면 지는 것입니다. 고난앞에서 예수님과 베드로를 보세요. 결정적 차이를 보입니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승리합니다. 베드로는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해요. 그게 뭡니까? 제자됨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일곱가지 대적을 말합니다. 다시한번 기억해볼까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핍박이나, 자 일곱가지 중 핍박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 마지막 시대는 기근과 적신이 핍박입니다. 초대교회는 말 그대로 핍박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의 심각한 문제가 배교입니다. 두려움은 배교로 갑니다. 성도에게 핍박과 채찍이 오니까, 정체성을 포기합니다. 로마제국 3백년간 핍박이 오니까 자기 믿음을 버려요. 배교는 더 이상 신앙으로 못살겠어, 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세기 마지막시대로 갈수록 주님의 제자는 무엇이 핍박이라구요? 무슨 압박을 받아요? 경제적 어려움이 압박이죠. 아 내가 주님의 제자로 살려면 정직과 진실로 가야 맞지만 이것은 너무 어려워, 더 이상 세상과 구별되어 정직하게 살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진실하게 살기를 포기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이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을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뭐냐? 성도인 나를 보고 믿지 않는 영혼이 차이를 못느끼고 그래서 거룩한 정체성이 없어져버리면 영혼구원도 안되는 것입니다. 제자됨을 포기했는데 한 영혼을 찾아가 섬기고 구원하는 일은 더군다나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구원을 그 삶에서 중단합니다. 이것이 배도와 포기의 문제예요. 여러분 이 문제가 히브리서 당시 가장 큰 주제였어요. 순결함을 포기하면 복음전도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진실함, 이것을 붙잡고 가느라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우리는 대출을 받는 상황에서 이 문제로 진통을 겪었고 결국 우리는 정체성을 지켜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옵니다. 가장 힘든 영적 싸움은 거짓과의 싸움일 것입니다. 2천년전에는 로마제국의 핍박과 대항하여 순결이나 배도냐 싸움이 일어났다면, 마지막 시대에는 세상의 거짓의 압박과 대항하여 순결이나 배도냐가 결정됩니다. 진실과 거짓,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이제 아무도 예수믿는다고 잡아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전한다고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의 길은 쉬워졌나? 2천년 전 제자의 길은 핍박과 탄압, 구금! 마지막 시대 제자의 길은 경제적 진실을 지키는가 버리는가! 이 문제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제자의 길은 진실의 영역이다 이렇게 봅니다. 내가 경제적 문제에서 정직함을 지켜낼 것인가? 이 문제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부패지수가 높은 나라입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정직과 진실이 묻힌다는 뜻입니다.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면 많은 반대를 받아요.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열두제자에게 주신 두가지 지침을 설교했습니다. 두가지 지침이 내 속에 확고해야 합니다. 첫째, 난 치밀한 전략을 짜고 있는가! 예수님 제자로 살면서 vip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삶의 원칙이다, 이걸 정해놓은 사람은, 치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것인가? 예수믿지 않은 이웃을 만났을 때, 복음을 어떻게 전하리라, 치밀한 전략입니다. 둘째, 난 제자의 정체성을 붙들고 있는가! 난 예수님 제자다 이렇게 삶의 원칙을 전했다면, 이 순결한 정체성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두가지 지침으로 살면, 조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만 잘났냐? 너만 예수 믿냐? 이런 말 합니다. 놀랍게도, 누가 반대하는가? 같이 예수믿고 교회다닌다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는 대충 신앙생활하는데 쟤는 왜 튀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지혜와 순결 두가지를 명하십니다. 순진하게~어리석게~ 이러면 안됩니다. 지혜롭게~순결하게~ 이렇게 살아야 복음이 전해지고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선교할까
마 10:16-20 / 임덕순 목사
오늘은 앞으로도 우리교회가 선교를 바로 하고 잘 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일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선교를 위해서 세워진 예수님의 몸이다”라는 인식을 갖고 오늘까지 선교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했다 할지라도 본문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고, 지혜롭게 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거나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엔 전략이 필요합니다. 누구를 보낼 것이냐, 어디로 보낼 것이냐, 무엇을 하게 할 것이냐, 어떻게 지원할 것이냐 하는 면에서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선교에는 90년도에 수립한 일곱 개의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1. 교회개척과 복음사역을 우선으로 하는 원칙,
2. 선교지에 자립의지를 심는 원칙,
3. 인재를 키우는 것을 우선 하는 원칙,
4. 팀 사역을 통하여 한 지역을 공략하는 원칙, (각자가 아닌 팀으로 사역)
5. 교회와 선교사, 선교지의 협력과 조화에 추구하는 원칙,
6. 다른 교회와 협력하여 사역하는 원칙,
7. 선교사와 평생 동역하는 원칙 등입니다.
그러면 최초의 선교사인 사도 바울도 선교를 전략적으로 실행하였을까요?
사도행전에는 선교전략이란 단어나 그에 관련한 교훈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중해 연안의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사역에서 그의 전략적 의도와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①그가 대도시 선교에 집중한 일이나, ②로마 선교를 갈망하였던 사실도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③그가 스페인 선교를 로마교회의 지원을 받아 하려했던 사실(롬15:24) 에서도 유럽선교의 전략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④그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의 선교계획을 예고하면서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는 이미 복음으로 다 편만하게 되어 더 이상 전도 대상지가 없으므로 이제는 로마행만 남아있다고 한 사실(롬15:19-20)에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의중에는 중요한 대도시에 먼저 복음을 전한 뒤에 그 주변지역의 복음화는 그 도시교회에 맡기려는 선교전략을 갖고 있었다고 보이며, 에베소, 고린도 같은 중요한 도시는 비교적 장기적으로 체제하며 집중적으로 선교를 한 것을 보아도 그 같은 전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선교전략을 세우려면 인간의 지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원리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전략에 관한 몇 가지 사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점령을 위해 열두 정탐꾼을 파견했을 때, 2명만 정확한 정보제공 했고 열명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바른 정보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눅 14:28-32에는 망대공사에 관한 주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사전 계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입니다.
적시성 또한 중요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은 전파해야 하지만, 때를 얻었을 때 전파하면 훨씬 더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생사가 불투명하고 삶이 고달팠던 6.25 이후에는 복음을 잘 받아들였지만, 평안하고 넉넉해진 지금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시대입니다.
선교전략의 목표는 오로지 가서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마28:19에,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셨는데,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것은 과정이고, 그래서 그가 말씀을 지키는 제자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역교회가 선교사역을 하고자 할 때 어떤 정책이 필요할까요?
1. 선교사는 목사만 보내야 할까요?
이제는 전문적인 기술이나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가야 하거나 그런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평신도를 발굴해서 훈련시켜 파송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에는 복음의 문이 닫히고 있는 지역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아시아의 북한, 캄보디아, 몰디브, 알바니아, 중동의 아프가니스탄, 알제리, 이란,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선교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콩고,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인도, 라오스, 말레지아, 네팔 등 상당수 국가는 비자문제로 선교사를 통제하는 나라입니다.
이들 국가들의 경우 선교의 정문은 닫혀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의 옆문은 열려있는데, 옆문을 통해 들어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옆문을 통해서만 선교사가 들어가는 지역에 13억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지역을 “창의적 접근지역”이라고 부르는데, 그 나라의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들어가서 사역을 해야 하는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가 초대교회 시절에는 일곱 교회나 있었던 성지이지만, 지금은 회교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있습니다. 터키와 이란 이라크 삼국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떠돌면서 나라를 건설하지 못하고 서럽게 살아가는 쿠르드족이 있는데, 그들은 터키 경내에만 근 2000만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김병석 이정경 평신도 부부를 쿠르드족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보냈는데, 목사나 전도사로서가 아니라 컴퓨터 기술자로 거주권을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 보다는 기술이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전하는 방법이 더 유용합니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선교하는 사람들을 자비량 선교사 혹은 텐트메이커 라고 하는데, 이들에게는 선교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정당하게 거주의 권리를 얻고 선교사 신분을 숨기기 위해 갖는 직업이므로 돈을 잘 벌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에게도 선교비를 지원해야 합니다. 자비량선교사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사도 바울도 선교비가 필요해서 교회들이 그를 지원했다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 선교사와 함께 일할 준비된 평신도 선교사도 파송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선교사 자녀를 위한 교사선교사, 행정가, 농업기술자, 의사, 간호사, 건축가 등입니다.
특히,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스타일의 선교사를 발굴해서 파송해야 합니다.
용감무쌍해서 어디 가서도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선교사,(오지의 교회설립)
미개한 지역을 돌보며 기르는 부모 같은 선교사,(열매가 더딘 아프리카 지역)
선교본부를 이끌고 신학교에서 지도자를 양성할 수 있는 학자 형 선교사,
잠든 신앙을 깨워 다시 불붙일 부흥사형 선교사,(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지역) 선교사의 사역을 잘 지원하며 행정을 감당할 수 있는 행정선교사,
그리고 성경번역, 문서 활동 등도 할 수 있는 번역 선교사 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팀이 이루어진 곳에서 팀을 강화시키는데 필요한 다양한 지원파트의 평신도 사역자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주로 목사선교사만 파송했지만 앞으로는 평신도 선교사도 그 지역에 필요하다면 보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어느 정도 훈련된 사람을 보내야 할까요?
우리 총회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MTI라는 선교훈련원 교육을 마치면 파송자격이 있다고 판단하지만, 우리교회는 되도록 어려서부터 헌신한 사람을 영입해서 긴 기간 우리교회와 마음을 같이하는 훈련을 시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 저학년 때부터 선교사로 헌신했던 사람을 찾았고, 교회 안에서 3년을 지내게 하면서 우리교회와 한 가족이 되게 하고 우리의 선교를 배우게 합니다. 선교사는 선교를 아는 목사 밑에서 자라야하며, 교회와는 가족처럼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사역하게 된 뒤에도 선교사는 교회를 믿고 교회는 선교사를 믿고 오해 없이 지속적인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는 하나님의 전권대사이면서 파송교회를 대표하는 외교관이며 적을 쳐부수러 가는 군인이 아니라 남을 형제로 삼으러 가는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래서 인상이 좋아야 하고 심성도 자비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명감과 달란트 뿐 아니라 그의 인격을 검증할 기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교사는 현지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선교지에서는 선교사들이 서로 협력하여 팀 사역을 하게 해야 합니다.
그동안은 같은 지역에 파송 받은 선교사도 이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이 교회가 하라는 일을 하고, 저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는 저 교회가 시킨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이런 특성이 있으니 이런 방법으로 선교하자고 거기에 파송받은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지도 못하고, 그 지역과 그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는 파송한 교회의 주장대로 제각기 사역을 했으니, 겉으로는 선교를 하는 것 같았으나 사실은 선교지가 훼손되는 일도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한 지역에서 같은 종족을 대상으로 선교하면서도 이 선교사가 하는 신학교가 따로 있고 저 선교사가 하는 신학교가 따로 있어서 언제까지나 하꼬방 신학교를 면치 못해서 일도 안 되었고, 서로가 시기하며 경쟁만 한 일도 많았다는 점을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픈 기억으로 갖고 있는 것은 민다나오라는 지역이 그랬습니다.
민다나오는 위험해서 그동안 선교사들이 들어가지 않았고 때 묻지 않은 지역이기에 우리교회가 김석진 정성호 선교사를 보내면서 민다나오에서 팀사역을 하도록 지도하였고 그래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다나오가 잘 된다 하니까 팀사역을 이해 못하는 교회들이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그동안 잘 되던 팀사역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참 가슴 아픕니다. 한국교회가 팀사역을 해야 선교가 된다는 것을 이해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선교는 팀으로 해야 열매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4. 선교사의 현지 관리를 위해서 현지의 선교단체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속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도 총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교단을 세우려고 간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으므로 건전한 선교사들과는 협력을 하면서 사역을 해야 합니다.
선교사가 나가있는 현지는 대부분 열악한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교통이나 통신이나 의료시설이나 안전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만일, 선교사에게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다면, 한국의 본부에서 머나 먼 그곳까지 당장에 손길을 펼 수가 없습니다. 페루나 니제르 같은 지역은 이틀 이상, 혹은 사흘 이상을 걸려야 현지에 도착할 수 있고, 여기에서 사람을 보내서 현지에 도착한다 해도 여기서 간 사람이 그곳 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수습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잘 알고 선교사 지원시스템를 갖춘 선교단체가 거기에 있다면, 그 단체에 선교사 돌보는 일을 맡겨야 하고, 그 지역을 연구했고 그 지역에서의 사역 경험을 가진 단체가 있다면 우리 선교사가 그 단체와 협력하여 효과적으로 사역하게 해야 합니다. 손영희 선교사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5. 처음부터 현지인들의 가슴에 자립의지를 심어야 합니다.
요즈음 폼으로 선교하는 교회들이 생기면서 선교지에 교회를 세우고는 자기교회 이름을 붙여 "방콕 한가람교회" "마닐라 한가람교회" "감비아 한가람교회" 식으로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선교지에 우리교회 이름을 내고 우리교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성숙한 선교의 자세라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복음을 전하여 주어서,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까지 돕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그들의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교회를 세우도록 가르치고 도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교회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자립하여 그 이웃마을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바른 선교입니다. 선교사가 세운 교회가 자립할 단계에 이르면 땅과 건물과 행정권과 모든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지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재산이 개인에게나 불건전한 단체에 넘어갈 위험이 없도록 안전장치는 해둬야 합니다. 우리가 방콕 쁘라왔짜나 교회에 건물 구입비를 보조해 주고 일부를 되갚게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잘 하는 일입니다.
과거 일부 서구선교는 선교사들이 가부장적인 보호주의와 Money mission으로 원주민 교회의 자립에 실패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선교지가 복음을 받은 지 백 수 십년 씩 되었지만 신자화율은 1%에도 못 미치고, 자립하는 교회도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지금도 선교지에 세워진 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립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돈으로 선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가 돈과 복음을 갖고 들어가면 현지인들은 누구나 복음보다는 돈을 요구합니다. 그들은 의식주조차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교사가 돈을 가지고 선교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쉽게 일이 진척되며 인기 있는 선교사가 됩니다. 본국에 보고할 일이 많아지고 계속 선교비가 몰려옵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돈 이상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기 때문에, 돈이 끊어지면 돈이 끊어짐과 동시에 사람들도 모두 떠나가 버립니다. 엄청난 물질을 쏟아 부은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이런 실례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런 선교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선교사가 가서 오직 복음만 들려주면, 처음에는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는데 일은 진척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고, 현지에서는 인기 없는 선교사가 될 것이고, 본국에 보고 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는 동안 묵묵히 복음으로 살며 참된 복음을 전하며 선교사답게 살아가면, 복음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 둘 나타날 것인데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준비한 사람입니다.
행8장에 보면, 성령은 빌립에게 인적 없는 광야 길로 가라 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했더니 거기에는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이 복음에 목말라 하면서 그 길을 오고 있었습니다. 빌립을 그길로 보내신 하나님은 거기에 복음을 들을 사람을 준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선교사가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를 보내시는 하나님은 물질을 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주라고 보내셨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은 거기서 복음에 목마른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만난 사람은 돈을 보고 온 사람도 아니거니와 쉽게 떠날 사람도 아니라 자기 민족을 위해서 헌신할 사람입니다. 그는 결국 선교사의 열정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변할 것이고, 혹시 선교사가 떠나게 될지라도 거기에는 훌륭한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사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선교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려는 선교사의 욕심과 조급함이 거대한 장애물이었고,
둘째는 그를 파송한 교회가 선교사에게 처음부터 보이는 업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언어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돈 선교를 하다 보면 선교는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선교사에게 단기 실적이나 보이는 업적을 요구하지 말고, 선교사도 단기간에 무언가 해 보이려고 하지 말고 복음으로 사는 참 선교사의 모습을 보이며 복음만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일을 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듣고 믿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선교사를 믿어주어야 하고, 무던히 참고 인내하며 묵묵히 지원해 주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6. 선교지의 교회문화는 복음적인 원칙 안에서의 수용이 필요합니다.
현지에 세워질 교회문화에 관하여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은 고치되, 교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수용하여 그들의 문화와 연결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페루의 복음적인 교회는 침례를 주는데 이것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우상종교가 되어버린 카톨릭에서 물을 뿌리는 세례를 주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나온 개신교인들은 물을 뿌리는 세례를 싫어하여서 개신교회가 침례를 주기 시작했답니다. 현지의 상황이 그렇다면 구태여 우리 식의 세례를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는 물에 잠기거나 물을 뿌리거나 방법에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에 있기 때문입니다. 침례 받은 교인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면 우리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세례 받은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니 문화 때문에 복음을 손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전할 복음에 대하여는 동정녀탄생,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재위, 재림의 복음의 뼈대를 토대로 하여, 그 위에 경건한 삶과 헌신적인 봉사를 가르쳐, 그렇게 살며 다른 지체들을 섬기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7. 선교사의 노후문제는 교회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한 시니어 선교사의 말에 의하면, “한국 선교사들의 90%가 맹자 어머니 선교사더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선교사들이 자녀교육 문제에 매달리느라고 대상자가 있는 지역에 들어가지고도 못하고 교육시설이 좋은 대도시에 옹기종기 모여서 자녀교육에만 전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 낮은 선교사가 우리교회에는 없는 것이 다행입니다. 선교사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선교사는 자녀교육을 하나님께 맡기고 이 문제에 초월해야 하지만 교회는 이 문제를 책임지려고 해야 합니다.
교육문제와 함께 노후문제도 선교사역의 발목을 잡습니다. 노후걱정 때문에 물질을 비축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사역은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선교사가 오직 선교에만 전념하다가 돌아오도록 노후 대책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것을 하고 있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총회가 이것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평생을 바쳐 오직 복음만 전해주다가 빈손으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교회는 우리를 대신하여 평생을 현지인들을 섬기고 맨손으로 돌아오는 선교사를 책임질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칭찬도 주님께만 기대하면서, 비록 더딜지라도 바른 선교를 차근차근 하는 교회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데 일조를 해야 하고, 한국교회의 선교사역에 모범을 보이며 앞장서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놀라운 약속을 받았고,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았기에 앞장서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졌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바른 선교를 감당하여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십시다.
이리 떼 속의 양 한 마리
마 10:16-20 / 이정선 목사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의 그림은 양떼 가운데 늑대 한 마리가 양의 가죽을 쓰고 숨어 있는 모습입니다. 실제로 늑대가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양떼 속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 우화, 또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 나오는 늑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나오는 늑대는 양의 탈을 쓰고 잠입할 만큼 교활합니다. 그리고 순하고 연약한 양들을 잡아먹을 만큼 포악하고 잔인합니다. 아무리 양의 숫자가 많아도 양들이 힘을 합해서 늑대를 쫓아낸다거나 자신들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양과 늑대 사이에는 그만큼 큰 힘의 불균형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양떼 속에 늑대 한 마리가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협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늑대들 속에 양 한 마리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 양이 최소한 늑대의 가죽이라도 뒤집어쓰고 있다면 얼마간이라도 숨 돌릴 틈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양은 늑대의 탈을 쓸 만큼 교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한 양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사나운 늑대들 사이에 있는 그림은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십니다. 양을 늑대들에게 보내는 것은 사지로 들여보낸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무릅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왕이 권능을 부여받고 파송을 받기 때문에 위풍당당한 정복자처럼 사람들 앞에 나타날 것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지다시피 보냄을 받았습니다. 왕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왕을 대리하는 것인데, 왜 제자들은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사지에 던져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왕 자신이 바로 그러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왕의 탄생을 기록하였는데, 그 왕은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뻔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그 왕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왕이 세상에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를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왕의 제자들 역시 왕과 같은 길을 걷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를 하시는데, 한 가지 눈에 띄는 말씀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는 것입니다. 뱀 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씀은 정서상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비호감 1순위 아닙니까? 아담을 유혹에서 범죄하게 한 것도 뱀이고, 또 사탄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비극을 초래한 원흉이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서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뱀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고 있습니다. 뭐 뱀 좋아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뱀을 보면 징그럽다는 생각을 하고 또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신 말씀이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동물들이 얼마든지 많을 터인데, 왜 하필이면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하셨을까, 고민이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지혜로운 것이 좋다지만 뱀은 좀 마땅치 않단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탄의 상징으로서의 뱀이나 또는 뱀의 간교함 같은 것을 암시하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제자들이 이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양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생존 자체가 극단적으로 위협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뱀은 생존이 지극히 위협을 받는 동물입니다. 인간으로부터 극도로 미움을 받다 보니까 자칫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운명입니다. 우리가 뉴질랜드에 살면서 한 가지 행운이라고 하면 뱀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도 살았었는데, 뱀을 만나면 몹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그 뱀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을 죽이는 것이 썩 쉬운 일이 아닙니다. 뱀은 또 도망치는 데 선수거든요. 위험을 만나면 재빨리 몸을 숨기고 도망치는 것이 뱀이 생존을 위해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씀은 위험에 처했을 때 그 위험에서 벗어날 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비록 제자들을 위험 속에 보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있다가 당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습니다만, 전에 보면 우리 한국 선교사님들의 열심이 특별해가지고 전도활동이 금지된 곳에서도 별로 조심을 하지 않고 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양이 늑대들 속에서 살려면 조심을 많이 해야지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제자들이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위험에서 살아남으려면 비둘기가 아니라 독수리처럼 모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위험에 처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본질적인 성품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련을 많이 겪고 어려운 일을 많이 당하다 보면 사람의 성품이 모질게 변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이 위험을 많이 겪는다고 성품이 모질게 변하면 곤란한 노릇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성품이 모질게 변하셨던가요? 오히려 비웃고 조롱하는 무리를 보시고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는 것이라면서 하나님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순결하라는 단어는 썩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원래의 뜻은 온순하고 해가 없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뱀처럼 재빠르고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사나워지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해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정당방위로 용납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까지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대항해서 베드로가 용감하게 칼을 빼들고 싸울 때, 예수님은 그를 말리시면서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해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까지도 말리셨습니다. 천국 복음은 칼과 폭력과 정복과 같은 힘에 의해 전파되거나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제자들이 생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누가 무엇으로 그들을 보호할 것입니까? 뱀처럼 요리저리 도망치는 것만이 유일한 그들의 생존방법이어야 합니까? 또 도망치는 것이 언제나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도망도 못 가고 붙잡힐 수도 있고, 도망치다가 붙잡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조심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제자들을 잡아다가 공회에 넘겨줄 것이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무섭지요. 우리가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는 말을 우리가 종종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무서우니까 사람을 조심하라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 사람들이란 복음에 대적하는 무리, 그래서 제자들을 잡아다가 공회에 넘기고 채찍질하는 데 한 편이 되는 사람들로 이해가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유별나게 반대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가 그 배후에 있을 수 있고, 경제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새로 일어난 기독교라는 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일단 서양의 종교로 자리를 잡은 기독교가 동양에 전해지면서 또 심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양화진에 가면 절두산 성지가 있습니다. 양화진은 원래 한강 하류에서 빼어난 경치로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를 박해했는데, 양화진에서 1만 명의 신자들의 목을 베어 언덕 아래로 던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름답던 양화진이 절두산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공산주의가 세계의 한 축을 이루면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민족 역시 그 비극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습니다. 결국 20세기 말이 되어 공산주의 블록이 와해되면서 기독교 박해도 막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슬람권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합니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고 할 만큼 서구세계와 이슬람세계가 크게 대립하면서 종교간의 분쟁이 국지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천국 복음이 이처럼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수없이 세워지게 된 것은 칼과 정복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칼과 힘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에 의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무력으로 십자가를 전파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께서 무력을 행사하는 왕으로 오셨다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뜻이 깊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즉 이 땅의 지배자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진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땅의 왕들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왕과 왕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면,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제자들은 그 왕들 앞에서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인들에게만 왕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왕이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돈도 없고 맞써 싸울 힘도 없는 모습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왕의 사절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공부도 많이 하지 못했고, 그저 호수에서 고기나 잡던 어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붙잡혀 공회 앞에 서거나 왕 앞에 끌려가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왕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세상의 왕들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순간에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공회 앞에 잡혀갔을 때 실현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셨고,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사도들이 담대하게 예수의 부활을 전하다가 공회 앞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베드로가 얼마나 담대하고 조리있게 말을 잘해버렸는지, 듣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이 무식한 갈릴리의 어부가 어떻게 이렇게 유식한 말을 잘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렇게 증명된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 산다는 것은 때때로 이리 가운데 양으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가정에서 혼자 예수를 믿으며 사는 분들, 정말 힘들게 사는 것을 봅니다. 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우리가 박해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멸시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사건들이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너무 편하게 예수 믿어서, 아무런 도전이나 박해도 없어서 우리 믿음이 오히려 나태해져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어요. 만일 오늘 예수께서 우리를 돈도 없이 칼도 없이 늑대 가운데 보내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반응을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가 늑대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만한 믿음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성령님이 말씀하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천국이 증거되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것,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우리 믿음의 분량이 그만큼 충만해지고, 늘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충만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박해를 대비하라
마 10:16-23 / 김영규 목사
신앙과 박해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고, 복된 일이고, 기쁜 일입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결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결단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아 누리는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마귀, 사탄이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입니다. 마귀는 한시적이나마 세상 종말까지 세상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을 자기의 지배 아래 두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믿지 못하게 합니다.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복귀한다면 마귀는 사생 결단을 하고 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둘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원수로 생각합니다. 비방하고, 욕합니다.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때리고, 잡아 가둡니다. 심하면 죽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소속이 다르고, 목표가 다르고, 삶의 원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일3:13)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세상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5-6) 우주 가운데 창조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우주도 하나요, 하나의 질서요, 하나의 다스림 가운데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입니다. 즉, 인류의 구주도 오직 한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삶의 목표도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을 목표로 살지만, 세상은 현세를 목표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삶의 원리로 삼지만 세상은 인간적 처세술을 원리로 삼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중시하지만 세상은 육체를 중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급을 귀하게 여기지만 세상은 인간의 상을 귀하게 여깁니다. 삶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배척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이쿠, 괜히 예수 믿기 시작했네! 그냥 되는대로 살아갈 걸!”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성도로써 당하는 모든 고난은 아주 유익합니다. 첫째로, 모든 고난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패배하는 시련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이기는 경험을 쌓게 합니다. 고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기는 경험을 모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는 거! 얼마나 짜릿하고 감격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학습을 통해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4:4)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둘째로, 모든 고난은 우리를 성숙시켜 줍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알게 되는 학습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관념적인 하나님에서 실존적인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야곱은 고난을 통해서 신령한 신자로 성숙되었습니다. 요셉은 고난을 통해서 젊은 나이에 지도자로 성숙되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시련을 통해서 민족의 구원자로 성장했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성숙도 없습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사48:10)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셋째로, 고난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박해를 복음 전파의 획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오늘 말씀 18절에도 박해를 통해서 주님의 증거가 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박해할수록 크게 일어난 것이 기독교의 逆說이요,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역사상 박해가 많았던 곳일수록 복음 전파도 획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대박해가 일어나자 복음은 위축되지 않고 더욱 맹렬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투옥, 스데반 집사의 순교, 야고보 사도의 순교가 일어나는 동안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시리아로 확산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 시대에 오히려 복음은 더 퍼졌습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은 신앙적 결단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왕궁의 시종에서 황제의 가족들까지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상황이었습니다. 대 박해 시대를 지나면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 하여 반 세기 이상 기독교를 탄압했습니다. 교회가 폐쇄되고 성경을 없앴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살아 있고 오히려 교회는 공산당을 정복했습니다. 박해는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박해는 오히려 복음 전파의 특별한 기회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교회 가는 것 반대하고, 성경을 찢고 불태우던 집안이 송두리 째로 뒤집어져 예수 쟁이들이 된 가정들이 많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박해의 유형들
박해는 매우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박해는 몇 가지 유형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로, 종교 집단의 박해입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공회와 회당이 박해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공회는 유대 사회 최고의 종교기구입니다. 각 지파의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인 일종의 대표기구입니다. 중요한 종교상 교리를 정하기도 하고, 사법적인 재판을 하기도 합니다. 회당이란 유대교의 집회 장소입니다. 회당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교육이 이루어집니다. 공회와 회당이 기독교 박해의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힙니다.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메시야를 전한다고 박해합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입니다. 각자 자신의 신앙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서로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면 각자의 생각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혹시 상대를 설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때리고, 가두고, 죽이는 것은 越權行爲입니다.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들보다는 뭔가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박해합니다. 우상과 미신을 믿는 사람일수록 다른 신앙에 대한 반발이 심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중세 로마 교회는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火刑에 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둘째는 정치적인 탄압입니다.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8절) 총독들과 임금들이 박해자가 됩니다. 빌라도 총독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은 죄 없는 바울을 묶어서 로마로 보냈습니다. 헤롯 왕가는 한 세기 동안 기독교를 박해 했습니다. 대 헤롯은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 마을의 유아를 모두 학살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 사도의 목을 베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사도 바울을 심문했습니다. 정치권력은 교회를 가장 골치 아픈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잘 말을 듣지도 않고, 순순히 따르지도 않고, 가끔 쓴 소리나 하고! 그래서 히틀러나, 스탈린은 교회를 탄압했습니다. 잘못된 권력자일수록 신앙을 탄압합니다. 아합은 잘못을 지적하는 엘리야를 죽이려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와 물 없는 우물에 집어넣었습니다. 오늘의 세계도 마찬가집니다. 비리가 많고 잘못이 많은 정부일수록 교묘히 반대자들을 탄압합니다. 나는 우리 정부가 교회를 탄압하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쩡했던 통치자가 없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쩡했던 나라가 없습니다.
셋째는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 의한 박해입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21절) 부모, 자식, 형제지간에도 박해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소련에 거주하는 음악가 한 분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6.25때 월북했다가 실망한 나머지 소련으로 탈출하여 소련에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 그의 한 형님은 공산주의자요 한 형님은 자본주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사상 때문에 형제들이 원수가 되었습니다. 신앙은 사상보다도 더욱 사람을 원수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사를 보면 신구교도 사이에 엄청난 전쟁이 있었습니다. 부모 형제, 동족을 가리지 않고 신앙 때문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가족들의 반대입니다. 사탄은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합니다.
넷째는 마음의 미움과 시기심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22절)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미움을 받게 되리라고 예고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싫어합니다. 왜 한국의 대중 정서는 불교에 호의적이고, 기독교에 적대적일까요? 국민적 정서가 그래요.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성경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 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싫어합니다. “기독교는 외래 종교이고, 불교는 토속 종교다.” 드라마에서 예배 장면이 나오면 특정 종교 선전이라고 비난하지만 염불 장면이 나오는 것에 대해서 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기여한 부분은 거의 언급이 없고, 잘못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반면에 무당 점쟁이 때문에 입는 폐해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합니다.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박해를 이기는 방법
박해자들을 이리라 한다면 제자들은 양입니다. 양과 이리의 싸움은 결과가 뻔합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양으로써 이리를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양이 이리를 이길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17절)
첫째로, 뱀과 같은 지혜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만 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잠30:24-28) 약육강식이라고 약한 존재는 다 망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는 족속은 약한 것들입니다. 개미, 지렁이, 잠자리! 반대로 멸종당하는 것은 강한 짐승들입니다. 사자, 호랑이, 코끼리, 하마, 고래, 독수리...등등. 사람도 그래요. 아버지가 마피아 강도짓 해서 손자 대까지 번성한 놈이 없습니다. 독재자 권력자 후손들이 다 망했어요. 요즘 국제 정세는 강대국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큰 나라는 살고 작은 나라는 죽는다! 요즘 인터넷에 보면 조국을 비하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아요.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국적을 포기합니다. 여차하면 튀겠다는 뜻입니다. 미국에 붙어야 된다는 사람, 중국에 붙어야 된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다 틀려먹은 생각입니다. 꼭 강대국에 붙어야만 나라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구 6000만 명이 작아요? 경제 규모 세계 12위의 국가가 작다면 더 작은 나라들은 다 망해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세계를 보세요. 여전히 유대인은 잘 삽니다.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저는 스위스 사람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는 그 나라의 裕福한 삶에 놀랍니다. 어디를 가나 그림 같은 경치가 있습니다. 동화 속의 나라 같은 도시와 농촌이 있습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훨씬 넘습니다. 둘째는 국가적 환경이 생각만큼 좋지만은 않다는 점에 놀랍니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영토가 넓은 것도 아닙니다. 인구가 많은 나라도 아닙니다. 4만 평방 km에 인구는 700만 명입니다. 공용 언어도 세 가지나 됩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통일과 독립을 유지해 왔습니다. 셋째는 그들의 축복이 국민의 피나는 노력과 지혜의 결과란 점에 대해서 놀랍니다. 어느 도시에 갔더니 스위스를 상징하는 그림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화살에 맞에 고통받는 獅子상입니다. 그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전 국민이 군대가 되어 싸웠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전 국민이 군대입니다. 그들은 산과 들과 호수를 잘 가꾸어서 세계적인 관광과 휴양지로 만들었습니다. 개인의 집이나 창고 하나를 지어도 주변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아름답고 깨끗하게 짓습니다. 농경지나 산이나 계곡이나 다 정원처럼 가꾸었습니다. 관광객들이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옵니다. 그런가 하면 강대국과 강대국 사이에서 영세 중립을 표방하여 전쟁이 끼어들지 않고 버티었습니다. 은행을 발전시켜서 세계의 돈을 저장하는 금고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서 각종 세계 기구들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회의를 위해서 찾아오는 손님들만 해도 수두룩 합니다. 이런 손님들은 주로 각국의 고위급 사람들입니다. 제약이나 시계와 같은 정밀한 기술 산업을 발전시켜서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작다고 망하는 게 아닙니다. 약하다고 생존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뱀은 성경에서 마귀의 상징입니다. 그렇지만 선악을 떠나서 그 지혜를 배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지혜가 필요할까요? 주님의 말씀을 보세요. 첫째는 성령을 의지하는 지혜입니다. 박해자들 앞에서 당황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할 말을 주십니다. 사람의 능력을 과신하다가 더 큰 화를 당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지혜요, 전도의 지혜요, 삶의 지혜입니다. 둘째는 끝까지 견디는 인내의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이 미워하고, 가까운 부모형제 자녀가 대적이 된다 해도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참고 견디면 주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매를 맞을지라도 하나님이 싸매어 주십니다. 옥에 갇힐지라도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행12:5) 셋째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는 지혜입니다. 부딪쳐 싸우다가 전도의 기회를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하는 게 다음을 위해서 좋습니다. 이 동네에서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가라고 하십니다. 좌충우돌 부딪치지 말고, 될 수 있으면 마찰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둘째로, 이리를 이기는 두 번째 비결은 비둘기 같은 순결입니다. 지혜가 이리를 대적하는 비결이라면, 순결은 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잘못된 교육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녀를 강하게 키우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강한 겁니까? 아무한테나 대드는 게 강한 겁니까? 공중도덕도 없고, 위아래도 없이, 氣만 살아서 펄펄 뛰면 강한 겁니까? 태권도 배워서 싸움질 잘하면 강한 겁니까? 제발 정신 차리세요. 진정한 강함은 정직하고 깨끗한 삶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세요. 요즘 공직자들 보세요. 지식이 없고, 권세가 없어서 뻥뻥 나가떨어집니까? 다 순결하지 못해서 나가 떨어집니다. 순결은 하나님의 인격이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순결 앞에 죄는 자리 잡지 못합니다. 영적 싸움은 순결한 자가 이깁니다. 여리고 성에서 크게 승리한 이스라엘은 아이성에서 대패했습니다. 아간의 도적질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여리고 평지에서 준비한 것은 전쟁 무기가 아닙니다. 첫째는 할례요(수5:2-9), 둘째는 유월절입니다.(수5:10-11) 할례는 신약의 세례와 같고, 유월절은 성찬과 같습니다. 세례와 성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성결이 가나안 전쟁의 무기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깨끗해야 박해자를 이깁니다. 박해자들은 언제나 신자들에게서 죄를 찾아내고 허물을 찾아내려고 발버둥 칩니다. 마귀는 욥을 고발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신자들의 허물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순결을 무기로 삼아야 합니다. 양심이 순결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순결해야 합니다. 물질생활이 순결해야 합니다. 대인관계가 순결해야 합니다. 국법과 사회적 규칙을 순결한 마음으로 지켜야 됩니다. 누가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성도는 박해자를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박해는 근본적으로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육적인 무기가 아닌 영적 무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육적인 자격이 아닌 영적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첫째는 마귀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함이요, 둘째는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순결로써 악한 세상을 이겨가는 여러분 도시기를 축원합니다.
박해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박해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박해를 당하는 것은 필연적 귀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마귀가 싫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싫어해요. 그래서 우리를 박해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박해는 반드시 이깁니다. 패배하는 박해는 없어요. 또한, 박해를 통해서 신앙이 성숙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박해를 획기적인 전도의 획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박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당해야 됩니다. 종교적인 박해, 정치적인 박해, 가까운 사람들의 박해, 모든 사람에게 까닭 없이 미움을 당하는 박해 등등, 이 모든 박해를 이겨야 합니다. 이 시대에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탄압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도와 박해자들의 관계는 양과 이리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양은 순결로 이리를 이깁니다. 허물로 마귀에게 책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순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필경 이깁니다.
박해는 결코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23절) 제자들이 이스라엘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다시 다가오셨습니다. 박해는 언젠가 끝이 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마귀를 심판하고,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날이 옵니다.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견디어야 합니다. 필경 주님이 박해 받는 사람들을 건져주십니다. 참고 견디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지혜와 순결
마 10:16-23 / 안병호 목사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10:16)
본문의 문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보내신 내용이다. 예수님은 9장 마지막 부분에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군을 보내어 주소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10장에서 계속 추수할 일군으로서 12사도를 부르시고 보내신 내용을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들이 가야할 세상은 이리 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이요 그의 제자들은 그들에게 잡혀 먹기 쉬운 어린양과 같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런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이와 같은 순결과 지혜로 살 때 아무리 어려운 이리 때와 같은 사나운 사람들 사이에도 능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와 순결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지혜 없는 순결은 무능력함이요, 순결 없는 지혜는 사악함이다. 세상을 이길 그리스도는 지혜와 순결이 항상 동행해야한다. 이리가운데서 사나운 이리들을 양순한 어린양으로 변화 시키는 일은 지혜와 순결이 항상 함께 해야 한다. 오늘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으로 지혜와 순결의 조화의 비결을 다음 과 같이 네 가지로 말한다. 첫째, 사람을 조심하라. 둘째, 모든 기회를 복음 증거의 기회로 삼으라. 셋째, 염려하지 말라. 넷째, 인내하라.
Ⅰ. 사람을 조심하라
10:17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사람을 조심하라. 이것은 이리와 같은 나쁜 마음을 가지고 어린 양을 헤치고자 하는 사람을 주의 하라는 말이다.
첫째, 사람은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세상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경우가 많이 있다. 물론 우리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믿어 주어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믿어 주는 것이지 그 사람 자신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무조건 믿다가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분은 교회 장로니까 믿을 만 하겠지 하고 돈을 빌려 주었다가 많은 돈을 뗀 사람이 있다. 그러나 장로라고 해서 집사라고해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무조건 사람을 믿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라고 믿기 쉬운데 전문가도 믿을 수 없다. 방수 전문가라고 아무리 자기를 주장하고 선전해도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엘리트 의사들이 모인 서울 대학 병원도 오진 율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사람 자체는 얼마나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지 모른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호흡이 코에 있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무조건 믿고 모든 것을 다 맡기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credulous라고 한다. 문자적으로는 참 착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실제적인 의미는 바보라는 말이다. 착해서 사람을 무조건 믿어 주는데 성경적으로 보면 이것은 바보라는 뜻이다.
둘째, 이유 없이 사람을 노하게 하지 말라.
사람을 맹목적으로 믿지 말라고 하니까 오해를 해서 무조건 사람은 의심을 해 보아야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한 것이 아니고 사람은 본래 불완전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을 항상 의심한다거나 불신하면 이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것이지 실수나 허물을 찾아내서 공격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인간을 믿지 말라는 말 속에는 어쩌면 인간은 이처럼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생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하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항상 사람의 약점만을 꼬집고 건드림으로서 사람을 화나게 잘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허물이 많고 약점이 많아도 사람은 또한 훌륭한 점이 많이 있는 것이다. 전혀 약점과 허물만 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혀 완전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약점을 보는데 빠르지 말고 좋은 점을 찾아서 한두 가지 훌륭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해 주고 약점은 덮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사람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책잡고자 하는 말의 올가미에 빠지지 말고 합당한 대답을 하도록 기도하라(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항상 바리새인들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지혜롭게 잘 피하는 대답을 하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사람을 돌로 쳐야 되는가 치지 말아야 되는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자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다 물러 갔다고 하였다.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가? 우리가 전도하고자 할 때 아주 공격적인 사람을 많이 만난다. 그런 사람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지혜로운 대답을 하지 못하면 낭패를 보기 마련이다.
넷째, 책잡힐 일을 하지 말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가능한 한 믿지 않는 자에게 책책 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말한다든가, 상스런 말을 한다든가, 너무 인색하다든가, 싸움질을 한다든다지 도덕적으로 흠을 보이면 전도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서도 전도한다고 하면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 짓인지 모른다. 우리의 몸가짐 마음가짐을 매우 신중히 해야 한다.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너무 책잡힐 일을 많이 해서 복음 전하는데 큰 방해가 되고 있다.
내가 학생 시절에 아주 똑똑하고 잘생기고 설교 잘하는 한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을 울릴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런데 한번은 학생들 집회를 통해 로마서 강의를 얼마나 은혜 스럽게 했던지 많은 학생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사경회를 마치고 술을 잔뜩 마시고는 추태를 부리다가 얼마나 동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얼마나 큰 실망을 했는지 은혜 받은 학생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좀 부족할지라도 우리의 행실이 착하면 언젠가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Ⅱ. 모든 기회를 복음 증거 하는 기회로 삼으라.
앞으로 제자들이 당하게 될 위험에 대해서 말한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17) 공회는 유대인의 초고 법정이다. 여기서 죄인으로 판결을 받으면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한다.
18절의 말씀을 보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이리 때와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나의 원수로 생각하지 말고 그들도 나의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요 순결이다.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능력을 덧입도록 한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 이와 같은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 졌다.
바울은 기독교도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가장 사랑스러운 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벨릭스 총독에게 복음을 증거 하였다. 현재는 이리 때와 같이 양을 잡아먹기 위하여 사납게 달려든 사람이라 할지라도 원수 시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위대한 신자가 될 수 있다. 지혜 있고, 순결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방어적인 태도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Ⅲ. 염려하지 말라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10:19-20)
법정에 끌려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총독들이나 왕이나 재판관 앞에서 말한다든가 변명하는 일은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언제나 염려가 머리 속에 들어오면 즉각 두려움을 버리라고 하셨다. 산상 수훈에서 염려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하실 뿐 아니라 염려가 시작될 때 바로 염려를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다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은 그 제자들이 총독들과 임금 들 앞에 끌려 갈 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왜냐 하면 성령님께서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아무리 원수들이 두려운 존재일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몸을 죽일지는 몰라도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핍박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매우 겸손한 마음을 갖기 때문에 지혜롭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때문에 더욱 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염려나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의 총독은 물론, 유대 왕 심지어 로마의 황제까지도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들 앞에 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 감옥에서는 백부장들에게 까지 복음을 전했다. 참 지혜와 순결은 큰 용기를 갖게 한다. 아무리 세상에서 큰 소리를 많이 쳐도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사건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염려한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다. 지혜란 단순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에도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이다.
Ⅳ. 인내하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0:21)
예수 믿는 사람은 가족가운데서도 분열과 갈등이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증오심 때문이다. 믿지 않는 가족이 믿는 가족을 죽는데 넘겨준다고 하였다. 결코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을 죽는데 넘겨 준 일이 없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0:22)
이렇게 미움을 받는 자는 사도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란 문자 그대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한다. 계급, 지위, 민족, 성, 나이 구별 없이.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이와 같은 핍박의 기간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충성 한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지혜로운 자는 끝까지 견뎌내는 자이다. 도중에 포기하는 자는 참으로 지혜롭지 못한 자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계실 때 죽기까지 핍박이 있었다. 교회도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아직 낮이니 일하도록 하라. 그들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라. 인내가 있는 사람은 결코 무슨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참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물러 설 줄도 알아야한다. 23절을 보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 23)
복음을 거절한 자들을 계속 붙들고 있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이나 베드로도 거역하는 사람들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 한 사람이 있으면 잠시 동안 피하는 것도 지혜이다. 무조건 사람만 피해 다니라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한걸음 물러서서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이다. 예수님도 자기 고향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물러서는 것을 본다.
우리가 끝까지 돕는다고 고의적으로 거역한 사람에게 우리의 시간과 정력만을 다 쏟을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해 주고 아무리 도와주어도 믿을 생각이 없고 이기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경우에는 마음이 아프지만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많은 시간을 내서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쳐 주고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많이 도와주지만 오히려 교회를 대적하고 교회를 욕하고 떠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그러나 깨끗이 떠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 주님도 그런 아픔을 많이 당하셨다. 우리 주님이 다 갚아 주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시면서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결코 쉽고 안이하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와 순결로 살아간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서도 사나운 이리 때와 같은 사람들을 양순한 양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 시켜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순결은 사나운 이리 때들을 온순한 양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무기이다. 지혜와 순결이란 사람에 대해서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무조건 믿어도 안 되고 무조건 외면해도 안 되고 아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대하지 말고 언제나 복음을 증거 함으로 예수님을 알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셋째로 두려움이나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움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넷째로 끝까지 인내함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는 다만 충성스럽게 봉사해야 한다. 그것이 최고의 지혜다. 이 의미를 잘 알고 삶에서 실천하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승리하면 축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마 10:16-23 / 박지온 목사
오늘 말씀에 제목을 "염려치 말라!"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성경 속에서 메시지의 내용이 오늘 '염려치 말라' 지난주에 또 뭐라 그랬습니까? '권능을 주신다!' 그 다음 또 뭡니까? '무서워 말라!' 전부 이런 내용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계속 염려하지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권능을 주신다!' 이런 말씀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느냐? 그러고 볼 때에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아마 우리 교인들이, 아마 굉장히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걱정을 하는가 보다! 아니 우리 교인들이 아니고, 이 땅에 아마 그런가 보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 지금 현재 이 땅에, 쉽게 말해서 염려할 수밖에 없고, 걱정할 수밖에 없고, 무서워 할 수밖에 없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이런 것이 지금 이 땅에 현실적인 환경이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10장 18절에 보면,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 10:19)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염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땅입니다.
특별히 이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의 주변 환경이 무서워지고, 염려할 수밖에 없고, 어려운 그런 환경이 올 수 있다는 것이 아니고, 당연하게 그런 환경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대 전제가 안 되면 여러분 살아 남지를 못해요. 신앙 생활하는 자체가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먼저 이 시간에 좀 인정을 해야 될 것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뭐 사건이 생기면,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아, 올 것이 왔구나! 당연하구나!' 인정을 하라! 이겁니다. 먼저! 먼저 이 환경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16절 보면,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6절 다같이 시작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아멘! '내가 너희를'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과 저입니다. 복음 들고 세계 복음화 해야 될 일꾼들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뭐라 그랬어요? '양을 이리 가운에 보냄과 같도다!' 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읽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도저히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오돌오돌 떨고 살아야 돼요. 지금 한번 보세요. 이리 라는 것은 늑대 아닙니까! 늑대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잘 못 보는데 뭐냐하면, 이게 떼로 몰려다닙니다.
여러분 아마 영화나 이런 것을 통해서 봤죠. 특별히 저 뭐 러시아나, 저 벌판 이런 황무지 같은 데는 이런 늑대들이 떼로 몰려다니죠. 그래서 제가 "닥터 지바고" 봤는가... 한번 보면서 뭐냐하면, 그 늑대 때가 그냥 떼로 몰려오는 겁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막 몰려옵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세요. 그 가운데 양을 한 마리 던졌다! 늑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또 양입니다. 어떻게 되겠어요. 이건 뭐 염려한다! 근심한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공포에 오돌오돌 떨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이와 같은 환경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리 가운데 양이 한 마리 들어갔다! 그건 뭐 그냥 금방 짖어져 죽는 거죠. 아마 뼈다귀도 안 남고 죽을 겁니다. 그런데 살고 있다! 그건 기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예수 믿고, 예수는 그리스도 시다! 그러고, 송현 교회 교인이다! 그러고, 주일날 버젓이 성경찬송 들고 오는 것은, 이건 기적입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뼈다귀도 안 남고 다 사라져야 되는데, 이게 지금현재, 우리가 여기에 살고 있다! 우리가 현재 믿음가지고 교회 모이고 있다! 찬송 부르고 있다! 이게 지금 기적입니다. 왜? 이런 기적이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시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적이다!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까지 왔다! 이것은 기적이지, 인간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혹시 처음 오신 분들이 있습니까! 어쩌다가 여기 왔습니까! 될 수가 없어요. 아마 여기 오기까지 지난 과거를 보세요. 도저히 올 수 없는 자들일 겁니다. 예수라 그러면 이를 갈고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건 기적이지, 그냥 나오는 문제들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 속에서 또 한가지 절대적인 전재가 되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예수 믿고,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없다!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이리 속에 양이 살아간다! 그건 뭐 엄청난 기적이죠. 도움이라는 어떤 그런 배경이 없으면 가능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강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인도 속에서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예수 믿고 산다! 그런 강력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이게 안 되면 우리는 '예수 믿고 산다! 뭐 세계복음화다!' 하기야 예수 믿고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세계복음화 한다고 전도하러 어디 나갑니까! 여러분 감히 전도하러 나간다는 사실자체가 이게 기적 아닙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이 축복과 역사가 지금 우리 속에 사실적으로 누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누린다!' 그러니까, 누리는 것이 나하고 상관없이 보일는지 모르지 만은, 이곳에 왔다는 자체가 여러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엄청난 누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강조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이제 전제를 했습니다. 위험이 오고 고통이 올 때에, 또 문제가 오고 힘든 일이 생길 때에 왜 이런 일이 오느냐? '당연하다!'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하다! 이걸 확실히 인식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 인지를 해야 돼요. 올 때에 왜 왔느냐? 올게 왔는 것이지! 그 당연하게 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못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도움을 믿지 않을 때에 당연히 오는 것이지, 거기에 당연히 사건이 생기지, 우리는 순간만 고개 돌려도, 당연히 문제와 사건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 신앙의 체질이 가득 차 가지고, 뭐 한순간입니다. 늘 불 신앙하고 살아가는데,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 수준과 상관없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 다른 게 없거든요.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바로 인식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 것이 왔구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 온 만큼 자연스럽게 이것이 인식이 되고, 인지가 되면 기대가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장해 주실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왔다! 그럴 때에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결이 되어 나갈 것인가? 기대가 되는 것이죠. 이런 어떤 배경들이 바로 이해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염려치 말라!' 그랬을 때에 염려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또 그런 문제가 왔을 때에 올 것이 왔구나! 그러면서 당황하지 말라! '당황하지 말라! 조급하지 말라! 정신병이 왔다! 육체에 병이 왔다!' 올 것이 왔습니다.
지금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뭔가 병 안 들고 사는 것이지, 조그마한 바이러스 하나만 들어와도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 아닙니까! 지난, 제가 말씀 드린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우리 어떤 목사님, 다락방에서 주로 합숙훈련을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갑자기 쓰러졌어요. 밤중에 막 빙빙 빙빙 돌아가 정신이 없어 가지고 밤중에 응급실에 갔어요. 뭐 큰 병인가 싶어서 그 가보니까, 응급실에 가서 진찰한 결과 바이러스가, 감기 바이러스가 어디 있느냐? 여기 달팽이관에 침범을 했어요. 그러니까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조그마한 게 들어와도 그런데 이 주변에는, 우리 주변에는 막 온통 바이러스 투성이고 병균 투성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살고 있거든요. 무슨 병이 걸렸다! 무슨 사건이 생겼다! 올게 왔구나! 손 한번 안 씻으니까 왔다! 그 문제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실수해도 들어올 수밖에 없는 환경이 지금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을 아마 확실하게 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것이 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올게 왔다!' 그러면 또 하나님께서 이 오는 것을 통해서 나와 여러분에게 계획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뭐냐하면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 오고,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확실한 인도만 붙잡게 되면 뭐가 없어지느냐? 조급하고, 당황하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여러분 정신병에서 가장문제 되는 것이 뭐냐하면, 조급해지는 겁니다. 막 다급해지고... 제가 늘 그 저녁 예배 때마다 조금 이 치유에 대한 문제를 말씀을 드리면서, 어떤 그 뭔가, 이게 정신적인 문제가 딱 마음에 올 때에, 제일 내 심령을 답답하게 만들고, 이걸 급증과 이 뭔가 증폭해 주는 것이 뭐냐하면, 조급함입니다. 막 답답하게 느껴져요. 답답해도 '답답해지는구나!' 그러면서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게 되는 것,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면 평안해져 버려요.
그냥! 큰일났구나! 왜 이러느냐! 나만 왜 이러느냐? 나한테만 이런 문제 생기느냐? 원망이 나오고, 불평이 나오고, 그러면 더 죽어 버려요. 그런다고 해서 유익이 되는 것이, 요만큼도 없거든요. 내게 사건과 일이 일어나면, '올 것이 왔구나!'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지금까지 늦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서 나와 내 가정과 우리에게 어떤 계획을 이루실 것인가? 기다리자!' 그러면 치료될 것은 치료되고, 지나갈 것은 지나가고, 그렇잖아요. 감기 걸렸다! 시간 되면 나가는 겁니다. 막 빨리 나으려고 약 먹고 하면 더 지쳐요. 그냥, 그냥 나가는 겁니다. 받아합시다. "때가 되면 나갈지어다!" 때가 되면 나가요. 그러면 슬프면 슬픈 데로, 아프면 아픈 데로, 오직 한번 약속 딱 잡고 바라보면, 때가되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사실이 확인될 수밖에 없는 축복을 이미 여러분과 제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10장 19절 말씀 보면요.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많은 설명을 안 해도 이게 여러분 다 해결된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왜 염려치 말고, 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렇게 느긋하다 못해 평안히 살수밖에 없는 삶이 누려져야 되느냐?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에 나타난 말씀 속에서, 엄청난 축복의 말씀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한 주간뿐만 아니라, 여러분 평생에 계속 될 것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늘 확인해야 될 것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게 확인되는 만큼 뭐가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손에 내 자신을 의뢰할 수가 잇습니다. 맡길 수가 있습니다. 맡기는 만큼 누구의 인도를 받습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너의 장래의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리라!' 잠언 서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맡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도 받지 못하는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이 믿음이 우리 자신 속에, 사실적으로 이해가 되는 때에, 구체적인 누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5장 10절, 13절에 보면 분명히 말씀했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지금까지 이 말씀을 정상적으로 말씀을 통해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 약점입니다. 신비적으로 받아 드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이죠. 말하자면 체험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식을 하려고 그러고 덤벼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체험적으로 이 체험을 시켜서 하나님의 자녀라 인식시키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주로 뭐냐하면, 옛날 과거에 신비적인 배경이고, 이것이 또 더 깊이 들어가면 종교적인 배경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그냥 어떤 체험으로, 어떤 노력을 통해서, 기도를 많이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여러분과 제게 생각한번 바꾸어 버리면 돼요. 그리고 뭔가 자세만, 방향만 바꾸어 버리면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받아합시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이 엄청난 변화를 주시는데, 그 말씀, 그 약속을 믿고, 영접하고, 내 안에 받아들일 때에, 성경은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그랬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기도 많이 했다!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뭐 방언 백 번, 천 번해도 이상한 사람은 많았는데, 이제 그런 것과 상관없이 약속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내가 영접했더니,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 그렇게 말씀한 것이 성경에 분명한 말씀입니다. 이 확신이 사실적으로 있어야 되죠.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뭐라 그랬어요? '생명이 없어요.' 백 번, 천 번 체험했다! 야단쳐도 아들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뭐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게, 뭐 희한하게, 뭐 또 생긴 것이 뭐 같이 이상하게 생겼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속에 있을 때에 그에게는 뭐가 있다 그랬습니까? 생명이 있다!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뭐 자꾸 것 붙잡고, 다른 어떤 이상한 현상들, 어떤 일어나는 징조들 붙잡으려고 하지 마세요. 내게 징조가 일어났다, 없다! 상관없습니다. 지금 내게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그래서 그 지난 수요일 날 메시지 들어보니까, 그러더라 구요. 미국에 목사님 손자가 있고, 손녀가 있는데, 큰놈한테는, 손자한테는 '예수님 어디 계시냐?' 그러니까, 가슴을 두드리고 그 밑에 이제 난 딸은 얼마 안되죠. 손녀한테는 '예수님 어디 계시냐?' 그러니까 배꼽을 두드려요. 그건 그들의 수준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다 큰놈이, 내 아들이 '예수님 어디 계시냐?' 그랬더니 가슴을 두드리면, 그건 약간 미친놈이죠.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 말씀을 붙잡고 내 안에, 그리고 순간 우리가 희미하고 연약할 때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오시옵소서' 내가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뭐로? 권세를 주셨다! 누가 말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약속입니다. 절대로 한번 약속하시면 변경치 아니하시고, 우주는 혹시 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 절대로 변치 않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보증으로 우주의 삼라만상에 법칙을 주었고, 그 법칙은 지금까지 바꾸어지지를 않습니다. 여름이 올 때에 겨울이 오는 법이 없어요. 여러분은 여름에 눈이 펑펑 옵니까! 그럴 수가 없어요. 이제 앞으로 말세가 되면, 그럴 증조가 나올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주님이 오실 증거로... 그러나 지금까지 그런 게 없어요. 우리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된 역사, 변치 않는 하나님의 역사로 분명히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사실을 사실적으로 붙잡으면 됩니다.
혹시 마음에 염려 근심이 있습니까? 먼저 이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내 안에 오시옵소서! 내 안에 예수께서 오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하는 이때에 중요한 것이, 오늘 여기에 나타난 말씀 배경이 뭐라 그랬습니까? '네가 입으로 말할 때에 염려하지 말라! 어렵고 힘들고 공경에 처했을 때에 변명하려고, 뭔가 말 잘하려고 생각지 말라!' 왜? 네게 말하게 하는 이는 너희 하나님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랬거든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에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께서 오신다!' 그랬습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임재가 여러분 속에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늘 하라 안 그럽니까! 그 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셨습니다. 임재라 그랬습니다. 이걸 가지고, '내주 하신다!' 그랬습니다. 성령은 한번 오셨다가 가는 법이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왜 자꾸 걱정합니까! 갔는가 싶어서 걱정하고, 떠났는가 싶어서 걱정하고, 하나님이 안 도와줄까 싶어서 걱정하고, '염려치 말라!' 그랬습니다. 한번 오시면 영원히 여러분과 저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여기에 말씀해 주신 것이 뭐냐하면,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염려가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를 할 수밖에 없고, 나올 수밖에 없어요. 자꾸 나오니까, 염려하지 말라! 그랬거든요. 아마 여러분 가정 생활, 사회생활, 직장 생활하면서 조금만 불 신앙으로 눈 돌리면, 전부 염려 투성이 입니다. 저는 신문을 보다가 자꾸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와서 조금만 이상한, 불 신앙하면 자꾸 이상한 말이 나옵니다. 염려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어요. 자식을 봐도, 이웃을 봐도, 그 다음에 아내를 봐도, 남편을 봐도, 그 나오는 것은 조금만 불 신앙하면, 전부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환경이요. 그런 상황에 대한 사실을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염려가 나왔을 때에 염려하지 말라는 이유 속에는, 염려가 나올 때마다 뭘 해야 됩니까? 그 염려를 하나님께라!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맡겨라! 네가 할 이유가 없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도라 그랬어요. 기도라 그랬습니다. 염려가 나올 때마다 그 염려를 금방 뭘 해야 됩니까? 기도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맡겨라! 기도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많은 말씀을 했죠. 특별히 우리 무시기도, 정시기도! 정시기도는 리듬을 타는 것이다! 뭐 그런 말씀을 했는데, 나는 정시기도는 하나님과 방향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봅니다. 그 다음에 무시기도는 하나님과 방향 맞춘 사실을 확인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현재 하나님과 방향이 맞게 되어 있느냐? 무시기도 입니다.
그렇게 나가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데, 성경은 많은 경우 기도에 대해서 엄청난 축복을, 축복이라고 말하기 보다 응답을 약속해 주신 것이죠. 요한 복음 14장 14절 보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랬습니다. 받아합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 이게 약속이거든요. 무엇이든지 그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뭐 이것은 될 것 같아서 기도하고 이것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기도 안하고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도 자신도 모르게 '도저히 이것은 안 될 것 같다!' 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구요. '아, 이것은 될 것 같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상관없어요.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누가 응답합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도하면 응답 받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 오는 만큼 뭡니까? 기쁨이 온다! 그랬습니다. 감사가 온다!
그래서 저는 요즘 새삼스럽게 뭘 느끼느냐하면, 여러분들이 그 기도할 때에 어떤 사건이 이루어 졌다고 기쁜 게 아니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는, 하나님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제가 그 국민일보에도 그런 말이 나왔더라 구요. 중보 기도에 대해서 요즘 어떤 교단에서는, '중보 기도 할 필요가 없다! 중보 기도라는 말 자체가 그런 어패가 있다!' 왜? 중보는 예수님 이외에 누가 중보 하느냐? 이래가지고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중보 기도하는 것, 그 자체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런 교단들이 있더라 구요. 그런 교단에서 보수적인 성향이 있더라 구요.
그런데 사실상 어떤 면에서 여러분 중보 기도라는 그 말 자체에 뜻이, 지난번에 제가 조금 설명을 드렸죠. 중보 기도한다는 말 자체가 그 사람에게 뭐 어려움이 있으니까, 그 사람의 사실이나, 일이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렇게 기도한다 생각하는 게 중보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중보 기도한다!' 그럴 때에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게 뭡니까? 원죄가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그에게 이루어지는 이 축복이 중보 기도에 배경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보 기도한다!'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 사람 위해서 일이 되고 안되고, 그 사람 축복 받고 안 받고,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한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여러분과 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손에 그 사람을 의탁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게 없어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옵소서!' 그 사람에게 다른 거 없어요. 여러분 어떤 경우 '중보 기도한다!' 그럴 때에 뭐 이상한 그런 또 중보 기도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니까, 다리가 하나 부러지게 하옵소서!' 그런다고 다리가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 백 번 해봐야 소용없어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해 주옵소서!'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죠.
여러분 사실은 중보 기도가 안 했던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도 롯을 위해서 엄청난 중보 기도가 나왔다! 성경은 많은 경우 있습니다. 그 많은 경우 기도가 그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졌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중보 기도에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자식들에게 향해서 막 중보 기도한다고, 뭐 '하나님 뭘 하게 해주고...' 그 이전에 하나님 뜻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면 성령 충만하게 해 주옵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정말로 세계 복음화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식이 될 수 있도록...
문제는 그런 방향에 기도입니다. 뭐 '세계 제일가는 갑부가 되게 하시고...' 다 갑부 되어버리면 누가? 물론 어떤 면에서 그런 문제도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인 여러분 배경이 잘 이해가 되어지고 이루어 져야되죠.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문제는 염려가 안 나온다는 게 아니거든요. 염려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올 때마다 기도응답의 역사로 이어지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응답을 주신다. 우리는 응답을 주신다! 그럴 때에 자꾸 우리기도에서 착각하고, 지금까지 응답을 하나도 못 받았다 싶고, 기도해도 안 된다 싶은, 기도의 실패 감이 상당히 많거든요. 많은 경우 거의 이런 교인들이 참 많습니다. '기도는 했는데, 기도는 안되더라!' 이런 것으로 참 많습니다.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 그랬는데, '하는 것마다 응답 받았다!' 그러는데, 또 응답 받는다고 말씀했는데, 나는 한번도 응답을 못 받았다! 이런 생각으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될 것이, 응답을 주신다는 응답은 도대체 뭐냐? 뭐가 주로 응답이냐? 그럴 때에 잘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응답이 뭐냐? 제일 핵심적인 중요한 것을, 여러분 전제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응답 중에 응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 이 사실을 사건과 일마다 인식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게 응답 중에 응답이에요.
뭐가 이루어 졌다! 성취되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겨요. 예를 들어서 보세요. 우산 장수는 비가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맨 날 하나님 오늘도 비가 오게 하옵소서. 그런데 또 소금 장수는 비가 오면 안 되잖아요. 오늘 비가 오지 않게 하옵소서. 이러면 둘 다, 한 사람은 비가 오게 해달라! 한 사람은 비가 오지 말게 해 달라! 그러면 이 사실 자체가지고 응답이라 그러면 곤란하거든요. 왜? 비가 올 때는 와야 되고, 안 올 때는 안 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비가 오고, 안 오고 하는 그렇게 비가 적당히 이 땅에 오게 하고, 안 오게 하는 이걸 가지고 신학적으로 일반은총이라 그럽니다. 일반 은총이라 그러는데 이것은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누구에게든지 다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실 차제를 가지고 우리는 기도응답에 문제로 연결시켜 버리면요. 여러분 이 땅에 악한 사람에게 다리몽둥이 다 부러져야 돼요. 그 악하다는 개념이 어떤 사람은 이런 개념이고 어떤 사람은 저런 개념입니다. 나올 수가 없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의 손에 잇는 것이지 인간 차체에 놓치 않습니다. 왜? 인간 자체가 파괴된다! 본질상 진노이기 때문에 거기에 기도 안 되는 응답 받는다 그러면, 이 땅은 당장 파괴가 되던지 지구가 이상해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기도응답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응답 그럴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이 먼저 '아, 하나님이 이 사건 속에서, 이 문제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이 사실이 인지되는 만큼 응답이 옵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고, 이 사실이 받아들여지는 만큼, 확실한 응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가지고 희미하게 생각하고, 여기에 대한 확실한 어떤 해답이 없으면 기도라는 자체가 잘 안 되죠. 그래서 여러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과, 일과, 사건과, 모든 것 잘 아십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런 말씀하죠. 나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십니다. 부모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닙니다. 나도 아닙니다. 내가 잘 알 것 같죠? 천만에 말씀! 어떤 면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제일 모릅니다. 알아도 엉뚱하게 알고 있어요. 가장 확실하게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정확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정도시냐? 객관적으로 성경이 뭐라 그랬습니까? 여러분 머리털 하나도 다 세신다! 그랬습니다. 여기 계신 분, 내 머리털이 몇 개냐, 혹시 알아요? 아무리 대머리라 그래도 머리 털 하나 계산하고 있는 분은, 세상 천지에 없더라 구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그런 말합니다. 왜 이런 문제 생기느냐? '아, 우연이겠지!' 아닙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절대 안 떨어집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고 사는 문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모든 문제, 왜, 모릅니까? 하나님이 잘 아시는 정도가 아니고, 너무 잘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39편 1절에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시 139: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시 139: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시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오늘 여러분 무슨 말하고 왔는지, 앞으로 오늘 무슨 말할지, 하나님 다 아십니다. 이상한 소리하고 여기 와서 앉았는 것도 아시고, 빨리 회개하세요. 하나님이 그걸 잊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다 아십니다. '다 아신다!' 그랬어요. 여러분 그래서 너무 이 사실을 알게된 바울이 '명철이 한이 없다! 지혜가 무한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그 역사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거죠. 그리고 똑같은 139편에 보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벌써 거기에도 또 하나님이 계세요. 하나님의 낮을 피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줄 압니까? 어디 가든지 하나님께서는 이미 벌써 내가 올 줄 알고 내 모든 상황과 일들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심지어는 내가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벌써 거기도 계시고,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옥 갈 수 없지만 지옥 간다 그래도..." 누가 같이 갑니까? '하나님이 같이 가신다!' 그랬습니다. 기가 막힌 사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옥 갈 수 없지만 지옥 간다! 그래도 하나님이 거기도 같이 가겠다! 그랬습니다.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뭘?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뭘 약속했느냐? 자녀가 되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때부터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약속했습니다. 어디서든지, 어디 가든지!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함께 인도하심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약속했다, 함께 한다!' 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거기에 모든 해답이 다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내가 자녀를 키워보면서 여러분 아마 다 느낄 겁니다. 느끼는 것은, 아버지가 자녀의 필요한 부분을 알았다! 그럴 때에 자녀가 굳이 달라, 안 달라 할 것도 없어요. 저절로 따라 옵니다. 그리고 뭐 자식이 조금 뭐 아버지한테, 이렇게 잘해주고 좀 아버지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러면, 그 것보다도 훨씬 그 자식을 풍성하게 갚아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이걸 모르는 아이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아빠가 과자 하나 달라고 그러면 절대로 안주고 혼자 먹죠. 꼭 지금 비슷해요. 이게 이해가 안 되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큰 축복과 은혜의 역사에 길을 몰라요.
엉뚱한 것! 그러니 뭐 헌금하라, 뭐 하라! 그건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나와 여러분을 통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뭐냐? 조금만 해 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하나님은 5분만 축복하시면, 1분만 축복하시는 게 아니고, 1초만 잠깐 축복하셔도 세계 재벌을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워낙 이상한 소리만 하고, 이상한 불 신앙만 가지고, 하나님 바라보고 원망만 잔뜩 해대니까, 축복해 줘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에요. 될 일이 아니고 축복해 줬다! 그러면 더 망하게 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뿐이지, 엄청난 이 은혜의 축복을 하나님이 약속할 때에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다 끝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누가 같이 계십니까? 박 목사가 함께 합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리라! 그 분이 누구입니까? 전능하신 분, 나의 아버지 시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저는 엄청난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핵심에도 비전이 나오고, 요즘 비전이 나오더라 구요. 이건 김동훈 목사님이 오셔 가지고 비전이 있으면 안 늙는다! 그러더라 구요. 비전이 있으면 나이가 많고, 또 연세가 많이 들어도 괜찮다! 비전만 가져라! 그래서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전이 없어서 늙느냐!' 나를 보고 요즘 많이 늙어간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엄청난 비전, 다른 게 아닙니다. 비전이 뭐냐? 성경에 여기 약속했습니다. 23절 한번 다같이 봅시다. 23절 다같이 시작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할렐루야!
우리의 비전은 뭡니까? 우리의 비전은 여러분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것 아닙니까! 구름이 조금만 떠도 우리 주님이 오실 날인가! 그리고 주님이 오시게 될 때에, 오시기 전에 성경은 뭐라 그랬습니까? 세계 복음화! 완전 복음화 시켜놓고 주께서 오실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바로 세계 복음화라는 비전입니다. 세계복음화의 비전! 이게 연결되는 겁니다. 우리 자식들이 그냥 걸핏하면, 우리 조그마한 꼬마들 뭐 압니까? '세계복음화 하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잖아요.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그 기도가 나쁘냐? 조만한 게 뭐 세계복음화 하겠냐? 비전입니다. 당장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를 하시고 약속을 해 놓았어요. 하나님께서 엄청난 그 속에, 모든 축복과 승리가 그 속에 다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시고, 그 속에 다 약속된 축복입니다. 여러분 이 비전을 가지고 나갈 때에, 오늘 본문에 말씀했죠. 이리저리 도망쳐 다녀야 되고, 몰려 다녀야 되고, 이런 역사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랬습니다. 때로는 신자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온다! 그것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 때문에 성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야 됩니다. 병들고 힘들다! 절대로 그 '병들고 힘들다!' 소리하지 마시고, 병들고 힘든 사건 또 여러 가지 문제로 통해서 힘든다는 사건이 나올 때에, 불 신앙으로 빠지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뭐라 그랬습니까? 성공하도록 계획해 놓았습니다. 기어코 그 사건, 사건이 여러분 실패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성공된 축복과 역사를 체험하게 만드실 것을 성경이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요셉을 불러 놓고 얼마나 문제가 계속 되었습니까? 노예로 팔리죠. 그 노예 때문에 성공하는 겁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감옥에 들어간 것 때문에 성공하는 겁니다. 그 사건 하나 하나가 요셉에게는 성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말을 여러분 들으면 오늘도 식상해 질 것 같아서 이 말 안 쓰겠습니다. 그 것 때문에 성공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축복 받도록,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받아합시다. "나는,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높이신다!" 내가 높이고 네가 높인 게 아닙니다. 혹시 사람에게는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 주시고, 여러분을 세계복음화에 일꾼으로, 하나님이 기어코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어 놓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어려운 문제에 있거나, 내게 고질 스러운 병든 문제나, 이런 사건이나, 이런 문제 있거든, 그것 자랑하지 마세요. 자연적으로... 왜, 그러냐 하면요. 제가 아파 보니까, 자꾸 그 말이 나오더라 구요. 흔히 뭐냐? 병 이야기 밖에 안 나와요. 나는 그것은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불 신앙으로 빠져 가는 사단에게 속는 겁니다. 그 자랑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귀한 역사와 계획을 이루시는가, 바로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축복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 것이거든요. 고난 때문에 승리하게 되고, 고난 때문에 믿음에 역사와 사실이 확인 되게 되고, 고난 때문에 이런 축복과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 성경에 약속입니다. 그게 다니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성경전체에 모든 인물들인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뭐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이것이 안 되니까, 너무 일이나 사건에 찌들려 있어요. 그리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 불 신앙에 찌들려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를 당해서 계속해서 안 된다는 것에 찌들려 있는 것이 바로 문제거든요. 이걸 가지고 우리는 종교에 빠졌다! 그럽니다. 여러분 종교에 빠졌다는 것은 기도해도 안되더라! 예수 열심히 믿어도 안 되더라! 그럴 수밖에 없어요. 복음에 확실한 뿌리를 못 내리면 그런 것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에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당장 당하는 것이 고난인 것 같지만, 그 고난보다도, 그 고난 통해서 하나님께서 승리의 조건을 만들어 나가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인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문제 속에서 뭐하면 되느냐? 주님만 붙잡아 버리면 되는 겁니다. 언약을 붙잡고 계속해서 방향을 맞추어 버리면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이 사실을 바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나는 그 풍랑을 만난 배도 타 봤고, 배를 타보면서 느끼는 것은, 바다 위에 배가 지나갈 때에 물이 배속에 들어와 가지고 빠져버리면, 그러면 다 끝입니다. 그러나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곳이 길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여러분 시험이 오고, 고난이 오고, 풍랑이 일어 날 때에 그곳에 빠져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불 신앙으로 낙심하면 끝입니다. 낙심만 하지 아니하면, 이 풍랑 인연하여서 뭐가 됩니까! 더 빨리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이것이 안되니까, 자꾸 실패에 빠지는 겁니다. 지금 나와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많은 사건, 일, 문제, 큰 비전을 가지시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세우셔서 세계까지, 세계 복음화에 역사까지 계획하신 이 뜻을 분명히 붙잡아야 됩니다.
노아의 방주는, 노아 식구가 물 때문에 살았습니다. 홍수 때문에 노아 식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아실 것은, 노아 식구 외에 다른 많은 사람들은 물 때문에 뭐했습니까? 빠져 죽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과, 혹은 때에 따라서는 병든 것과 풍랑이 일어나고, 사건이 생길 때에 불 신앙하게 되면, 바로 그 사건 때문에 죽을 수 있습니다.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언약잡고, 확실하게 되는 그 순간, 그 사건 때문에 살아납니다. 그 사건 때문에 축복으로 인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엄청난 교회 건축을 앞두고, 여러 가지 모든 문제에서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아, 사단이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그릇을 키우시는 중대한 축복이 있습니다.
이렇게 좁아 터진 마음으로 큰 교회 지어봤자! 어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엄청난 그런 계획을 세우시고, 이제 마음 문 활짝 열고, 비전을 주셔서 세계를 살려야 될 그런 일꾼들로 하나님이 먼저 그릇을 만들어 줄 겁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분 기도하고, 각 이 기관들마다, 개인이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 들으시고 지금 응답하고 계십니다.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음만 조금 여시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빠질 것이 아니라, 그것 붙잡고 언약 화시켜 나가버리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확신과 담력을 가지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건, 그것이 축복과 은혜의 기회요. 주신 문제, 그것이 내가 빠질 문제가 아니고 축복을 받을 은혜의 길인 것을 확인하시면서 하나님이 지금도 이 사건, 이 일을 통해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실한 믿음 가지시고, 승리하시는 말씀의 성취가 한 주간도 계속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로 승리하라!
마 10:16-23 / 전순기 목사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이제 다시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마음의 허리띠를 동여매고, 험한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이 건강해야 합니다.
프리츠 펄즈(Fritz Pearls)라고 하는 독일 출신의 유명한 유대인 정신분석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잘 알 것. 자기의 장점과 단점도 알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둘째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사람일 것.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고 특별히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맞닥뜨려 이겨내는 사람일 것. 문제에 부딪치면, 비겁하게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16절에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는 말씀이 있는데,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보면 말이 되는 이야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섭리와 지혜를 발견하게 되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왜 주님께서 양과 같은 당신의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실까요?
우리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냄을 받은 양’이라고 부르신 말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도가 살아가야 할 세상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성도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그런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처신하며 살아가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의 본분을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 그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화) 손자병법 모공 편에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고 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서, 승산이 있을 때에 싸우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부지피이지기(면) 일승일패(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적의 실정을 모른 채 아군의 전력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부지피부지기(면) 매전필패(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전력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는 뜻입니다. 손자의 가르침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영적인 전쟁인 신앙생활에서 승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고, 또 우리의 대적인 세상을 알아야 하고, 우리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리와 같은 세상
이리의 속성을 연구해 보면, 주님께서 왜 세상을 이리라고 비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리는 개과에 속한 포유동물로서 혼자 또는 둘씩 또는 무리지어 다니면서 사냥을 하는 육식 동물입니다. 이리 떼의 속성이 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이리는 물어뜯는 이리라고 불립니다(창49:27). 스바냐서에는 당시의 권력자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던 모습을 비유하여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라고 묘사했습니다(습3:3절).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흉악한 이리라 했고(행20:29),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양을 늑탈하고 해치는 이리라고 불렀습니다(요10:12). 일반적인 육식 동물들은 자기 배를 채울 정도만 사냥하지만, 이리는 항상 자기가 먹을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짐승을 물어 죽인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양에게 가장 위협적인 동물 중에 하나가 이리라고 합니다.
요약해 보면, 호전적이고, 잔인하고, 떼거지로 힘을 모아서 약한 자를 죽이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다른 짐승들을 해치고 빼앗기를 주저하지 않는 게 이리의 성질인데, 이것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또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좋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세상의 본질적인 성격이 그렇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리가 주로 양을 노리고 공격하는 것처럼, 세상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럽지만, 기독교 복음 신앙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과 고난, 멸시와 천대, 노골적인 공격을 보면, 바로 이리가 양을 공격하고 물어뜯는 모습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양의 정신을 가진 성도들
그러면 이번에는 왜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냄 받은 양이라고 비유하셨을까 생각해 봅시다. 양이라는 동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양이라는 동물을 생각하면, 우선적으로 양순한 동물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겁니다. 자주 말씀 드리게 되는데, 양은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뿔도 없습니다. 양은 눈도 어둡고 다리가 짧고 몸통이 커서 잘 뛰지도 못합니다. 이처럼 양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목자의 돌봄 없이 이리 가운데 보냄을 받으면, 보냄 받는 즉시로 이리에게 잡혀먹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제자들을 이런 연약한 동물인 양으로 비유하셨을까요? 기왕에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 가운데로 보내시려거든, 양이 아니라 이리를 이길 수 있는 사자나 호랑이로 보낸다고 하시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이유가 뭘까요?
신구약 성경에서 성도를 비유하는 여러 가지 비유 중에 가장 대표적인 비유가 바로 양이라는 비유입니다. 시편 100편에 “우리는 그의 백성이며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했습니다(시100:3). 또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당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시면서, 당신은“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양의 이미지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사야 53장 6절의“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이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양이란 동물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워서 각기 제멋대로 행하기를 좋아하는 데, 그 결과는 옳은 길을 찾지 못하고 그릇된 길로만 가다가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겁니다.
양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순종과 희생의 이미지입니다. 양은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에 소나 염소나 비둘기도 제물로 사용했지만, 주로 사용된 제물은 양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어리석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목자 앞에 서기만 하면 아주 양순해집니다. 양은 매우 온유한 동물이라서 털을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하게 가만있습니다. 그리고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양을 죽일 때에도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에 돼지 같은 동물은 잡으려고 할 때에 몸부림을 치고 엄청나게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래서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양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시면서 이 두 가지 이미지를 다 사용하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양처럼 살까? 이리처럼 살까?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하시는 중요한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이웃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희생 제물로 드려지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양이라는 동물은 온순한 초식 동물입니다. 남을 해칠 줄 몰라서, 벌레 한 마리 죽일 줄 모릅니다. 양은 사람들에게 유익만 주는 동물입니다. 양은 사람들에게 털을 줍니다. 젓도 줍니다. 고기도 줍니다. 그리고 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집니다. 이처럼 양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유익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속죄 제물이 되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의문을 가져보십시오. 도대체 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이렇게 힘든 방법을 선택하셨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꼭 이 방법 밖에는 없었을까? 자신보다 더 큰 힘이나 권세 앞에서는 쉽게 굴복하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전능하신 능력을 발휘해서 단번에 회개시키고 믿게 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많은 고민 끝에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권세나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건, 가장 쉽고 효과가 빠르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권세나 힘을 사용하면, 겉으로는 굴복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심에서의 복종을 받아낼 수는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가 가진 권세와 힘을 과시한 사람은 상대방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존경은 결코 받아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화) 바람과 태양이 나그네 옷 벗기기 내기를 했다는 우화가 있습니다. 강한 바람으로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없었지만, 따뜻한 태양빛을 비춰주자 나그네는 자발적으로 옷을 벗었다는 겁니다. 간단한 우화지만, 아주 깊은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떠난 인생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방법은 강풍으로 휘몰아치는 방식이 아니었고, 따뜻한 태양과 같은 주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비춰주심으로 얼어붙은 가슴들이 녹아져서 자발적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실 때에, 우리의 냉냉하던 가슴은 녹아지고, 돌덩이같이 굳어졌던 마음은 연두부같이 부드러워지게 하십니다. 완고하고 교만하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집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양처럼 세상에 결코 해를 주지 않고 유익만 주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또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던 예수님의 정신을 따라 살아감으로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양으로 세상에 보내신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양과 같은 존재 가치를 가지고, 또 양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이지, 실제로 우리가 양처럼 미련하고 나약하고 무능한 존재가 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에서도 사자나 호랑이처럼 힘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을 보십시오. 이들은 결코 약한 사람들이 아니고, 호랑이나 사자처럼 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부귀영화와 권세, 장수의 복을 받았던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다 하나님의 양이었고, 이리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양처럼 양의 정신을 가지고 살았고, 양의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이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며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가을처럼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분들처럼 그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다니엘처럼, 그렇게 힘 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리의 정신이 세력을 가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이리처럼 사느냐? 아니면 양처럼 사느냐?”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정신의 문제라는 겁니다. 비록 호랑이나 사자처럼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순한 양처럼, 나보다 약한 자들을 말없이 섬기며,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에, 그 온유함과 겸손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향하게 만듭니다.
성공적인 대인관계의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세워주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절대로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지만, 반대로 내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을 섬겨줌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주면, 쉽게 내게 마음을 연다는 사실입니다.
요약해서 정리한다면, 주님께서 성도들을 양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 성도들이 이리의 정신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겸손하고 온유한 양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양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양으로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길이며, 인간이 살 수 있는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는 고상한 삶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깨닫고 주님만 의지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이웃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섬기는 삶! 말로 하면 참 멋있는 말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한다.’는 말도 참 가슴 뛰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말처럼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깨닫고, 인정하고 주님만 붙잡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 붙어 있는 것처럼 주님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만을 듣고 목자의 뒤를 따라가듯,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만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로
주님께서 파송을 받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워야”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비둘기의 순결함을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둘기를 가만히 주목해 보십시오. 비둘기는 아주 깨끗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비둘기가 사는 장소를 보십시오. 비둘기 집은 비둘기가 싼 똥 때문에 아주 더럽습니다. 비둘기는 어떻게 그런 더러운 장소에 살면서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비둘기의 날갯죽지 밑에서 나오는 기름 때문입니다. 비둘기는 그 기름을 자기 부리로 온 몸에 바르기 때문에 아무리 더러운 곳에 살아도, 더러운 오물이 몸에 묻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리가 득시글거리는 광야처럼 험한 세상 가운데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물이 들기 쉽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세상을 부러워하고, 양으로 살아야 할 성도들이 이리처럼 살기 쉽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염된 환경 속에서도 깨끗함을 간직하는 비둘기처럼 순결함을 유지하라는 겁니다.
뱀의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창세기 3장의 사건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이 됩니다. 뱀이 하와를 꼬여 타락시킬 때에 한 말을 보면, 매우 지혜롭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허점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점을 공격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합니다. 뱀이 한 짓이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서 뱀의 지혜로움만을 들어서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와 꼭 같은 의미의 말씀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어떤 불의한 청지기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주인에게 들켜 해고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그는 자신이 해고당한 후에 먹고 살 수 있도록 대비를 했습니다.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계약서를 다시 쓰며 빚을 반으로 탕감해 줍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은 쉽게 말해서 세금 10억 낼 것을 5억만 내게 만들어주고, 자신이 커미션을 두둑이 챙겼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자신의 삶을 미리 준비한 것을 두고,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것은 불의한 청지기의 부정한 짓 자체를 칭찬하신 게 아니고,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하신 것이었습니다.
비둘기는 어리석은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호7:11). 성도들이 비둘기의 순결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정신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서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의 올바른 뜻을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엉뚱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화) 톨스토이 같은 똑똑하고 유명한 사람도 성경 말씀을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는 산상보훈의 가르침에 있는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라. 구하는 자에게 주고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해를 해서 군대와 경찰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산상 보훈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강도가 집에 들어와도 막지 말아야 합니다. 보증을 서달라고 하면 다 서주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대로 산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말씀의 참된 의미, 믿음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열심을 부리다 보면,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지혜라는 요소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인지 지혜롭게 분별하지 못하고, 덤벼들면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예, 목사가 성도들 보증 서는 일). 분별과 선택의 지혜를 얻지 못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성도들은 날마다 사기꾼들의 밥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야말로 이리의 밥이 되는 양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주님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시는 것은 이리 밥이 되라고 보내시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보 등신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늘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리의 정신이 아니라, 양의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일 뿐입니다. 그럴 때에 당신께서 친히 함께 하셔서 양의 정신으로 행하는 성도들을 이리 가운데서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며 살려면 반드시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바로 아는 것이며, 분별과 선택을 바로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2절에 보시면, 주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을 때에 참고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이 동네에서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말씀이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참고 인내할 때가 있고, 피할 때가 있는데,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겁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이 십자가 지실 때가 되시기 전에는 핍박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었을 때는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려고 자발적으로 고난 받는 자리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분별과 선택으로 이뤄집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올바르게 분별하고 선택하는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섣불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재삼재사 숙고해야 합니다. ‘반복되는 것에는 원리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어떤 동일한 실패를 여러 번 경험했다면, 그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중요한 문제를 혼자서 결정하기 힘들면 영적인 지도자와 상의하셔서, 비둘기의 순결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뱀의 지혜를 가지고 선택하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어떻게 우리가 비둘기의 순결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뱀의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까?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지 19,20절이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그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님이 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복음을 증거해야 할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성령님만 전폭적으로 의지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전도할 때만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삶의 전반에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비결은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일하시고, 또 성령님은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말씀 속에는 인생의 모든 지혜와 지식이 있고, 성공적인 삶의 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 속에 있는 삶의 원리를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 성공적인 인생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하고,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습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는데, 늘 우리는 지혜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씀을 믿고, 순간순간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또 기회를 따라 주님 전에 나아가 긍휼하심을 구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천국 대표 선수가 되고, 영혼의 추숫군이 되어 살아가는 삶을 마치 양이 이리 가운데 사는 것과 같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 같은 세상의 정신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이웃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양들임을 명심하십시오. 이제 이리떼가 득시글거리는 세상을 살지만, 양의 정신을 가지고, 비둘기의 순결함과 뱀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비둘기의 순결함을 지키면서 동시에 뱀의 지혜로 살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리함으로 성령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날마다 도우시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사는 성도의 지혜로운 삶
마 10:16-23 / 최승천 목사
성도는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고 훈련을 받고 또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경건의 훈련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그 말씀을 실현해서 살아갑니다. 성도들의 삶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간과 공간보다는 교회 밖이라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루어지는 분량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럼으로 성도의 세상에서의 삶은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이 또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주의 복음을 품고 살아갈 때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씀해주시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마치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는 것 같다 하고 주님께서는 염려하시면서 그들에게 이와 같이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또한 복음을 실현하며 전하며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어 승리함으로 나중까지 견디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조금 더 살펴봄으로 성도의 이 세상에서의 지혜로운 삶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추석을 맞이해서 연휴를 지내면서 우리는 여러 식구들과 사람들을 만나며 삶의 각 장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러 삶의 장면에서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로마서 12장 21절>말씀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래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며 그 포괄적인 삶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잠시 더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오늘 첫 번째 생각하는 것은 은혜의 양면, 즉 뱀 같은 지혜로움과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소유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16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야 할 뱀 같은 지혜로움이 우리들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세상의 그 어떤 자들도 능가하는 지혜로움이 있는 백성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5절>을 보면 ‘하나님에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에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야고보 1장 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 세상의 어떤 지혜자도 능가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을 것이고 지혜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분한 지혜와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기력하다든지, 아니면 착하기만해서 남에게 늘 속는다든지, 어떤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해서 늘 쩔쩔매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세상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탁월하지만 겸손한 것이지 어리석어서 늘 어려움 겪고 주님 앞에 와서 늘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그것을 알기에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온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가장 바닥에 있는 상태에서 주님 앞에 불림을 받았지만 가장 지혜롭고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도들이 되었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움과 결단력, 추진력, 지구력을 가지고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지혜와 능력보다 더 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산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산은 할 수 있으되 하나님께 유익함과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계산을 능가하는 더 큰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지 계산조차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지혜까지 구하는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뱀 같은 냉철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탁월함과 겸손함이 조화를 이루듯이 냉철하고 이지적인 우리의 모든 지혜가 우리가 격정으로 휩쓸리기 쉬운 우리의 감정을 통제함으로 말미암아 실수와 실패를 방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남에게 속아서 자꾸 실패하고 넘어진다면 내게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 욕심 때문에 눈이 가려서 판단하지 못하는가?
내 분별력의 부족인가?
내가 사람을 잘못 판단해서 늘 어려움을 겪는가?
내가 무엇을 보충해야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는 순간에도 내가 이 순간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내가 이 어려움을 어떻게 딛고 일어설 것인가?
이 어려움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어떤 새로운 역사를 도모할 것인가 하는 냉철함속에 열정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결정은 냉철하게 추진은 열정적으로 강철 같은 버티는 힘으로 마지막까지 견디어 우리는 결국 결과를 이루어 그것을 주님께 올려드리기까지 지혜와 힘을 발휘해야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백성에게서는 또한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동시에 소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가져야 합니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없이 냉철함과 의지만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의 맛과 빛을 상실하게 합니다. 세상의 능력 있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냉철한 이성과 능력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순박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근원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순결함은 약한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지혜로움이 합해짐으로 세상 그 어떤 누구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정말 지루할 정도로 쫓김을 받으며 그의 생명의 위협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따르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어찌 내가 죽일 수 있으랴 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를 피해 오히려 사울 왕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쫓김을 마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포기했던 거죠.
그는 하나님의 의사를 존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웠으니 이것은 내가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생각했죠.
그는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셨고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됩니다.
또한 그가 왕이 된 후에 법계가 다윗성에 들어오게 될 때 다윗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죠.
그런데 그것을 보고 그 아내 미갈이 비난합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다가 옷이 흘러서 벗겨져 내려왔어요. 왕의 체통에서 벗어난다고 힐난하자 다윗은 미갈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기뻐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라고 그의 마음을 순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순박과 순결함도 압니다.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서도 그는 순결을 지킵니다. 그리고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에서도 요셉은 순박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를 죽을 지경까지 몰아넣었던, 그를 긴 고초의 기간에 몰아넣었던 그 형들에 대해서 단번에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원수를 갚는 대신 사랑과 선대함으로 그 마음을 풀었던 거예요.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믿음의 족장의 계열에 서게 되었던 거죠.
그래요. 원수를 원수로 갚아버린다면 속이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과 은혜로 갚는 하나님의 축복과 자비가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시원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축복과 영원한 은혜 속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너무나 지혜로운 것입니다. 착한 마음가지고 살면 결국 처음에는 손해 보는 것 같으나 결국은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우리는 간혹 이 착하다는 것과 어리석다는 것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착하다는 것은 지혜롭지만 마음이 순결하고 순박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사람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나쁜 의도는 없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하나님께도 영광이 안 되고 사람에게도 도움과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진정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느냐 아니면 내 생각 속에 머무르다 실수 또는 실패하느냐에 대한 차이입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착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도 하여 주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성도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비록 이 세상을 보면 착한 사람은 비교적 어리숙한 것 같아요.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비교적 이기적이고 남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경향도 있는 것을 봅니다.
어제 베다니동산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을 우리 사회복지위원들과 함께 방문했어요.
사회복지위원회에서 또 이렇게 명절이 되니까 기관방문을 해서 같이 가게 된 겁니다.
거기는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같이 생활을 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예배도 드리고 또 우리가 준비한 사랑도 전달하고 같이 시간을 보낸 후에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그 책임을 맡은 목사님이 얘기한 것이 귀에 남아있어요.
뭐냐 하면 다 장애인입니다. 장애를 가져서 혼자서 생활할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 생활할 수 있는 분인데 그 가운데서도 지적장애인이지만 지적수준이 조금 더 높은 사람이 있고 그 가운데도 비교적 조금 더 낮은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도 조금 더 나은 사람은 꼭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조금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지능이 조금 더 높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꼭 남을 지배하려고 든대요. 그리고 또 좀 뭣한 사람은 다른 사람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도무지 안 되고 이제 혼자만 지내고 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인생의 기본 구조 같아요.
꼭 남보다 힘이 세면 남을 지배하려고 하고 남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남을 지시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이와 같은 것들이 우리 인간의 죄악된 심성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착한, 착하면서도 능력이 있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결국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겸비와 조화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도들 가운데 한 가지에 치우쳤다거나 한 가지를 외면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승리한다고 해도 순박함이 없는 승리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속의 승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만약에 우리 자녀가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께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 하나님나라에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녀들의 믿음을 위해서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그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유익을 끼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관련 없는 세속의 자녀들이 될 것인가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겸비함을 위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조화를 위해 말씀을 잇고 연구하는 것과 가슴으로 뜨겁게 기도하는 것에 조화와 균형을 역시 이루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돼요.
우리는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을 삶으로 실현해야 돼요.
내가 말씀을 이지적으로 연구하는 것과 뜨거운 가슴으로 기도하는 것이 조화되어야 하지만 또 그것이 둘 다 내 삶에 실현이 되어야 돼요. 말씀도 내 삶에 실현해야 돼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랑하라 라고 했으면 그것을 내가 지식적으로 하나님은 사랑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그것을 실현해야 돼요.
뿐만 아니라 내가 그렇게 기도했으면 내 삶속에서 그것을 실현해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어적 믿음이 아니라 실천적 믿음이 돼야 돼요.
왜 성도의 삶에서 믿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요?두 가지 이유가 가장 크죠.
하나는 말씀대로 기도한대로 살지 못해서 그래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뭐죠? 아주 중요합니다.
지속적이지 못해서 그래요.
어떤 일을 하는데 끝까지 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 가지 결심했고 기도했으면 그 일을 이루되 끝까지 지속적으로 마침표 찍을 때까지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치우침이 아닌 균형입니다.
그리고 멀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건 그것을 작은 틀에 놓고 바라보는 것과 큰 틀에 놓고 바라보는 것은 전혀 의미가 틀려요.
사람을 볼 때도 ‘당장’이라는 작은 틀에 놓고 바라보는 것과 ‘멀리’라는 큰 틀에 놓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평가의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를 때 제자들은 정말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낚고 있는, 또 뿐만 아니라 돈이나 세고 있는 세리, 또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기록할 의미조차 없어서 기록조차 안한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에요.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는 가장 어려운 바닥에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당장에 그들을 평가하지 않고 예수님은 더 큰 틀 안에서 그들의 뒤를 바라보고 평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을 때 누구도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가 대신 죽겠다고 나선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뒤의 더 큰 틀 안에서 그들을 봤던 거예요.
오순절 성령 충만하고 또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하기까지 헌신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보고 계셨던 거죠.
내가 사람을 볼 때도 얼마만한 틀 안에서 사람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대하는 내 기대,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평가, 그 사람을 보는 나의 모든 시각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도 예수님처럼 큰 틀 안에서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을 가지고 더 멀리 바라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에 의지를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어야 합니다.
비록 잘 안되더라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은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 조금씩 나아져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 대한 신뢰 속에서 이루는 평안입니다.
오늘 <18절>을 보니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너희를 넘겨줄 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라 너희에게 어려울 때 내가 너희에게 지혜를 주고 너희에게 논리를 주고 너희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주어서 너희가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실현해가는 삶에 있어서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순간, 그 어려운 순간을 헤쳐 갈 지혜와 은혜를 주십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셔서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은 우리를 담대하게 하고 또 그 담대함이 우리를 능력 있게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9절>은 말씀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어디로 가든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감속에서 이루어지는 용기입니다.
요즘은 정말 성도들의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더 큰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어려움 속에서 세워졌고 어려움 속에서 지경을 넓혔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셨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풀무 불에 던져짐으로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다니엘 사자 굴에 던져짐으로 오히려 사자의 입을 봉하심으로 그를 보호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만인, 왕까지도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십니다.
요셉은 고난을 거쳤기에 총리의 자리에 이르는 급행열차를 타게 된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는 왜 이 어려움이 올까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이 인도하시려는 축복의 지경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고 누려야 합니다.
훈련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축복의 과정으로 여기고 누리고 행복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운동하면 건강해지죠.
내가 건강해지기 위해서 정말 하기 싫어도 운동을 해야 하고 억지로 억지로 운동을 한다면 그것을 며칠이나 하겠습니까? 운동 억지로 해서는 결코 며칠 못해요.
내가 정말 힘을 쓰고 내가 숨이 차고 정말 땀을 흘리고 애를 써도 그래도 이 순간도 그래도 기쁘다 하는 마음이 있어야 그 운동 오래 할 수 있습니다.
음식 먹으면 영양소 섭취해서 우리가 건강해질 겁니다.
야, 이거 내가 살기 위해서 먹어야지 하고 억지로 먹으면 며칠이나 먹겠습니까?
‘아, 맛있다.’하고 생각하고 맛있어서 먹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건강해지겠죠.
늘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열심히 하는 사람도 그 일을 즐기는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주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마음 평안히 주님의 은혜의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마음의 평안을 가지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할 수 있죠.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치면서 견고해지고 삶의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어떤 것도 산을 올라가면 겉에서 볼 때는 일직선상으로 표현되는 것 같지만 그런 산은 아무데도 없어요. 가다보면 오르고 또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되는 겁니다. 멀리서 보면 일직선으로 보이지만 결국 길을 따라가면 일직선상으로 끝까지 올라가는, 계단 올라가듯 올라가는 산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오르고 내리는 이와 같은 과정을 반복해 가면서 견고해져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축복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헌신을 하나님의 축복의 과정으로 여기면 우리는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애씀을 우리는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여깁니다.
요즘 교회의 수많은 봉사자들이 교회 안에서 혹은 교회 밖에서 점점 더 많은 봉사와 수고를 하는 것을 보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제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 정말 우리의 지경을 넓혀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수고하고 애쓰고 섬기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자,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잠도 깰겸 손도 한 번 들어서 저처럼...... 자, 잠 깼죠?
자, 따라서 합시다.
“이 작은 손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변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큰 손으로 나를 축복하게 합시다.”
다시 한 번.
“이 작은 손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어려운 이웃 섬기고 하나님의 큰 손으로 축복하게 합시다.” (손 내리시고요.)
만약에 이 작은 손으로 끝까지 움키면 하나님이 큰 손으로 한꺼번에 거두어가세요.
이 작은 손으로 움켜봐야 하나님이 한 번에 큰 손으로 거두어가시면 우리는 그 수없이 오랜 기간 동안 움켜봐야 아무의미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작은 손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손이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는 손이고 하나님의 크신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도록 만들어야 돼요.
주님께 대한 신뢰와 평안이 있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염려치 말라 주께서 그 때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자신감과 더불어 우리가 큰 자산을 가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큰 부요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아름답게 사용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유익한 곳에 사용함 없이 본인의 통장 숫자만 바라보고 고생만 한다면, 그리고 이 세상 그냥 의미 없이 떠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수입도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아름답게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진정한 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그의 삶을 아름답게 드리는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염려와 걱정대신 주님께서 인도함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며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있어서도 염려 걱정 근심대신 오히려 담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바라며 큰 능력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까지도 인도하셨는데 앞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시랴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와 평안은 결국 우리를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성도로 만드는 것입니다. 보장의 기쁨을 가진 사람을 누가 흔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천국의 보장을 가졌고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만약에 내가 지금 어려운데 하나님께서 아직 내게 손을 뻗치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도 그 어려움을 극복할 만한 힘이 내게 있다는 뜻이에요.
내가 여기서 힘들다고 얘기하지 말고 내게 남은 힘을 찾아서 발휘해보자 라는 마음가지고 하나님 앞에 달려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오늘 성경은 세 번째 시련 속에서 꽃피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어요.
<22절, 23절>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따라서 합시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요. <23절>보면 이 동네에서 너희가 박해를 받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구원의 축복과 은총 속에 거하게 됩니다.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일까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교회에서 27년을 사역을 진행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을 참 많이 만나보고 이렇게 관찰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 승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제게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지구력의 부족인 것 같아요. 끝가지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사람을 처음에 만나면 뭐든지 잘하겠다고 얘기해요.
그리고 약속도 하고요 잘해보겠다고 그래요. 저는 거짓말 하는 거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에는 진실이에요. 그 순간은 정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시간 지나면 마음도 달라지고 느낌도 달라지고 힘도 들고 후회도 되고 결심이 흔들려져요. 결국 번복한단 말이에요.
그럼 뭐죠?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결국 거짓말을 하게 된 거예요.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그 약속은 거짓말이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끝까지 버티는 힘이 없어서 그래요. 이 때 하나님이 키질을 하시는 겁니다. 까부르는 거예요. 정말 은혜를 받을 그릇인가 달아보는 것이죠. 대부분 이 순간에 떨어져 나가는 거 같아요.
광야의 40년을 견딘 사람만이 결국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넌 사람만이 그리고 가나안의 긴 정복의 전투를 거친 사람만이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자, 우리 오늘도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약속대로 정한대로”
다시 한 번.
“약속대로 정한대로”
“끝까지”
한 번 실천해봅시다.
여러분 끝까지란 말 이 교회에서 도대체 몇 번 들었는지 세기도 힘들만큼 여러 번 들었을 겁니다.
여러분 끝까지 한 번 마음먹은 것이면 약속대로 정한대로, 내가 약속대로 정한대로 살다가 손해보고 도무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할지라도 내가 한 번 말했기 때문에,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한 번 지켜보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는 그것이 내 분복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자. 끝까지 가보자. 마침표 찍고 결국 끝내자. 라고 생각해 봅시다.
정말 실천해봅시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너무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시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도 견디어 구원을 이루는 것이죠.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절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결과적으로 그것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그걸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제까지 내가 승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방법이 서툴렀을까요?능력이 부족했을까요?
몸이 약했을까요?결국 그것을 넘어서는 끈기가 부족했기 때문이죠.
언제나 산의 정상부분은 가파릅니다. 숨이 찰만큼 가파르면 정상이 그 앞에 있는 거죠.
어려운 지경을 넘어서면 또 숨고를 시간은 있게 되는 겁니다.
항상 은혜의 때는 그리 멀리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숨어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멀리 있지 않습니다.
<시편 121편 5절>을 보면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지금 이 시간도 주님께서 나를 방치하지 않으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시련 속에 꽃피는 축복입니다.
꽃이 피기까지 씨 뿌리고 물주고 햇빛 쬐게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를 위해서 기다리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칠 때쯤 되면 주님은 우리 앞에 와 계실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내 손에 닿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충분히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갈 능력과 힘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 다시 힘을 쥐어짜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힘을 내어 나아갑시다.
그리고 우리 힘이 떨어지면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겁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맙시다.”
자,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하지 맙시다.”
“나는 어려움을 이길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이 우리들에게 분명히 임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이번 주 추석주간이고 연휴가 진행됩니다. 만나는 식구들마다 대하는 이들마다 사랑과 은혜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적인 언어, 복음적인 행동, 그리고 순간의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어야 합니다.
명절이 고통스러운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고 승리합시다.
또한 우리 삶에서 꼭 기억합시다.
은혜의 양면,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을 동시에 소유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신뢰 속에 주님을 신뢰하고 그 가운데 평안을 얻으며 시련 속에 꽃피워지는 마지막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도자가 받을 고난과 핍박
마 10:16-23 / 이상호 목사
보통 사람들은 교회 나올 때, 남들로부터 위로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나옵니다. 물론 약간의 행운이나 축복을 바라고 오지요. 그런데 이런 기대감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과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예언을 잘못하신 겁니까? 아니면 오늘날 교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까?
그 동안 우리는 우리가 영적 추수꾼이 됨을, 곧 복음의 일꾼이 됨과 그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가치 있는 일임을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복음 증거의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자가 겪어야 할 고난과 핍박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복음 전하는 현장에 내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전도 현장이 어떻다는 것을 단적으로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이리들이 우굴거리는 곳에 가는 양과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도자가 받을 고난과 핍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7절에 보면 사람들이 그들을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8절에 보면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기도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일까지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22절을 보면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음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고 사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살려고 할 때 핍박이 없겠습니까?
예수님도 24,25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바알세불이라, 곧 귀신의 왕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예수님의 제자요 종인 우리들도 좋은 소리 들을 생각 말고, 고난 받을 각오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 당시 제자들과 또 오늘 우리들에게 그런 전도 현장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첫째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16)
우리에게는 먼저 뱀과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원래 뱀이란 동물은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창 3:1에 보면 "여호와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간교하다'는 말은 원래 '영리하다'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뱀이 그렇게 지혜로웠기 때문에 사탄도 그것을 이용해서 우리 인간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고, 즉 다시 말해서, 흙 속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영리한 동물인지 모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발도 없이 배로 기어다니는 동물인데도 누구에게 잡히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본능적으로 위험에서 피하는 법을 알고 있어서 잘 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전도하면서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고난이나 핍박은 당하지 말고 잘 피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복음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세상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될 수 있으면 화평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롬 12:18에 보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전도할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갖고 평소에 그들에게 인심을 얻어 놓는 것이 지혜입니다. 또 우리들이 전도할 때도 지혜를 써야 합니다. 무턱대고 복음만 전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 전도할 때인지 아닌지도 잘 구분해 보고 언제 어떻게 접근하여야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인지 지혜롭게 전해야 합니다.
그래도 전도하다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여기 23절에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했습니다.
예수님도 아기 때에 헤롯이 그를 죽이려 하시니 그 부모들이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그들 가운데를 지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전도하다 불필요한 어려움이나 핍박이 생기면 피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위험지역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이 가명을 쓰거나 또 자주 이사 다니시며 복음 전하는 것도 하나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언제나 좋게만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뱀과 같은 지혜로만 살다가는 정말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또 한가지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순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짐승들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것이 뱀이라고 한다면, 가장 순결한 것은 비둘기라 하겠습니다. 비둘기는 이렇게 깨끗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비둘기 하면 순결의 상징이요, 또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뱀처럼 지혜롭게 이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그들에 잘 보이려고 하고 또 전도도 조심스럽게 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의 순결까지 양보해 가면서, 우리의 전도까지 포기해 가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18절에 보면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전도하다가 끌려가는 핍박을 당할 수 있는데, 그 때는 당당히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32절과 33절에 보면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무리 뱀처럼 지혜롭다고 해도 우리가 증거할 것은 증거하고 시인할 것은 시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순결, 전도자의 순결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자들이 전도하다가 붙잡혔을 때 그렇지 않습니까?
"관원들이 그들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하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하면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행 4:18-20)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증거할 사람들로서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말도 아끼고 행동도 조심하면서 불필요한 욕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할 때는 해야 합니다. 욕을 먹을 때는 먹을 각오를 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순결, 전도자의 순결은 지켜야 합니다.
요즘 우리 신자들, 정말 지혜로워야 할 때는 지혜롭지 않고 순결할 때는 순결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이 두 가지를 잃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지혜와 순결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 둘을 다 지녀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17절)
우리가 전도해야 될 대상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란 필요한 존재이면서 고통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개나 돼지나 소나 닭 때문에 속 상하고 고통 당하는 경우보다는 사람 때문에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손해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모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리나 전갈이나 독수리나 뱀 때문에 위기를 겪고 고통을 당했던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때문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겪은 것은 수를 셀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그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동족이며 선민인 유대인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딤후 4:9 이하를 보면 의도적으로 바울을 괴롭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구리장색 알렉산더였습니다. 금속세공업자인 알렉산더는 바울을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장점을 덮어두고 단점을 들추는데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리시니"라고 했고,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40여년을 목회 하다가 은퇴하신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 속에 [조심해야 될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
둘째,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흉잡는 사람.
셋째, 매사를 반대만 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넷째, 성직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
다섯째, 의도적으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여섯째,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일곱째, 성직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
여덟째, 남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홉째,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열째, 말로만 큰소리 치고 일은 하지 않는 사람.
목회를 하면서도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니 서글프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고, 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사람 다 믿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심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하셨으니 우리가 얼마나 사람을 조심해야 하겠습니까?
터어키의 어떤 선교사님이 급진적인 모슬렘 교도들에게 테러의 대상이 되어 몰래 빠져나와 피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나 했더니, 어떤 사람이 이 선교사님을 띄워주며 이슬람교가 어떠냐고 물어, 그가 개종할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적으로 이슬람교를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것을 녹음하여 방송국에 갖다 주어 국영방송국에 보도되었고, 이를 들은 급진적인 회교도들이 선교사님을 잡아 죽이겠다고 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피해 숨어지내다가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심할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매우 힘들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고, 당시 제자들도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에 위로와 평안의 말씀을 주십니다.
셋째로,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8-20절)
여기 18절, 19절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앞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이리 가운데 보낸 양과 같다고 하시며, 그런 가운데서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하셨지, 또한 사람을 삼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전도할 것입니까? 전도가 그렇게 힘든 것이고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전도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도하러 나서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당할 힘도 주시고 또 할 말도 주셔서 능히 감당하게 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능력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전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전도나 설교나 시간만 보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아니시고는 할 수 없는 일이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요, 전도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전도하러 가면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는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실 테니 격정하지 말고 전도 현장에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22절
22절을 봅시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이기며 견뎌야 합니다. 전도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전도의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하는 자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한번 두 번 해 보고 안 된다고 포기하는 자는 결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전도자는 결국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는 자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견디면 거기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세상의 가치있는 일들, 고귀한 일들은 끝까지 견디지 않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가정의 자녀들이 공부하고 대학입시를 위해서 애쓰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4년밖에 다니지 않는 대학도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잠 못자고, 하고싶은 일 못하면서 꼭 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올림픽에서 하찮은 종목도 금메달을 따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금메달을 놓고 4년 동안 준비하고 연습하며 훈련합니다. 금메달을 따는 것은 그렇게 귀한 일이고 은메달, 동메달도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일이 아니라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하는 일은 얼마나 견뎌야 합니까? 공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애를 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뎌나가고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과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고 나가야 합니다.
가족 가운데 불신자들 앞에서 묵묵히 꾸준히 신앙의 삶을 견지하고 나가면 그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으며 때가 되면 거둔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명심하며 끝까지 견뎌나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말씀처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며, 사람에 대해 삼갈 것은 삼가면서 끝까지 견뎌나가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전도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앞으로 얼마남지 않은 추수감사절을 생명축제로 준비하면서 내가 맡은 한 영혼을 인도하는 일에 힘쓰고, 더불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삶으로서의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사명을 다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 10:16-31 / 최영기 목사
I. 세상은 사단에게 속했다
인생의 행, 불행은 처해 있는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라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낙천적인 사람은 물이 반만 든 컵을 보면서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고 비관적인 사람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양의 물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만족할 수가 있고 불만족할 수가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천국을 기대하면 도저히 못 살 세상이 되고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퍽 살만한 곳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의 주제가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고난이 낙담과 절망을 가져올 수도 있고 재미와 보람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세상을 복귀하려 오셨다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로빈후드라고 생각하면 세상과의 관계가 어떨 지에 관하여 머리에 그림이 그려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릴 적에 책을 읽으면서 자란 사람은 의도 로빈후드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임꺽정이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로빈후드는 영국 임꺽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하여 말씀드리자면 로빈후드 의도입니다. 당시 영국의 왕은 사자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리처드였는데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오다가 독일 왕의 포로가 됩니다. 왕이 없을 때에 그 동생 존이 왕 노릇을 하였는데 국민들의 고혈을 짜고 학정을 했습니다. 이에 못 견딘 사람들이 로빈후드를 중심으로 숲에 모여서 집단을 형성하고 고관들을 공격하여 돈을 빼앗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곤 했습니다. 이들은 항상 정부군에게 쫓겨 살았지만 자유를 구가했고 이들의 무리를 merry men 즉 기쁨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끝에 가서는 포로가 되었던 사자 왕 리처드가 은밀하게 영국에 밀입국하여 왕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는데 로빈후드와 merrymen이 왕을 도와 정권을 되찾는 것을 돕습니다.
예수님을 역사 속의 왕과 비교할 수 없지만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설명하자면 이 세상을 당시의 영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단은 왕권을 찬탈한 악한 왕 존이고 예수님은 왕권을 되찾고자하는 사자 왕 리처드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정부 군사에게 감시 대상이 되고 항상 쫓기지만 궁극적으로는 승리하는 로빈후드와 merry man입니다.
2.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핍박을 예상해야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핍박을 예상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엡 6:12), 이 세상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권을 우리의 조상인 아담에게 위임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사단에 꼬임을 받아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통치권이 사단에게 넘어갔습니다. 상실된 세상의 통치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악한 자를 사주하여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좇는 백성들을 가만두겠습니까? 로빈후드의 전설에서 찬탈 왕 존이 정당한 왕 사자 왕 리처드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은 색출하고 투옥하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을 핍박한 세상이 제자들이라고 가만 둘 리가 없다고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24-25절).
권력 잡은 사람들에게 받을 핍박을 주님은 예고하고 계십니다(17-18절). 이러한 핍박은 무슬림 권과 힌두권 안에 사는 크리스천들이 현재 받고 있습니다. 또 집안으로부터의 핍박이 있습니다(21-22절). 이것은 6.25 때에 우리가 경험한 것입니다. 자녀가 예수 믿는 부모를 반동이라고 하여 당국에 고발하고 부모가 예수 믿는 자녀들을 반동이라고 고발한 예가 몇 십년도 안 되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무슬림 국가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와서 총으로 쏴서 죽이는 경우가 있답니다. 가문의 치욕을 막기 위한 이유도 있고 배교자를 처단함으로 자신이 천국 갈 credit을 높이기 위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3. 순진하면서도 지혜로워야한다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도 악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악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다가 안되면 "에라 모르겠다"하고 똑같이 악하게 대하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끝까지 선하게 대해야지요. 예수님도 22절에서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처럼 순진하다고 해서 어리석어지라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러시아에 갔을 때에 한 선교사님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셨습니다. 길가를 가는 데에 어떤 이태리 사람이 길에서 붙들고 사정을 하더랍니다. 러시아에 장사를 하러 왔는데 갖고 있는 돈을 다 도둑맞았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데 비행기 값이 없는데 돈을 좀 꾸어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갖고 있는 밍크 코트를 주면서 값이 천불이 넘는데 고향에 가서 다시 돈을 갖고 올 때까지 이 물건을 담보로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이 선교사님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집에 데리고 와서 차를 대접하고 집에 있는 돈을 박박 긁어서 900불을 만들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 이태리 사람이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면 남긴 밍크 코트는 돈을 갖고 와서 찾아갈 테니까 잘 보관을 해달라고 했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돌아와서 비행기 값을 갚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가게에 가서 감정을 했더니 몇 천불 할 것이라는 밍크 코트가 몇 십불도 안 되는 모조품으로 판정이 났답니다. 그때 동석한 다른 목사님이 말하셨습니다. "어, 나도 어떤 이태리 사람에게서 똑같은 제안을 받았는데." 그러면서 900불을 뜯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내가 부끄럽습니다. 나는 사기군인 것 같아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목사라면 목사님처럼 속아주어야 하는 것인데." 이 목사님의 말씀에 저는 부분적으로는 동의합니다. 속은 목사님은 보기도 말하는 것도 순수한 비둘기 같은 분이십니다. 불쌍해했던 마음은 하나님이 칭찬하실 것이고 잃어버린 돈도 결국은 보충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이 목사님이 사기꾼을 사기꾼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기군인 줄 알고도 900불을 도와 주셨다면 더 아름다웠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비둘기처럼 순진하고 뱀처럼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세상에서 살기 위하여서는 는 비둘기처럼 순진하고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악한 사람을 알아보고 악한 사람의 동기를 꿰뚫어 보아야합니다. 로빈후드의 예를 들어도 로빈후드는 뱀처럼 지혜로워야합니다. 첩자를 알아보는 눈도 있어야하고 악한 관리가 제시하는 조건에 감추어진 음모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아니면 자신과 부하들을 당 위험에 던져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찰력과 지혜는 보통 기도하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십 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과 악한 동기를 알아챈 후에는 여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2:17, 21). 말하자면 속아주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가끔 가다가 자동차가 기름 값이 떨어졌으니 도와 달라느니 고향에 돌아갈 차비를 도와달라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순진하던 시절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몇 십불이고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몰에서 고향에 돌아갈 버스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충분한 액수를 주었는데 시장을 보고 나와서 보니까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을 붙잡고 나에게 하듯이 열심히 설득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여비가 필요하다든지 기름 값이 떨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즈음은 가스가 떨어졌다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기치는 것을 알지만 주유소에 가서 가스를 넣도록 하고 돈을 대신 지불해줍니다.
악한 세상에 살기 위하여 악한 사람을 알아보고 악한 동기를 알아보는 통찰력을 키우시되 큰 피해가 오지 않는 한 스스로 속아주고, 이용 당해주고,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II.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로빈후드처럼 악한 왕 밑에서 싸우며 살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1. 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핍박을 견디어 낼만한 능력이 자신에게 있을까 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 니다. 그러한 능력을 성령님께서 공급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재판정에 끌려가서 자신을 변호해야하는 경우를 예로 들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큰 두려움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잡혀가서 왕과 총독들, 높은 사람들 앞에 섰을 때에 자신과 자신의 신앙에 관하여 충분히 변호할 능력이 있을까 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경우가 되면 성령님이 즉석에서 할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9-20절).
성령님은 필요할 때에 할 말을 주십니다. 앞에 나와서 간증을 해보신 분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평소에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간증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간증할만한 얘깃거리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섰을 때에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간증을 침착하게 잘 했을 뿐만이 아니라 나중에 간증을 들으신 분들로부터 은혜 받았다는 말을 들었던 경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이 할 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간증이고 전도이고 상담이고 말에 관하여서는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성령님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에게만 의존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준비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도 설교자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스피커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달하는 스피커 말입니다. 그래서 설교 본문을 갖고 이것을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 에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준비 없이 단 위에 서지는 않습니다. 이러할 때에 어떤 신앙 선배가 준 말을 기억합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에는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준비하라. 설교를 할 때에는 모든 것이 성령님에게 달린 것처럼 하라. 간증이나 전도나 상담을 하실 때에도 충분히 준비를 하시되 실제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의존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오해와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핍박 가운데에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비난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다가 예수를 믿게 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며느리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집안에 우환이라도 닥치면 며느리가 예수 믿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옴팍 뒤집어씁니다. 아들이 예수를 믿고 제사를 거부하게 되면 조상도 모르는 호로 자식이라고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6절). 언제인가는 예수 믿는 며느리도 인하여 집안에 우환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며느리 때문에 집안이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될 때가 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아들이 불효자식이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말고 더 담대히 전해야합니다(27절). 우리가 가진 것은 진리이고 이 사실이 밝혀질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다 지옥에 갑니다. 이것이 밝혀질 진리입니다. 안 믿는 집에서 처음 믿게 된 사람은 이 진리를 전해서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구원받고 천국에 가도록 해야지 비난이 두려워서 예수 믿는다는 것도 숨기고 제사 지낼 때에 같이 절하면 부모 형제 친척이 지옥에 가는 것을 방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거역을 해야 부모와 친척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고 언제인가는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3.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핍박 가운데에 두려워하는 것은 고난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가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천국에 갑니다. 기껏해야 죽이기밖에 못하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밖에 없습니다.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받는 영원한 형벌입니다(28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은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조직 폭력배의 두목도 힘센 사람이 아니라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죽는 것이 천국 가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 환영할만한 사건이라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러한 담대함을 갖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패배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 없다
핍박 가운데에 가장 두려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느냐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역경에 처해서 기도해도 응답이 얼른 오지 않으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는가?" "하나님이 정말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는가?" 사실은 고난 자체보다 이러한 의문이 우리를 더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관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29-31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악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상처도 입을 수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싸움은 희생을 치러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사단을 패배시켰습니다. 자신 목숨을 버려 승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순교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사단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존중해주면서 승리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선택권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관심밖에 벗어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잠시의 패배는 더 큰 승리를 이루기 위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요즈음 하나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엄청난 은총을 베풀어주셨는데 아버지께서 저의 생명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에 주저하지 않게 해주세요." 주님의 섭리 가운데에 주님의 승리를 위하여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를 위해 싸우다가 받은 수많은 영광의 상처를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오해
마 10:18 / 박용래 목사
여러분은 이런 사건들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이런 체험들을 하고 싶어 합니다. 뭐든지 구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데 적잖은 낙심이 찾아오곤 합니다. 오늘 그 섭섭함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병 고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병을 고쳤다는 기적보다 믿음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있습니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자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고, 두 소경에게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런 믿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많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사건에서의 믿음도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초점을 두어야지 본인들이 얼마나 병 낫기를 소원했느냐, 병이 나을 것을 기대하고, 간절해하고, 예수님은 그걸 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아닙니다. 병이 낫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 집의 문제가 해결될 것을 얼마나 믿고 기도 하냐가 아니라 지금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며, 얼마나 잘 믿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좀 더 구체적인 사건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막9:21~2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려오니까 제자들이 귀신들인 아이 하나를 고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아이를 위해 무슨 수를 써주시길 원하고 있고, 그러자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구절이 오늘날 우리가 많이 오해하는 구절입니다. 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빌4:13) 이런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구절들이죠. 이 구절처럼 여러분의 삶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까?
그러나 그 본문들은 전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믿으면, 간절히 소원하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다는 간단한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낸 다음을 보십시오. 28절에 제자들이 우리도 예수님 하시는 그대로 했는데 왜 안 될까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본에는 기도와 금식으로 안 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기도를 안했을까요? 당연히 했겠죠! 그런데 왜 응답이 없었을까요? 옛날에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목회하실 때의 일입니다. 3부 예배를 들어가려는데 고등부 전도사님이 막 소리를 지르며 뛰어 오시더랍니다.... 내가 기도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죠!
기도란 내가 소원하는 일을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며 도움을 구하는 행위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이런 일을 이루어 낸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한 표로서 행하는 기도입니다. 단식투쟁이 아닙니다. 금식을 다이어트 겸해서 하시면 요요현상 일어나 저처럼 됩니다. 이렇게 금식이나 기도를 했을 때 좋은 결과가 잘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금식이나 기도 자체가 상징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드러내기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응답을 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하면 우리도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너희가 이 일을 해내는 사람처럼 행하여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라는 방법을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가 되어야 하고, 그 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믿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의 실제 영역에 들어와야지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역은 죄와 사망의 영역입니다. 믿음이라는 영역은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복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가 자녀 된 본분을 잃지 않을 때에서만 믿음이라는 단어는 통용됩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연합함을, 즉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를 말합니다. 이런 자리에 있을 때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능치 못할 일은 우리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대로 빚어지는 모든 복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적 부유함을 채우려는 이기심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포도나무에 붙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왜 우리의 삶은 고단한 것일까요?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누리는 복된 삶이 이런 것일까요? 우리 마음속에 이런 불평들이 생긴다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을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자 생각을 해보죠. 과연 대학합격을 놓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또 아름답고, 능력있는 사람과 결혼시켜 달라는 것은 육의 생각입니까? 영의 생각입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받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 생각은 영의 생각도 될 수 있고, 육의 생각도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영의 생각이란 그 결과를 얻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향한 어떤 꿈이 있냐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정말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아름다운 믿음의 가정, 본이 되는 믿음의 가정을 이루겠다는 꿈을 가지고 소원하면 그것은 영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세상에 보이기 위함이거나, 내가 만족하고 좋기 위함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받는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학에 가면 뭘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학문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꿈을 꾼다면 그것은 영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되어... 건축가가 되어...) 자! 이제 우리는 어떤 믿음의 기도를 구체적으로 해야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속는 분이 아십니다.
인생대박을 소원하는 후배중 하나가 정말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몸부림을 치는데 삶은 참 고달플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 때면 어김없이 한잔 걸치고 꼭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목사인 형이 대신 책임지라는 것이지요. 책임 못 지겠으면 떠오르는 번호 6개만 불러보라는 것이지요. 그 후배가 늘 부르짖는 성경구절이 시편 23편입니다.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왜 이리도 부족함이 많을까? 입니다. 그 후배는 넋두리 마지막에 시편 23편을 자기 고향 사투리로 주저리주저리 암송하곤 했습니다. 시편 23편을 지은 다윗의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어떠한 형편에 처했든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것, 그것 하나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다윗에게 최후 승리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는 것 하나로 만족하십니까?
빌4:10~13절의 문제도 이렇게 풀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보십시오.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에 축복받은 삶을 살았습니까? 아니죠!! 우리의 축복기준으로 본다면 바울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고후 11장에 의하면 그는 40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배가 침몰해서 죽을 뻔하고, 돌에 맞아 죽을 뻔하고, 여러 번 강도의 위험과 여러 번 굶고, 헐벗고 여러 번 죽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생의 이야기는 한두 해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가 사역하는 평생에 걸쳐 당한 것입니다. 예전에 아무리 고생을 해도 결과가 좋으면 큰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감옥에까지 갇히게 되어 육신이 약해져 감옥에서 나온 얼마 후 죽고 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옥 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그가 얘기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배웠다는 일체의 비결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은 부유하다는 것이 하나님말씀 순종하는데 도움이 된 거 없고, 또 가난하다는 것이 하나님말씀 순종하는데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말씀 순종하는데 필요한 것은 하나님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습니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질이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배고프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프게 할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배고픈 것이 하나님말씀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이 나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 괴롭힘을 감수하고 내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나를 괴롭히고, 매질하면 그 세상을 혼내줄 수 있다가 아니라, 그 괴롭힘과 매질을 당해도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요,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무시무시하죠! 겁나십니까?
그렇다고 예수 믿으면 다 헐벗고 굶주리진 않습니다. 설령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속에서 헐벗고 굶주려야 하는 상황이 닥쳐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해도 그런 상황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은 그 상황 속에서 우리의 친구가, 위로자가, 인도자가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된 자리, 구원의 자리로 이끌고 가시려는 최종 목표를 가지고 계십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시려는 그 역사에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엔 반드시 그 자리로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는데 방해하는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빠진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꾸 한숨이 나온다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 앞에서 성공과 부유함을 통해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데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소경처럼 눈을 뜨십시오.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며,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교인이 아니라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승리와 감격, 그 평안을 맛보고 싶으시면 온전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영의 생각을 하십시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히 반응하며, 순종하셔서 어떤 형편에 처하게 되든지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모두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마 10:21-23 / 이정선 목사
조직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조폭인가요? 인류 최초의 조직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아담 혼자 있을 때는 조직이 만들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와가 와서 두 사람이 되니까 조직이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가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가장 먼저 생겨난 조직, 그리고 가장 근본적이고 모든 조직의 근원이 되는 조직이 바로 가족입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그 조직은 커지게 되고, 조직이 커지다 보면 자연히 분화가 일어납니다. 또 다른 조직도 생겨나겠지요.
가정의 중요한 한 가지 기능은 사회의 구성원 개체를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사회의 구성원은 인간인데, 인간을 공장에서 만들어 내거나 우주에서 수입해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던 것처럼 흙으로 인간을 만들어서 계속 공급해 주시지도 않습니다. 구성원의 재생산 기능은 가정에서 담당합니다. 즉 가정은 생물학적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어떤 기관이나 조직이 생물학적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어떤 기관은 공통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조직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로 유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가장 원초적인 생물학적 관계에 의해 구성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조직의 구성원 사이에는 어느 조직보다 더 강한 애정과 밀착력을 갖게 됩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이나 목숨도 아끼지 않을 만큼 서로를 위하는 형제간의 사랑은 누가 가르쳐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조직의 성격으로부터 유래하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거나 또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은 가족의 그런 성격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희생하는 것이 가정의 중요한 기능이고, 또 그것이 가정에서 발견되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가족의 유대와 가치가 붕괴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첫째는 돈 때문입니다. 상속 문제로 형제들이 재판도 불사하며 싸우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보험금을 타려고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거나,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는 기막힌 이야기들을 가끔 접하게 됩니다. 돈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돈이라는 가치를 얻기 위해서 생물학적 유대관계로 맺어진 가족의 가치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태생과 근본을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돈 때문에 가족의 가치가 붕괴되는 것은 가장 가치 없는 일입니다. 돈은 가족을 포기해야 할 만큼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사상 때문에 가족관계가 파괴되기도 합니다. 사상은 옳다고 믿는 신념입니다. 사상에 대한 신념은 가족마저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이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가족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욕심에 의한 저급한 것이라고 비난을 받는 반면, 사상은 옳은 길을 따른다는 신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비난을 덜 받거나 때로는 오히려 칭송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요. 사상의 차이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꼽으라면 우리 민족을 맨 먼저 꼽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의 유대관계를 파괴시킬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종교 문제입니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과 가족관계가 서로 충돌하게 되면, 가족으로서의 사랑이나 정이 힘을 잃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단 집단에 빠져가지고 가출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종종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믿고 따르게 된 그 종교에서 요구하는 것을 수행한다는 명분 앞에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나 자식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 같은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옛날에는 예수 믿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완고한 유교적 전통의 가치체계 속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족의 자격을 박탈당하고도 남을 일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요즘에도 명절이 되면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믿는 며느리가 믿지 않는 시댁에 가면 제사지내는 문제로 불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믿는 형제들과 믿지 않는 형제들 사이의 갈등이나 앙금이 되풀이됩니다. 가족 간에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큰 고통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젊은 처녀 총각들이 결혼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절대로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본인들은 여러 가지 합당한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같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은 고통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저는 다른 어떤 기도보다 가족의 구원을 위한 기도는 피를 토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했는데, 나 혼자 마음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어떤 분이 갑자기 교회를 안 나와서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천주교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예수를 믿지 않으셨기 때문에 지옥에 갔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 지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하니까 천주교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진짜로 천주교에서 그렇게 엉터리로 가르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믿음을 갖지 못한 가족의 고통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예수님 말씀을 보면 형제가 형제를 죽는 데 내어주고, 아비가 자식을 고발해서 죽게 하고,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해서 죽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보다 진한 가족의 유대관계, 팔이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이고 무조건적인 가족의 사랑이 완전히 해체되어버린 상태입니다. 형제끼리,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에 죽는 데 내어주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요, 바로 예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미움을 받아야 할 일이 됩니다. 그 미움은 가족의 사랑과 유대관계를 태워버리고도 남을 만큼 강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왜 미움 받을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누가 그렇게 미워하고 못살게 하던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참 행복한 세상에 태어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미움 받을 일이었습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생생하게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미움 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어느 인권단체인지 선교단체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거기서 촬영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단이라는 나라는 남북으로 나뉘어 계속 내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북쪽의 이슬람 정부와 남쪽의 기독교 반군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슬람 정부군이 반군 마을을 습격해서 아이들을 잡아왔어요. 그리고 그 아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발 사이를 보폭 정도 되는 쇠사슬로 묶어서 수용소에 가둬 놓았는데, 날마다 코란을 공부하고 외우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외우면 매로 때리고 학대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저렇게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를 극심하게 반대하고 탄압하는 세력이 대표적으로 이슬람 종교이기 때문에 이슬람을 자꾸 예로 들게 되는데, 이슬람 사회에서는 종교가 종교 이상의 기능을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적 규범과 도덕은 물론 경제활동까지 주관하는 사회적 시스템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회적 시스템 밖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정치적, 경제적 권리나 활동을 박탈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곳에서 설령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마치 지하에서 비밀활동을 하듯이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저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미움을 받아야 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라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또 교회에 나와서 얻는 기쁨과 유익들이 많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만나서 교제하는 것도 즐겁고,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소속감을 갖게 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잘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면 누가 예수를 믿을까요? 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며 살게 될까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지 보세요.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야말로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힘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채플 시간에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셨는데,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는 핍박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핍박을 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고통을 너무 견디기 어려워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산 채로 껍질을 벗긴다거나 하는 고문을 받는다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또한 예수를 부인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그런 핍박을 당하지 않고 사는 것이 너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지만, 설령 그런 핍박이 닥친다면 우리 주님께서 껍질 벗기는 고문의 고통도 견딜 힘을 주셔서 믿음을 지키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목숨을 잃게 될 위험 속에 산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천국을 소유하는 것은 확고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그저 적당히 교회에 왔다갔다 해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세요. 그는 적당히 하나님께 순종해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욥을 보세요. 이유도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신뢰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외부의 도전이 너무 없어서 나태하고 안이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고통을 주실지 모릅니다.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올바로 세워지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지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그런 것 당하지 않고도 더 순종하고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이 너무 간사하다는 것, 우리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고난을 당하더라도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성도로서 매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교회가 생겼을 때,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한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했습니다(행 5:41).
주님은 그렇게 핍박당하는 성도들을 돌보시고 지켜보십니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도망다니다가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기 전에 주님이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가 오리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은 쉽지 않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갖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석을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그 핍박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은 고통일 것입니다. 머잖아 주님이 오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일시적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나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거나 고통을 당하는 불이익이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받는 것이 성도의 영광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힘과 믿음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광스러운 구원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하면서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어찌하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기쁨이 되는 믿음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삶을 거룩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